The Oracle 1회
1. 금가루
인상이파는 주류 밀거래, 자릿세 받기, 장물 밀거래, 윤락업을 통해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 중 윤락업을 제외하고-그것도 자세히 조사하면 제외라고 하기 어렵지만- 모든 사업이 불법적이었다. 인천, 그것도 남구, 거기다 주안2동이라는 작은 영역에서 4개파가 세력 싸움을 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세력을 이루고 있는 이들이 인상이파였다. ‘IS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를 차리고 작은 사무실 하나를 얻어 터를 잡고 있었는데, 사장은 양인상이라는 자였다.
“인상이형 어디 갔어요, 오전무님?”
60평의 널찍한 사무실에 7개의 책상과 7개의 의자와 7개의 컴퓨터만 딸랑 놓여져 있기 때문에, 강채성 부장은 늘 불만이다. 내년이면 30세가 되는 강채성은 양인상 다음으로 나이가 많았고 인상이파에서 가장 덩치가 컸다. 또한 ‘진정한 인상파’라는 뒷별명이 남겨질 만큼 인상적인 용모를 하고 있었다. 계란형 얼굴이었는데 뒤집어진 계란이라서 보기에 괴로웠으며, 이목구비가 심하게 뚜렷해서 두려웠다.
외모만큼 성격도 과격한 편이라서 힘을 쓰는 일을 자주 맡았고, ‘적당한 구박’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양인상이 아랫사람에게 가장 큰 불쾌감을 느낄 때는 ‘채성이 네가 알아서 해.’라고 명령한다. 강채성이 잘못의 원흉일 때도 같은 명령을 내린다. 강채성은 스스로에게도 적당한 형벌을 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상이파의 멤버들 사이에서 인기투표를 한다면 양인상 다음으로 높은 점수를 받을 사람이 강채성이었다.
“지석이가 오늘이잖아요. 지석이 만나러 갔어요.”
“벌써요? 같이 가려고 차도 대기시켰는데…….”
강채성이 깍듯하게 대하는 사람은 오록현 상무였다. 21세의 어린 나이고, 조직에 들어온 것도 늦은 후배지만 강채성은 항상 오록현을 형님처럼 모셨다. 그 이유는 양인상이 오록현을 자신의 오른팔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결정되는 순간부터 강채성은 오록현을 형식적 윗사람으로 모시지 않고, 진정한 자신의 어르신으로 모셨다. 오록현도 나름대로 강채성을 형님처럼 모시며 깍듯하게 대했다.
“운동도 할 겸 걸어가신대요.”
“거기가 어딘데 걸어간답니까! 한참 걸릴 텐데.”
강채성의 고함에 오록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사무실이 쉬는 날이었다. 일요일에도 쉬는 날이 없고 국경일도 마찬가지였지만, 오늘같은 날은 예외였다. 4년이나 함께 동고동락했던 고지석 팀장이 외지로 발령받는 날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업무상 차질이 많아졌으나-고지석이 맡고 있는 일을 넘겨줄 만큼 믿을만한 녀석이 없었다- 모두가 환영했다.
26세의 고지석은 1주일 전에 결혼했고, 부인이 된 여자가 사퇴를 권고했다. 고지석이 한참을 고민하다가 2일 전 양인상에게 조심스레 뜻을 밝혔다. 그러자 양인상은 책상 위에 놓여있던 포스트잇 한 장을 고지석의 얼굴로 집어던지며 “이런 개새끼! 갈테면 가 봐!”라고 고함쳤다. 싸늘한 한기가 사무실을 적실 때, 양인상은 곧장 밖으로 나가서 2시간만에 돌아왔다.
그 때까지 양인상의 책상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고지석의 안면에 또 종잇장이 날아들었다. 문서 한장과 통장이었다. 양인상은 고지석에게 수퍼마켓 문서 하나와 통장을 줬다. 사퇴는 안되니 외부지사를 운영하라는 엉뚱한 소리와 함께. 물론 말이 그렇지 수퍼마켓과 3천만원이 들어있는 통장을 퇴직금으로 준 것이다. 오늘은 그 수퍼마켓에 물건을 들여놓는 날이었다.
“이미 도착하셨을 거예요. 상희가 같이 갔으니까 택시 탔을 걸요? 걔 오늘 하이힐 신었거든요.”
“아, 그럼 다행이지만……. 상희가 오늘은 어쩐 일로 일찍 왔대요?”
“제가 일찍 온다고 했었거든요.”
“어어. 상희가 아직도 오전무님 좋아해요? 얘가 요즘 철이 들었나? 순정파가 됐네.”
“처음부터 저를 좋아했대요. 다른 놈팡이는 제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만난 거라나?”
“허허.”
강채성은 노인처럼 너털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컴퓨터 전원을 켠 채 잠시동안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화면이 켜지자 키보드만한 손으로 마우스를 쥐었다. 그리고 커서를 시작Bar에 가져가더니 시스템 종료를 클릭하고 확인을 눌렀다. 자신이 컴퓨터를 켰다 껐다는 데에 큰 만족을 느낀 듯 강채성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강채성은 오록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오전무님은 왜 안가셨어요?”
“좀 이따가 가려고요. 몸이 안 좋은 지 자꾸 헛것이 보이네요.”
그 순간 강채성의 안색이 굳었다.
“뭐가 보였는데요?”
“금가루가 떨어지고 피가 폭포처럼 흘렀어요.”
“예?”
“말하기가 참……. 아무튼 아까 그래서 차에 치일 뻔 했어요. 좀 괜찮아지면 갈 테니까 채성이형 먼저 가세요.”
강채성은 불안한 듯 오록현의 미소를 잠시 응시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사무실 밖으로 나갈 때까지 오록현의 얼굴을 주시하던 강채성은 뒤늦게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밖으로 나간 강채성이 다시 들어왔을 때는 자신의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화환이 들려져 있었다. 오록현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뭐예요?”
“며칠 째 계속 밖에 있기에 누가 버린 것 같아서 주워왔어요. 여기에 놓으면 어울리겠죠?”
“네. 거기엔 그게 필요했어요.”
오록현이 웃음을 참고 간신히 칭찬했다. 강채성은 만족한 듯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손바닥을 털더니 사무실을 나갔다. 그제야 오록현은 강채성이 들어오기 전의 자세로 돌아갔다. 키보드를 세워 모니터에 걸친 채 엎어진 것이다.
“아아, 요즘 왜 이러지? 할 일 많은데.”
오록현은 자신의 이런 상태가 싫었다. 회사를 위해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일하고 싶었다. 비록 불법이었지만, 일에 대해 자세히 알게된 이후로 오록현은 자신이 나쁜 짓을 한다고 여긴 적이 없었다. 오록현은 양인상을 몽상가로 치부했고, 그래서 존경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양인상의 몽상이 현실이 되어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 * *
“하. 웃음 밖에 안 나오네.”
양인상에게 들었던 첫마디였다. 오록현의 가슴은 내려앉았다. 오록현이 12세부터 16세가 되는 5년 간 소매치기 생활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걸려본 적이 없다. 손재주는 별로였으나 타겟을 잡는 능력과 일을 벌이는 장소를 잘 선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인상을 만난 날만큼은 예외였다. 이전과 다른 느낌을 주는 자였으나 ‘저 사람의 주머니는 꼭 털어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이 들었다. 양인상을 미행하다가 최적의 상황을 선택하여 지갑을 슬그머니 빼내는데, 양인상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더니 중얼거렸다. 한숨과 함께 웃음 밖에 안 나온다는 말을. 그리고 양인상은 오록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 내가 누군지 아냐?”
“누군데요?”
오록현은 겁에 질렸으면서도 도전적으로 물었다. 양인상의 지갑을 뒤에 감춘 채. 양인상은 곧 또 하나의 지갑을 들어보이며 웃었다.
“나도 너랑 같은 직업이거든. 게다가 여긴 내 시장이거든.”
“어, 몰랐어요.”
“너 여기서 언제부터 했냐?”
“처음이에요, 이 동네는.”
“아닌 것 같은데?”
“진짜 처음이에요. 한 번만 봐주세요, 선배님.”
1회 끝 ㅇㅅㅇ!
레디 오스 성화 올림
잡담: 갑자기 이글루가 휴지통이 되어간다! ;ㅁ;
2008년 2월 25일 월요일
인연 1회
1화. 우연3
뭐가 중요한지 모르겠고 뭘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 그래서 세희, 그 계집애가 참고서를 세워둔 채 타로카드를 뒤섞으면 유심히 바라보곤 했지. 선생님은 내 시선을 보고 세희가 뭘 하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에 나는 늘 떡볶이 값을 날렸어.
혹시 알아? 갑작스러운 상황이 닥쳤을 때 내가 무슨 행동을 취하건 하루가 지나면 그 때를 후회하게 된다는 것. 그 때의 기분. 혹시 알아?
뭔가에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대처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워질 거야. 난 절대 그럴 수 없을 테니까. 수많은 군중들을 끝까지 외면한 채 단상 위 메모지만 열심히 쳐다보는 사람들의 기분을 이해해. 그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어. 글 속에는 나의 생각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거든. 그 속에는 나의 생각을 시간이라는 양념으로 버무린 요리가 들어있어. 그래. 사람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우산 없어요?”
이 잘 생긴 남자애가 나에게 웃었을 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했을까? 잘 생겼다고는 하지만 머리카락은 세계 어느 인종에게도 천연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색깔이었고, 저런 귀를 가진 인간이 태어난다면 엄마 자궁이 남아나지를 않았겠다 싶을 정도로 서슬 퍼런 귀걸이를 하고 있는 애였어. 아아, 목걸이. 현기증이 난다. 누가 독살이라도 하려나? 저렇게 강인한 은사슬 목걸이라면 소가 아니라 미노타우르스라도 끌고 갈 수 있을 거야.
중요한 것은 이 녀석이 나에게 우산이 없냐고 물었다는 거야. 난 우산이 없었어. 하지만 얘도 없었어. 비가 쏟아지는 하늘 아래 어떤 쌩 양아치가 나타나서 나에게 유혹의 한 마디를 건넸다고 밖에 볼 수 없겠지. 이 불쾌감을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방법은 없었어. 시간이 없었으니까.
“예에…… 없는데요.”
“아, 그래요? 저도 없는데.”
어쩌라고! 나의 대답은 하루가 아니라 당장 후회할 만큼 머저리 같았을 거야. 폭이 1미터도 채 안 되는 좁은 공간에 나란히 선 채 우리 둘은 정면을 응시했어. 하늘엔 비가 쏟아졌고, 바람은 우리 머리를 막고 있는 좁은 테라스를 인정하듯 비를 실어오지 않았지. 셔터가 내려진 정체 모를 가게 앞에서 우리 둘은 약속된 침묵이라도 하듯 얌전히 있었어. 그러다 내가 말을 꺼냈어.
“이미 다 젖었는데 그냥 뛰지 그러세요?”
뒤늦게 공격을 한 거야. 나는 시간을 다루지 못하는 게 확실했어. 나의 두 번째 대답 속에는 시간이라는 양념이 버무려져 있었고, 그 양념은 소고기에 뿌려진 케첩처럼 형편없었지. 하지만 양아치는 웃었어.
“지금 꼬시는 중인데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요?”
