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20일 수요일

슬램덩크 패러디의 비극

1. 청어람 사무실에 있을 당시, 나는 4층에 계신 여타 작가분들과 달리 3층에서 글 썼다. 연중 작가의 무덤이라 불리는 그곳은 괴이한 기운이 흘러서 '어떠한 작가도 열심히 글을 쓰게 하는 능력을 가진 자리'였다. 전설의 메롱도 그 강력한 기운을 이길 수는 없었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열심히 썼다.(후에 용들의 전쟁이 메롱기에 접어든 때는 내가 그 자리를 떠났던 시기와 일치한다.) 아쉽게도 청어람 사무실이 이사하여 그곳은 미지의 공간이 되고 말았다.

노트북 하나 딸랑 두고 그저 자판만 두드리고 있을 때, 하루 한 번씩 찾아오는 분이 있었다. S님은 언제나 밝은 웃음과 커다란 목소리와 쉬지 않는 입담을 가지고 3층을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사무실 분들은 긴장했다. 잡히면 듣는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었다. 사장님도 S님에게 붙잡히면 '허응...' 하는 반쪽 미소를 유지한 채-자리를 벗어날 궁리를 하는 표정임이 확실한 얼굴이었다!- S님 썰을 들었다.

내가 처음 청어람 사무실에 갔을 때는 이미 그러한 상황이 보편화되었는지 S님만 나타나면 약속이라도 한 듯 바빠졌다.

"아, 지금 인쇄 어떻게 됐어요?"
"거기 총판이죠? 네! 아니, 지금 이게 급한 거라서요. 좀 더 서두르고 싶은데요."
"XX작가님! 원고요. 어떻게 됐어요? 어머, 안돼요. 제가 지금 그쪽으로 갈게요."
"XX님 또 실종이에요! 저 그분 집에 좀 다녀올게요!"

3일 만에 알게 된 패턴이었다.(난 또 원래 그렇게 하루 한 번씩 정신없는 순간이 오는 줄만 알았다. -_-)

S님이 선택한 사람은 당연히 나. 느긋하게 자판을 두드리는 나를 제외하고 모두 다 '건드리면 죽는다.' 는 포스를 풍겼으니 어쩔 수 없다.

"뭐 써요?"
"용들의 전쟁요. 4권 다 써가요."
"아아. 판타지 소설이에요?"
"아뇨. 무협요."
"근데 왜 이름을 그렇게 했어요?"

시작은 사소하나 중반은 창대하고 끝은 없으리라. S님과의 대화가 그랬다. 처음에는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다가 점점 글빨이 오를 즈음에는 장시간 이어지는 대화가 방해되었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는 나로서는 "글 쓰는데 방해가 됩니다. 혼자 있게 해 주세요." 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레디가 그런 말을 하면 누가 믿어. 그 때 이미 나는 출판계에서 전설급으로 통하는 메롱작가였는걸. -_-

그렇다고 무한정 받아줄 수는 없었다. 한창 글빨이 오르던 어느 날 S님이 평소처럼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난 자판을 치며 건성건성 대답했다. 이렇게 글이 잘 써지는 경우는 드물다! 이건 4년에 한 번 오는 글빨이란 말이다! 내가 모니터와 S님을 번갈아보며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면서 대화하는 척만 하자, S님이 점점 더 집요해졌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대답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참다 못한 나는 말했다.

"S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입니까?"
"네?"
"전 지금입니다."

그렇게 말하곤 모니터를 매섭게 노려보며 자판을 두드렸다.

S님이 빙긋 웃으며 손을 뻗더니 내 노트북을 덮었다.

"나도 지금이에요."


2. 이곳 사무실은 규칙적이다. 취침 시간은 없지만, 기상시간 만큼은 확실하게 지켜야 한다. 9시를 넘기면 누구도 잠을 자고 있으면 안된다.

하지만 난 사이클이... oTL

깊은 밤 어두운 공간이면 내 활동무대가 열린다. 눈은 올빼미처럼 말똥말똥해지고 손가락이 평소보다 세 배는 빨라진다. 새벽에 이르러 절정을 맞이하는 내 에너지는 아침해가 뜨는 순간에 거품처럼 사그라진다. 퀭한 눈이 되어 정신을 못 차리면서 취침 가능시간이 오기만을 바란다.

어느날 M작가가 말했다.

"형도 이젠 아침형 인간이 되어 보라고."
"그게 쉬운 줄 아냐?"
"밤까지 안 자고 버텼다가 딱 시간 맞춰 자면 되는 거야. 참 쉬워. 형도 해봐."
"절대 안 돼. 넌 모르는 구나. 이쪽 업계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선배와 선배들 사이에 전해지는 격언이 있어."
"그딴 뻘소리, 듣고 싶지 않지만 낫살 처먹었으니 예의상 들어줄게."
"심야를 제압하는 자가 업계를 지배한다!"
"허억! 심야를 제압... 하는 자가?"
"그래! 하하하! 심야를 제압할 수 있는 자가 곧 업계 지존이 된단 말야. 그러니 오늘도 나는 업계를 지배하려고 날밤을 까야만 하는 운명이야."
"음. 알았어. 그럼 인터넷은 끊을게."
"아니, 저기..."

