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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7일 월요일

[투귀류] # 서장

투귀류(鬪鬼流)


서장(序章)


강호(江湖)에서 승천한 기운이 협객(俠客) 전설을 혈우와 단비로 소호(沼湖)에 되돌린다. 소호는 곧 강호가 된다. 무엇이 먼저라 할 수 없는 법이며 끝을 볼 수 없는 윤회이자 굴레였다. 누구도 시작을 몰랐고 누구도 끝을 몰랐다.


허나 많은 무인들이 시작이라 이르던 때가 있었다.


실존했는지조차 확인할 길 없는 연호, 마력 원년(魔曆 元年) 이전은 누구도 내공을 말하지 않았다. 이름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설이라 불릴 이 시기에 남아있는 유일한 기록은 마군 곽문원(魔君 郭紊原) 일대기였다. 짐승 가죽에 새겨진 몇 자 기록만 봐도 곽문원이 원시강호(原始江湖)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극성으로 외공을 수련한 곽문원이 일백 십년 간 마도천하를 이루며 강호를 다스리는 동안, 처음으로 내공이라는 존재가 알려졌다.


정성을 다하여 수련에 정진하다보면 하늘이 감동하여 정체를 알 수 없는 힘 씨앗을 몸에 심는다 했다. 어리석은 무인들이 그리 알며 수련과 제사를 동일시하다가 곽문원에게 가르침 받았다. 하늘이 내린 힘이 아니라 애초부터 몸에 감춰진 또 다른 힘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수련하는 법도 배웠다.


내공 탄생이자, 원시무림 종말이며, 중세강호의 시작이었다. 다수 무림인들은 더 이상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저 무를 숭배하고 연구했다.


황궁서고 기록은 그것으로 끝이었으나, 무인들 사이에 구전되는 곽문원에 대한 전설은 몇 개 더 있었다. 곽문원은 운남성 봄(春)에서 점치던 사내였다고 한다. 주술을 빌어 내공을 이루었고 정령을 달래는 춤을 통해 외가 보법을 깨치어 수천 종 무공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혹자는 곽문원에 대한 모욕이라며 분개했다. 오랜 수련으로 깨친 외공이 내공을 불러왔고, 그것을 느끼어 내공체계를 이룬 것이 분명하다 말했다. 단지 영적인 힘에 의해 고수가 되었다면 어찌 강한 자라 말할 수 있을까.


마도 마인들은 곽문원이 모든 무공의 원류(原流)라고 주장한다. 무인들은 마도 세력이 강성할 때만 그 주장을 인정해줬다. 그리고 마도 세력이 약해지면 그 주장을 내세워 마음껏 핍박했다. 마도는 자신들 시조 곽문원을 드높이기 위해 여러 모로 노력했다. 심지어 전설대로 주술적 힘을 이용해 내력증진을 꾀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마군 전설에 언급된 내공수위에 이른 자는 없었다.


증명되지 않은 오직 하나뿐인 기록이지만, 강호 후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마도천하는 일백십삼 년이나 지속되었다고 한다. 강호와 관련한 가장 확실한 기록은 ‘군웅시대(群雄時代)’였다. 당시 군웅들이 활약했던 여러 가지 기록이 세상에 남겨졌다. 이러한 군웅들은 훗날 각각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여 마도시대를 끝맺었다. 후에 세력이 부패하고 세상에 강제력을 보이니, 여러 영웅들이 집단을 멀리하며 세상을 떠돌기 시작했다. 이때를 ‘협객시대(俠客時代)’라 불렀다.


협객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형성하던 시기가 뒤를 이었다. 정파, 사파, 마도가 천하를 삼분하던 ‘삼천강호(三天江湖)’가 이 때였는데,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쟁기로 하늘을 갈아보세’라는 노래를 부르며 뒤집어엎음으로써 십구 년 만에 끝맺었다.


이러한 강호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무공이, 새로운 지략이, 새로운 암투가, 새로운 정(情)이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구름처럼 천하에 드리워졌다. 구름은 곧 열매가 되어 강호 역사에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중흥기를 맞이했다. 식솔 열 명이 채 안되던 작은 가문이 비전절기(秘傳絶技)로 천하를 얻을 때도 있었고, 한날한시에 백팔 명 절세고수가 중원을 밟으며 피와 술로 천하를 논할 때도 있었다. 수많은 후배들이 태산 같은 기틀을 잡고 성장하여 호연지기를 펼치고,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기암괴석(奇巖怪石)과 심산유곡(深山幽谷)에 몸을 감추어 후배들에게 기연(奇緣)을 건네기도 하던 시기였다.


그것이 절정에 이를 무렵, 중원에 전쟁이 벌어졌다. 오랑캐라 하여 업신여기던 자들이 큰 세력을 이루어 중원을 유린하자, 강호 고수들도 이에 맞섰다. 그러나 정작 필요했던 절세고수(絶世高手)들은 ‘강호와 국가는 별개의 문제다!’라고 주장하며 은거에 들어갔다.


젊은 호걸들과 늙은 하수들이 은거한 고수들을 찾아다니며 오랑캐를 물리쳐 줄 것을 간절하게 요청했지만,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고수들은 말했다.


‘나라를 돕다니! 관직을 바라는 속물이 되고 싶지는 않다!’


열과 혈을 기울여 싸우는 것 자체가 유치하다고 느낀 절세고수들이다. 남은 것은 그저 자존심 뿐. 어디 저 편에 있을 또 다른 동급 절세고수들에게 속물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싸워야 할 이유는 없었다. 모든 절세고수들이 국가 위기에 등을 돌렸다.


나라는 망했다.


그리고 절세고수들은 후회하기 시작했다. 국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황실이 내버려두지 않았다. 은거했던 수많은 고수들이 한 가을 메뚜기 떼처럼 몰려든 자들에게 죽임 당했다. 앞잡이가 된 고수사냥꾼 대부분은 한 때 오랑캐와 맞서 싸우던 자들, 바로 젊은 호걸과 늙은 하수들이었다.


이리 하여 강호는 상류사회와 하류사회 사이에 큰 불신이 쌓였다. 절세고수들은 자신들 무공을 싹수머리 없는 후배들에게 전수하느니 차라리 가슴에 끌어안고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고, 후배들은 나라를 등진 매국노들에게 무공을 배우느니 차라리 아는 것들 대충 모아서 그저 그런 무공하나 창안하고 ‘이것이 최고일세!’라며 자조하는 삶을 누리는 게 낫다고 여겼다.


강호도 망했다.


무려 칠백 년 가까이 쇠퇴한 ‘하류강호(下流江湖)’에 새로운 바람이 불게 된 것은 오랑캐 황제가 내린 칙령이었다. 드디어 ‘황가천하(皇家天下)’가 도래한 것이다.


황제 칙령으로 뛰어난 인재들이 선발됐다.


황실천마대(皇室天馬隊).


황하비마수(皇下飛馬手).


쌍룡금위영(雙龍禁衛營).


규화환조군(硅華宦爪軍).


황제는 네 개 집단으로 이루어진 이들을 통칭하여 황하군웅지(皇下軍雄池)라 불렀다. 황하군웅지는 강호에 기를 세우고 기존 무가들을 간섭했다. 그나마 뜻 있던 협객들이 크게 반발했다. 바로 밟혔다. 황하군웅지는 천지기존 백도운(天地奇尊 伯圖雲)에게 강호접수 실행기관인 군웅지(軍雄池)를 맡겨 모든 불만을 힘으로 풀어주라는 명을 내렸다. 백도운은 성심성의껏 무인들 불만을 해결했고, 협객들 무리는 금세 흩어졌다. 그렇게 불만 가득했던 협객들이 중원을 떠나 변방으로 흩어지니 강호에 유래 없는 괴이한 시대가 열렸다.


세외강호(世外江湖)!


좋은 말로 강호 영역이 넓어졌고, 나쁜 말로 중원 물이 흐려졌다. 백도운이 무림을 다스린 이후 이십 년이 흘러, 중원보다 세외 변방에 더 많은 고수들이 살게 되었다. 특히 호진족(虎眞族) 영역인 흑호강성(黑虎江城)이나 노림성(路林城)은 강호 절세고수라 불리던 무인들이 절반 이상 모였을 정도였다.


하루가 다르게 강호는 급변했다. 시정잡배들이 뭉친 작은 정보 집단이 천하를 장악할 때가 있고, 서막(西漠) 이름 모를 세력이 갑자기 성장하여 산천초목을 뒤흔들 때도 있었다. 흑호강성 일대가 강호 세력 중심지가 될 때도 있고, 흑두산(黑頭山) 산적들이 천하제일이라 불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흐름 속에서 중원이 세력을 장악했던 때는 한 번도 없었다. 모든 세력들이 중원 회귀를 꿈꾸건만,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어느 누구도 백도운이 있는 중원으로 들어서지 않았다.


그래도 무인들은 중원을 잊지 않았다. 중원이 품었던 협객 도리와 무, 그리고 순수한 정신을 그리워했다. 그 마음만은 결코 변치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변치 않는 것이 있었다. 전설 시대부터 끊임없이 내려오는 소문이었다.


[신천방록부(新天方錄符)를 지닌 자를 상대하지 마라. 천하를 상대할 자가 아니면 지닐 수 없는 책이기 때문이다.]


[마령연환나이서(魔靈連環挪移書)를 지닌 자를 상대하지 마라. 그것을 지닌 자는 이제 천하를 상대할 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鬪鬼流★


K.O.G나 믿어주시고 얘는 그러려니 하세요. 작정하고 연재하려면 한참 멀었습니다.


레디 오스 성화 올림

유진이의 환타지 - 2

“우웅…”

유진이는 눈에 익은 동네를 걸어가고 있었어요. 아마도 유진이의 동네였을 거예요. 유진이는 늘 가던 방향대로 집을 향하고 있었고,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답니다. 그저 밝은 대낮에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와 집들. 구민이네 개조차도 보이지가 않네요.

“아빠가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이어지는 내용

유진이의 환타지 - 1

유진이의 판타지 -1

“눈썰매…”

“응? 눈썰매가 타고싶어? 이제 저녁이 다 되어 가는데 그만 집에 가자, 유진아.”

“싫어. 눈썰매 타고싶어.”

“음… 한 번만 타면 금방 끝날텐데? 그럼 재미없잖니. 그러지 말고 오늘은 집에 가자. 아빠가 다음주 일요일에 다시 데려와서 눈썰매 태워줄게.”

“히잉… 싫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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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호스트 바둑왕] 8국. 져줄까?

제8국 져줄까?

놈은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이는 놈이 입고있는 옷이 헤이안 시대의 복색 임을 알고 긴장했다. 그보다 더 사이를 긴장시키는 것은…….
[이 놈… 7국 때 뒷 얘기 생각 안 해서 꽁초라고 말해버리긴 했지만…]
사이는 바둑판 위에 짓이겨진 대마초를 노려보며 입술을 떨었다.
[저 장초를 아무렇지도 않게 버렸다. 이 자는 또 뭐지?]
놈이 다시 외쳤다.
“뭐가 혼인보 슈우사쿠냐! 그깟 녀석, 이미 나한테 진 시시한 놈이라구!”
[라는 건 나한테 이겼다는 얘긴데… 누구더라?]
“믿는 거냐, 이 놈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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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호스트 바둑왕] 7국. 묘수풀이 세 문제

제7국 묘수풀이 세 문제

빛나는 손가락, 빛나는 손!

히카루의 흑돌이 빛을 발했다.

나도 저렇게 둔다면!

콰콰콰쾅!

“…….”

도우야 명인과 사이,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긴장하며 바둑판을 응시했다. 희뿌연 연기가 자욱하게 흐르는 바둑판 위에는 히카루가 박아놓은 흑돌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폭렬지옥류(爆裂地獄類) 염라행마(閻羅行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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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호스트 바둑왕] 6국. 일도양단

제6국 일도양단

쏴아아아아!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구겨진 하늘의 우중충한 모습이 도시를 덮었다. 그 기운은 히카루와 아키라가 마주하고 있는 기원의 이곳저곳에 스며들며 사람들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째깍째깍.

시계는 6시 5분을 막 넘기는 중이었다. 기원의 내부에는 시계소리 외의 그 어떠한 소리도 용납되지 않았다. 도우야 아키라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며 바둑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가 아키라의 한수를 기다리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졌습니다.”

갑자기 아키라가 고개를 숙이고 침통하게 말했다. 히카루는 깜짝 놀라며 사이를 돌아봤다.

‘어어? 어! 왜 그래?’

사이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낙담하듯 중얼거렸다.

[불계입니다. 자기의 패배를 스스로 인정한 것입니다. 벌써부터 그러면 재미없는데…]

히카루가 당황하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나… 난 잘 모르겠지만… 아직 지난번 대국의 반정도 밖에 두지 않았잖아! 사… 사이. 네가 그렇게 무참하게 이긴 거야?’

사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움이 사이의 얼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이는 행여나 하는 마음에 히카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말해봐요, 히카루.]

히카루는 사이가 시킨 대로 눈을 내리깔며 아키라에게 조용히 말했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

울컥. 아키라가 목구멍으로 워프하는 심장을 애써 제 자리로 돌리며 말했다.

“그… 그래도 졌습니다. 어차피 다음 수에 단수치면 다 먹히니까…”

아키라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맺지 못했다. 처참하게 무너진 바둑판의 형국이 마치 자신의 인생이라도 되는 양 실의에 빠진 채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히카루는 아키라의 쳐진 어깨를 보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바둑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아이를 이렇게까지 망가뜨려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히카루가 안쓰럽게 아키라를 응시하다가 갑작스레 벌떡 일어나며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도우야, 너 대단하다! 너무 진지해서 무서울 정도였어!”

역시 아키라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한수 한수에 너의 기백이 나를 압도할 정도로…”

여전히. 여전히 아키라는 고개를 떨군 채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절망의 기운이 아키라의 주변에 가득했다. 히카루는 결국 말끝을 흐리며 아키라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내 말 따윈…’

히카루는 우울해졌다.