농담조가 들어있는 그 대답에 내 정신은 공황상태가 되었어. 나는 고개부터 세차게 가로저으며 퉁명스럽게 “그럼 내가 뛸게요.”라고 말했지. 그리고 정말로 빗속을 향해 몸을 날렸어. 그 순간 나는 양아치와 육체적 접촉을 하게 되었지. 녀석이 내 손을 잡은 거야.
“됐어요, 됐어. 내가 포기할게요.”
다시 나를 테라스 아래로 집어넣은 양아치는 웃으며 말했어.
“나도 그냥 처음 봤을 때 마음에 든다 싶어서 말을 걸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갈게요.”
“아뇨. 어차피 뛰어서라도 가야 해요. 학원 시간 늦었거든요.”
“어느 학원 다녀요?”
“알아서 뭐 하게요? 포기한 거 맞아요?”
“음…….”
양아치는 잠시 망설였어. 그리고 그 커다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열 개나 붙어있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말했지.
“포기는 했죠. 그냥 물어본 거예요. 노력도 하지 않으면 아무리 인연이라도 소용이 없을 테니까.”
인연 좋아하네.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건물의 어둑한 창을 지나치는 하얀 빗줄기를 바라보자, 양아치의 목소리가 들렸어. 활기 찬 목소리였지. 마치 뭔가를 꿈꾸는 사람이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듯 자신감이 느껴졌어.
“제 이름은 다음번에 만날 때 알려줄게요. 저는 이 동네에 처음 왔어요.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면서 여기저기 걷다가 여기까지 온 거예요. 아무 생각 없이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는 취미가 있거든요. 어때요?”
“뭐가요?”
“제 집은 이 동네도 아닐뿐더러 서울도 아니에요. 학교도 수원이고 여기 올 일이 전혀 없죠. 오늘처럼 한가한 경우도 자주 생기는 편이 아니고요. 괜찮죠?”
“그러니까, 뭐가요!”
“앞으로 3번을 더 우연히 만나면 그 때는 사귀는 거예요.”
스토킹하겠다는 얘기잖아! 난 있는 힘껏 코웃음을 치며 잔뜩 찌푸린 하늘을 바라보았어. 양아치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렸지. 언덕 아래 버스정류장 종점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가는 뒷모습이 이유 없이 즐거워 보였어. 그리고 나에게 무척이나 인상 깊은 장면을 남겨줬는데, 그것은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서 빗길에 미끄러져 자빠지는 모습이었어. 난 당연히 깔깔대며 웃었지.
그렇게 되고 보니 2년이 지났는데도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었어. 가끔 가다가 혼자서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며 피식 웃기도 했지. 하지만 그 양아치의 얼굴을 다시 떠올리려 해도 쉽지가 않았어. 남자애답지 않은 초승달 눈웃음도 기억이 나고 도톰한 입술이 열심히 움직였던 것도 기억이 나는데, 얼굴 전체는 죽었다 깨어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거야. 양아치를 생각하면 뚜렷하게 기억이 나는 것은 연녹색 머리카락과 고슴도치처럼 사방으로 가시를 뻗어대던 귀걸이와 은사슬 목걸이 뿐이었어.
그러니 2년 만에 그 녀석을 다시 만났을 때 알아볼 리가 없잖아! 그 3가지를 모두 팔아치우고 나타났으니까 말야.
“우와아아앗!”
수원역 앞에서 무테안경을 쓴 범생이 하나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비명을 질렀을 때, 저게 미쳤나 싶었어.
레디 오스 성화 올림
추잡: 카테고리를 이제야 확인한 사람은 진 겁니다.
뭐가 중요한지 모르겠고 뭘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 그래서 세희, 그 계집애가 참고서를 세워둔 채 타로카드를 뒤섞으면 유심히 바라보곤 했지. 선생님은 내 시선을 보고 세희가 뭘 하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에 나는 늘 떡볶이 값을 날렸어.
혹시 알아? 갑작스러운 상황이 닥쳤을 때 내가 무슨 행동을 취하건 하루가 지나면 그 때를 후회하게 된다는 것. 그 때의 기분. 혹시 알아?
뭔가에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대처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워질 거야. 난 절대 그럴 수 없을 테니까. 수많은 군중들을 끝까지 외면한 채 단상 위 메모지만 열심히 쳐다보는 사람들의 기분을 이해해. 그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어. 글 속에는 나의 생각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거든. 그 속에는 나의 생각을 시간이라는 양념으로 버무린 요리가 들어있어. 그래. 사람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우산 없어요?”
이 잘 생긴 남자애가 나에게 웃었을 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했을까? 잘 생겼다고는 하지만 머리카락은 세계 어느 인종에게도 천연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색깔이었고, 저런 귀를 가진 인간이 태어난다면 엄마 자궁이 남아나지를 않았겠다 싶을 정도로 서슬 퍼런 귀걸이를 하고 있는 애였어. 아아, 목걸이. 현기증이 난다. 누가 독살이라도 하려나? 저렇게 강인한 은사슬 목걸이라면 소가 아니라 미노타우르스라도 끌고 갈 수 있을 거야.
중요한 것은 이 녀석이 나에게 우산이 없냐고 물었다는 거야. 난 우산이 없었어. 하지만 얘도 없었어. 비가 쏟아지는 하늘 아래 어떤 쌩 양아치가 나타나서 나에게 유혹의 한 마디를 건넸다고 밖에 볼 수 없겠지. 이 불쾌감을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방법은 없었어. 시간이 없었으니까.
“예에…… 없는데요.”
“아, 그래요? 저도 없는데.”
어쩌라고! 나의 대답은 하루가 아니라 당장 후회할 만큼 머저리 같았을 거야. 폭이 1미터도 채 안 되는 좁은 공간에 나란히 선 채 우리 둘은 정면을 응시했어. 하늘엔 비가 쏟아졌고, 바람은 우리 머리를 막고 있는 좁은 테라스를 인정하듯 비를 실어오지 않았지. 셔터가 내려진 정체 모를 가게 앞에서 우리 둘은 약속된 침묵이라도 하듯 얌전히 있었어. 그러다 내가 말을 꺼냈어.
“이미 다 젖었는데 그냥 뛰지 그러세요?”
뒤늦게 공격을 한 거야. 나는 시간을 다루지 못하는 게 확실했어. 나의 두 번째 대답 속에는 시간이라는 양념이 버무려져 있었고, 그 양념은 소고기에 뿌려진 케첩처럼 형편없었지. 하지만 양아치는 웃었어.
“지금 꼬시는 중인데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요?”
농담조가 들어있는 그 대답에 내 정신은 공황상태가 되었어. 나는 고개부터 세차게 가로저으며 퉁명스럽게 “그럼 내가 뛸게요.”라고 말했지. 그리고 정말로 빗속을 향해 몸을 날렸어. 그 순간 나는 양아치와 육체적 접촉을 하게 되었지. 녀석이 내 손을 잡은 거야.
“됐어요, 됐어. 내가 포기할게요.”
다시 나를 테라스 아래로 집어넣은 양아치는 웃으며 말했어.
“나도 그냥 처음 봤을 때 마음에 든다 싶어서 말을 걸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갈게요.”
“아뇨. 어차피 뛰어서라도 가야 해요. 학원 시간 늦었거든요.”
“어느 학원 다녀요?”
“알아서 뭐 하게요? 포기한 거 맞아요?”
“음…….”
양아치는 잠시 망설였어. 그리고 그 커다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열 개나 붙어있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말했지.
“포기는 했죠. 그냥 물어본 거예요. 노력도 하지 않으면 아무리 인연이라도 소용이 없을 테니까.”
인연 좋아하네.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건물의 어둑한 창을 지나치는 하얀 빗줄기를 바라보자, 양아치의 목소리가 들렸어. 활기 찬 목소리였지. 마치 뭔가를 꿈꾸는 사람이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듯 자신감이 느껴졌어.
“제 이름은 다음번에 만날 때 알려줄게요. 저는 이 동네에 처음 왔어요.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면서 여기저기 걷다가 여기까지 온 거예요. 아무 생각 없이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는 취미가 있거든요. 어때요?”
“뭐가요?”
“제 집은 이 동네도 아닐뿐더러 서울도 아니에요. 학교도 수원이고 여기 올 일이 전혀 없죠. 오늘처럼 한가한 경우도 자주 생기는 편이 아니고요. 괜찮죠?”
“그러니까, 뭐가요!”
“앞으로 3번을 더 우연히 만나면 그 때는 사귀는 거예요.”
스토킹하겠다는 얘기잖아! 난 있는 힘껏 코웃음을 치며 잔뜩 찌푸린 하늘을 바라보았어. 양아치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렸지. 언덕 아래 버스정류장 종점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가는 뒷모습이 이유 없이 즐거워 보였어. 그리고 나에게 무척이나 인상 깊은 장면을 남겨줬는데, 그것은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서 빗길에 미끄러져 자빠지는 모습이었어. 난 당연히 깔깔대며 웃었지.
그렇게 되고 보니 2년이 지났는데도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었어. 가끔 가다가 혼자서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며 피식 웃기도 했지. 하지만 그 양아치의 얼굴을 다시 떠올리려 해도 쉽지가 않았어. 남자애답지 않은 초승달 눈웃음도 기억이 나고 도톰한 입술이 열심히 움직였던 것도 기억이 나는데, 얼굴 전체는 죽었다 깨어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거야. 양아치를 생각하면 뚜렷하게 기억이 나는 것은 연녹색 머리카락과 고슴도치처럼 사방으로 가시를 뻗어대던 귀걸이와 은사슬 목걸이 뿐이었어.
그러니 2년 만에 그 녀석을 다시 만났을 때 알아볼 리가 없잖아! 그 3가지를 모두 팔아치우고 나타났으니까 말야.
“우와아아앗!”
수원역 앞에서 무테안경을 쓴 범생이 하나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비명을 질렀을 때, 저게 미쳤나 싶었어.
레디 오스 성화 올림
추잡: 카테고리를 이제야 확인한 사람은 진 겁니다.
2006년 6월 30일 금요일
하나세기
하나세기
1장. 일곱 열쇠
빛이 없고 어둠이 없는 시기에 ‘셍 크라드Sen Crad’가 존재했다. 셍 크라드 외의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이 때는, 그 어떤 설명조차 존재할 수 없었다. 자신을 확인할 거울이 없고 주위를 바라볼 눈도 없었으며 냄새가 없었을 뿐 아니라 코도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셍 크라드 뿐이었고 그 위대한 존재가 어째서 위대한지, 그 거대한 존재가 얼마나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는 지 아는 자는 존재할 수 없었다.
신들Gods도 셍 크라드가 꿈을 꾸는 것은 보지 못했다. 신들이 그러하듯 셍 크라드도 근본적으로 소유한 모든 것을 천천히 꺼내놓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존재들 가운데, 셍 크라드의 꿈이 있었다. 가장 위대한 신의 말씀에 의하면 셍 크라드는 시간의 시간의 시간Road Of Road을 헤아리다가 잠이 들었다고 했다. 신은 자신들의 ‘성스러운 어머니’를 잠재운 시간을 ‘성스러운 아버지’로 여겼다. 하지만 셍 크라드에게 있어서 시간은 적AntiCrad이었다. 셍 크라드는 시간에게 패배한 것을 수치로 여기고, 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했다. 셍 크라드의 꿈은 구름처럼 부드럽고 바람처럼 흐르는 육각의 상자였는데, 이것의 ⅓위쪽에 칠흑같이 어두운 열쇠구멍Black hole이 있었다. 셍 크라드는 시간이 만들어낸 열쇠구멍에 맞는 열쇠가 자신에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나 그것에 맞는 열쇠를 창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꿈의 열쇠는 창조물의 창조물이 수십 수백 번을 얽히고 설키며 재창조를 반복하면서 미세하게 다듬어져야 만들어질 수 있었다. 셍 크라드는 자신의 창조물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상자를 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셍 크라드로 하여금 자신에게 존재하는 모든 창조물들을 열쇠구멍에 밀어 넣도록 만들었다. 열쇠구멍에 들어간 셍 크라드의 창조물은 상자 속에서 세상을 만들었다. 셍 크라드가 제일 먼저 넣었던 창조물은 자신이 놓여진 세계를 예스밀드Yethmild라고 불렀다.
