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31일 일요일

친해진 네 사람

예전에 지하철에서 겪었던 일이다.

용산에 볼 일이 있었다. 오전에서 정오로 달리는 시간대라 비교적 한적했지만, 서 있는 사람이 2-3명 가량 있을 정도로 자리가 찬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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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했다.

아울양에게서 홍염의 성좌 3권 득. 싸인 내용은 '레디 오빠 KIN' -_-^

우리 깜찍한 탤런트 기영군이 인도에 가기 전에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역시나 감자탕은 푸짐하게 나와서, 영등포역의 방황을 보람있게 만들었다.(사아기님과 나는 서로를 몰라봐서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말을 걸지 못했다. 기억력의 문제라기보다는 둘 다 너무 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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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30일 토요일

술 마시러 가기 전에 웹서핑하다가 생각난 잡상.

주객전도라고 해야 할까나?

재밌어요. 감동이었습니다. 이번 회 정말 좋았습니다. 최고입니다. 멋지십니다! 제가 본 글 중에서 제일 재미있군요.

라는 댓글이 수백 개 달리다가...

쓰면 다 글인 줄 아나? 제발 네 인생을 돌아보고 정신 좀 차려라. 이따위 글을 쓸 시간에 알바나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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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20418/115.2

이제 술마시러 출발이다! ;ㅁ;

글이 1이라 할 때.

메모가 1이고 자료가 2며 찌꺼기가 3이다.

분량으로 환산했더니 몇몇의 장편 글에 저런 공식이 나왔다. 예외도 있지만, 저놈들이 연중에 큰 몫을 한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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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29일 금요일

이제 자야겠다.

5359/29.1

청어람에 들러서 원고 얘기 진행. 예상 외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음.(힘내자!)

만족.

15125/84.5

아아. 내 후배 넘 재밌다. >_<

처음 만날 때부터 남달리 센스가 있는 대학후배들이 있었다. 일명 떼거지 후배들로 만화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는데, 이 녀석들이 여전히 우정을 과시하며 까불고들 있다. 그 후배들 중 한 명이 내 과거의 여친인지라(나이 차이만 따지면 난 쌩도둑놈) 지금도 녀석의 홈페이지를 자주 찾는다. 애인사이가 끝나고보니 얘만큼 귀여운 후배가 없더라. ㅠ_ㅜ

최근에 이 녀석이 친구들과 함께 맛난 거 먹었다. 이야기꽃이 제대로 피워지기도 전에 한 명이 급하게 튀었나보다. 간만에 모인 기쁨이 반감되었다는 이유로 다들 배신감을 느꼈다.(물론 이것들의 끼리끼리 농담티컬 배신감이다) 녀석의 홈페이지에 그와 관련한 얘기가 주절주절 흘러나왔는데, 배신녀가 등장하여 댓글을 남겼다.

"미안해. 미안해. (변명 후) 정말 미안해."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그 다음 홈피 주인장의 댓글이 재미있어서 허락은 커녕 알리지도 않고 일부를 훔쳐왔다.


얘는... 미안하긴... 아니야....
너의 됨됨이를 몰랐던 것도 아니고...
내가 오랜만에 널 만나다 보니 감을 잃었지 뭐야.
나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지. 널 믿다니... 너도 황당했지?


아아. 귀여워 죽겠다. ㅠ_ㅜ

레디 오스 성화가 일부를 훔쳐옴

2005년 7월 28일 목요일

빌어먹을...

2759/16.3

호칭

오래전 나는 만화 스토리 작가로 데뷔할 때 대명종이라는 출판사를 처음 찾게됐다. 컨택을 받아서 가게됐던 것인데, 당시에 나에게 만나자는 제안을 하셨던 분이 본인의 글 '대행로'를 보여주셨다. 나로서는 너무나 재미있게 읽은 무협소설인지라, 그분뿐 아니라 그분이 소개한 출판사에게도 호감을 갖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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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연결

최근에 글을 쓰면서 겪게되는 가장 큰 난관이 문장의 연결이다. 단문 중심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이전에는 글을 쓸 때 노래를 흥얼거리듯 문장을 읊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때마다 딱딱 끊어진다. 음표를 박아넣은 것처럼 높낮이가 느껴졌던 문장연결이 사라지고 상황을 워프하듯 통통 튀는 것이다. 쓰면서도 '이게 과연 제대로 된 문장인가?'라며 고민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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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내겐 많은 친구가 있다. 다시 보면 환하게 웃으며 끌어안을 친구들이 너무도 많다. 눈을 부릅뜨고 서로를 까대기에 열중할 친구들은 다행히 없다. 그저 보면 반가운 친구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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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26일 화요일

더운 여름.