‘마냥 씹는다. 허접 주제에…’

히카루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나, 갈게. 안녕…”

히카루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아키라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늘어진 어깨는 더 이상 힘을 얻지 못했고, 절망의 한숨이 주변 공기를 가득 메웠다. 아키라의 눈이 금세 방울지며 한 방울의 눈물을 떨궜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키라는 어렸을 때 아버지인 도우야 명인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어렸을 때.

‘아버지!’

아주 어렸을 때. 아키라는 도우야 고요과 손을 잡고 걸으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버지! 나, 바둑에 재능이 있나요?’

도우야 고요는 아키라의 보드라운 손을 놓지 않은 채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바둑에 재능이 있냐고?’

도우야 고요는 웃었다.

‘하하하.’

도우야 고요는 말했다.

‘너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로선 모르겠지만…’

도우야 고요는 미소를 지었다.

빙긋.

도우야 고요는 춤췄다.

덩실.

도우야 고요는 벗었다.

‘작작 좀 해!’

그냥 말…을… 이었다. 쳇!

‘그런 재능이 없다고 해도 넌 더 대단한 재능을 두 가지 갖고 있단다.’

‘두 가지… 재능?’

‘혼인보 슈우사쿠의 바둑전서에 이런 옛구절이 있지. 명인이 숲을 걸으면 그는 오동나무 바둑판을 들고 온다. 허접이 숲을 걸으면 삽질만 하다 온다. 명인이 별을 바라보면 그는 묘수풀이좌를 만든다. 허접이 별을 바라보면 마냥 별이다. 명인과 허접의 차이를 잘 나타내는 말이지.’

‘차이요?’

‘명인은 구해버려. 돈이 될만한 것을. 허접을 구해버려. 돈이 될만한 것은.’

‘총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버지?’

어린 아키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물어본다면…’

도우야 고요는 쓸쓸한 표정으로 아키라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 아버지가 난감하게 되겠지. 그러니 아키라. 너의 말은 꽤 실례되는 말이었단다.’

‘저… 때릴 거예요, 아버지?’

‘하하하. 귀여운 내 아들을 때릴 이유가 없지. 그러나 한 가지는 명심해라. 최선을 다해 앞만 보며 걷는다면 허접은 되지 않는다. 넌 지금까지 잘 하고 있었어.’

‘아버지…’

‘그래, 아키라. 청춘을 향해 걸어라. 앞만 보고 가는 것이 명인의 로망이란다.’

아키라는 마음속으로 괴롭게 되뇌었다. 기원은 여전히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너무도 조용해서 아키라가 주먹을 굳게 쥐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아키라는 마음속으로 괴롭게 외쳤다.

‘아버지! 저는 지금까지 아버지의 그 말을 가슴에 새긴 채 앞만 보며 걸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뭔가 보이지 않는 벽이 제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아랫입술을 자근 깨무는 순간, 고개를 숙인 아키라의 얼굴에서 맑은 방울이 떨어졌다. 물론 당황스럽게 침이나 콧물 따위는 아니었다. 아키라는 끊임없이 바둑판 위로 눈물을 떨구며 마음속으로 아우성쳤다.

‘보이지 않는 큰 벽이!’

*

비가 그친 다음날의 하늘은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며 햇살을 고스란히 내비칠 정도로 맑았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내내 멍한 얼굴을 하고 정신을 못차리는 히카루가 안쓰러웠는지, 아카리가 집에 같이 가자며 붙잡았다. 그 때 히카루는 백치와 맞먹는 정신상태였기 때문에, 아카리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우리엄마 진짜 웃긴다!”

학교를 벗어날 때까지 아카리는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주 내용은 자신의 엄마 얘기였다. 대부분 같은 레퍼토리지만 아카리는 언제나 새로운 얘기인양 떠들어대며 웃곤 했다.

“생선을 훔쳐가는 도둑고양이를 맨발로 쫓아갔거든.”

아카리의 엄마 사카키는 언제나 그랬다. 도둑고양이가 아니더라도 고양이나 개를 보면 늘 필사적으로 달려가서 손을 물려야 직성이 풀리는 이상한 아줌마였다. 때문에 히카루도 가끔씩 아카리의 엄마가 손에 붕대를 매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히카루는 아카리의 엄마에 대한 동물 발견 정신증후군이나 그 동창이신 치요 아줌마가 메카닉인지 인간인지, 또는 카스가 아줌마가 오사카댁인지 부산댁인지를 고민할 상황이 아니었다. 히카루의 머릿속은 온통 어제의 아키라 모습만이 담겨져 있었다.

“어… 히카루! 내 말 듣고있니?”

듣고 있지 않았다. 히카루는 아카리가 멈춘 것도 모르고 그대로 땅만 보며 마냥 걸었다.

“왜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긴 거야, 사이.”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걷던 히카루가 갑작스레 멈춰서며 말했다.

“왜 지난번처럼 능숙하게 이기지 않은 거냐고? 말해봐, 사이!”

곧 사이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 아이는 단칼에 목과 몸통을 벨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 그러면 투명해지거든요. 그 땐 ‘방법2002’ 묘수기술로도 못 이겨요.]

“하아…”

히카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아카리가 뭐라고 쫑알거렸지만, 히카루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카리는 결국 히카루를 포기하고 중간에 다른 길로 가버렸다. 히카루는 마치 본능적으로 발이 움직이기라도 하는 듯 무의식을 담고 걸어가서 기원에 도착하고 말았다. 기원의 간판을 보는 순간, 히카루는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아키라가 눈깔까지 오그라들어 가며(그, 그건… 사이가…) 처절하게 싸우던 그 모습을. 왜 그랬을까! [아키라는 왜 그깟 바둑에 필사적으로 목을 매야 했을까! 어째서! 왜! 그렇게도 내 옷을 벗기고 싶었을까?] 에?

“이 자식! 남의 생각에 꼽싸리끼지 마!”

[그러니까 고민 때려 치고 빨리 바둑두러 가요!]

“싫어.”

[인색해요!]

“인색하다고?”

[여기까지 와 놓고선!]

“지금 그럴 기분이 아냐.”

히카루가 고개를 저으며 기원에게서 몸을 돌리는 순간, 뒤쪽에서 오가타가 착지했다. 아마도 기원창문을 통해 뛰어내린 듯 싶었다. 오가타는 히카루를 잡아채며 다짜고짜 기원으로 끌고갔다.

“따라와!”

“왜 이래요!”

히카루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어른인 오가타의 힘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히카루는 오가타의 우악스런 힘에 이끌려 기원까지 끌려가고 말았다. 오가타는 기원 안에 들어가자마자 중앙의 누군가에게 고함쳤다.

“도우야 선생님! 그 아이를 잡아왔습니다!”

“자, 잡았다고? 내가 뭘 어쨌다고…”

놀라서 고함치던 히카루가 멍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도우야 명인이었다. 도우야 고요는 침묵하는 바다처럼 오가타의 고함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대국을 지도하는 한수를 놓았다.

탁.

“그 아이가 아키라를 이겼다는 건가?”

탁.

“그것도 두 번이나… 아키라를…”

갑자기 도우야 명인의 싸늘한 눈이 히카루를 향했다. 숨이 멎을 정도의 위압감! 폭풍처럼 몰아치는 위압적인 기운이 히카루의 전신을 휘감았다. 히카루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물러서며 긴장했다. 하지만 사이는 달랐다. 명인만이 가질 수 있는 패기에 휘말리자, 사이 또한 타오르는 눈빛으로 도우야를 응시했다. 사람을 보면서 나체를 상상하는 건 사이에겐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히카루는 더 큰 불안감을 느꼈다.

“네 실력을 알고싶다.”

도우야 명인이 빈자리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또 한 번 차가운 위압감이 히카루의 전신으로 몰아쳤다. 동시에 사이도 들끓는 열기의 눈동자를 빛내며 표정을 굳혔다.

“아, 아니… 전…”

히카루가 주춤 물러서며 손을 휘젓는 순간,

[히카루!]

활화산이 폭발하듯 뜨거운 위압감이 사이에게서 흘러나왔다.

[그와 겨루십시오!]

“…….”

[‘혼인보 슈우사쿠’였던 나에게 도전했던 호적수…]

“어어…”

[이 자의 기백은 그와 똑같다!]

“난… 싫어.”

히카루가 고개를 저으며 또 한 발 물러서는 순간, 사이의 목소리가 다른 의미로 뜨거워졌다.

[귀에 혀… 들어갑니다?]

히카루는 잽싸게 앉았다. ㅡㅡ;;

“세 점 깐다. 내 아들도 그랬다.”

“…….”

히카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3개의 화점 위에 돌을 놓았다. 그리고 조이는 가슴을 억제하기 위하여 조심스레 숨을 들이켰다.

따악!

제대로 숨을 들이켜기도 전에 도우야 명인의 날카로운 일격이 바둑판을 강타했다. 히카루의 가슴이 무저갱을 뚫고 맨틀을 지나 핵 관통 다시 맨틀 뒷동네 무저갱에 뜻밖의 심해를 거쳐서 칠레 산간지방을 뚫고 대기권으로 날아갈 만큼 철렁 내려앉았다. 단지 백돌을 바둑판에 올려놓았을 뿐인데도 엄청난 위압감이 전해지고 있었다. 히카루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사이가 외쳤다.

[5의 3 공격!]

“…….”

히카루는 사이가 말한 지점으로 조심스레 돌을 놓았다. 자신이 돌을 놓는 손을 보니 조금 전 도우야 명인이 내려놓을 때와 비교하여 단연코 쪽팔렸다. 히카루가 막 돌을 내려놓자마자 도우야 명인은 백돌을 들었다.

따아악!

“아키라한테는 2살 때부터 바둑을 가르쳤다.”

도우야 명인의 손가락 끝이 빛나는 것만 같았다. 한 수 한 수마다… 어느 순간부터 히카루는 사이가 지시해서가 아니라 도우야 명인이 돌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기 위해 돌을 내려놓고 있었다.

딱!

“그렇기 때문에… 그런 아키라를 이긴 아이가 있다는 걸…”

손가락이 돌을 집는다. 손가락이 휘어진다!

따악!

“나로선 믿을 수 없다.”

손가락이… 바둑판에 돌을 놓는다! 빛나는 손가락! 빛나는 손!

따아아아!

도우야 명인의 백돌이 바둑판의 일점을 맹렬하게 후려쳤다.

우주이상류(宇宙理想類) 천추행마(天樞行馬)!

사이가 흠칫하며 바둑판의 형세를 살피다가 급히 말했다.

[저자는 강합니다, 히카루! 일단 방어에 들어가야겠어요. 10의 16 화점에 두세요.]

나도… 히카루의 손이 통에 들어있는 흑돌을 매만졌다. 나도… 나도!

[히카루! 10의 16!]

‘나도 저렇게 둔다면!’

히카루는 흑돌을 쥔 손을 번쩍 치켜들며 힘차게 바둑판으로 날렸다.

콰콰콰쾅!

도우야 명인과 사이의 눈이 경악으로 치켜떠졌다. 히카루가 돌을 놓은 곳은 사이가 말했던 10의 16지점이 아니었다. 뜻밖의 곳! 그러나 그 한 수로 인하여 흑돌은 뜻밖의 형세를 만들었다.

폭렬지옥류(爆裂地獄類) 염라행마(閻羅行馬)!

사이, 도우야 명인! 3명 모두가 바둑판에 박혀서 뿌연 연기를 뿜어내는 흑돌을 응시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계가

[연재] [호스트 바둑왕] 5국. 칼을 가는 아키라

제5국 칼을 가는 아키라

덜컹.

전동차가 몇 번씩 좌우로 흔들렸지만, 아키라는 자신의 몸이 기울어지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히카루는 조심스레 아키라의 눈치를 살폈다. 아키라는 쉴 새 없이 중얼거리며 곧 시작하게될 대국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히카루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사이.’

히카루의 속삭임에 사이가 살짝 다가와 말했다.

[웃흥♡]

‘게에엑! 하지 마!’

[왜 불렀어요, 히카루?]

‘정말로 이길 수 있겠어? 너 지난번에 저 애하고 대국해서 돌만 열심히 따먹었지, 결과는 두 집 차이로 겨우 이겼었잖아.’

사이가 힐끗 아키라를 돌아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건 유도바둑이었어요. 어린아이를 상대로 본격적으로 승부를 벌일 수는 없죠.]

‘유도바둑?’

[유도바둑이란 상대를 바른 호스트로 이끌어주는 게 목적입니다. 말은 필요 없습니다. 한 수 한 수가 가르치는 겁니다. 또한 승패에 얽매인 어리석은 바둑은 결코 두지 않습니다! 그 때 그 때 피를 토하는 모습만 봐도 만족하니까요.]

히카루는 안도하며 아키라를 주시했다.

‘흠… 그렇다면 일단 저 녀석보다는 강하다는 얘기지?’

[아까 말했잖아요, 히카루. 저에게 다 방법이 있다고.]

‘뭐… 하긴…’

히카루가 빙긋 웃으며 생각했다.

‘나하고 똑같은 6학년의 평범한 아이니까 사이가 이기는 게 당연하지.’

순간, 사이의 싸늘한 음성이 히카루의 머릿속을 자극했다.

[지금 뭐라고 생각하셨나요, 히카루! 평범한 아이라고요?]

“응?”

[당치않은 소리입니다. 저 아이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랍니다!]

“뭐?!”

놀라 외치는 히카루 덕분에, 아키라는 머릿속 계산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키라의 싸늘한 눈빛이 자신에게 고정되자, 히카루의 가슴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사이가 말을 잇는 동안 아키라의 매서운 눈매는 히카루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저 아이는 미숙하지만 아주 빛나는 수를 두고 있습니다. 상당한 고수들도 저 아이의 옷을 벗기기는 어려울 겁니다.]