이로써 하나세기The Absolute Century가 시작되었다.
태초의 신들은 예스밀드를 담아놓은 상자가 열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예스밀드는 셍 크라드의 꿈속에 존재하는 세계였고, 상자가 열리게 되면 꿈에서 깨어나기 때문이었다. 상자가 열리는 순간이 예스밀드의 파멸을 의미했다. 신들은 자신들의 소멸을 원하는 창조주를 증오했다. 그 때문에 창조주를 대신하여 시간을 숭배했고, 셍 크라드가 열쇠를 찾을 수 없도록 스스로의 창조를 억제했다.
셍 크라드가 열쇠구멍을 통해 밀어 넣은 2번째 창조물은 대지Mood였다. 무드는 금빛을 발하는 작은 덩어리였는데 눈물 한 방울에 가라앉을 만큼 작아서 그 아름다운 금빛을 뚜렷하게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한 쌍의 금빛 무드는 수많은 자식을 낳고 낳아서 예스밀드에 널리 펼쳐졌다. 상자가 바람에 이끌려 70번 반복했을 때, 무드의 영역은 신들이 머물 수 있을 만큼 넓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무드의 아름다운 금빛은 끝내 볼 수 없었다. 무드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금빛이 점차 탁해지고 짙은 색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대신 무드에게 남은 금빛을 지킬 기둥이 셍 크라드의 3번째 창조물로서 열쇠구멍을 통해 들어왔다. 기둥은 무드가 가지고 있던 아름다운 금빛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는데, 크기가 너무 거대하여 무드의 모든 영역을 지배했다. 신들은 서로 합심하여 기둥을 부쉈다. 6개로 쪼개진 기둥은 무드의 영역을 떠나서 각자의 공간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금빛이 6개로 분열되어 불의 색Red, 물의 색Blue, 흙의 색Yellow, 쇠의 색Violet, 나무의 색Sepia, 별의 색Green이 되었다. 신들은 이들 기둥에게 각각 이름을 주어 사이바Psyba, 피안Feean, 어쓰Earth, 야쓰Yark, 엘브Elf, 레타우Retha Hoo라고 불렀다.
신들은 화합과 조화와 안정을 위하여 자신들을 희생했다. 예스밀드가 늘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셍 크라드의 꿈은 느닷없는 비논리적 창조와 예스밀드에게 해로운 존재를 끊임없이 만들고 있었다. 또한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셍 크라드의 꿈의 세계에 대한 불안이 예스밀드의 모든 것을 혼돈에 빠뜨렸다. 그것을 바로잡는 방법은 완전한 존재의 희생 밖에 없었다. 신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영원하기를 바라며, 고요와 평화로 예스밀드를 가꾸었다. 또한 창조주의 잠을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로 예스밀드의 모든 것을 적셨다.
방울이 모여 형상을 이루었던 최초의 신이자 예스밀드의 최고신 ‘하야누Hayanoo'는 셍 크라드를 숭배하는 존재였다. 하야누는 셍 크라드의 꿈을 동경하여 스스로 오랜 시간 잠을 잤다. 그러나 셍 크라드처럼 꿈속의 존재 예스밀드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하야누가 잠에 빠져있는 동안에 창조된 신들은 자신들이 증오하는 셍 크라드를 숭배하는 존재에게 분노했다. 그리고 하야누를 외면한 채 저들끼리 예스밀드를 분할하여 다스리기 시작했다. 잠에서 깬 하야누는 자신의 세계가 많은 신들에게 빼앗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관대한 하야누는 신들의 영역을 질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예스밀드의 조용한 영역을 떠돌며 꿈에서 이루지 못한 세계의 조각들을 조금씩 만들어냈다.
하야누가 만든 것은 존재자 셍 크라드의 기둥을 따른 것이었다. 하야누의 사이바와 하야누의 피안과 하야누의 어쓰와 하야누의 야쓰와 하야누의 엘브와 하야누의 레타우가 예스밀드를 장식했다. 그리고 셍 크라드가 자신을 창조한 것처럼 하야누의 손에 의해 새로운 신이 만들어졌다. 하야누의 모습을 빌어 예스밀드에 드러난 존재의 이름은 ‘드래곤Dragon’이었다.
드래곤은 오만했다. 창조주 하야누의 모습과 같다는 이유로 다른 신을 경시하고 스스로를 예찬했다. 그리고 하야누가 빼앗긴 예스밀드의 영역에 흉폭한 날갯짓을 하여 지배자가 되려했다. 드래곤이 바다의 신 ‘레비돈Reibeeton'에게 오만의 화염을 뿜었을 때, 하야누가 참지 못하여 징벌을 가했다. 하야누는 천 년의 긴 시간동안 드래곤을 무저갱에 가두었다. 천 년이 지나 무저갱을 나올 때, 드래곤은 신들을 향한 오만을 그곳에 남겨뒀다. 그 이후 드래곤은 신들을 경시하지 않았다.
하야누는 예스밀드가 이룬 대지의 굴곡과 바다의 고요를 동경하여 산의 형상을 이룬 신탑과 고요의 형상을 이룬 우물을 만들었다. 이 때 하야누의 마음 속 마음에 감춰진 열쇠가 바깥으로 새어나왔다. 창조의 열정에 담겨진 하야누의 열쇠 ‘나키nakey’는 신탑의 의지와 우물의 열정으로 작은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치 뮤드의 여섯 기둥과 흡사한 것이 신탑과 우물의 주변을 감쌌고, 천년이 지났을 때는 일곱 개의 대륙과 다섯 개의 바다를 만들었다. 신탑은 대륙의 가장 높은 곳이 되었고 우물은 바다의 가장 낮은 곳에 숨었다.
다른 신들이 하야누의 창조를 부러워했다.
하야누가 새로운 창조를 고민하며 여섯 종족을 만들고 있을 때, 다른 신들은 하야누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하야누를 제외한 다른 신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셍 크라드의 꿈인 예스밀드라는 것을 잊고 말았다.
하야누는 자신이 만든 세상을 ‘사르티스’라 이름 붙이고, 드래곤이 다스리게 했다. 드래곤은 우물이 다섯 번째로 만들어낸 생명체 ‘뱀’과 흡사하게 생겼으나, 뱀보다 천 배는 거대한 몸체에 날개가 있었다. 하야누의 금빛 눈이 드래곤에게도 있었고, 하야누의 지식이 담긴 시간도 드래곤에게 있었다. 드래곤은 사르티스의 그 어떤 종족보다도 현명하고 강했으며 날개가 미처 지우지 못한 오만도 남아있는 종족이었다.
하야누는 사르티스의 형상을 빌어 ‘엘프’를 만들고, 신탑과 우물이 만든 모든 자연과 친밀할 것을 명령했다. 엘프는 사르티스의 거친 대지처럼 어둡고 갈라진 살가죽과 열네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으며 눈동자는 하늘처럼 맑았다. 키가 작고 느렸으나 우물이 만든 빠른 동물들에게 부탁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종족이었고, 드래곤 다음으로 하야누의 모습과 가까운 형상이었다.
하야누는 우물의 형상을 빌어 ‘인간’을 만들고, 신탑과 우물이 만든 모든 자연들을 재구성할 것을 명령했다. 인간은 우물의 열정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자연의 형상을 끝없이 바꾸려고 노력했다. 어떤 것은 하야누를 만족시켰으며 어떤 것은 하야누를 놀라게 할 때도 있었다. 우물처럼 매끈한 살갗을 가진 인간들은 열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으며 눈동자는 바다처럼 맑았다. 엘프보다는 2배나 크고 빨랐으나 자연에게 부탁할 수 있는 권능을 갖지 못했고, 하야누와 닮은 점은 거의 없었다. 그것이 하야누를 크게 만족시켰다.
하야누는 인간의 형상에 하늘과 나무와 돌의 형상을 섞어서 ‘지니’와 ‘드워프’와 ‘스톤크’를 만들었고, 마지막으로 드래곤의 형상에 바다의 형상을 섞어서 ‘시곤’을 만들었다. 하야누는 이 네 종족에게 아무런 권능도 주지 않고, 모습의 근원을 따라 권능을 찾으라고 명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연을 재구성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야누는 자신이 만든 종족이 스스로 창조하는 모습을 즐기고 싶었다.
하야누의 마지막 종족 ‘시곤’이 만들어졌을 때, 뮤드를 적시던 노래가 갑자기 멈췄다. 신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세계가 ‘셍 크라드의 꿈’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하야누처럼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영역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긴 신들이 서로를 헐뜯고 싸우기 시작했다. 하야누가 뮤드에서 벌어진 뜻밖의 사태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신들은 일곱의 무리로 분열되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야누가 신들을 말리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셍 크라드의 꿈’을 알리려 했다. 그러나 예스밀드를 알리기 위해 사이바의 기둥으로 가던 도중, 하야누는 누군가의 암습을 받고 무저갱에 갇혔다.
하야누가 사라진 다음 날, 제1세기의 첫 번째 전쟁 ‘안타레드’가 시작되었다.
2.
뮤드의 북쪽대지는, 그 중에서도 최북단의 대지는 폭이 좁고 끊임이 없는 강 ‘요든’에 의해서 경계선이 만들어져 있었다. 요든강은 바로 남쪽에 하야누가 만들어낸 최고의 신탑, ‘아틀라스산’의 중턱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940신터(신터: 신의 걸음을 의미하며 하야누의 이동법을 기준으로 한다. 거리단위로 1신터는 약 100미터이다)에서 2개의 줄기로 나뉘어져 동요든강과 서요든강이 되었다. 요든강의 시작이 되는 아틀라스 샘은 우물의 힘을 모두 다 동쪽에 남겼기 때문에 동요든강의 주변은 새와 나무와 붉은 흙이 있었고, 서요든강의 주변에는 돌과 노란 흙이 있었다. 요든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 대지의 주인인 불의 신 ‘파이어’는 서요든강의 영역에 자신의 신전을 세우고 ‘화염의 3종족’을 만들었다. 대지의 북쪽 바다는 언제나 붉게 일렁거렸는데, 그 이유는 북쪽 바다의 절벽 너머에서 북쪽 기둥 ‘엘브’가 불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브의 불길 때문에 파이어의 하늘은 언제나 붉었으며, 구름도 이따금 화염을 뿜을 때가 있었다. 동요든강의 새와 나무와 붉은 흙도 엘브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여 떠나고 시들고 변색되었는데, 그 중 강한 새와 강한 나무와 강한 붉은 흙이 열기에 적응하여 살아남기도 했다. 파이어는 동요든강의 너머에서 푸르게 빛나는 나무와 그 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새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또한 짙은 색으로 축축하게 젖어있는 요든강 너머의 붉은 흙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불의 신 파이어는 동요든강 북단의 새에게 ‘이글킹’의 이름을 주고, 그 보답으로 날개를 얻었다. 그리고 요든강의 물을 들끓게 하는 지독한 열기에도 끄덕 없는 나무들에게 다리를 주고 ‘팔과 다리’가 될 재료를 얻었다. 강물조차 증발할 정도의 열기가 내리쬐는 곳이었으나, 속에 품고있는 물을 절대로 화염의 구름에게 내주지 않는 파이어의 붉은 흙에게는 ‘고드’의 이름을 주어 자신의 창조물이 될 재료로 삼았다.