나는 더러운 아침형 인간이 되고 말았다.


3. 오랜 시간 사무실에서 생활했다. 사무실은 게임 금지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견딜만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정말 괴로웠다. 특히 오랜 시간 정들었던 와우와 생이별한 아픔은 늘 내 가슴을 찢어발겼다.

하루 한 시간이라도 와우를 하게 해달라고 M작가에게 말했다. M작가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나를 다독거렸다.

"노망도 곱게 들었으면 해. 이미 떠난 녀석 울며불며 매달려봤자 추해질 뿐이야. 이제 그만 잊어."

난 땡깡부렸다. 바닥에 누워 발을 동동 구르며 와우가 하고 싶다고 울부짖었다. 그 때 마침 현관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통통. 통통통.

"문을 열어줘요. 문이 안 열리네."

덜컥쾅!

아X는 누가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잡아 뜯고 들어왔다. 눈물 맺혀 흐릿한 시야 저편에서 아X가 듬직한 체구를 흔들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아X를 향해 오열했다.

"악선생님..."
"호오?"
"와우가 하고 싶어요."

아X는 안경을 매만지며 말했다.

"일단 앞니부터 없애고 그 말씀을 하셔야죠."

아X가 목검을 빼들었고, 난 어느새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레디 오스 성화 올림

댓글 27개:

  1. 1. 노트북 덮...;;;

    2. 더러운 아침형 ㅠㅠㅠㅠㅠㅠ 절대 동감이예요. 흑흑 ;ㅁ;... 물론 저는 이미 더러움에 젖어버렸지만 흑흑...

    3. 1번과 3번... 왠지 다른 이야기를 다른 작가분들이 하셨다면 픽션이라고 웃어 넘겼겠지만... 레디옹이 하시니... 하핫...하... 절실하게 와닿는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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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게 식곤증때문이 아니었군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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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청어람에 저런 전설이 있었단 말인가...몰랐군요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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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아.. 사무실에 가둬놓고 글쓰게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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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모큐....



    연중작가의 무덤이라니, 가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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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전성기 이야기 왜 이리 웃깁니까(...)



    그리고 마지막 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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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역시 감금하면 글빨이 오르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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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외국 출판사들이 괜히 작가를 잡아다가 원고 받을 때까지 가둬놓는 게 아니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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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아, 현장을 목격한 저로선...음음...

    S님과의 모습이 그런 것이었군요.(왠지 누군지 알 것 같기도..)

    왠지 전 모른 척했던 것 같아요.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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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아악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첫번째거에서 약간 미소

    마지막거에서 대폭소 햇네여



    악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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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이런걸 책으로 내심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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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뭔가 작가에 대한 환상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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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사실에 근거한 얘기라는 사실에 좌절하는 현실이 망연자실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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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에피소드 마무리한다니까 '훗!' 하셨다고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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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명당이에요. 수영누나도 제 자리 와방 탐내셨어요.(성실하게 쓰시면서! 세상 참... 있는 사람들이 더하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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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냅레디. 괜히 통조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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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이제는 갈 수 없어요. 그곳에 다른 출판사가 들어서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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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와닿아서 웃긴겁니다... A군이 저러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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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그게 뭐랄까... 감금의 문제가 아니라, 지켜보는 여성이 몇 명이냐에 따라... 아니, 이것도 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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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S님은 늘 쾌활해서 개인적으로 좋아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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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앞니 뺀다며 목검을 치켜들 때는 ㅋㅋㅋㅋㅋㅋㅋ못해요! ;ㅁ;ㅁ;ㅁ;ㅁ;ㅁ;ㅁ;ㅁ; 아크는 농담을 해도 농담같이 들리지 않는 포스를 풍긴다능... ㅠ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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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이런 글마저 메롱하면 답이 없는 애가 되잖아요.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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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trackback from: 키퍼오브게이트.....
    슬램덩크 패러디의 비극솔직히 말해서 나는 레디옹의 글을 읽은게 거의 없어요.이유는, 완결된 것만 보기 때문이죠.이미 유리가면 애장본이나 헌터x헌터,창룡전 같은게 방 안을 굴러다니는 것만으로도, 정말 충분히, 괴로워서 더 이상의 메롱작을, 고르지 않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ㄱ-;그러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KOG 찬양 감상글에 솔직히 매우 보고 싶기도 하고, 완결 원고가 이미 넘어갔다는 말을 듣고 저는 기대했죠.이렇게 : '좋아, 이번에 완결 나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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