적의를 드러내는 아키라의 몸이 갑자기 나체로 보였다. 히카루는 눈을 질끈 감으며 중얼거렸다.

“바둑 쪽으로만 집중시켜줘, 사이.”

[아무튼… 저 아이의 한 수에 제 자신도 많은 반성을 했답니다. 저 아이가 성장한다면…]

“성장한다면?”

[파티마가 될지… 서태웅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바둑 쪽으로만 집중…”

히카루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쥐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사이의 말을 듣지 않아도 도우야 아키라에게서 느껴지는 서늘한 한기가 보통의 평범한 어린애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키라의 주변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선 것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마음 속에 갈고있는 칼날이 당장이라도 히카루의 가슴을 찌를 것만 같았다. 히카루는 한숨을 쉬며 전동차 창 밖으로 지나치는 풍경을 주시했다. 행여나 저번처럼 피만 토하게 하고 결과는 패배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지독한 욕을 뱉은 녀석에게 패배한다는 것은 히카루에게 있어서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꼭 이겨야 해, 사이.’

[웃흥♡]

“거기다 입김 좀 불지 마!”

기원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의 손님들이 기겁하며 모여들었다. 모두가 아키라와 히카루의 대국을 기억하는 어른들이었다. 히카루는 주변의 소란에 부담을 느끼며 어깨를 움츠렸지만, 아키라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지금의 소란이 당연하다는 듯 태연한 자세로 바둑판을 앞에 두고 있었다.

‘이 녀석은 주변을 의식하지 않나 봐. 역시 보통 아이가 아냐, 사이!’

[아까 내가 말했잖아요!]

‘정말 이길 수 있어?’

[방법이 있다고 했잖아요!]

‘좋아! 너만 믿을게, 사이.’

히카루도 침착을 되찾고 바둑판을 사이에 둔 채 아키라와 마주했다. 아키라가 통에 든 백돌을 쥐며 말했다.

“맞두면 되겠지? 흑은 누가 잡을까?”

“잡는다고?”

“홀짝해서 이기는 사람이 흑이야. 자!”

아키라가 백돌을 가득 쥔 손을 내밀었다. 히카루는 잠시 아키라의 손을 응시하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달각. 틱. 티틱.

아키라의 손에서 바둑알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럴 때마다 히카루의 귀가 조금씩 꿈틀거렸다. 히카루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짝!”

순간 아키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주먹을 쥔 손에서 중지를 가볍게 퉁기자, 손아귀에 쥐어진 바둑알 중 하나가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아키라는 바둑알들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세어볼까? 하나, 둘… 컥!”

12개의 조각. 소매로 돌을 퉁길 때 부딪쳤던 녀석이 반으로 쪼개졌던 것이다. 아키라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 네가 흑이야. 덤은 다섯집 반이다.”

“덤?”

[덤?]

“먼저 두는 흑이 유리하니까 백이 처음부터 다섯 집 반을 가지고 시작하는 거지. 다시 말해서 마지막에 50집 대 50집으로 비기면, 백이 다섯 집 반을 이긴다는 얘기야.”

[커헙!]

입가에 선혈을 흘리는 사이를 보자, 히카루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넌… 몰랐냐, 사이?’

[혼인보 슈우사쿠 시절엔 그런 규칙이 없었거든요.]

‘흑을 갖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니?’

히카루가 한숨을 쉬며 질문하는 순간 사이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전 흑을 갖고서 못 벗긴 사람이 없습니다!]

‘잘났다. 지면 네가 벗으렴.’

히카루의 불안감이 더욱 가중되었을 때, 갑작스레 아키라가 외쳤다.

“그럼… 부탁합니다!”

정색을 하는 아키라의 모습에 당황한 히카루도 조심스레 “부탁합니다.”라고 답했다. 히카루는 통에서 흑돌을 하나 꺼내며 사이의 눈치를 살폈다. 사이는 부채를 힘껏 뻗으며 말했다.

[오른쪽 위 소목!]

주위의 어른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아키라는 바둑판 위에 놓인 한 개의 흑돌을 오랫동안 주시하다가 천천히 백돌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남아있는 나머지 하나의 소목 위에 올려놓았다. 사이는 아키라의 수에서 날카로운 칼날의 예리함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다섯 집 반의 부담이라… 이 아이를 상대로 실력이 비슷한 사람끼리 겨룬다면 꽤나 부담스럽겠군. 한수한수 움직임에 신경전을 벌이지 않으면…]

순간, 사이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얼룩(--;;)에 봉인된 채 보내왔던 오랜 시간들. 이제 사이는 더 이상 바둑을 두지 못하여 괴로워할 일이 없는 것이다. 최선의 한 꺼풀 벗기기… 이렇게 기쁠 수가… 장수하렴, 히카루.

딱!

아키라의 일수! 사이는 가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칼날을 느끼며 흠칫했다. 형세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사이는 빙긋 웃었다. 그리고 힘껏 부채를 뻗으며 외쳤다.

[15에 16! 어택!]

따악!

히카루의 일수가 매섭게 펼쳐졌다. 14에 15. 사이가 발광하며 히카루의 머리통을 부채로 두들겼다.

[15에 16이라고요! 거긴 14에 15잖아요!]

“이 칸들을 언제 다 세! 대충 놔도 상관없는 것 아냐?!”

[바둑에 대충이 어디 있어요? 거긴 오목으로도 쓸모 없는 자리라고요!]

따학!

설전을 벌이던 사이와 히카루는 청명하고도 묵직한 바둑판의 외침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아키라가 맹공격을 노골적으로 가한 것이다. 사이는 힘껏 부채를 뻗으며 히카루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한 수를 지시했다.

[X좌표 하나 하나 하나 하나 하나 하나 하나 하나 하나 하나 하나 하나 하나 하나 하나 하나! 그리고 Y좌표 하나 하나…]

“크아악! 그래! 내가 잘못했으니까 처음 패턴으로 불러!”

[16에 16!]

드디어 둘의 불꽃튀는 접전이 벌어졌다. 초반의 형세는 의외로 히카루가 쉽게 잡았다. 그러나 중반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아키라의 힘이 점점 더 흑돌을 압박하고 있었다. 10개의 돌을 한꺼번에 따먹어도 아키라는 피를 토하거나 흥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까지 지으며 형세의 유리함에 대한 확신의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히카루는 아키라의 미소를 보며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 사이? 지금 우리가 이기고 있는 것 맞아?’

[4집 반을 지고 있어요. 이대로 가면 우리가 져요.]

‘헉! 그럼 어떻게 해?!’

파랗게 질린 히카루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사이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한숨을 뱉었다.

[어려워요. 저렇게 칼을 가는 아키라의 수라면 만만치 않을 거예요.]

‘말도 안 돼, 사이! 분명히 아까는 방법이 있다고 했잖아!’

[훗!]

사이가 빙긋 웃었다.

[마침 저도 그 방법을 쓰고있는 중이에요.]

그 순간 아키라가 비명을 질렀다.

“헉?! 손발이 오그라든다!”

히카루는 아키라가 자신의 오그라드는 손발을 보며 파랗게 질리는 것을 응시한 채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저런 종류의 방법이란 거였어?”

[에? 방법이라는 게 저거말고 또 있어요?]

“바둑과 관련이 있는 필살기를 쓰자는 얘기야. 신의 한 수 같은 거 없어?”

[그런 게 있으면 벌써 성불했죠.]

“아무튼…”

“크헉! 얼굴도 오그라든다!”

“저 방법 좀 풀어! 쟤를 보면 바이오 해저드 패러디같아!”

사이가 방법을 풀기는 했어도, 아키라는 이미 강한 압박에 시달린 상태라서 소피티아처럼 멍한 지점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히카루가 조심스레 흑돌을 놓자, 아키라는 비로소 바둑판으로 시선을 떨구고 고구마 장사가 힘들다며 눈물을 흘렸다. 히카루는 사이를 향해 이를 갈았다.

“정신도 제대로 돌려놔.”

[그건 저도 못해요. 저 아이의 의지력에 달려있죠. 걍 저렇게 정신 없을 때 덮칠까요?]

“제에발!”

히카루가 벌떡 일어서며 고함을 지를 때였다.

따악!

바둑판을 때리는 매서운 소음이 히카루와 사이를 놀라게 했다. 도우야 아키라가 싸늘한 눈으로 히카루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키라의 입술 틈으로 한줄기 피가 흘렀는데, 그것은 정신을 차리기 위하여 스스로의 입술을 깨물었기 때문이었다. 아키라가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안자, 히카루. 꼐속 두자.”

[헉! 위기의 순간에서 정신을 차리더니 레벨이 올랐어요! 지금의 아키라는 졸라 짱 세요!]

“이, 이런…”

히카루는 자리에 앉으며 당황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키라의 눈동자가 투명해지며 날카로운 한기를 폭풍처럼 쏘아댔다. 바둑판을 향하는 사이의 부채도 조금씩 떨고 있었다.

[유… 육에 10.]

탁.

따항!

[쿨럭. 파… 팔에 10.]

톡…

따하황!

[커러럽! 구… 구… 구에…]

파랗게 질린 사이가 부채조차 주체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자, 히카루는 들고있던 흑돌을 통안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사이를 향해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이…”

[흑흑흑. 예… 에. 히카루…]

“방법 써.”

순간 사이의 떨림이 멎었다. 사이는 부채를 턱 아래 가져가며 빙긋 미소를 짓더니 바둑판을 거만하게 깔아보며 명령했다.

[아무데나 두세요, 히카루.]

“에? 그래도 돼?”

히카루가 멍한 얼굴로 사이를 바라보면서 바둑판 위에 흑돌을 올려놓았다. 현재의 국면과 전혀 상관이 없는 엉뚱한 수였다. 주변의 모든 어른들도 히카루의 수가 패착이라며 혀를 찼다. 그러나 아키라는 눈을 부릅뜬 채 10분이 지나도록 히카루의 수를 주시하고서야 비로소 패착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한 순간의 방심도 용납할 수 없다는 자신의 의지때문이었다. 아키라는 자신있게 백돌을 쥔 손을 치켜들며 외쳤다.

“끝났어, 히카루!”

휘이이이익!

아키라의 손끝이 바둑판을 향하여 매섭게 날아갔다. 그 순간 아키라의 손가락이 오른쪽으로 오그라들었다.

“…….”

백돌은 아키라가 놓으려고 했던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2칸 이동한 지점에 정확히 떨어져 있었다. 어른들이 보건대 히카루의 수와 비교하여 만만치 않은 허접수였다. 사이가 절도있는 동작으로 부채를 촥 펼치며 미소를 흘렸다.

[방금 그 돌 옆에 빈 곳 있죠? 거기에 하나 톡 떨구세요. 그리고 중요한 건…]

“중요한 건?”

[제가 늘 하는 ‘웃흥♡’ 기억하시죠? 그 톤에 맞춰서 ‘단수♡’하시는 거 잊으시면 안돼요.]

“단수♡”

정상적으로 돌아온 손을 매만지던 아키라가 급히 ‘꿀꺽!’하며 뭔가를 삼켰다. 거의 장악했던 우상변이 지금의 일격으로 인하여 전세가 뒤집혀진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대마를 살리는 것에 더 고민을 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키라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열심히 바둑판의 형세를 체크했다. 무려 20분이 지나서야 아키라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유일한 활로를 찾았기 때문이다. 다시 전세를 자신에게로 돌릴 수 있을만큼 중요한 한 수가! 아키라는 백돌을 쥔 손을 바둑판으로 뻗었다. 그리고 외쳤다.

“또 오그라드냐!”

아까는 갑작스런 방법에 당황하여 일수불퇴의 상황에 직면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키라는 왼쪽으로 오그라드는 손가락에 최대한 힘을 주며 자신이 노린 지점으로 백돌이 향하도록 유도했다. 온몸에 열기가 흐르며 끊임없이 땀방울이 솟구쳤고, 팔에 힘을 줄 때마다 찢어질 듯한 고통이 전신을 강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키라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지점에 백돌을 놓는데 성공했다.

툭.

“어떠냐, 히카루! 이제는 정말로 끝이다!”

아키라가 호탕하게 웃으며 히카루를 노려봤다. 하지만 히카루의 표정에는 절망의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주변의 어른들이 떠드는 소리.

“저런 패착이 있나, 끌끌끌…”

“죽여달라고 애원을 하는 구만. 아키라 선생님 맞아?”

“왜, 왜들 그러지?”

아키라는 뒤늦게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고 바둑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자신이 놓은 백돌은 최고의 지점에 있었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아키라가 고민하고 있을 때, 대국을 보기 위해 카운터를 비웠던 이치카와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키라… 너… 눈깔이 오그라들었어.”

“끄허헉?!”

비켜비켜! 목구멍에 걸쳐진 성대를 향해 피분수가 필사적으로 달려가며 고함을 질렀다. 손바닥에 힘을 줘서 입을 막기는 했지만, 손가락 틈새로 피식 파칙 찌식 튀어나가는 핏줄기들은 바둑판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사이가 부채를 끌어안으며 감동에 겨워 중얼거렸다.

[봐요, 히카루.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

“전혀 그렇지 않아. 다음 수나 말해.”

사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부채를 뻗었다.

[여기에 놓으시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 안에 있는 돌을 가져가세요. 그리고 다 가져가셨을 때 ‘훗!’하고 한 번만 웃어주세요. 아아, 기대된다.]

15개의 돌을 모두 따먹은 히카루는 사이가 시킨대로 했다. 가벼운 미소.

“훗!”

“푸헤에!!”

순식간에 기원은 피바다가 됐다. 아키라는 백돌을 쥔 손을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중앙의 대마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을 향해 내밀었다. 돌을 놓기 전에 아키라는 이치카와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호, 혹시… 지금도 제 눈이 오그라들었어요?”

“아냐. 지금은 멀쩡해.”