“이글킹의 날개에게 엘브의 권능을 담아야 한다.”
파이어는 자신의 첫 번째 창조물인 ‘마리오’에게 최초의 명령을 내렸다. 마리오는 파이어의 대지에 가장 많이 분포된 노란 흙으로 만들어졌다. 노란 흙은 크기가 작고 무리가 뭉쳐지지 않았으며 불타는 하늘과 들끓는 바다의 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파이어는 기둥 엘브가 뿜어대는 불꽃 코로나의 권능을 훔쳐서 노란 흙에게 주었는데, 코로나가 무지개처럼 빛을 내며 파이어가 원하는 형상을 빚었다. 형상이 반쯤 투명하고 오색의 영롱한 빛이 항상 맴도는 모습을 한 피조물은 파이어에게 ‘마리오’라는 이름을 받았다. 마리오는 ‘아름다운 불꽃’이라는 뜻이었으며 파이어가 만든 언어이자 의미였다.
마리오는 이글킹의 날개를 들고 바다절벽 너머의 붉게 타오르는 기둥 엘브에게 갔다. 그러나 엘브는 이 피조물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고 코로나로 배를 태워버렸다. 마리오는 바다 속을 걸어서 파이어에게 돌아왔지만, 배가 탈 때 놓쳤던 이글킹의 날개는 오랫동안 엘브의 주위를 방황했다. 1크밀드(크밀드: 신의 잠을 의미하며 하야누의 잠을 의미한다. 시간단위로 1크밀드는 1년. 1밀드는 하루다. 하야누가 잠을 자면서 뒤척이는 때를 1밀드로 하는데 하야누는 모두 365번을 뒤척였을 때 잠에서 깨어난다)가 지났을 때, 외로운 엘브는 이글킹의 날개에게 정을 주고 말았다. 이글킹의 날개는 엘브의 권능을 품에 안고서 화염의 구름을 타고 파이어에게 돌아왔다. 파이어는 무척 기뻐하며 2번째 창조물을 만들었다. 화염의 날개와 고드의 몸, 강한 팔과 다리를 가지고 태어난 이 피조물은 ‘고르고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파이어는 고르고스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4크밀드 전에 하야누가 사라져, 창조의 땅 ‘하야누스’가 주인 없는 곳이 되었다. 그대는 아틀라스산을 넘어 하야누스를 지배하라. 그리고 하야누의 열쇠 나키를 찾아야 한다. 그대가 뮤드의 모든 세상을 정복하고 여섯 개의 열쇠를 모두 찾았을 때, 셍 크라드의 열쇠 ‘예스밀드’의 길이 보일 것이다. 쇠는 모든 것의 시작이며 너희가 있기 전에, 내가 있기 전에, 그리고 하야누가 있기 전에도 존재했던 셍 크라드의 첫 번째 창조물이다. 그것을 얻는 자가 뮤드를 지배할 수 있고, 셍 크라드에게서 예스밀드를 빼앗아 영원을 보장받을 자격을 갖게 된다.”
고르고스는 파이어의 명령과 파이어의 일부 지식과 파이어의 커다란 권능을 받았다. 수천의 고르고스 군대는 수만의 마리오와 수십만의 이글킹을 이끌고 요든강을 건넜다. 그동안 파이어는 절대권능의 힘을 부여받을 세 번째 창조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세 번째 피조물은 파이어의 모든 권능과 함께 코로나와 화염의 구름에게 축복을 받았는데, 엘브가 직접 이름을 주었다. 엘브는 파이어의 세 번째 피조물을 ‘아이니’라고 불렀다. 아이니는 3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하야누의 머리와 흡사했고, 또 하나는 하야누의 창조물인 인간의 것과 흡사했으며, 나머지 하나는 드워프와 흡사했다. 이것은 엘브가 하야누를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었고, 또한 하야누의 대지를 침공하는 파이어에 대한 분노의 뜻이기도 했다. 아이니는 오른손에 코로나의 구슬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화염의 구름으로 몸을 감쌌다. 파이어는 아이니의 모습을 보고 무척 두려워하여 엘브의 힘이 약해지는 ‘푸른 하늘의 날’을 선택해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엘브가 먼저 이 계획을 알아차리고 화염의 드래곤을 아이니에게 선물했기 때문에, 오히려 파이어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고르고스의 군대가 아틀라스 산을 넘었을 때 파이어의 피가 요든강을 붉게 물들였다. 들끓는 피의 강이 아틀라스산의 정상에서도 또렷하게 보였기에, 고르고스는 창조주의 죽음을 알고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때 마리오가 고르고스의 피를 모아서 아틀라스 샘에 뿌렸는데, 그것이 강줄기를 타고 내려가다가 요든강이 갈라지는 부분에서 새로운 고르고스를 낳았다. 새로운 고르고스는 파이어의 모든 지식과 권능을 얻지는 못했으나, ‘정복욕’과 ‘쇠를 탐내는 욕심’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들은 파이어의 명령과 관계없이 마리오와 이글킹을 이끌고 하야누스로 쳐들어갔다. 그 때 파이어의 대지는 이미 아이니가 주인이 되어 있었다. 셍 크라드의 여섯 기둥중 하나인 엘브는 아이니에게 파이어를 대신하여 ‘불의 신’이 될 것을 명했고, 아이니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엘브의 뜻에 따라서 실종된 하야누에게 충직할 것을 약속했다.
창조주와 땅을 잃은 군대는 명령만을 소유한 채 하야누스로 진군했다. 주변의 모든 신들이 이 소식을 들었으나 하야누와 파이어 외의 어떠한 신도 자신들의 피조물을 만든 이가 없었다. 하야누를 추종하던 몇몇 신들이 자신들의 땅을 버려둔 채 하야누스로 향했다. 모두가 고르고스의 군대보다 먼저 하야누스에 도착했으나, 적들을 징벌하지는 못했다. 기둥 피안의 중심으로 자전하는 부유(浮游)의 땅 라타의 주인이자 비의 신 기나스가 자신을 따르는 신들에게 명령하여 다른 신들의 빈 땅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세계를 침공당한 바다의 신 레비돈은 급히 하야누스를 떠났고, 다른 신들도 서로를 불신하여 고르고스의 군대가 하야누스에 도착하기 전에 자신들의 대지로 돌아갔다. 비의 신 기나스는 바다를 지배한 채 레비돈을 맞아들였다. 레비돈은 기나스에게 굴복하여 물의 신으로 받들겠다고 맹세했다. 그 때부터 기나스는 비를 뿌리기 위하여 물을 만들 필요가 없이 레비돈이 공물로 바치는 바다의 일부를 비로 사용했다.
손쉽게 하야누스를 정복한 고르고스의 군대는 9밀드의 휴식을 가진 뒤에 서쪽의 대지 ‘티뮤드’를 침공했다. 기둥 어쓰의 보호를 받으면서 가장 많은 신들이 연합을 하고있는 티뮤드는 남쪽 ‘라헬’의 세력과 전쟁중이었다. 고르고스의 침공시기에 맞춰 마치 연합공격을 하듯 라헬의 세력이 몰아치자 티뮤드의 주인이자 흙의 신 ‘두뮤’는 은빛 구슬 속에 세계를 감췄다. 그리고 자신과 동조하는 6명의 신과 함께 안타레드가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나오지 않았다.
고르고스의 군대가 9밀드의 휴식을 가진 뒤, 라헬의 세력을 공격했다. 라헬의 신들은 크게 패배하여 기둥 사이바가 지키고 있는 안정의 땅으로 도망쳤다.
고르고스가 다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8밀드가 지났을 때 안타레드를 일으켰던 모든 신들이 각각 하나씩의 대표를 뽑아서 사이바의 기둥에 모였다. 물의 신 기나스와 어둠의 신 그레모리와 생성의 신 벨페고르와 신전의 주(主) 바알제붑과 파괴의 신 할투스는 다른 신들을 대표하여 알타레드의 바른 길을 약속했다. 불의 신 아이니와 흙의 신 두뮤는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니가 자신의 영원한 종 화염의 드래곤을 보내어 신들의 맹약에 동참했기 때문에 기둥 사이바는 예스밀드의 모든 신들이 하나를 이루었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하나의 세기가 시작되었고, 사이바는 그 증표로 하나의 신을 만들었다. 모든 신들이 약속한 하나는 ‘안타레드를 위한 고르고스와의 전쟁’이었으며, 사이바가 직접 만든 전쟁의 신은 창조자의 이름에서 비롯하여 ‘시바’라고 했다.
*********************************************************************************************************
원래 이 글을 구상하기 이전에 '다크 드래곤'이라는 제목의 판타지를 썼었다.('다크 드래곤'은 집필을 일찍 중단했기 때문에 아예 연재조차 되지 않았던 '수많은 글 중 하나'다) 다크 드래곤을 쓰던 도중, 등장인물의 대화 속에서 고대신들의 이야기가 언급됐다. 고대신들의 전설은 머리 속에 담아두거나 메모만 했었는데,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 얘기는 왜 안 썼지?'
그런 이유로 세계의 창조와 멸망에 이르는 장편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 하나세기가 나오게 된 경위다.
'하나세기'는 창조부터 고대신들의 전쟁과 몰락까지의 이야기.
'일곱 열쇠의 탑'은 고대신에게서 비롯된 신족과 인간의 싸움이야기.(이게 '파 나노스'의 설정과 상당히 유사하다. 하지만 '파 나노스'가 모험물이라면, '일곱 열쇠의 탑'은 전쟁물에 가깝다)
'다크 드래곤'은 세상을 지배한 일곱 종족들의 전쟁, 그 속에서 세계를 정복하는 영웅들의 이야기.
'콘돌 킹'은 검과 마법으로 지배당한 세계 속에서 '신의 뜻'에 위배되는 신마법(과학)으로 반란을 꾀하는 이야기.(시간적 배경은 '중세에서 1차, 2차 세계대전으로 넘어가는 지구'에 가깝다.)
'신의 창'은 어느 날 우주에서 날아온 백색 창에 의해 세계의 중심이 꿰뚫리는 사건으로 시작해서, 인간과 고대신이 조우하게되는 이야기. 여기서 세계 멸망. 진행과정은 상당히 SF틱하지만, 마침 내가 주제를 알아서 판타지.
꽤 오래 전에 구상해서 쬐금씩만 썼던 이 5부작 장편은...