선풍기를 내게 향한 채 침대에 눕는다. 시트에 닿은 몸에 땀이 맺히면 몸을 돌려 선풍기 바람을 쐬게 한다. 딩굴댕굴 딩굴댕굴 만물의 영장은 끝없이 구르고, 미물은 그저 바람만 뿌린다. 이 더위에도 불구하고 귀여운 황용은 여전히 홍칠공에게 수작을 부리고, 곽정은 변함없이 어리버리하다. 몇 번째 다시 보는 영웅문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다음 편을 보지 않으면 못참게 만든다. 스토리는 둘째 치고 황용 때문에 다음을 안 볼 수가 없다. 조인은 왜 이렇게 귀엽냐고!(사길 잘했다. ㅠ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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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25일 월요일

책 정리 도중...

낱권짜리나 2권 있는 책은 다 버리려고 열심히 분류했다. 버릴 책들이 1박스 가까이 나왔다.

이걸 그냥 버릴까, 아니면 동아리에 갖다줄까 고민하면서 건성건성 그 책들을 읽었다.

그러다 삼매경에 빠졌다. -_-;;

한참을 읽던 도중 권가야님의 해와달 1권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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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24일 일요일

'옹'의 수염

이사 계획이 파토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짜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경우를 맞이할 때 늘 거울을 본다. 그리고 나에게 묻는다. "자. 지금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지?"

거울 속의 내가 말했다.

"면도를 안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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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23일 토요일

1인칭 주인공 시점

나는 국문학도가 아니다. 문과 출신도 아니다. 그래도 선생님을 제대로 만나서 국어공부는 기차게 열심히 했다.

국어공부 열심히하면 뭘 하나. 배운 것이라고는 이 문장에 은유법이 쓰였는지 의인법이 쓰였는지 밑줄 체크하고, 단어의 비슷한 말이 뭔지 반대말이 뭔지 깨알같은 글씨로 적는 것 뿐이었는데. 국어수업과는 거의 상관없이 나는 처음 소설을 연재했을 때 극악의 문장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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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22일 금요일

손을 들어야 할 때

어릴 때 배웠다. 건널목을 지날 때는 오른손을 들어야 한다고. 꽤 오랜 시간 손을 든 채 건널목을 지났다. 언젠가 친구들이 놀렸다. "바보야! 쪽팔리게 손을 들고 건너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창피함을 느꼈다. 내 주변에는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손을 들고 건널목을 지나는 경우가 없었다. 그걸 알게된 순간부터 나는 건널목을 지날 때 손을 들지 않았다. 나는 그게 성숙의 과정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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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누리 SF란 정모 때...

이게 언젯적이냐;

이 때는 참석하지 않았던 것 같다.(가 아니라 어쩌면 이 때였을 지도. 생각해보니 그 때의 난 사진찍히는 걸 싫어했다. '그래. 맘대로 찍으세요.'가 되어버린 건 '묵시강호'를 출간할 때, 자모에서 필름 2통을 다 써가며 펑펑 찍었을 때였다.)

당시의 나는 좋아하는 작가분들이 있었다. 꼭 보고싶은 작가 3분이 있었는데 다 오신댄다! 그래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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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21일 목요일

대여점 문제 #4

페이퍼백 출간에 앞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기존의 출판기획과 같습니다.