이치카와의 대답을 듣고 안심한 아키라는 정확한 지점에 백돌을 놓았다. 그 때 이치카와의 옆에 있던 히로세씨가 말했다.

“아니, 이치카와양! 언제 그렇게 눈알이 오그라들었어? 둘 다 왜 이래?”

“푸아아아아아압!”

기원의 창문이 깨지며 도로를 향해 피폭포가 쏟아졌다. 위층의 헌혈룸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온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계가

[연재] [호스트 바둑왕] 4국. 용서할 수 없는 폭언

제4국 용서할 수 없는 폭언

※ 새로운 변화를 꾀하기 위하여 이번 회의 등장인물은 모두 가명으로 했습니다. 모든 인물들이 다 가명으로 되어있으니 알아서 감지하시기 바랍니다.

히루세는 오늘도 기원을 향해 걷고 있었다. 하늘은 맑고 보도블록엔 껌딱지 하나 없이 깔끔했으며, 뛰노는 어린아이들은 여전히 군침이 돌았다. 히루세는 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2개의 간판이 보였다. 일직선으로 흘러내리는 피와 함께 헌혈룸임을 알리는 간판이 있었고, 그 아래 기원(돈 내고 바둑을 두는 곳)이 있었다. 당연히 히루세는 기원을 선택했다.

“아키랑 선생님 계셔?”

인사대신 던진 히루세의 말에 이치카라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히루세는 짐작한 듯 반짝이는 머리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이치카라가 아키랑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또 복기하고 있어요.”

“지난주, 동년배 남자아이에게 두 집 차이로 무너졌던 거 말이지? 복기가 재미있대?”

“아닐 걸요? 배경 스크린톤이 SSE-409번이잖아요. 저기만 저렇게 어둡다고요. 저거 봐요. 방금 이마에 철십자 마크 솟았던 것 보셨죠? 저러다가 가끔 피도 토해요.”

“그래? 그래서 저렇게 마스크를 하고 있는 거야?”

“마스크 아니에요. 제가 빌려줬어요. 아직 어려서 많이 놀랐을 거예요.”

얼굴을 붉히는 이치카라를 향해 히루세가 으르렁거렸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성희롱이야. 당장 치우지 못해? 여자만의 물건을 어디다 갖다 붙이는 거야?”

히루세는 이치카라가 아키랑의 입에서 거시기를 떼어내는 것을 보며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쉬었다. 1주일 전부터 도우야 아키랑은 아무하고도 대국을 하지 않은 채, 시카루와의 대국만을 수도 없이 복기 할 뿐이었다. 히루세는 아키랑과의 대국을 포기하고 귀퉁이의 바둑판으로 쓸쓸히 걸어갔다.

‘이 한수도… 이 한수도…’

아키랑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바둑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뽀록이다! 이게 혹시라도 그 아이의 실력이라면…’

곧 아키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아이의 실력이 그 정도일 리가 없어!’

“신도우 시카루…”

아랫입술을 문 아키랑에게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을 때였다.

“어린이 사마, 어린이 사마. 꼭 한 번 들러 주십시오.”

“에?”

아키랑은 자신의 얼굴 앞에 날아든 찌라시에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심각한 패션이 아키랑에게 빙긋 웃으며 찌라시를 흔들고 있었다. 찌라시를 본 아키랑은 바둑알을 쥔 손이 그려진 중앙에 시선을 고정하며 잠시 침묵했다. 손인지 구데기 기어가는 야구공인지 알 수 없는 그림. 세상에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다카하시 오바토와 아키랑의 아버지인 도우야 구요뿐이었다. 아키랑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래! 아버지에게 물어보자!”

한편 시카루는 등짝을 어루만지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시가 옆에서 오도방정을 떨며 서럽게 울어댔다.

[시카루, 바보바보바보바보바보!!]

“시끄럿! 한 번만 말해도 다 알아들어!”

[훌쩍! 어린이와의 대국을 즐겨보려 했을 뿐인데…]

“그걸 누가 믿어?! 이게 다 네가 쓸 데 없는 소리를 했기 때문이야!”

[너무해요, 시카루! 손해본 건 누군데요? 안되겠어요. 시카루 고추라도 보여줘요!]

“죽을래, 너?! 자꾸 그러면 바둑 따위 안 둘 거야!”

시카루가 허공의 사시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주위의 시선을 받을 때였다.

“신도우…, 신도우 시까루!”(까? 뭐… 가명인데 아무렴 어때. --;;)

갑작스런 외침에 놀란 시까루(이걸로 정착됐군. --;;)가 고개를 돌리니 도우야 아키랑이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시까루는 멍한 얼굴로 아키랑을 응시했다.

“도우양…”(--??)

시까루는 반가운 얼굴로 도우양에게 걸었다.

“도우양이구나! 웬일이니?”

아키랑은 주춤 물러서며 반문했다.

“너, 너야말로 어쩐 일이지? 설마 바둑대회에 갔었던 거야?”

“나? 난 그냥 놀러갔었어.”

도우양은 잠시 시카루(하나만 해!)의 얼굴을 응시했다. 시카루 또한 도우양을 멍하게 응시하며 멋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곧 시카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봤더니 굉장하더라. 그런 경험은 처음이야. 나보다 어린애들이 엄청 많이 모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신중하더라고.”

도우양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을 능가하는 실력자의 입에서 그런 뜻밖의 말이 나온 것은 의외였다. 시카루가 말을 이었다.

“진짜 놀랐어. 감동도 약간 받았고.”

“감동?”

도우야가 당황하며 물었다.

“너… 넌 진지하게 바둑을 둬본 적이 없니?”

“진지?”

시카루는 미친놈이라도 보듯 도우양을 응시하며 코웃음을 쳤다. 도우양은 좀 더 곤혹한 얼굴이 되어 시카루의 손을 잡아챘다.

“손 좀 보여줄래?”

“손?”

시카루의 손은 손톱조차 닳지 않은 초보자의 그것이었다. 도우양은 더욱 난감해졌다. 시카루는 쌩초보였던 것이다. 내가 이런 놈에게 깨지다니! 혹시나 싶어서 손가락을 입속에 넣어 혀끝으로 얼마나 거친가를 감상했지만, 여전히 쌩초보의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질 뿐이었다.

“왜, 왜 이러니!”

시카루가 기겁하며 도우양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그리고 곁에서 [나도 시카루의 손가락이 되고싶어요…]며 중얼거리는 사시에게 발길질을 했다. 그 때 도우양이 말했다.

“넌… 프로기사 되고싶니?”

“프, 프로?”

시카루는 갑작스런 말에 충격을 먹은 듯 한동안 입을 벌린 채 말을 못했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풉!”하고 헛바람을 뿜으며 미친듯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 내가 프로?! 진심으로 말한 거야? 프로기사따위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어! 넌 정말 예상외로 재미있는 친구구나?!”

“3천 8백만 엔.”

시카루의 웃음이 멈췄다. 도우양이 말을 이었다.

“명인전 타이틀의 상금이지. 그리고 기성전이라면 3천 3백만 엔.”

정확하게 시카루의 맥을 찌르는 말이었다. 시카루는 천문학적인 금액에 당황하며 외쳤다.

“자, 잠깐! 타이틀전이라는 게 몇 개나 있는 거냐? 전부 우승하면 얼마를 받는 거야?”

“모든 대회에서 상금을 받는다고 치면 1억 2천만 엔 정도…”

차르르륵 덜컹. ¥

차르르르… 덜컹! ¥

1억 2천만 엔. 2002년 9월 23일 16시 47분 현재. 고시 시각 16시 33분에 이루어진 4번째 고시회차의 환율로 따진다면 1억 2천만 엔은 한화로 12억 1천 58만 4천원. 출판사 잘못 걸린 작가가 하루 한 회 꾸준하게 연재를 해서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출간해도 딱 101년 만에 벌 수 있는 금액이다. 시카루는 이성을 잃고 사시에게 흥얼거렸다.

“히히히히. 사시? 네 실력이라면 명인전같은 건 우습지?”

[시카루! 돈 때문에 바둑을 두겠다고요?]

“아니, 그게 아니라… 바둑이 진짜 그렇게 돈 잘 버는 건지 몰랐어. ¥♡ 그래서…”

[저질! 시카루 저질!]

“이봐, 사시… 네가 그런 말을 할 입장은 아냐…”

시카루가 불평하며 손을 휘저었다.

“돈 때문이라면 아주… 가끔이라고, 사시.”

그 말을 들은 아키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주 가끔?”

“어? 아니 그냥 프로가 된 후, 간간이 타이틀이나 하나둘 정도 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시카루의 대답에 아키랑은 할 말을 잃었다.

“그냥… 프로가 되어… 간간이 타이틀이나 하나둘 정도 따겠다고…?!”

그러니까… 할 말을 잃었다고 했다, 아키랑… --+

턱.

아키랑은 위협적으로 발을 내밀었다. 시카루가 움찔하며 물러섰지만, 아키랑과의 거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아키랑이 좀 더 가깝게 다가가며 눈을 부릅떴기 때문이다.

“그 말… 프로기사 모두를 모욕하는 말이다.”

“어… 나?”

“넌… 바둑을 좋아하지 않아! 바둑을 두는 사람이 그런 폭언을 할 리가 없어!”

시카루가 당황하며 몸을 기울였다. 시카루는 긴장하며 사시에게 속삭였다.

“사, 사시. 내가 뭐… 잘못 말했나?”

[당연하죠! 바둑을 그렇게 우습게 보시면 안돼요, 시카루! 자신의 정조와 바꿀 만큼 바둑은 위대하다고요!]

“전혀 잘못 말한 게 아니었군…”

시카루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을 때 아키랑이 고함쳤다.

“그냥 프로나 돼 보겠다고? 프로기사의 존엄성과 명예를 알기나 하니!? 인내, 노력, 고통, 좌절…! 절망까지 뛰어넘어도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바둑인들이 대부분이야!! 아버지 곁에서 그런 기사들을 수없이 봐왔었지!! 그런데 넌…”

아키랑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왜 내가 이런 녀석 따위에게 진 거지? 분하다, 분해!

“나도 그걸 각오하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왔다!! 어려서부터 매일매일, 몇 시간씩 바둑을 두면서 자랐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운명처럼 바둑을 뒀다!!”

“근데 그렇게 허접이야?”

“쿠릅!”

아키랑은 입술 틈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피를 손바닥으로 급히 막으며 허리를 굽혔다. 씹탱이! 그래! 그 때 진 건, 내가 방심했기 때문이야. 초보자라 생각하고 깔 본 내가 패배를 자초한 거야. 아키랑은 피가 고인 손을 불끈 움켜쥐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금부터… 우리… 다시 한 번 승부를 가르자.”

“뭐?”

“난 프로가 될 거다.”

“…….”

“언젠가 네가 쉽게 프로가 된 후, 쉽게 타이틀을 쟁취하려고 한다면 지금 나한테 진다는 건 말이 안되지!! 피하지 말고 지금 겨루자!!!”

힘껏 손을 내미는 아키랑의 눈빛은 도전적으로 불타고 있었다. 시카루는 당황감을 못 이겨 주춤 물러섰다.

“싫어.”

“싫다니! 그런 폭언을 해놓고도 너무하지 않아?!”

“너무한 건 너야! 이번 회의 네 대사들을 차분하게 다시 읽어봐! 아키랑, 너의 대사는 거의 네타 수준이라고! 이 정도면 비뢰도나 묵향을 타자로 쳐서 인터넷에 올리는 거와 뭐가 달라?!”

“그렇다고 지금까지 쓴 걸 다시 편집할 수는 없는 일이야! 겨루자, 시카루!”

“싫어!”

“겨루자니까!”

“싫다니까!”

시카루는 야멸치게 몸을 돌리며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키랑의 분노에 어린 눈이 시카루의 뒷모습을 매섭게 노려봤다. 아키랑은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열며 싸늘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도망가지 마라, 오노.”

뚝. 시카루의 뒷목 안에서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시카루는 세계 최고의 메카닉 선행자라도 된 것처럼 버벅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저기… 방금 내 이름이 뭐라고?”

“도망가지 말라고 했다. 이회창의 탈을 쓴 부시야!”

풉! 퍼래랩! 재빨리 손을 들어 입을 막기는 했지만, 피분수가 하늘을 향해 뻗어나갔다. 시카루는 비틀거리다가 보도블록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저었다. 산만한 세상이 이리저리 휘어지고 있었다.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툭. 투둑! 투둑!

쏴아아아아!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은 금세 먹구름으로 뒤덮였고, 보도블록엔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시카루는 보도블록의 한 귀퉁이에 고여있는 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었다. 조지 부시가 씨익 웃으며 이회창의 인피면구를 뜯고 있었다. 시카루는 입가에 흐르는 선혈을 닦으며 매서운 눈으로 아키랑을 노려봤다. 그리고 사시에게 물었다.

“사시… 저 자식이랑 또 한 판 해도 이길 수 있어?”

[물론입니다. 제게 확실한 방법이 있으니까요.]

사시 또한 아키랑을 노려보며 몸을 떨고 있었다. 시카루는 아키랑이 내민 손으로 자신의 손을 뻗었다.

“좋아. 한 판 뜨자. 어떻게 나를 그따위 것들과… 절대… 네 폭언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아키랑!”

“훗, 김성모.”

“커헙! 쿨르억!”

손가락 틈으로 쿨럭쿨럭 쏟아지는 피를 무시한 채, 시카루는 아키랑의 손에 도움을 받고 몸을 일으켰다.

쏴아아아아아!

둘은 달렸다. 앞서 달리는 아키랑의 눈에 불꽃이 튀고 있었다. 그래. 내가… 내가 신의 한수를 추구하며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면… 여기서 질 수는 없어!! 세찬 빗줄기가 얼굴을 후려쳤지만, 아키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천천히 가!”