산이 멀다.(두리번)
레디 오스 성화 올림
1장. 일곱 열쇠
빛이 없고 어둠이 없는 시기에 ‘셍 크라드Sen Crad’가 존재했다. 셍 크라드 외의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이 때는, 그 어떤 설명조차 존재할 수 없었다. 자신을 확인할 거울이 없고 주위를 바라볼 눈도 없었으며 냄새가 없었을 뿐 아니라 코도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셍 크라드 뿐이었고 그 위대한 존재가 어째서 위대한지, 그 거대한 존재가 얼마나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는 지 아는 자는 존재할 수 없었다.
신들Gods도 셍 크라드가 꿈을 꾸는 것은 보지 못했다. 신들이 그러하듯 셍 크라드도 근본적으로 소유한 모든 것을 천천히 꺼내놓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존재들 가운데, 셍 크라드의 꿈이 있었다. 가장 위대한 신의 말씀에 의하면 셍 크라드는 시간의 시간의 시간Road Of Road을 헤아리다가 잠이 들었다고 했다. 신은 자신들의 ‘성스러운 어머니’를 잠재운 시간을 ‘성스러운 아버지’로 여겼다. 하지만 셍 크라드에게 있어서 시간은 적AntiCrad이었다. 셍 크라드는 시간에게 패배한 것을 수치로 여기고, 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했다. 셍 크라드의 꿈은 구름처럼 부드럽고 바람처럼 흐르는 육각의 상자였는데, 이것의 ⅓위쪽에 칠흑같이 어두운 열쇠구멍Black hole이 있었다. 셍 크라드는 시간이 만들어낸 열쇠구멍에 맞는 열쇠가 자신에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나 그것에 맞는 열쇠를 창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꿈의 열쇠는 창조물의 창조물이 수십 수백 번을 얽히고 설키며 재창조를 반복하면서 미세하게 다듬어져야 만들어질 수 있었다. 셍 크라드는 자신의 창조물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상자를 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셍 크라드로 하여금 자신에게 존재하는 모든 창조물들을 열쇠구멍에 밀어 넣도록 만들었다. 열쇠구멍에 들어간 셍 크라드의 창조물은 상자 속에서 세상을 만들었다. 셍 크라드가 제일 먼저 넣었던 창조물은 자신이 놓여진 세계를 예스밀드Yethmild라고 불렀다.
이로써 하나세기The Absolute Century가 시작되었다.
태초의 신들은 예스밀드를 담아놓은 상자가 열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예스밀드는 셍 크라드의 꿈속에 존재하는 세계였고, 상자가 열리게 되면 꿈에서 깨어나기 때문이었다. 상자가 열리는 순간이 예스밀드의 파멸을 의미했다. 신들은 자신들의 소멸을 원하는 창조주를 증오했다. 그 때문에 창조주를 대신하여 시간을 숭배했고, 셍 크라드가 열쇠를 찾을 수 없도록 스스로의 창조를 억제했다.
셍 크라드가 열쇠구멍을 통해 밀어 넣은 2번째 창조물은 대지Mood였다. 무드는 금빛을 발하는 작은 덩어리였는데 눈물 한 방울에 가라앉을 만큼 작아서 그 아름다운 금빛을 뚜렷하게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한 쌍의 금빛 무드는 수많은 자식을 낳고 낳아서 예스밀드에 널리 펼쳐졌다. 상자가 바람에 이끌려 70번 반복했을 때, 무드의 영역은 신들이 머물 수 있을 만큼 넓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무드의 아름다운 금빛은 끝내 볼 수 없었다. 무드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금빛이 점차 탁해지고 짙은 색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대신 무드에게 남은 금빛을 지킬 기둥이 셍 크라드의 3번째 창조물로서 열쇠구멍을 통해 들어왔다. 기둥은 무드가 가지고 있던 아름다운 금빛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는데, 크기가 너무 거대하여 무드의 모든 영역을 지배했다. 신들은 서로 합심하여 기둥을 부쉈다. 6개로 쪼개진 기둥은 무드의 영역을 떠나서 각자의 공간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금빛이 6개로 분열되어 불의 색Red, 물의 색Blue, 흙의 색Yellow, 쇠의 색Violet, 나무의 색Sepia, 별의 색Green이 되었다. 신들은 이들 기둥에게 각각 이름을 주어 사이바Psyba, 피안Feean, 어쓰Earth, 야쓰Yark, 엘브Elf, 레타우Retha Hoo라고 불렀다.
신들은 화합과 조화와 안정을 위하여 자신들을 희생했다. 예스밀드가 늘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셍 크라드의 꿈은 느닷없는 비논리적 창조와 예스밀드에게 해로운 존재를 끊임없이 만들고 있었다. 또한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셍 크라드의 꿈의 세계에 대한 불안이 예스밀드의 모든 것을 혼돈에 빠뜨렸다. 그것을 바로잡는 방법은 완전한 존재의 희생 밖에 없었다. 신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영원하기를 바라며, 고요와 평화로 예스밀드를 가꾸었다. 또한 창조주의 잠을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로 예스밀드의 모든 것을 적셨다.
방울이 모여 형상을 이루었던 최초의 신이자 예스밀드의 최고신 ‘하야누Hayanoo'는 셍 크라드를 숭배하는 존재였다. 하야누는 셍 크라드의 꿈을 동경하여 스스로 오랜 시간 잠을 잤다. 그러나 셍 크라드처럼 꿈속의 존재 예스밀드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하야누가 잠에 빠져있는 동안에 창조된 신들은 자신들이 증오하는 셍 크라드를 숭배하는 존재에게 분노했다. 그리고 하야누를 외면한 채 저들끼리 예스밀드를 분할하여 다스리기 시작했다. 잠에서 깬 하야누는 자신의 세계가 많은 신들에게 빼앗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관대한 하야누는 신들의 영역을 질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예스밀드의 조용한 영역을 떠돌며 꿈에서 이루지 못한 세계의 조각들을 조금씩 만들어냈다.
하야누가 만든 것은 존재자 셍 크라드의 기둥을 따른 것이었다. 하야누의 사이바와 하야누의 피안과 하야누의 어쓰와 하야누의 야쓰와 하야누의 엘브와 하야누의 레타우가 예스밀드를 장식했다. 그리고 셍 크라드가 자신을 창조한 것처럼 하야누의 손에 의해 새로운 신이 만들어졌다. 하야누의 모습을 빌어 예스밀드에 드러난 존재의 이름은 ‘드래곤Dragon’이었다.
드래곤은 오만했다. 창조주 하야누의 모습과 같다는 이유로 다른 신을 경시하고 스스로를 예찬했다. 그리고 하야누가 빼앗긴 예스밀드의 영역에 흉폭한 날갯짓을 하여 지배자가 되려했다. 드래곤이 바다의 신 ‘레비돈Reibeeton'에게 오만의 화염을 뿜었을 때, 하야누가 참지 못하여 징벌을 가했다. 하야누는 천 년의 긴 시간동안 드래곤을 무저갱에 가두었다. 천 년이 지나 무저갱을 나올 때, 드래곤은 신들을 향한 오만을 그곳에 남겨뒀다. 그 이후 드래곤은 신들을 경시하지 않았다.
하야누는 예스밀드가 이룬 대지의 굴곡과 바다의 고요를 동경하여 산의 형상을 이룬 신탑과 고요의 형상을 이룬 우물을 만들었다. 이 때 하야누의 마음 속 마음에 감춰진 열쇠가 바깥으로 새어나왔다. 창조의 열정에 담겨진 하야누의 열쇠 ‘나키nakey’는 신탑의 의지와 우물의 열정으로 작은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치 뮤드의 여섯 기둥과 흡사한 것이 신탑과 우물의 주변을 감쌌고, 천년이 지났을 때는 일곱 개의 대륙과 다섯 개의 바다를 만들었다. 신탑은 대륙의 가장 높은 곳이 되었고 우물은 바다의 가장 낮은 곳에 숨었다.
다른 신들이 하야누의 창조를 부러워했다.
하야누가 새로운 창조를 고민하며 여섯 종족을 만들고 있을 때, 다른 신들은 하야누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하야누를 제외한 다른 신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셍 크라드의 꿈인 예스밀드라는 것을 잊고 말았다.
하야누는 자신이 만든 세상을 ‘사르티스’라 이름 붙이고, 드래곤이 다스리게 했다. 드래곤은 우물이 다섯 번째로 만들어낸 생명체 ‘뱀’과 흡사하게 생겼으나, 뱀보다 천 배는 거대한 몸체에 날개가 있었다. 하야누의 금빛 눈이 드래곤에게도 있었고, 하야누의 지식이 담긴 시간도 드래곤에게 있었다. 드래곤은 사르티스의 그 어떤 종족보다도 현명하고 강했으며 날개가 미처 지우지 못한 오만도 남아있는 종족이었다.
하야누는 사르티스의 형상을 빌어 ‘엘프’를 만들고, 신탑과 우물이 만든 모든 자연과 친밀할 것을 명령했다. 엘프는 사르티스의 거친 대지처럼 어둡고 갈라진 살가죽과 열네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으며 눈동자는 하늘처럼 맑았다. 키가 작고 느렸으나 우물이 만든 빠른 동물들에게 부탁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종족이었고, 드래곤 다음으로 하야누의 모습과 가까운 형상이었다.
하야누는 우물의 형상을 빌어 ‘인간’을 만들고, 신탑과 우물이 만든 모든 자연들을 재구성할 것을 명령했다. 인간은 우물의 열정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자연의 형상을 끝없이 바꾸려고 노력했다. 어떤 것은 하야누를 만족시켰으며 어떤 것은 하야누를 놀라게 할 때도 있었다. 우물처럼 매끈한 살갗을 가진 인간들은 열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으며 눈동자는 바다처럼 맑았다. 엘프보다는 2배나 크고 빨랐으나 자연에게 부탁할 수 있는 권능을 갖지 못했고, 하야누와 닮은 점은 거의 없었다. 그것이 하야누를 크게 만족시켰다.
하야누는 인간의 형상에 하늘과 나무와 돌의 형상을 섞어서 ‘지니’와 ‘드워프’와 ‘스톤크’를 만들었고, 마지막으로 드래곤의 형상에 바다의 형상을 섞어서 ‘시곤’을 만들었다. 하야누는 이 네 종족에게 아무런 권능도 주지 않고, 모습의 근원을 따라 권능을 찾으라고 명했다. 그것은 인간들이 자연을 재구성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야누는 자신이 만든 종족이 스스로 창조하는 모습을 즐기고 싶었다.
하야누의 마지막 종족 ‘시곤’이 만들어졌을 때, 뮤드를 적시던 노래가 갑자기 멈췄다. 신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세계가 ‘셍 크라드의 꿈’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하야누처럼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영역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긴 신들이 서로를 헐뜯고 싸우기 시작했다. 하야누가 뮤드에서 벌어진 뜻밖의 사태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신들은 일곱의 무리로 분열되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야누가 신들을 말리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셍 크라드의 꿈’을 알리려 했다. 그러나 예스밀드를 알리기 위해 사이바의 기둥으로 가던 도중, 하야누는 누군가의 암습을 받고 무저갱에 갇혔다.
하야누가 사라진 다음 날, 제1세기의 첫 번째 전쟁 ‘안타레드’가 시작되었다.
2.