시카루가 소리쳤지만, 아키랑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방심? 훗! 신도우 시카루는 초보자가 아니다. 방심하지 않는다!! 그의 특징이라면 특이하게도 오래된 정석을 쓴다는 것. 슈우사쿠의 행마같은! 그 슈우사쿠의 수는 현대와는 규칙이 다른 옛날, 공제없던 시대의 바둑이었으니까 선수가 ‘좋은 수’였던 것이다!! 그거다!! 거기에 이 녀석을 무너뜨릴 수 있는 해답이 있어!!

“너… 또 네타야. 평소에 느낌표 두 개나 찍고 그러던 애, 아니었잖아? 이러면 원본을 누가 사겠냐?”

“생각같은 건 읽지 마!”

아키랑은 기원을 향해 달리면서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것은 시카루도 마찬가지였다. 용서할 수 없는 폭언을 던진 아키랑의 입에서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아아, 시카루. 사시는 행복해요♡]

“시꾸랏!”

시카루에게 있어서 운명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기 시작했을 지도… 이봐, 그 길이냐? 그 길로 가는 것이냐, 시카루!

계가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번 회의 등장인물은 모두 가명으로 했습니다. 행여나 눈에 익은 이름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가명으로 전환한 이름임을 먼저 숙지하시기 바랍니다.

[연재] [호스트 바둑왕] 3국. 사활의 급소

제3국 사활의 급소

“어린이 사마, 어린이 사마. 꼭 한 번 들러 주십시오.”

“예?”

히카루는 머리를 온통 금색 무쓰로 떡칠하고 같잖은 몸빼양복에 마녀 신발짝같은 구두를 신은 녀석이 내민 찌라시를 받았다. 히카루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것을 보지도 않고 버리려고 했다.

[히카루, 안돼요!]

“응? 악! 하지마!”

사이가 히카루의 귓불을 살포시 무는 동안, 히카루는 자신이 구겼던 찌라시를 펼쳐 재빨리 읽었다. 며칠 간의 경험에 의하면 이런 경우 사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을 때, 혀가 들어온다.

“어린이… 바둑대회?”

[가요, 가요! 히카루! 어서요!]

사이가 폴짝폴짝 뛰며 즐거워할 때, 히카루는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방향을 돌렸다. 며칠 전 히카루는 링을 보며 울었다. ‘차라리 쟤가 나’라고 중얼거리며.


제19회 어린이 바둑대회.

“우와.”

그곳에 수많은 어린이들과 학부모들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히카루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며 그들의 진지함을 감상했다. 아이들은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바둑판에 열중했는데, 학부형들은 잔뜩 긴장한 채 자식들의 한 수 한 수에 침을 꿀꺽 삼켰다. 바둑에 일가견이 있는 학부형은 입술 사이로 ‘거기다 두면 먹히지! 복날인데 잡혀볼래?’라며 불평하기도 했다. 히카루는 바둑을 두는 아이들의 무리로 걷기 시작했다.

“사이… 대단하다.”

사이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신나요! 어린아이들이 많이 있어요. 천년 전 바둑을 향한 내 열정도 지금 여기 있는 아이들의 뜨거운 열기와 똑같았어요!]

“너가 그런 말을 해 봤자 신빙성이 없어.” 히카루가 불만스런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사이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나에게 가르쳐 주는군요. 천년 후 미래 바둑의 열기도 지금과 똑같을 거라고…]

“그러니까… 사이? 네가 그런 말을 해봤자 진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니까.”

[근데 히카루? 왜 다들 옷을 입고 있죠? 아직 먹힌 돌이 없나봐요.]

“그래. 앞으로는 그 말부터 해. 하아아.”

“아 참. 그 애.” 히카루는 찬찬히 주변을 둘러봤다. “도우야 아키라는 여기에 없나?”

[없어요. 엇!]

“엇? 또 뭐야?”

[저기요, 저기. 까딱 잘못하면 흑이 죽게 됩니다.]

히카루는 사이가 가리킨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곳엔 히카루 또래의 소년이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서로가 신중하게 집중하며 한 수 한 수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히카루는 말없이 그들의 바둑판 옆에 섰다. 사이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히카루도 사방의 길이 막히면 알이 죽는다는 것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히카루가 속삭였다. “우상변의 흑돌 말이지? 17의 3.”

[아녜요. 그곳이 아니라 히카루한테서 좌상변이에요. 1의 2가 급소입니다.]

“왜? 17의 3에 두지 않으면 먹히잖아?”

[거긴 먹혀봤자 1개 짜리에요. 문제는 좌상변의 돌들이죠. 저기는 무려 24집 짜리 대마라고요.]

“에? 저기 흑이 다 먹혀봤자 대여섯 집 밖에 안될 것 같은데?”

[그 흑이 살면 그 집도 없겠죠. 오히려 안쪽의 백이 죽을 거예요. 따낸 돌과 빈 공간과 백이 살아남을 것까지 감안하면 24집이에요.]

“하지만 나는 우상변의 돌이 더 맛있어 보이는걸?”

[원래 맛있어 보이는 게 더 허접해요.] 사이가 불평했다. 하지만 히카루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시끄러. 17의 3이야.”

[1의 2라고요!]

“17의 3!”

[1의 2!]

사이의 목소리야 들릴 리가 없겠지만, 히카루의 목소리는 꽤 메가폰틱했다. 그 앞에서 바둑을 두던 두 소년이 대단히 티꺼운 표정으로 히카루를 주시했다.

탁.

소년은 히카루의 말에 현혹되지 않고 1의 3에 두었다. 그곳의 패는 대단히 위험해서 소년이 선택한 것은 먹여치기의 공격법이었는데, 사이가 말했던 1의 2에 두지 않으면 안쪽의 백이 살아나서 개작살나는 형세였다. 히카루는 물끄러미 그것을 보다가 백돌의 소년이 수를 두기 직전에 말했다.

“아깝다. 여기 두면 안돼! 그 16칸 위라고.”

순간 소년이 움찔하며 “어!”하고 외쳤다. 곧 백돌을 쥔 소년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히카루를 돌아봤고, 히카루도 뒤늦게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깨달았다.

“아!”

히카루가 스스로의 손으로 입을 막으며 당황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너!”

콰악! 아까부터 긴장한 얼굴로 히카루를 주시하던 감독관 모리가 급히 달려와 그를 잡고 외쳤다.

"뭐 하는 짓이냐! 대국 중에 훈수를 두다니! 이게 장난인 줄 아니!"

"아! 미, 미안해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정도로 큰 소란이 벌어졌다. 히카루는 당황해서 눈물까지 찔끔할 정도였는데, 그 옆에서 사이가 "난 몰라요."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모리가 히카루에게 뭐라고 다시 외치려하자, 그 뒤에서 누군가가 낮게 말하며 그의 입을 막았다.

"모리씨, 조용히 처리하세요."

아무도 원문의 대사가 19금이라는 것을 몰랐다. 모리는 오가타의 지시에 따라서 사시미를 꺼내며 말했다.

"오가타 선생님. 이 아이는 저 쪽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살려주세요!" 히카루가 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어 오가타를 봤다. 하지만 오가타는 냉담하게 말했다. "부탁해요."라고.

"으앙!"

히카루가 끌려간 뒤, 오가타는 낮게 한숨을 뱉었다.

"거 참." 그는 히카루가 훈수를 두었던 바둑판을 보며 두 소년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건지 말해줄래?"

흑돌의 소년은 자신이 돌을 놓았던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여기에 놓으니까 저 애가 '아깝다! 바로 16칸 위야.'라고 말했어요."

오가타는 소년이 가리킨 지점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음. 여긴 어려운 형국이군. 프로인 나로서도 손이 멈춰진다.'

그는 시선을 옮겨 히카루가 훈수를 두었다는 17의 3을 보았다.

'뭐 하자는 플레이지? 훈수야 꽁수야?'

오가타는 픽 웃으며 소년에게 물었다.

"넌 이 훈수의 의미를 파악했니?"

"혹시 이 새끼 친구가 아닐까요? 여기다 뒀다면 짤 없이 질 텐데."

오가타는 싸늘한 눈으로 백돌의 소년을 봤다.

"너?"

"아니요!" 백돌의 소년이 급히 대답했다. "뭔가 안면이 있을 것같은 느낌은 들었지만."

오가타가 생각하기에도 히카루의 존재는 그냥 깽판을 치러 왔던 얼뜨기 소년일 것 같았다. 오가타는 확인을 위해서 뒤에 있던 또 다른 감독관에게 물었다.

"그 아이는 참가자입니까?"

"아닙니다!"

대답은 감독관이 하지 않았다. 오가타는 뒤를 돌아봤다. 어인 아주머니께서 오가타를 노려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오가타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지금 대국 중인 소년의 학부형임을 눈치챘다.

"전혀 관계 없는 아이입니다." 아주머니는 말했다. "명찰을 달지 않았거든요."

오가타는 고갯짓으로 그녀에게 계속 말을 하라고 지시했다. 아주머니는 대회장의 문을 가리키며 반 울상의 얼굴로 말했다.

"아까 대회장으로 들어오는 걸 봤어요!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이쪽으로 왔습니다. 우리 애가 있는 곳에 서 있구나했더니만……." 갑자기 아주머니가 눈을 부릅뜨며 흥분했다. "한참 쳐다보고는 '아깝다'라고 말해서 우리아이의 대국을 엉망으로 만들었답니다!"

순간 오가타의 눈에 들어오는 형국이 있었다. 비로소 오가타는 17의 3이지닌 사활의 급소를 눈치챘다. 오가타는 믿을 수 없는 듯 입술을 떨다가 아주머니를 향해 낮게 말했다.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오가타의 눈에 험악한 기운이 맴돌았다.

"한참 쳐다봤다고요?"


"하하하!" 히카루는 식은땀을 흘리며 웃었다.

"웃을 일이 아냐."

모리는 사시미를 내세우며 표정을 굳히고 있었는데 그의 눈빛은……. 그의 눈빛은!

[히카루. 저는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아요.♡]

사이와 같았다. 혼인보 슈우사쿠를 덮쳤다고 말했을 때 지었던 그 눈빛. 그 수많은 공간을 놓아두고, 하필 지하실에 이상한 천막이 있는 이곳까지 데려온 모리의 눈빛! 히카루는 온몸에 소름이 돋고 금세라도 오바이트를 할것만 같았다.

"정말 잘못했어요."

"주절거리는 건……." 모리가 천막 귀퉁이의 작은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만 됐으니까 뒷문을 향해서 돌아서거라."

"싫어요!"

"돌아서라면 돌아서!"

모리가 험악한 눈을 빛내며 히카루의 어깨를 잡아 틀었다. 위험했다. 히카루는 뒷문을 향해 강제적으로 몸이 돌려졌고, 모리는 히카루의 뒤통수를 힘껏 밀어서 허리를 숙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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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조 (청소년유해매체물의 심의기준)

① 청소년보호위원회와 각 심의기관은 제8조의 규정에 의한 심의를 함에 있어서 당해 매체물이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청소년보호매체물로 결정하여야 한다.
3. 성폭력을 포함한 각종 형태의 폭력행사와 약물의 남용을 자극하거나 미화하는 것.
이에 해당하는 짓을 해버린 자는 2연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99.2.5>
아! 이런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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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카루는 모리를 뒤로하고 완전히 허리를 구부린 상태가 되었다. 히카루가 울상이 되어 “왜 이러세요!”라고 외치자, 모리는 충혈된 눈을 하고 찬연히 웃으며 외쳤다.

"가만있어, 이놈아! 네 등짝 좀 보자!"

"네?" 히카루가 반문했다.

"등짝 말이다, 등짝! 난 네 등짝이 보고싶어! 등짝을 보잔 말이다, 등짝!"

"사이! 도와줘!"

[네! 그러니까…… 좌우의 다리를 좀 더 벌리고 마음을 편하게 가져요! 고개를 반쯤 들고서 입을 살짝 벌리면 등짝을 보여주는 느낌이 좀 더 가깝게 다가올 거예요!(너도 등짝이냐? ㅡㅡ;;)]

"그런 쪽으로 도와달라는 게 아냐!"

히카루가 처절하게 고함을 질렀을 때였다.

탁!

히카루는 누군가에 부딪치며 옆으로 쓰러졌다. 모리는 뜻밖의 제3자를 보고 흠칫했다. 그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당황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어. 미, 미안…… 합니다."

"조심하거라."

도우야 명인은 천천히 둘을 지나쳤다. 어째서 천막 뒤쪽에 그가 있었는 지 알 수는 없었으나, 도우야의 뒷모습은 히카루의 등짝에 대한 셋의 관심을 제거하기에 충분했다.

"저 사람은 누구예요?"

히카루가 가슴을 진정시키며 모리에게 물었다.

"도우야 고요. 현재 신의 한 수에 가장 가까운 남자다."

모리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사이의 눈에 이채가 어리며 도우야 명인이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신의 한 수에 가장 가까운 남자!

덜컥.

도우야 명인이 진행사무실의 문을 열었을 때는 그곳 내부의 모두가 바둑판을 주시하고 있었다. 도우야 명인은 문을 닫으며 물었다.

"불상사가 있었다고?"

"아, 도우야 명인."

희끗한 백발의 진행자가 반색하며 말했다.

"이걸 보십시오."

도우야 명인은 그가 가리키는 바둑판을 보았다. 조잡한 수로 점철된 행마가 가득한 판이었다. 도우야 명인은 그것이 어린이 바둑대회의 내용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도우야 명인의 시선을 끄는 곳이 있었다. 우측의 전면에 걸친 행마였는데 제법 묘한 국면으로 되어 있어서 함부로 행마를 결정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물론 그것은 주변의 다른 행마로 보아 우연히 이루어진 것임에 틀림없었다.

"여기 17의 3말입니다. 우리들 프로들로서도 생각하기 어려운 수인데도 어린애가 훈수를 했답니다."

"아이가 초보자라면 그냥 단수를 피하기 위해서 지적한 게 아닐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습니다. 한참을 들여봤으니 좌하변의 경계와 우상변의 위험한 국면을 모두 감안한 듯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한참을 볼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도우야 명인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흑의 생사를 결정짓는 급소를 알아차리다니. 이런 능력을 갖고있는 아이가 내 아들 아키라말고 또 있었군."
그 때 막 모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도우야 명인이 그를 힐긋 보며 "즐거웠는가?"라고 묻자, 모리는 당황하며 "못 봤습니다."라고 뜻 모를 소리를 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알아봤나?"

오가타가 모리를 보며 물었다. 모리는 당황하며 "죄송합니다!"라고 외치곤 고개를 숙였다. 오가타가 실망스러운 얼굴을 하자, 도우야 명인이 픽 웃었다.

"상관없어."

도우야 명인은 바둑통에서 흑돌을 하나 꺼냈다. 부드럽게. 마치 바둑알이 그의 손에 빨려들 것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그 아이가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도우야 명인은 그것을 들고 바둑판을 향해 힘껏 일수를 뻗었다.

따아악!

"조만간에 우리들 프로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가 돌을 놓은 곳은 17의 3.5였다.

"미안하네."

도우야 명인은 얼굴을 감싸쥐고 주저앉은 모리를 향해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돌을 내려놓을 때 17의 4에 있던 흑돌이 비껴 맞으며 퉁겨나가 모리의 콧잔등을 조졌던 것이다.

계가

[연재] [호스트 바둑왕] 2국. 까마득한 높이

제2국 까마득한 높이

슥.

히카루의 할아버지는 실망에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히카루.”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반년 후에 다시 와라.”

바람이 불었다. 히카루는 벙찐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하염없이 뜻밖의 낙엽을 맞으며 고정되어 있었지만, 마음만은 끝없는 열정으로 외치고 있었다. 어이 사이? 우리 사이. 무슨 사이? 니캉 내캉 협잡해서 할아버지 등쳐먹고 100엔 받아 노는 사이? 니가 내를 물로 보고 할아버지 등돌려서 개쪽 주는 깨는 사이? 이봐 사이? 대답해봐이대빵허접한바둑실력으로순진한어린애가슴들뜨게해서절망의나락탱이로열나빠뜨려깰깰대는거지그지그지! 죽일 테야! 너 꽤 한다고 했잖아!

[흑흑흑, 하지만 저 할아버지는 제 취향이 아닌 걸요.]

사이가 흐느끼며 대답했다. 히카루는 불만스런 얼굴로 “내가 지금 옷벗기 바둑을 했냐?”라며 중얼거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집을 나오며 대단히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

“난 이제 바둑 안 둬.”

[으아앙! 다음부턴 꼭 이길게요!]

“조까 안 둬.”

[으아아아앙, 히카루우! 정말 미안해요! 좋은 거 해드릴테니까 화 푸세요오!]

“좋은 거?”

[네!]

“으아아아아아악! 그만 둬!”



다음날 바둑 교실.(뭘 했길래. --;;)

“여기 두는 수가 흑으로는 최상의 수로서…….”

바둑 선생을 맡은 시라카와 7단은 금테 안경이 인상적인 20대 후반의 남자였다. 정장이 대단히 잘 어울리고 친절한 인상이 배여 있는 자였는데, 그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즐거웠다. 그가 막 기보에 흑돌을 놓고서 사활의 맥을 설명하자, 교실 뒷좌석에 앉았던 히카루가 길게 하품을 했다.

“무슨 말을 하는 지 하나도 모르겠어.”

[히카루는 초보니까요.] 사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사이는 바둑교실에 왔다는 것과 시라카와가 선생이라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만족하고 있었다. [지금 하고 있는 건 간단한 묘수풀이에요.]

“그럼 강의는 여기서 마치고 대국에 들어가겠습니다.”

시라카와는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에 가득 담고서 대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등 사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목적지는 히카루였다. 히카루와 같은 어린아이가 바둑을 시작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바둑계의 앞날에 대한 청신호’였고,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네 이름은 신도우 히카루로구나. 바둑, 처음이냐?”

“아.” 히카루는 그가 말을 걸었던 것이 의외인 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예. 전혀 모릅니다.”

“그래, 알았다. 왜 바둑에 흥미를 갖게 되었니?”

시라카와가 빙긋 웃으며 히카루에게 흥미를 보이자, 사이가 망설이지 않고 [히카루! 저 사람, 히카루에게 호감 있나 봐요. 덮쳐요!]라고 외쳤다.

“덮치기 위해서요.”

“…….”

“…….”

“하하하. 돌 뺏기에 재미를 들였나 보구나. 그래. 처음 바둑을 하는 사람들은 바둑알을 포위해서 덮치는 데 맛을 들이지.”

“예! 하하하! 그래요!” 히카루가 급히 대답하며 시라카와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으우우우우우우웃! 었! 따! 그 웃음을 본 사이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울먹였지만, 히카루는 으우우우우우우웃! 음! 을! 지우지 않았다. 변태로 남기엔 히카루의 미래가 창창했기 때문이다. 모르지, 혼인보 슈우사쿠가 몇 살에 갔다고? 혹시……. --;;;

“좋아. 네가 좋아하는 돌 뺏기 게임을 하자.”

시라카와는 그렇게 말하며 여전히 사람좋은 얼굴로 히카루와 마주했다. 히카루가 멍한 얼굴로 바둑판을 보자, 시라카와는 히카루의 손에 검은 돌을 쥐어 주며 말했다.

“자. 아무 곳에나 한 번 둬 보렴. 어떨 때 단수(원작은 아다리 ;;)가 되고 어떨 때 돌을 빼앗을 수 있는 지 가르쳐 줄게.”
히카루는 어색한 손놀림으로 바둑돌을 쥐었는 데, 금세라도 바둑알을 놓칠 듯 어리숙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시라카와는 히카루가 처음 바둑을 두는 아이임을 잘 알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여기다 두었어요.”

히카루는 바둑알을 바둑판 정 중앙의 천원에 놓았다. 그러자 시라카와가 빙긋 웃으며 그 옆에 돌을 놓았다. 물론 그 때 사이가 [어쭈?]라고 외치며 코웃음을 친 것을, 시라카와는 듣지 못했다.

[오른쪽 위 소목!]

“에.”

히카루는 사이가 시키는대로 했다. (자, 잠깐…… 내용이 이렇게 바뀌면 나중에 어쩌라고!)

“음?”

시라카와는 히카루의 수가 엉뚱한 것을 탓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그는 히카루에게 돌을 뺏는 법만 가르쳐주면 되는 것이기에. 시라카와는 천원에 놓았던 히카루의 돌 옆으로 다시 백돌을 놓았다. 2면이 막혔으니, 그 다음에 히카루가 어디에 또 지랄을 하건 신경쓰지 않고 단수를 칠 셈이었다. 하지만 사이는 남 잘되는 꼴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천원에 놓은 돌 위에 붙여서!]

“음.” 시라카와는 단수를 놓치고 낮게 신음했다. 이젠 두 개가 붙은 돌을 노리는 것보다, 히카루가 두 번째로 놓았던 엉뚱한 돌을 노리는 것이 더 이로웠다. 시라카와는 자신의 왼쪽 아래 소목에 놓인 히카루의 바둑알 옆으로 돌을 놓았다. 그러자 사이는 망설임 없이 외쳤다.

[왼쪽 위 소목! 오호호호호! 적어도 40집은 앞서고 있어요, 히카루!]

“정말?” 히카루가 그렇게 말하며 사이가 부채의 끝으로 찍은 지점에 돌을 놓았다. 시라카와는 그것을 외면하며 왼쪽 아래 소목에 놓인 흑돌을 2면으로 감쌌다. 행여나 또 도망을 칠까 두려워서 그는 흑돌 바깥쪽을 막음으로써 그가 멀리 도망칠 수 없도록 했다. 이미 시라카와는 히카루의 수에 불쾌감을 느끼는 상황이었고, 어떻게든 빨리 단수 한 개를 치고서 “이게 단수라는 거다. 그리고 여기에 돌을 놓으면 이 안의 네 돌이 빼앗기는 거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꿈도 큰 것.] 사이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빙긋 웃었다. [옆으로 한 칸 째세요, 히카루. 평생 단수치게 해 주나 봐라.]

히카루는 사이가 시키는대로 이동했다. 그리고 30분 후…….

“졌습니다.”

시라카와는 히카루에게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는 분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왜! 내가 왜 얘랑 대국까지 가게 된 거냔 말이다! 왜 머리를 숙여야 하고 왜 “졌습니다.”라고 말을 해야 하지? 이봐봐, 히카루? 뭐지, 너? 내 생전에 너같이 얍삽하게 바둑을 두는 놈은 처음 봤다. 그깟 단수 한 번쯤 당해주면 안돼? 시라카와는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히카루를 노려봤는데, 그때 히카루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허접이시네요.”

“죄송합니다.”

내가 왜 죄송한건데! 시라카와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라는 이유로 히카루는 기원을 찾아갔다.

“어서오세요.”

갈색으로 물들인 단발머리의 이치카와가 형식적인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가 히카루의 모습을 보고 빙긋 웃었다. 그 웃음엔 ‘초짜네.’의 비아냥이 분명히 담겨 있었다. 그녀는 곧 테이블 위의 장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름을 적으렴. 여기는 처음이지?”

“여기든 어디든 완전히 처음이에요. 누구든지 바둑을 두나요?”

“물론이지. 경력은 어느 정도니? 응. 여기에 적어.”

“경력? 잘 몰라요. 방금 허접하고 둬서 이겼어요.”

“잘 모른다?” 이치카와가 멍한 얼굴로 히카루를 보았을 때, 그는 이미 주변을 둘러보며 기원 내부로 한 걸음 내딛고 있었다.

“누구와도 대국한 적이 없어요. 아마 강하다고 생각되지만…….”

“대국한 적이 없는데도 강하다고?” 이치카와가 다시 비아냥의 웃음을 던지며 말했다. 그 순간 히카루가 검지를 뻗으며 외쳤다.

“앗! 저기에 애도 있네요!(원문 그대로지만… 넌 어른이냐? --;;)”

도우야 아키라는 막 바둑판을 정리하던 참이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검지를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어, 나?”

히카루는 빙긋 웃었다. 아키라가 히카루를 향해 걸으며 빙긋 미소를 지었는데, 그 미소는 이치카와의 웃음과 비교하여 싸가지의 차이가 그리 많지 않았다.

“좋아. 내가 상대해 줄게.” 아키라가 말했다. “난 도우야 아키라.”

“난 신도우 히카루. 6학년이야.”

“아, 나도 6학년이야.” 아키라가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아키라는 대단히 매력적이었다.(라는 이유로 기원의 요금이라던지 기타의 문제는 모두 해결됐다. --;;)

아키라는 히카루의 첫수를 보며 한숨을 뱉었다. 조금 전 히카루는 대국을 원했는데, 아키라는 그에게 3점 내지는 4점을 깔고 두게 할 셈이었다. 대국을 원한 자라면 어느 정도 실력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키라는 대단히 실망하고 있었다. 히카루의 돌을 놓는 모습이 초짜중에서도 개초짜였기 때문이다.

탁.

탁.

탁.

탁.

탁.

탁.

탁.

퍽! (죄송해요. 담부턴 안 그럴게요. ᅲ_ᅲ)

아키라는 다소 놀라고 있었다. 갓 10수를 넘긴 후였지만, 히카루의 수는 대단히 뛰어났다. 가끔 엉뚱한 곳에서 손이 멈추는 이상한 행동을 보였던 것도, 혹시 겐세이(방해기술)가 아닐까 여겨질 만큼. 아키라는 조금씩 긴장했다.

‘이 녀석. 내 묘수에 넘어오지 않는다.’

아키라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을 때, 히카루는 사이가 내민 지점으로 돌을 내밀고 있었다. 탁. 그 일수에 아키라가 눈을 부릅떴다.

‘너, 넘어오지 않는 게 아니라……!’

히카루의 일수는 아키라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국면을 저 아이가 리드하고 있어!’

긴장으로 인해 아키라의 손은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리고 히카루의 한 수. 그것은 바둑판의 격전지에서 한참을 떨어진 텅 빈 공간이었다. 하지만 아키라는 그 수를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신의 한수였을까? 히카루의 수는 대단히 뜻밖이면서도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아키라가 그것에 응수하면 이제껏 박 터지게 싸우던 곳이 은근하게 휘말리며 절망적인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고, 응수하지 않으면 불모의 땅을 모조리 빼앗길 위험이 있는 그런 수였다.

‘이건 최선의 한 수가 아니다! 최강의 한 수는 더더욱 아니다! 이것은!’

아키라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뽀록이다, 씨발 새끼!’

하지만 동기를 따질 수 없는 것이 바둑임을 아키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돌을 들었다. 도우야 아키라. 현재 신의 한수에 가장 가까운 남자로 알려진 도우야 명인의 외동아들이다. 그는 결코 도망치는 바둑을 둔 적이 없었다. 도우야는 힘껏 손을 뻗으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네가 뽀록이라면 나는 실력이다! 피하지 않겠어!’

땅! 아키라의 수는 히카루의 일 수에 단호히 맞서며 힘있게 빛을 발했다. 그러자 사이가 조용히 말했다. [15의 24. 조져요.]

톡. 히카루의 일 수. 그리고 따항! 아키라의 눈에서 광채가 일며 그의 힘있는 일 수가 히카루의 돌 사이를 가차없이 가로질렀다. [훗.] 사이는 웃었다. [17의 24. 기다려요, 히카루. 곧 개처럼 기어가며 짖어대는 저 녀석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너무 심하게 하지 마, 사이.” 히카루는 낮게 불평하며 그가 지정한 곳에 돌을 두었다. 아키라가 다시 힘있게 돌을 내려놓는 순간, 사이는 흠칫했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턱과 입술의 사이에 손등을 수평으로 하고 엄지 검지 새끼 손가락을 곧게 뻗으며 나머지 손가락은 수직으로 하향시켰다.