뮤드의 북쪽대지는, 그 중에서도 최북단의 대지는 폭이 좁고 끊임이 없는 강 ‘요든’에 의해서 경계선이 만들어져 있었다. 요든강은 바로 남쪽에 하야누가 만들어낸 최고의 신탑, ‘아틀라스산’의 중턱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940신터(신터: 신의 걸음을 의미하며 하야누의 이동법을 기준으로 한다. 거리단위로 1신터는 약 100미터이다)에서 2개의 줄기로 나뉘어져 동요든강과 서요든강이 되었다. 요든강의 시작이 되는 아틀라스 샘은 우물의 힘을 모두 다 동쪽에 남겼기 때문에 동요든강의 주변은 새와 나무와 붉은 흙이 있었고, 서요든강의 주변에는 돌과 노란 흙이 있었다. 요든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 대지의 주인인 불의 신 ‘파이어’는 서요든강의 영역에 자신의 신전을 세우고 ‘화염의 3종족’을 만들었다. 대지의 북쪽 바다는 언제나 붉게 일렁거렸는데, 그 이유는 북쪽 바다의 절벽 너머에서 북쪽 기둥 ‘엘브’가 불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브의 불길 때문에 파이어의 하늘은 언제나 붉었으며, 구름도 이따금 화염을 뿜을 때가 있었다. 동요든강의 새와 나무와 붉은 흙도 엘브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여 떠나고 시들고 변색되었는데, 그 중 강한 새와 강한 나무와 강한 붉은 흙이 열기에 적응하여 살아남기도 했다. 파이어는 동요든강의 너머에서 푸르게 빛나는 나무와 그 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새들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또한 짙은 색으로 축축하게 젖어있는 요든강 너머의 붉은 흙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불의 신 파이어는 동요든강 북단의 새에게 ‘이글킹’의 이름을 주고, 그 보답으로 날개를 얻었다. 그리고 요든강의 물을 들끓게 하는 지독한 열기에도 끄덕 없는 나무들에게 다리를 주고 ‘팔과 다리’가 될 재료를 얻었다. 강물조차 증발할 정도의 열기가 내리쬐는 곳이었으나, 속에 품고있는 물을 절대로 화염의 구름에게 내주지 않는 파이어의 붉은 흙에게는 ‘고드’의 이름을 주어 자신의 창조물이 될 재료로 삼았다.
“이글킹의 날개에게 엘브의 권능을 담아야 한다.”
파이어는 자신의 첫 번째 창조물인 ‘마리오’에게 최초의 명령을 내렸다. 마리오는 파이어의 대지에 가장 많이 분포된 노란 흙으로 만들어졌다. 노란 흙은 크기가 작고 무리가 뭉쳐지지 않았으며 불타는 하늘과 들끓는 바다의 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파이어는 기둥 엘브가 뿜어대는 불꽃 코로나의 권능을 훔쳐서 노란 흙에게 주었는데, 코로나가 무지개처럼 빛을 내며 파이어가 원하는 형상을 빚었다. 형상이 반쯤 투명하고 오색의 영롱한 빛이 항상 맴도는 모습을 한 피조물은 파이어에게 ‘마리오’라는 이름을 받았다. 마리오는 ‘아름다운 불꽃’이라는 뜻이었으며 파이어가 만든 언어이자 의미였다.
마리오는 이글킹의 날개를 들고 바다절벽 너머의 붉게 타오르는 기둥 엘브에게 갔다. 그러나 엘브는 이 피조물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고 코로나로 배를 태워버렸다. 마리오는 바다 속을 걸어서 파이어에게 돌아왔지만, 배가 탈 때 놓쳤던 이글킹의 날개는 오랫동안 엘브의 주위를 방황했다. 1크밀드(크밀드: 신의 잠을 의미하며 하야누의 잠을 의미한다. 시간단위로 1크밀드는 1년. 1밀드는 하루다. 하야누가 잠을 자면서 뒤척이는 때를 1밀드로 하는데 하야누는 모두 365번을 뒤척였을 때 잠에서 깨어난다)가 지났을 때, 외로운 엘브는 이글킹의 날개에게 정을 주고 말았다. 이글킹의 날개는 엘브의 권능을 품에 안고서 화염의 구름을 타고 파이어에게 돌아왔다. 파이어는 무척 기뻐하며 2번째 창조물을 만들었다. 화염의 날개와 고드의 몸, 강한 팔과 다리를 가지고 태어난 이 피조물은 ‘고르고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파이어는 고르고스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4크밀드 전에 하야누가 사라져, 창조의 땅 ‘하야누스’가 주인 없는 곳이 되었다. 그대는 아틀라스산을 넘어 하야누스를 지배하라. 그리고 하야누의 열쇠 나키를 찾아야 한다. 그대가 뮤드의 모든 세상을 정복하고 여섯 개의 열쇠를 모두 찾았을 때, 셍 크라드의 열쇠 ‘예스밀드’의 길이 보일 것이다. 쇠는 모든 것의 시작이며 너희가 있기 전에, 내가 있기 전에, 그리고 하야누가 있기 전에도 존재했던 셍 크라드의 첫 번째 창조물이다. 그것을 얻는 자가 뮤드를 지배할 수 있고, 셍 크라드에게서 예스밀드를 빼앗아 영원을 보장받을 자격을 갖게 된다.”
고르고스는 파이어의 명령과 파이어의 일부 지식과 파이어의 커다란 권능을 받았다. 수천의 고르고스 군대는 수만의 마리오와 수십만의 이글킹을 이끌고 요든강을 건넜다. 그동안 파이어는 절대권능의 힘을 부여받을 세 번째 창조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세 번째 피조물은 파이어의 모든 권능과 함께 코로나와 화염의 구름에게 축복을 받았는데, 엘브가 직접 이름을 주었다. 엘브는 파이어의 세 번째 피조물을 ‘아이니’라고 불렀다. 아이니는 3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하야누의 머리와 흡사했고, 또 하나는 하야누의 창조물인 인간의 것과 흡사했으며, 나머지 하나는 드워프와 흡사했다. 이것은 엘브가 하야누를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었고, 또한 하야누의 대지를 침공하는 파이어에 대한 분노의 뜻이기도 했다. 아이니는 오른손에 코로나의 구슬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화염의 구름으로 몸을 감쌌다. 파이어는 아이니의 모습을 보고 무척 두려워하여 엘브의 힘이 약해지는 ‘푸른 하늘의 날’을 선택해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엘브가 먼저 이 계획을 알아차리고 화염의 드래곤을 아이니에게 선물했기 때문에, 오히려 파이어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고르고스의 군대가 아틀라스 산을 넘었을 때 파이어의 피가 요든강을 붉게 물들였다. 들끓는 피의 강이 아틀라스산의 정상에서도 또렷하게 보였기에, 고르고스는 창조주의 죽음을 알고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때 마리오가 고르고스의 피를 모아서 아틀라스 샘에 뿌렸는데, 그것이 강줄기를 타고 내려가다가 요든강이 갈라지는 부분에서 새로운 고르고스를 낳았다. 새로운 고르고스는 파이어의 모든 지식과 권능을 얻지는 못했으나, ‘정복욕’과 ‘쇠를 탐내는 욕심’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들은 파이어의 명령과 관계없이 마리오와 이글킹을 이끌고 하야누스로 쳐들어갔다. 그 때 파이어의 대지는 이미 아이니가 주인이 되어 있었다. 셍 크라드의 여섯 기둥중 하나인 엘브는 아이니에게 파이어를 대신하여 ‘불의 신’이 될 것을 명했고, 아이니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엘브의 뜻에 따라서 실종된 하야누에게 충직할 것을 약속했다.
창조주와 땅을 잃은 군대는 명령만을 소유한 채 하야누스로 진군했다. 주변의 모든 신들이 이 소식을 들었으나 하야누와 파이어 외의 어떠한 신도 자신들의 피조물을 만든 이가 없었다. 하야누를 추종하던 몇몇 신들이 자신들의 땅을 버려둔 채 하야누스로 향했다. 모두가 고르고스의 군대보다 먼저 하야누스에 도착했으나, 적들을 징벌하지는 못했다. 기둥 피안의 중심으로 자전하는 부유(浮游)의 땅 라타의 주인이자 비의 신 기나스가 자신을 따르는 신들에게 명령하여 다른 신들의 빈 땅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세계를 침공당한 바다의 신 레비돈은 급히 하야누스를 떠났고, 다른 신들도 서로를 불신하여 고르고스의 군대가 하야누스에 도착하기 전에 자신들의 대지로 돌아갔다. 비의 신 기나스는 바다를 지배한 채 레비돈을 맞아들였다. 레비돈은 기나스에게 굴복하여 물의 신으로 받들겠다고 맹세했다. 그 때부터 기나스는 비를 뿌리기 위하여 물을 만들 필요가 없이 레비돈이 공물로 바치는 바다의 일부를 비로 사용했다.
손쉽게 하야누스를 정복한 고르고스의 군대는 9밀드의 휴식을 가진 뒤에 서쪽의 대지 ‘티뮤드’를 침공했다. 기둥 어쓰의 보호를 받으면서 가장 많은 신들이 연합을 하고있는 티뮤드는 남쪽 ‘라헬’의 세력과 전쟁중이었다. 고르고스의 침공시기에 맞춰 마치 연합공격을 하듯 라헬의 세력이 몰아치자 티뮤드의 주인이자 흙의 신 ‘두뮤’는 은빛 구슬 속에 세계를 감췄다. 그리고 자신과 동조하는 6명의 신과 함께 안타레드가 끝날 때까지 그곳에서 나오지 않았다.
고르고스의 군대가 9밀드의 휴식을 가진 뒤, 라헬의 세력을 공격했다. 라헬의 신들은 크게 패배하여 기둥 사이바가 지키고 있는 안정의 땅으로 도망쳤다.
고르고스가 다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8밀드가 지났을 때 안타레드를 일으켰던 모든 신들이 각각 하나씩의 대표를 뽑아서 사이바의 기둥에 모였다. 물의 신 기나스와 어둠의 신 그레모리와 생성의 신 벨페고르와 신전의 주(主) 바알제붑과 파괴의 신 할투스는 다른 신들을 대표하여 알타레드의 바른 길을 약속했다. 불의 신 아이니와 흙의 신 두뮤는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니가 자신의 영원한 종 화염의 드래곤을 보내어 신들의 맹약에 동참했기 때문에 기둥 사이바는 예스밀드의 모든 신들이 하나를 이루었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하나의 세기가 시작되었고, 사이바는 그 증표로 하나의 신을 만들었다. 모든 신들이 약속한 하나는 ‘안타레드를 위한 고르고스와의 전쟁’이었으며, 사이바가 직접 만든 전쟁의 신은 창조자의 이름에서 비롯하여 ‘시바’라고 했다.
*********************************************************************************************************
원래 이 글을 구상하기 이전에 '다크 드래곤'이라는 제목의 판타지를 썼었다.('다크 드래곤'은 집필을 일찍 중단했기 때문에 아예 연재조차 되지 않았던 '수많은 글 중 하나'다) 다크 드래곤을 쓰던 도중, 등장인물의 대화 속에서 고대신들의 이야기가 언급됐다. 고대신들의 전설은 머리 속에 담아두거나 메모만 했었는데, 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 얘기는 왜 안 썼지?'
그런 이유로 세계의 창조와 멸망에 이르는 장편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 하나세기가 나오게 된 경위다.
'하나세기'는 창조부터 고대신들의 전쟁과 몰락까지의 이야기.