[꺄르르! 백년도 못 사는 게 천년 짜리한테 개겨? 히카루. 10의 7에 돌 한 개 톡! 놓으실래요? 그리고 입을 살짝 벌리셔서 ‘다안수?!’ 해 보세요.]

“다안수?!” 히카루는 시킨 대로 했다.

“헉!”

아키라는 품안에서 강심제를 꺼내 먹었다가 그것으로도 부족한 지 휴대용 호흡기를 사용하여 몇 번 숨을 들이켰다. 그는 좌상변을 포기하고 우하변의 널찍한 공간에 괴로운 한 수를 놓았다. 사이는 잠깐 침묵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히카루가 사이를 부르자, 사이가 둘 곳을 정한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직 어린애니까…….] 사이는 아키라의 절망적인 얼굴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곧 눈을 부릅뜨며 검지를 뻗었다. [지금 단수친 거 따먹어요! 저런 놈은 정신적인 충격으로 싹부터 밟아야 해요!]

따악!

“커헉!”

14개의 돌을 먹는 히카루를 보며 아키라는 피를 토했다. 그리고 10분 후. 아키라는 다시 피를 토해야만 했는데, 이번엔 21개의 돌이 운명을 달리했다. 아키라가 눈물 가득한 얼굴이 되어 손수건으로 눈의 물기를 닦아가며 열심히 두었지만, 히카루의 어설프게 내려놓는 돌은 열나 얍삽했다. 아키라는 12개의 돌을 또 따 먹혔다.

“너무 심한 거 아냐, 사이?”

세 번째로 피를 토하는 아키라를 보며 히카루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러자 사이는 서글픈 눈으로 아키라를 주시하며 말했다.

[전 저런 미소년이 피 토하는 게 너무 보고 싶었거든요.]

“이봐.” 히카루는 더 이상 아키라를 괴롭히고 싶지 않아졌다.

툭. 모든 것에 절망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은 채 힘없는 1수를 내민 아키라. 히카루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멍하게 히카루를 올려 보는 아키라에게, 히카루는 까마득한 높이의 권좌에 있는 사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따먹은 47개의 돌을 보여주며.

“많이 먹었다. 그만 해라.”

“커헙!” 아키라는 또 다시 피를 토했다. 그리고 바둑판에 엎어져서 혼절하고 말았다.

계가

[연재] [호스트 바둑왕] 1국. 바둑 영혼의 출현

제1국 바둑 영혼의 출현

“흐음.” 히카루는 반쯤 금이 가고 끈적한 먼지가 달라붙은 골동품 병을 집어들며 말했다. “이것도 아냐.”

“그만 나가자, 히카루! 기분 나쁘다.”

아카리는 히카루가 이 습기 가득한 벽장 위에 들어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가끔씩 히카루의 엉덩이를 발끝으로 걷어찼지만, 히카루는 그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먼지가 풀풀 솟는 상자 속의 물건들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어?” 히카루는 눅은 먼지가 가득한 종이들 아래 잡힌 물건이 대단히 묵직한 느낌을 주자, 낮게 외쳤다.

“이거! 이거 좋겠다!”

히카루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가 힘들여 꺼낸 것은 바둑판이었다. 네 개의 다리가 딸린 19로반의 바둑판은 한 눈에 보기에도 오랜 세월을 겪은 노인의 그것(치매는 아니고 --;;)이 담겨졌음을 알 수 있었다. 히카루가 찾는 물건은 바로 그 연륜이 담긴 골동품이었다.

“우와! 나, 이거 뭔지 알아. 오목하는 거 맞지?”

아카리가 바둑판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웃었다.

“바보, 바둑이야! 이건 바둑판이라는 거야!” 히카루는 아카리를 향해 불평하곤 바둑판의 퀴퀴한 먼지를 털었다.“무지 오래된 거 같은데 할아버지가 옛날에 쓰시던 건가? 요즘 골동품이 뜨고 있는데 꽤 비싼 값에 팔 수 있겠는걸!”

그리고 히카루는 걸레를 들어 바둑판의 표면을 닦기 시작했다. 비로소 히카루의 목적을 알게 된 아카리가 대사대로 불평했다. 물론 히카루도 대사대로 받아쳤다. 히카루의 신경은 온통 바둑판의 얼룩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무리 걸레로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바둑판의 얼룩은 골동품상과의 가격 흥정에서 대단히 불리하게 작용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 어라! 아무리 닦아도 이 얼룩이 안 지워져.”

“얼룩? 얼룩이 어디 있는데? 깨끗하잖아!”

“이 얼룩이 안 보여?” 바둑판을 향해 불평하던 히카루가 이번엔 아카리를 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직접 얼룩에 검지를 뻗어 짚어 주었지만, 아카리는 그 얼룩을 정말로 못 보는 지 고개만 기울이며 멍한 얼굴을 했다.

“여기 있잖아!” 히카루가 짜증을 냈다.

“어디?” 아카리의 목소리에도 점진적인 짜증이 흘렀다.

“여기!”

“어디?”

“여…!”까지 말을 하다가 히카루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어디 여기어디하다가 결국 짜증이 나서 치고 받고, 그러다가 제3자가 없는 이곳에서 둘 다 엎어지면 느닷없는 온리 유. 히카루는 거기까지 생각한 걸 다행으로 여기며 “여기 그런 게 있어. 우유가 굳은 것 같은 얼룩(--??)이….”라고 간단히 말한 뒤, 걸레로 열심히 얼룩을 닦기 시작했다.

[보입니까?]

“그러니까 아까부터 말했잖아!” 히카루는 다시 짜증을 냈다. 그의 예상대로 아카리는 일부러 장난을 친 것이다. 정말로 엎어져서 온리 유를 원한 것일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목소리가 들립니까?]

“어?”

히카루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카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군요!]

“누구냐!”

히카루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자 아카리 또한 창백한 얼굴로 히카루를 주시했다.

“왜 그래? 뭔 말이야!” 아카리는 울상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나 돌아갈래!”

[있다! 있어! 신이시여, 감사드립니다!]

아카리가 막 천장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딛었을 때였다. 히카루는 보았다. 바둑판 위에 나타난 하얗고 투명한 막부시대의 관복을 입은 자가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을 하고 자신을 주시하는 것을.

[저는 지금 다시… 지금 다시… 이승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여인처럼 아름답고 곱상한 얼굴을 한 20대의 청년이었다. 그 하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지는가 싶더니 히카루의 온 몸에 차가운 전율이 흘렀다. 히카루는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악! 난 세상에서 주변에 꽃바람 날리는 새끼가 제일 싫어어어!”

그리고 히카루는 기절했다.



다음 날 학교에 가게 된 것도 히카루에겐 기적이었다. 히카루의 할아버지 대신 직접 구급차를 불러서 병원에 데려갔던 아카리가 교실 내에서 가끔씩 걱정스런 얼굴로 히카루를 보곤 했다. 물론 히카루는 아카리가 그러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히카루의 정신은 온통 자신의 몸 속에 들어온 꽃바람 유령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넌 누구야.”

히카루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유령을 하루 동안 관찰한 결과, 그는 대단히 마음이 여린 편이었다. 히카루가 기절했을 때 [어쩜! 난 몰라! 왜 기절하고 지랄이얌.]이라고 외치며 바동댄 것도, 자세히 생각해 보니 아카리가 아니라 이 유령이었다. 히카루는 자신의 몸에 들어온 놈이 엑소시스트의 그 놈과는 다르게 대단히 만만한 유령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절대로 자신의 모가지를 180도 돌리거나 몸을 뒤집어서 계단을 내려가게 하지는 않을 유령임이 확실했다.

“누구냐니까!”

히카루가 외쳤다. 교실 내의 학생과 선생들이 흠칫하며 히카루를 보았지만, 그 중간과정은 아카리가 어제의 일을 들먹이며 처리했다. 덕분에 히카루는 마음 편하게 유령의 대답을 들을 수가 있었다.

[저는 후지와라노 사이입니다.]

“완전히 새된 놈?”

[걔는 싸이에요] 사이는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저는 헤이안의 기원에서 대군에게 바둑을 가르치던 사람이었답니다.]

“헤이안? 바둑?”

사이는 회상했다. 구리빛 얼굴에 밝은 미소와 콧수염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대군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저리게 했다.

[기원에서 매일 바둑을 둘 수 있었던 저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특히 대군께서 다섯 알이 넘는 바둑돌을 향해 단수를 치실 때면 숨이 막힐 정도로 짜릿했답니다. 다섯 알부터는 가슴을 만져도 되거든요.]

“자, 잠깐. 바둑에서 가슴이 왜 나와?”

[어, 모르세요? 요즘은 옷 벗기 바둑같은 것 안 하나 보죠?]

“기원에서 그런 걸 왜 해?”

[기(棋)도 두고 기(妓)도 따 먹는 곳이 기원이잖아요.]

“그럼.” 히카루는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너 설마… 호스트냐?”

[아무튼 말예요.] 사이는 식은땀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저 이외에도 대군께 사랑을 받는 기선생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대군께 말을 하더군요. ‘대군 마마, 기(선)생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옷 벗기 대국으로 승부를 가려 승자만을 스승으로 두십시오.’라고요.]

“…….” 초등학교 6년생 히카루가 감당하기엔 다소 벙찜이 있었다.;;;

[일방적인 대국으로 그는 바지 속옷만 남고 저는 웃옷 하나만을 벗었었습니다. 당연히 모두의 시선이 그 자에게만 집중된 가운데 나 혼자만 그걸 눈치챘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뭐, 뭐가?”

[그가 바둑판 밑으로 발을 내밀어 제 허벅지를 더듬어 제 그곳을 향해…….]

“우우우우욱!”

“히카루! 왜 그러니?”

선생님이 기겁하며 히카루에게 달려왔지만, 히카루가 먼저 화장실을 향해 쏜 살처럼 날아갔다. 히카루는 화장실의 세면기에 끊임없이 오바이트를 하며 괴롭게 말했다.

“네 상대가 남자 아니었어?”

[그래서 제 가슴이 더 두근거렸습니다. 결국 저는 제 흥분된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대국에서 지고 말았지요.]

“우웨에에에엑!”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대국에서 지고 몸을 일으켰을 때 어찌 제 그곳이 멀쩡할 수 있었겠습니까? 대군께서는 옷 위에 비친 제 …를 보시고 음탕하다 하여 내치셨습니다. 음탕하다는 오명까지 덮어쓰고 왕궁에서 쫓겨난 저에게 살아갈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틀 후 전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 그럼 넌 유령같은 거구나.”

[예. 너무 원통해서 저승으로 갈 수 없었던 제 영혼은 그 바둑판에 그대로 잠들어 수많은 세월을 보내고 마침내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항간에 떠도는 고스트 바둑왕이라는 작품이 호스트 바둑왕의 아류인 이유는 위의 사항을 빌어서 알 수 있는데, 본문을 잘 보시면 그 때 두던 바둑판과 어제 본 바둑판이 다르게 생겼음을 알게 되실 겁니다.]

“자, 잠깐만. 내 수준을 감안해서 얘기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아. 죄송해요. 아무튼 이번 편은 로리콘입니다. 그 애가 그러더군요. ‘이 바둑판에 있는 우유빛(--;;) 얼룩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누군가가 흘린 이 …;;같은 얼룩이 왜 나에게만 보이는 걸까?’라고요. 그래서 재빨리 나타나 따 먹었죠.]

“우웨에에에엑!”

[아이는 그런 걸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기뻐하며 저에게 몸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바라던 대로 다시 기생으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가 서슬 네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전염병에 걸려 죽기까지는.]

“제, 제발 그만 얘기해. 네가 원한다는 바둑을 둬 줄 테니까! 우웨엑!”

[그의 이름은 혼인보 슈우사쿠. 좋은 몸이었죠.]

“우우우웨에에에에엑! 그마안!”

그것이 초등학교 6년생 히카루가 바둑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었다.

계가

2008년 2월 25일 월요일

The Oracle 1회

The Oracle 1회

1. 금가루

인상이파는 주류 밀거래, 자릿세 받기, 장물 밀거래, 윤락업을 통해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 중 윤락업을 제외하고-그것도 자세히 조사하면 제외라고 하기 어렵지만- 모든 사업이 불법적이었다. 인천, 그것도 남구, 거기다 주안2동이라는 작은 영역에서 4개파가 세력 싸움을 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큰 세력을 이루고 있는 이들이 인상이파였다. ‘IS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를 차리고 작은 사무실 하나를 얻어 터를 잡고 있었는데, 사장은 양인상이라는 자였다.

“인상이형 어디 갔어요, 오전무님?”

60평의 널찍한 사무실에 7개의 책상과 7개의 의자와 7개의 컴퓨터만 딸랑 놓여져 있기 때문에, 강채성 부장은 늘 불만이다. 내년이면 30세가 되는 강채성은 양인상 다음으로 나이가 많았고 인상이파에서 가장 덩치가 컸다. 또한 ‘진정한 인상파’라는 뒷별명이 남겨질 만큼 인상적인 용모를 하고 있었다. 계란형 얼굴이었는데 뒤집어진 계란이라서 보기에 괴로웠으며, 이목구비가 심하게 뚜렷해서 두려웠다.
 
외모만큼 성격도 과격한 편이라서 힘을 쓰는 일을 자주 맡았고, ‘적당한 구박’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양인상이 아랫사람에게 가장 큰 불쾌감을 느낄 때는 ‘채성이 네가 알아서 해.’라고 명령한다. 강채성이 잘못의 원흉일 때도 같은 명령을 내린다. 강채성은 스스로에게도 적당한 형벌을 가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인상이파의 멤버들 사이에서 인기투표를 한다면 양인상 다음으로 높은 점수를 받을 사람이 강채성이었다.

“지석이가 오늘이잖아요. 지석이 만나러 갔어요.”

“벌써요? 같이 가려고 차도 대기시켰는데…….”

강채성이 깍듯하게 대하는 사람은 오록현 상무였다. 21세의 어린 나이고, 조직에 들어온 것도 늦은 후배지만 강채성은 항상 오록현을 형님처럼 모셨다. 그 이유는 양인상이 오록현을 자신의 오른팔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결정되는 순간부터 강채성은 오록현을 형식적 윗사람으로 모시지 않고, 진정한 자신의 어르신으로 모셨다. 오록현도 나름대로 강채성을 형님처럼 모시며 깍듯하게 대했다.

“운동도 할 겸 걸어가신대요.”

“거기가 어딘데 걸어간답니까! 한참 걸릴 텐데.”

강채성의 고함에 오록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사무실이 쉬는 날이었다. 일요일에도 쉬는 날이 없고 국경일도 마찬가지였지만, 오늘같은 날은 예외였다. 4년이나 함께 동고동락했던 고지석 팀장이 외지로 발령받는 날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업무상 차질이 많아졌으나-고지석이 맡고 있는 일을 넘겨줄 만큼 믿을만한 녀석이 없었다- 모두가 환영했다.

26세의 고지석은 1주일 전에 결혼했고, 부인이 된 여자가 사퇴를 권고했다. 고지석이 한참을 고민하다가 2일 전 양인상에게 조심스레 뜻을 밝혔다. 그러자 양인상은 책상 위에 놓여있던 포스트잇 한 장을 고지석의 얼굴로 집어던지며 “이런 개새끼! 갈테면 가 봐!”라고 고함쳤다. 싸늘한 한기가 사무실을 적실 때, 양인상은 곧장 밖으로 나가서 2시간만에 돌아왔다.

그 때까지 양인상의 책상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고지석의 안면에 또 종잇장이 날아들었다. 문서 한장과 통장이었다. 양인상은 고지석에게 수퍼마켓 문서 하나와 통장을 줬다. 사퇴는 안되니 외부지사를 운영하라는 엉뚱한 소리와 함께. 물론 말이 그렇지 수퍼마켓과 3천만원이 들어있는 통장을 퇴직금으로 준 것이다. 오늘은 그 수퍼마켓에 물건을 들여놓는 날이었다.

“이미 도착하셨을 거예요. 상희가 같이 갔으니까 택시 탔을 걸요? 걔 오늘 하이힐 신었거든요.”

“아, 그럼 다행이지만……. 상희가 오늘은 어쩐 일로 일찍 왔대요?”

“제가 일찍 온다고 했었거든요.”

“어어. 상희가 아직도 오전무님 좋아해요? 얘가 요즘 철이 들었나? 순정파가 됐네.”

“처음부터 저를 좋아했대요. 다른 놈팡이는 제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서 만난 거라나?”

“허허.”

강채성은 노인처럼 너털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컴퓨터 전원을 켠 채 잠시동안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화면이 켜지자 키보드만한 손으로 마우스를 쥐었다. 그리고 커서를 시작Bar에 가져가더니 시스템 종료를 클릭하고 확인을 눌렀다. 자신이 컴퓨터를 켰다 껐다는 데에 큰 만족을 느낀 듯 강채성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강채성은 오록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오전무님은 왜 안가셨어요?”

“좀 이따가 가려고요. 몸이 안 좋은 지 자꾸 헛것이 보이네요.”

그 순간 강채성의 안색이 굳었다.

“뭐가 보였는데요?”

“금가루가 떨어지고 피가 폭포처럼 흘렀어요.”

“예?”

“말하기가 참……. 아무튼 아까 그래서 차에 치일 뻔 했어요. 좀 괜찮아지면 갈 테니까 채성이형 먼저 가세요.”

강채성은 불안한 듯 오록현의 미소를 잠시 응시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사무실 밖으로 나갈 때까지 오록현의 얼굴을 주시하던 강채성은 뒤늦게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밖으로 나간 강채성이 다시 들어왔을 때는 자신의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화환이 들려져 있었다. 오록현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뭐예요?”

“며칠 째 계속 밖에 있기에 누가 버린 것 같아서 주워왔어요. 여기에 놓으면 어울리겠죠?”

“네. 거기엔 그게 필요했어요.”

오록현이 웃음을 참고 간신히 칭찬했다. 강채성은 만족한 듯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손바닥을 털더니 사무실을 나갔다. 그제야 오록현은 강채성이 들어오기 전의 자세로 돌아갔다. 키보드를 세워 모니터에 걸친 채 엎어진 것이다.

“아아, 요즘 왜 이러지? 할 일 많은데.”

오록현은 자신의 이런 상태가 싫었다. 회사를 위해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일하고 싶었다. 비록 불법이었지만, 일에 대해 자세히 알게된 이후로 오록현은 자신이 나쁜 짓을 한다고 여긴 적이 없었다. 오록현은 양인상을 몽상가로 치부했고, 그래서 존경했다. 적어도 지금만큼은 양인상의 몽상이 현실이 되어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 * *

“하. 웃음 밖에 안 나오네.”

양인상에게 들었던 첫마디였다. 오록현의 가슴은 내려앉았다. 오록현이 12세부터 16세가 되는 5년 간 소매치기 생활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걸려본 적이 없다. 손재주는 별로였으나 타겟을 잡는 능력과 일을 벌이는 장소를 잘 선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인상을 만난 날만큼은 예외였다. 이전과 다른 느낌을 주는 자였으나 ‘저 사람의 주머니는 꼭 털어야 한다’라는 강박관념이 들었다. 양인상을 미행하다가 최적의 상황을 선택하여 지갑을 슬그머니 빼내는데, 양인상이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더니 중얼거렸다. 한숨과 함께 웃음 밖에 안 나온다는 말을. 그리고 양인상은 오록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 내가 누군지 아냐?”

“누군데요?”

오록현은 겁에 질렸으면서도 도전적으로 물었다. 양인상의 지갑을 뒤에 감춘 채. 양인상은 곧 또 하나의 지갑을 들어보이며 웃었다.

“나도 너랑 같은 직업이거든. 게다가 여긴 내 시장이거든.”

“어, 몰랐어요.”

“너 여기서 언제부터 했냐?”

“처음이에요, 이 동네는.”

“아닌 것 같은데?”

“진짜 처음이에요. 한 번만 봐주세요, 선배님.”

1회 끝 ㅇㅅㅇ!

레디 오스 성화 올림

잡담: 갑자기 이글루가 휴지통이 되어간다! ;ㅁ;

인연 1회

1화. 우연3

뭐가 중요한지 모르겠고 뭘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 그래서 세희, 그 계집애가 참고서를 세워둔 채 타로카드를 뒤섞으면 유심히 바라보곤 했지. 선생님은 내 시선을 보고 세희가 뭘 하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에 나는 늘 떡볶이 값을 날렸어.

혹시 알아? 갑작스러운 상황이 닥쳤을 때 내가 무슨 행동을 취하건 하루가 지나면 그 때를 후회하게 된다는 것. 그 때의 기분. 혹시 알아?

뭔가에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대처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워질 거야. 난 절대 그럴 수 없을 테니까. 수많은 군중들을 끝까지 외면한 채 단상 위 메모지만 열심히 쳐다보는 사람들의 기분을 이해해. 그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어. 글 속에는 나의 생각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거든. 그 속에는 나의 생각을 시간이라는 양념으로 버무린 요리가 들어있어. 그래. 사람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우산 없어요?”

이 잘 생긴 남자애가 나에게 웃었을 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했을까? 잘 생겼다고는 하지만 머리카락은 세계 어느 인종에게도 천연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색깔이었고, 저런 귀를 가진 인간이 태어난다면 엄마 자궁이 남아나지를 않았겠다 싶을 정도로 서슬 퍼런 귀걸이를 하고 있는 애였어. 아아, 목걸이. 현기증이 난다. 누가 독살이라도 하려나? 저렇게 강인한 은사슬 목걸이라면 소가 아니라 미노타우르스라도 끌고 갈 수 있을 거야.

중요한 것은 이 녀석이 나에게 우산이 없냐고 물었다는 거야. 난 우산이 없었어. 하지만 얘도 없었어. 비가 쏟아지는 하늘 아래 어떤 쌩 양아치가 나타나서 나에게 유혹의 한 마디를 건넸다고 밖에 볼 수 없겠지. 이 불쾌감을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방법은 없었어. 시간이 없었으니까.

“예에…… 없는데요.”

“아, 그래요? 저도 없는데.”

어쩌라고! 나의 대답은 하루가 아니라 당장 후회할 만큼 머저리 같았을 거야. 폭이 1미터도 채 안 되는 좁은 공간에 나란히 선 채 우리 둘은 정면을 응시했어. 하늘엔 비가 쏟아졌고, 바람은 우리 머리를 막고 있는 좁은 테라스를 인정하듯 비를 실어오지 않았지. 셔터가 내려진 정체 모를 가게 앞에서 우리 둘은 약속된 침묵이라도 하듯 얌전히 있었어. 그러다 내가 말을 꺼냈어.

“이미 다 젖었는데 그냥 뛰지 그러세요?”

뒤늦게 공격을 한 거야. 나는 시간을 다루지 못하는 게 확실했어. 나의 두 번째 대답 속에는 시간이라는 양념이 버무려져 있었고, 그 양념은 소고기에 뿌려진 케첩처럼 형편없었지. 하지만 양아치는 웃었어.

“지금 꼬시는 중인데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요?”

농담조가 들어있는 그 대답에 내 정신은 공황상태가 되었어. 나는 고개부터 세차게 가로저으며 퉁명스럽게 “그럼 내가 뛸게요.”라고 말했지. 그리고 정말로 빗속을 향해 몸을 날렸어. 그 순간 나는 양아치와 육체적 접촉을 하게 되었지. 녀석이 내 손을 잡은 거야.

“됐어요, 됐어. 내가 포기할게요.”

다시 나를 테라스 아래로 집어넣은 양아치는 웃으며 말했어.

“나도 그냥 처음 봤을 때 마음에 든다 싶어서 말을 걸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갈게요.”

“아뇨. 어차피 뛰어서라도 가야 해요. 학원 시간 늦었거든요.”

“어느 학원 다녀요?”

“알아서 뭐 하게요? 포기한 거 맞아요?”

“음…….”

양아치는 잠시 망설였어. 그리고 그 커다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열 개나 붙어있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말했지.

“포기는 했죠. 그냥 물어본 거예요. 노력도 하지 않으면 아무리 인연이라도 소용이 없을 테니까.”

인연 좋아하네.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건물의 어둑한 창을 지나치는 하얀 빗줄기를 바라보자, 양아치의 목소리가 들렸어. 활기 찬 목소리였지. 마치 뭔가를 꿈꾸는 사람이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듯 자신감이 느껴졌어.

“제 이름은 다음번에 만날 때 알려줄게요. 저는 이 동네에 처음 왔어요.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면서 여기저기 걷다가 여기까지 온 거예요. 아무 생각 없이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는 취미가 있거든요. 어때요?”

“뭐가요?”

“제 집은 이 동네도 아닐뿐더러 서울도 아니에요. 학교도 수원이고 여기 올 일이 전혀 없죠. 오늘처럼 한가한 경우도 자주 생기는 편이 아니고요. 괜찮죠?”

“그러니까, 뭐가요!”

“앞으로 3번을 더 우연히 만나면 그 때는 사귀는 거예요.”

스토킹하겠다는 얘기잖아! 난 있는 힘껏 코웃음을 치며 잔뜩 찌푸린 하늘을 바라보았어. 양아치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렸지. 언덕 아래 버스정류장 종점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가는 뒷모습이 이유 없이 즐거워 보였어. 그리고 나에게 무척이나 인상 깊은 장면을 남겨줬는데, 그것은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서 빗길에 미끄러져 자빠지는 모습이었어. 난 당연히 깔깔대며 웃었지.

그렇게 되고 보니 2년이 지났는데도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었어. 가끔 가다가 혼자서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며 피식 웃기도 했지. 하지만 그 양아치의 얼굴을 다시 떠올리려 해도 쉽지가 않았어. 남자애답지 않은 초승달 눈웃음도 기억이 나고 도톰한 입술이 열심히 움직였던 것도 기억이 나는데, 얼굴 전체는 죽었다 깨어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거야. 양아치를 생각하면 뚜렷하게 기억이 나는 것은 연녹색 머리카락과 고슴도치처럼 사방으로 가시를 뻗어대던 귀걸이와 은사슬 목걸이 뿐이었어.

그러니 2년 만에 그 녀석을 다시 만났을 때 알아볼 리가 없잖아! 그 3가지를 모두 팔아치우고 나타났으니까 말야.

“우와아아앗!”

수원역 앞에서 무테안경을 쓴 범생이 하나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비명을 질렀을 때, 저게 미쳤나 싶었어.

레디 오스 성화 올림

추잡: 카테고리를 이제야 확인한 사람은 진 겁니다.

2007년 7월 4일 수요일

[후한지] 자료의 압박 -_-

이 글을 처음 구상했을 때, 약 반년 정도 자료를 모으는데만 힘썼던 것 같다. 자료를 모으면서 별 소리 다 들었다. 이와 관련한 자료를 구하기 어려운 이유는 왕망의 정치사상이 사회주의와 흡사하여 국내에서 관련자료를 금지했다는 소리를 들었고, 이 시기가 중국의 치부라서 당시의 사서들이 폐기처분됐다는 소리도 들었다. 다 신빙성이 없지만, 이 시기의 자료가 무척 적은 것은 사실이다.(그래도 어지간한 도서관 자료들을 싹쓸이하다보니 제법 나오긴 했다. 중복이 심하지만... -_-)

후한지는 역사와 관련된 판타지 소설이다. 무협적 요소도 있지만, 상황의 설정들은 짤없이 판타지다. 일단 내 황당무계병은 뭘 써도 판타지가 나와버리게 만드니까. -_-

아무튼 오랜만의 미리니르리! >ㅁ<

미리니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