'일곱 열쇠의 탑'은 고대신에게서 비롯된 신족과 인간의 싸움이야기.(이게 '파 나노스'의 설정과 상당히 유사하다. 하지만 '파 나노스'가 모험물이라면, '일곱 열쇠의 탑'은 전쟁물에 가깝다)
'다크 드래곤'은 세상을 지배한 일곱 종족들의 전쟁, 그 속에서 세계를 정복하는 영웅들의 이야기.
'콘돌 킹'은 검과 마법으로 지배당한 세계 속에서 '신의 뜻'에 위배되는 신마법(과학)으로 반란을 꾀하는 이야기.(시간적 배경은 '중세에서 1차, 2차 세계대전으로 넘어가는 지구'에 가깝다.)
'신의 창'은 어느 날 우주에서 날아온 백색 창에 의해 세계의 중심이 꿰뚫리는 사건으로 시작해서, 인간과 고대신이 조우하게되는 이야기. 여기서 세계 멸망. 진행과정은 상당히 SF틱하지만, 마침 내가 주제를 알아서 판타지.
꽤 오래 전에 구상해서 쬐금씩만 썼던 이 5부작 장편은...
산이 멀다.(두리번)
레디 오스 성화 올림
2005년 9월 25일 일요일
시공도시(時空都市) 서장. 원예부장 정연실, 서울로 상경하다.
## 100% 연중글입니다. 10분 정도 시간 떼울 마음이 아니면 읽지 않으시기를 권장합니다. 다른 글을 쓰면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습작을 쓴 거니까요. 심하게 말해서 수틀리면 연재고 평상심이면 다음편 100년지 대계입니다. ;ㅁ;
* * *
시공도시(時空都市)
서장. 원예부장 정연실, 서울로 상경하다.
두툼한 분홍빛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일어났다. 흘끔거리는 시선들이 정연실을 향하고 있었다. 어디가 이상해서 저런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일까. 정연실은 양 갈래로 곱게 땋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특별하게 삐친 머리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얀 상의, 까만 치마에 얼룩이 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시선을 던졌다. 손수건으로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은 구두인데 자꾸만 쳐다본다. 겁이 나서 어깨를 움츠렸다.
“아.”
주변의 시선이 없었다면 마음놓고 탄성을 질렀을 것이다. 서울은 화려했다. 벽보다 유리가 더 많은 것 같은 건물이었는데, 용케도 그 큰 덩치가 무너지지 않는다. 문이 많고 사람이 많았다. 어디서든 입구라는 게 있으면 무조건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경찰아저씨도 보였고, 말로만 들었던 서울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보였다. 어르신들은 천박하다며 혀를 찼던 교복이었지만, 정연실은 부러웠다. 자신이 입은 하얗고 까만 단색의 교복보다는 저렇게 스트라이프선으로 매무새를 장식한 교복이 몇 배는 더 이뻐 보였다. 예전에 서울로 도망쳤다가 붙잡혀온 명호 오빠가 말했던 빵 가게도 보였다. 정말로 빵을 쪼개서 배춧잎과 맛있다는 고깃덩이를 사이에 끼워 넣었다. 정연실은 남이 들을까 두려워 속삭이듯 탄성을 뱉었다. 서울은 예상보다 훨씬 멋있었다. 서울에 오길 정말 잘했어! 정연실은 행복했다.
쏴아아아아! 꽈릉!
정연실은 우울했다. 9월인데 비가 막 오고 지랄이다. 번개가 칠 때마다 몸을 움찔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옆집 노복이보다 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했다. 모두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초췌했으며,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어 보였다. 주변의 눈을 아랑곳 않고 행동하는 게 정연실을 놀라게 만들었다. 자신이 떠나온 성주리(城主里)에서는 저런 식의 생활을 보내는 자가 딱 한 명 있었다. 바둑부의 유치영이라는 남자애였는데, 다들 그 애를 향해 미쳤다고 말하며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었다. 그런 사람들이 서울역에는 무척 많았다. 말로만 듣던 텔레비전이 신기했으나,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서 감히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연실은 지금 문 밖으로 나와 비를 마주하고 있었다.
쏴아아!
비는 끝도 없이 내렸다. 밤인데도 주변이 밝았다. 춥지는 않았지만 괜히 불안하여 보따리를 꼭 안았다. 몇몇 사람들이 정연실을 지날 때마다 힐끔거렸다. 누군가 “촬영중인가?”라고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정연실은 사람들의 눈길이 부담스러워 자꾸만 땋은 머리를 다듬었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모든 계획을 다 잡았었는데, 이렇게 비가 앞길을 막으니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막막했다.
“에이.” 정연실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일단 가고 보자!”
쏴아아아아!
보따리를 머리에 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달리지 못했는데 교복이 흠뻑 젖어 속옷이 비쳤다. 정연실은 팔뚝을 가린 교복이 속살의 빛을 그대로 내비치자, 깜짝 놀라며 몸을 숙였다. 그리고 보따리를 급히 펼쳐 짙은 색 겉옷을 꺼내 어깨에 걸쳤다.
“이거 쓰세요.”
누군가 정연실에게 우산을 건넸다. 부드러운 인상의 사내였는데 우산이 2개다. 손을 저어 거절했지만, 사내는 끝내 정연실의 손에 우산을 쥐어주고 땅굴로 들어가 버렸다. 서울 사람이 무섭다는 말은 거짓말이구나. 정연실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우산을 쓰고 나니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정연실은 비로소 서울 구경을 시작했다. 자신이 제일 즐기는 골목골목을 찾아 열심히 걸었다.
“아가씨, 어디가?”
어떤 골목에서 여자의 목소리처럼 고성인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정연실이 고개를 돌려서 상대를 확인했다. 목소리와 다르게 거친 인상의 사내다. 그리고 4명의 사내가 또 있었다. 정연실은 “그냥 가는 중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사내들이 웃었다.
“잘 데는 있어?”
“있을 거예요.”
정연실의 대답에 사내들이 또 한 번 웃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3명의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정연실의 뒤쪽에서 다가온다. 앞에 있던 5명 사내 중에 2명이 정연실의 좌우를 포위했다. 목소리가 가녀린 사내는 친절함을 보였다.
“오빠랑 같이 갈래? 방 하나쯤은 만들어 줄 수 있거든.”
쏴아아아아!
비가 거세졌다.
* * *
성주리에는 3개의 고등학교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위석 고등학교만 남녀공학이었다. 위석 고등학교는 다른 학교보다 2배는 더 넓은 운동장을 갖고 있었으며 특별활동을 위한 건물이 따로 있을 정도로 재정이 좋았다. 특별활동 건물은 학교 본 건물의 절반쯤 되는 크기의 3층 건물이었다. 그곳 3층의 중심부에 학생회실이 있었다. 별빛이 밤하늘을 장악한 맑은 날씨. 학생회실의 창문은 그런 하늘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동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럼 연실이는 정말 서울로 간 거야?”
학생회장 김민종이 창 밖을 채운 별을 보며 물었다. 뒤에서 박승진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김민종은 짧은 머리에 구릿빛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뒷짐을 지고 창 밖을 보는 모습이 어울려서 달이라도 비춘다면 한 폭의 그림같을 것이다. 반면 박승진은 전형적인 마당쇠 인상이었다. 넉넉한 마음이 박승진의 입가에 어린 미소를 통해 느껴졌다. 하지만 박승진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박승진이 답했다.
“편지를 남겼어, 회장. 아무래도 금방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아.”
“대체 서울이 뭐가 좋다고 가는 건지. 이장님도 걔가 떠난 건 알고 계셔?”
“이장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둘째 딸인데 모를 리가 있겠어? 하지만 데려오라는 말은 안 하시더라. 데려오라 하셔도 무슨 수로? 그 넓은 서울에서 걔를 무슨 수로 찾을 수 있겠어?”
“짜증나네.”
김민종이 불쾌감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저었다.
탕!
칠판이 몇 번 떨리다가 진정됐다. 김민종은 칠판을 향해 다시 한 번 손을 저으려다가 한숨으로 마무리했다. 내력으로 인한 진공음이 적막했던 학생회실을 잠시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김민종이 창문 밖으로 손을 뻗었다.
“저 많은 꽃들을 버려놓고 대체 뭘 하자는 거야? 원예부에 이제 누가 남았다고.”
“내가 하면 안될까? 그래도 걔한테 몇 가지 잡기는 배웠는데…….”
“아서라.” 김민종이 웃으며 지풍을 쏘았다. 건물 아래 화단이 ‘쾅!’하고 폭음을 일으키며 수십 개의 꽃잎을 흩어놓았다. “환영원예술(幻影園藝術)은 잠깐 배운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냐.”
박승진이 길게 한숨을 쉬며 뒤통수를 다시 긁었다.
“그럼 어떻게 해. 부장이 없어졌다고 원예부를 폐부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
* * *
쏴아아아하!
빗물 가득한 골목에 동공 풀린 자들이 잔뜩 엎어져 있었다. 꽃잎이 바닥에 가득하다가 빗물에 녹아 사라졌다. 정연실은 울상이 된 얼굴로 부러진 우산살을 매만졌다. 한쪽이 무너진 우산을 들고 비를 막았다가, 슬며시 치우며 하늘을 보았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다. 땅에서부터 하늘로 쏘아지는 빛이 너무도 강렬했다.
“하아아.”
고개를 땅으로 숙이며 길게 한숨쉬었다. 정연실이 잠시 눈을 치켜 떴다. 골목의 지저분한 벽 귀퉁이에 민들레 한송이가 보였다. 정연실은 미소를 지으며 민들레를 어루만졌다. 곧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며 벽 전체가 민들레로 덮였다. 하지만 정연실이 골목에서 모습을 감췄을 때, 민들레 무리들은 빗물에 씻겨 사라졌다. 한 송이 민들레만 외롭게 남아서 잠깐의 부귀영화를 그리워했다.
* * *
“편지라고?”
3개월만에 본 김민종의 밝은 얼굴이다. 박승진이 식은땀을 억지로 감추며 김민종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박승진의 곁에 있던 통신부원(通信部員) 김기영도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민종이 둘에게서 느껴지는 어둠의 낌새를 전혀 느끼지 못한 채 급히 편지를 펼쳤다.
“이 자식, 그래도 서울에서 잘 살고있나 보구나. 걱정했었는데 잘 됐다.”
김민종의 환한 얼굴은 편지의 글을 읽는 즉시 굳어버렸다. 박승진이 말했다.
“빨리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야겠지? 그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건 우리 마을만의 문제가 아니잖아.”
“믿을 수 없어.”
김민종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말은… 강호뿐 아니란 얘기잖아. 시공의 비틀림이…….”
“연실이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 걔는 거짓말 안 하는 애잖아. 시공의 비틀림으로 인해 강호의 도시들만 이곳으로 온 게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의 도시들도 겹치고 있는 게 분명해.”
김민종은 박승진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시 한 번 사진을 보았다. 가장 거슬리는 사진은 역시 정연실의 모습이었다. 수십 명의 폭주족들을 뒤에 달고 찍은 이 펑키스타일 여보스는 대체 누구냐! 또 다른 사진에서 정연실은 문신 가득한 오른팔로 각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편지에서 언급된 ‘인간이 하늘을 날아다니게 할 수 있는 기계’를 찍은 사진도 인상적이었지만, 어떤 남자의 시체를 찍은 사진이 제일 놀라웠다. 몸의 절반이 기계였는데, 편지에 의하면 팔에서 살인광선이 나오고 이장님보다 더 빠른 경공술을 펼친다고 했다.
“일단 이장님에게 가서 긴급사항 허가를 받고 마을회관으로 가.”
김민종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박승진과 김기영이 학생회실을 빠져나갈 때까지 김민종의 시선은 편지와 사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김민종은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뚫어질 듯 노려봤다. 신음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으으음. 경기도에 신수(神獸)들이 사는 도시가 발견됐다는 소문이라……. 대체 시공이 어디까지 비틀어지려는 거지?”
<<'1장. 분열된 서울의 어둠. 제1 삼국시대'편으로 계속>>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연중글'입니다! -_-/(빌어먹을! 스토리는 끝까지 다 잡아놓았는데... oTL)
레디 오스 성화 올림
* * *
시공도시(時空都市)
서장. 원예부장 정연실, 서울로 상경하다.
두툼한 분홍빛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 일어났다. 흘끔거리는 시선들이 정연실을 향하고 있었다. 어디가 이상해서 저런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일까. 정연실은 양 갈래로 곱게 땋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특별하게 삐친 머리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얀 상의, 까만 치마에 얼룩이 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시선을 던졌다. 손수건으로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은 구두인데 자꾸만 쳐다본다. 겁이 나서 어깨를 움츠렸다.
“아.”
주변의 시선이 없었다면 마음놓고 탄성을 질렀을 것이다. 서울은 화려했다. 벽보다 유리가 더 많은 것 같은 건물이었는데, 용케도 그 큰 덩치가 무너지지 않는다. 문이 많고 사람이 많았다. 어디서든 입구라는 게 있으면 무조건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경찰아저씨도 보였고, 말로만 들었던 서울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도 보였다. 어르신들은 천박하다며 혀를 찼던 교복이었지만, 정연실은 부러웠다. 자신이 입은 하얗고 까만 단색의 교복보다는 저렇게 스트라이프선으로 매무새를 장식한 교복이 몇 배는 더 이뻐 보였다. 예전에 서울로 도망쳤다가 붙잡혀온 명호 오빠가 말했던 빵 가게도 보였다. 정말로 빵을 쪼개서 배춧잎과 맛있다는 고깃덩이를 사이에 끼워 넣었다. 정연실은 남이 들을까 두려워 속삭이듯 탄성을 뱉었다. 서울은 예상보다 훨씬 멋있었다. 서울에 오길 정말 잘했어! 정연실은 행복했다.
쏴아아아아! 꽈릉!
정연실은 우울했다. 9월인데 비가 막 오고 지랄이다. 번개가 칠 때마다 몸을 움찔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옆집 노복이보다 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했다. 모두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초췌했으며,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어 보였다. 주변의 눈을 아랑곳 않고 행동하는 게 정연실을 놀라게 만들었다. 자신이 떠나온 성주리(城主里)에서는 저런 식의 생활을 보내는 자가 딱 한 명 있었다. 바둑부의 유치영이라는 남자애였는데, 다들 그 애를 향해 미쳤다고 말하며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었다. 그런 사람들이 서울역에는 무척 많았다. 말로만 듣던 텔레비전이 신기했으나, 그 앞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서 감히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연실은 지금 문 밖으로 나와 비를 마주하고 있었다.
쏴아아!
비는 끝도 없이 내렸다. 밤인데도 주변이 밝았다. 춥지는 않았지만 괜히 불안하여 보따리를 꼭 안았다. 몇몇 사람들이 정연실을 지날 때마다 힐끔거렸다. 누군가 “촬영중인가?”라고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정연실은 사람들의 눈길이 부담스러워 자꾸만 땋은 머리를 다듬었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모든 계획을 다 잡았었는데, 이렇게 비가 앞길을 막으니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막막했다.
“에이.” 정연실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일단 가고 보자!”
쏴아아아아!
보따리를 머리에 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달리지 못했는데 교복이 흠뻑 젖어 속옷이 비쳤다. 정연실은 팔뚝을 가린 교복이 속살의 빛을 그대로 내비치자, 깜짝 놀라며 몸을 숙였다. 그리고 보따리를 급히 펼쳐 짙은 색 겉옷을 꺼내 어깨에 걸쳤다.
“이거 쓰세요.”
누군가 정연실에게 우산을 건넸다. 부드러운 인상의 사내였는데 우산이 2개다. 손을 저어 거절했지만, 사내는 끝내 정연실의 손에 우산을 쥐어주고 땅굴로 들어가 버렸다. 서울 사람이 무섭다는 말은 거짓말이구나. 정연실은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우산을 쓰고 나니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정연실은 비로소 서울 구경을 시작했다. 자신이 제일 즐기는 골목골목을 찾아 열심히 걸었다.
“아가씨, 어디가?”
어떤 골목에서 여자의 목소리처럼 고성인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정연실이 고개를 돌려서 상대를 확인했다. 목소리와 다르게 거친 인상의 사내다. 그리고 4명의 사내가 또 있었다. 정연실은 “그냥 가는 중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사내들이 웃었다.
“잘 데는 있어?”
“있을 거예요.”
정연실의 대답에 사내들이 또 한 번 웃었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3명의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정연실의 뒤쪽에서 다가온다. 앞에 있던 5명 사내 중에 2명이 정연실의 좌우를 포위했다. 목소리가 가녀린 사내는 친절함을 보였다.
“오빠랑 같이 갈래? 방 하나쯤은 만들어 줄 수 있거든.”
쏴아아아아!
비가 거세졌다.
* * *
성주리에는 3개의 고등학교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위석 고등학교만 남녀공학이었다. 위석 고등학교는 다른 학교보다 2배는 더 넓은 운동장을 갖고 있었으며 특별활동을 위한 건물이 따로 있을 정도로 재정이 좋았다. 특별활동 건물은 학교 본 건물의 절반쯤 되는 크기의 3층 건물이었다. 그곳 3층의 중심부에 학생회실이 있었다. 별빛이 밤하늘을 장악한 맑은 날씨. 학생회실의 창문은 그런 하늘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동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럼 연실이는 정말 서울로 간 거야?”
학생회장 김민종이 창 밖을 채운 별을 보며 물었다. 뒤에서 박승진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김민종은 짧은 머리에 구릿빛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뒷짐을 지고 창 밖을 보는 모습이 어울려서 달이라도 비춘다면 한 폭의 그림같을 것이다. 반면 박승진은 전형적인 마당쇠 인상이었다. 넉넉한 마음이 박승진의 입가에 어린 미소를 통해 느껴졌다. 하지만 박승진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박승진이 답했다.
“편지를 남겼어, 회장. 아무래도 금방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아.”
“대체 서울이 뭐가 좋다고 가는 건지. 이장님도 걔가 떠난 건 알고 계셔?”
“이장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둘째 딸인데 모를 리가 있겠어? 하지만 데려오라는 말은 안 하시더라. 데려오라 하셔도 무슨 수로? 그 넓은 서울에서 걔를 무슨 수로 찾을 수 있겠어?”
“짜증나네.”
김민종이 불쾌감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저었다.
탕!
칠판이 몇 번 떨리다가 진정됐다. 김민종은 칠판을 향해 다시 한 번 손을 저으려다가 한숨으로 마무리했다. 내력으로 인한 진공음이 적막했던 학생회실을 잠시 소란스럽게 만들었다. 김민종이 창문 밖으로 손을 뻗었다.
“저 많은 꽃들을 버려놓고 대체 뭘 하자는 거야? 원예부에 이제 누가 남았다고.”
“내가 하면 안될까? 그래도 걔한테 몇 가지 잡기는 배웠는데…….”
“아서라.” 김민종이 웃으며 지풍을 쏘았다. 건물 아래 화단이 ‘쾅!’하고 폭음을 일으키며 수십 개의 꽃잎을 흩어놓았다. “환영원예술(幻影園藝術)은 잠깐 배운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냐.”
박승진이 길게 한숨을 쉬며 뒤통수를 다시 긁었다.
“그럼 어떻게 해. 부장이 없어졌다고 원예부를 폐부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
* * *
쏴아아아하!
빗물 가득한 골목에 동공 풀린 자들이 잔뜩 엎어져 있었다. 꽃잎이 바닥에 가득하다가 빗물에 녹아 사라졌다. 정연실은 울상이 된 얼굴로 부러진 우산살을 매만졌다. 한쪽이 무너진 우산을 들고 비를 막았다가, 슬며시 치우며 하늘을 보았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다. 땅에서부터 하늘로 쏘아지는 빛이 너무도 강렬했다.
“하아아.”
고개를 땅으로 숙이며 길게 한숨쉬었다. 정연실이 잠시 눈을 치켜 떴다. 골목의 지저분한 벽 귀퉁이에 민들레 한송이가 보였다. 정연실은 미소를 지으며 민들레를 어루만졌다. 곧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며 벽 전체가 민들레로 덮였다. 하지만 정연실이 골목에서 모습을 감췄을 때, 민들레 무리들은 빗물에 씻겨 사라졌다. 한 송이 민들레만 외롭게 남아서 잠깐의 부귀영화를 그리워했다.
* * *
“편지라고?”
3개월만에 본 김민종의 밝은 얼굴이다. 박승진이 식은땀을 억지로 감추며 김민종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박승진의 곁에 있던 통신부원(通信部員) 김기영도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민종이 둘에게서 느껴지는 어둠의 낌새를 전혀 느끼지 못한 채 급히 편지를 펼쳤다.
“이 자식, 그래도 서울에서 잘 살고있나 보구나. 걱정했었는데 잘 됐다.”
김민종의 환한 얼굴은 편지의 글을 읽는 즉시 굳어버렸다. 박승진이 말했다.
“빨리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야겠지? 그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건 우리 마을만의 문제가 아니잖아.”
“믿을 수 없어.”
김민종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 말은… 강호뿐 아니란 얘기잖아. 시공의 비틀림이…….”
“연실이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 걔는 거짓말 안 하는 애잖아. 시공의 비틀림으로 인해 강호의 도시들만 이곳으로 온 게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의 도시들도 겹치고 있는 게 분명해.”
김민종은 박승진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시 한 번 사진을 보았다. 가장 거슬리는 사진은 역시 정연실의 모습이었다. 수십 명의 폭주족들을 뒤에 달고 찍은 이 펑키스타일 여보스는 대체 누구냐! 또 다른 사진에서 정연실은 문신 가득한 오른팔로 각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편지에서 언급된 ‘인간이 하늘을 날아다니게 할 수 있는 기계’를 찍은 사진도 인상적이었지만, 어떤 남자의 시체를 찍은 사진이 제일 놀라웠다. 몸의 절반이 기계였는데, 편지에 의하면 팔에서 살인광선이 나오고 이장님보다 더 빠른 경공술을 펼친다고 했다.
“일단 이장님에게 가서 긴급사항 허가를 받고 마을회관으로 가.”
김민종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박승진과 김기영이 학생회실을 빠져나갈 때까지 김민종의 시선은 편지와 사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김민종은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뚫어질 듯 노려봤다. 신음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으으음. 경기도에 신수(神獸)들이 사는 도시가 발견됐다는 소문이라……. 대체 시공이 어디까지 비틀어지려는 거지?”
<<'1장. 분열된 서울의 어둠. 제1 삼국시대'편으로 계속>>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연중글'입니다! -_-/(빌어먹을! 스토리는 끝까지 다 잡아놓았는데... oTL)
레디 오스 성화 올림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