제일 중요한 부분이 작품과 작가 섭외입니다. '명성 중심의 작가섭외'와 '작품성, 대중성 혼합 중심의 작품섭외'가 흥행에 있어서 가장 큰 관건이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자본이 부족한 중소출판사가 페이퍼백 시장의 장을 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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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만화 안 그리고 산 지도 제법 됐다. 혹시나 싶어서 끄적댔는데 역시나 이상의 반응. 손이 완전히 굳어서 원하는 그림과 동떨어진 녀석이 튀어나온다. -_-;;

이번에 이사가게되면 원고대를 따로 만들어서 틈틈이 그려야겠다. 내가 뭘 믿고 이렇게 나태해졌을까. -_-

컴퓨터 탓으로 돌리고 싶긴 하다. 데스크탑이 책상을 장악하고 작업실까지 벗어나고 보니 정작 만화를 그릴 곳이 방바닥 밖에 없었던 것. 도구도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남아있던 내 원고들도 실종상태.

이사 때 꼭 책상을 하나 구입해야지. 뭐가 나오건 하루 1컷씩은 그려야겠다. 휴우.

레디 오스 성화 올림

2005년 7월 20일 수요일

[국어사전] ㄱㄴ=순

① 어둠 속에 자신의 일부를 갈무리하는 과정. 상대에 대한 직접적 '힘의 표출'보다 더 높은 효과로 발전하기 위해 거쳐야만 할 순차적인 진행방식이다. 힘을 알리는 상태가 우선이며, 표출되는 힘의 조절이 차선임을 뜻하는 단어. 여기서 언급되는 '순'은 '순서'의 줄임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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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 ㄱ

깨달음. 각성의 의미. 동물적 세계관을 벗어나 의식을 표현할 수 있는 제2의 언어, 또는 표현으로의 첫 걸음이다.

자아의 성찰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타인이라는 존재의 의식하며, 자신이 가진 것을 먼저 알리는 과정에 ㄱ이 필요하다. 즉, 사회로 통하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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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19일 화요일

깊은 잠의 서정곡

라면 2개를 쫄여서 끓이는 바람에 밥에 비벼(-_-;;) 먹었다.

다 먹고나서 글 쓰던 도중 위장이 지쳐버려서 내 몸에게 도움 요청을 했다. 내 몸은 위장을 도와 전체경보를 울린 뒤 긴급조치로 활동중지령을 내렸다. 난 자판위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내 몸이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잠시동안 계엄령을 풀고 하체의 통금을 해제했다. 비틀거리며 이불로 가서 잠에 빠졌다.

덜컥 짤린 얘기

2005년 7월 18일 월요일

잡기를 익혔다!

이글루의 메인페이지 글 수를 지정하는 걸 배우고, 내용을 뚝딱 끊어서 클릭을 해야 나머지 글을 볼 수 있게하는 담배(-_-??)기능도 배웠다.

이러니까 메인페이지가 좀 속 시원하다.

또 뭐 있나 둘러봐야지.

레디 오스 성화 올림

매력적인 사람

대부분의 사람은 괴물에게 매력을 느낀다. 누군가는 그 존재를 '영웅'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천재'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 사람이 이루어낸 결과를 보며 결정을 내리지만, 정작 사람들이 보고있는 그 존재에 대한 매력은 결과를 만들어낸 노력이다.

나는 노력만능주의자다. 에디슨이 말했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나는 그 1%의 영감마저 노력으로 만드는 것임을 주장하는 사람이다.

분야만 다를 뿐이지, 사람이 사람에게서 얻어내는 매력은 대부분 노력에 있다. 그중에 가장 일반적인 것이 성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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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17일 일요일

잠이 오지 않는다!

피곤한 건 분명하다. 재떨이가 입술에 한 번 닿았고, 커피 위에 담뱃재가 둥둥 떠다닌다. -_-

그런데 잠이 오지 않는다. 신경이 예민해져서 선풍기의 낮은 바람소리가 몇 번 주기로 들리는 지까지 알아낼 정도다. 예민하다고는 하지만 성질 더러워지는 예민함과는 다르다. 기분 좋은 예민함? 내 기억으로는 글이 제일 잘 나올 때가 이런 상태다.

근데 글은 안쓰고 이글루에서 놀고 있다. -_-

뭔가 쓰고는 싶은데...

레디 오스 성화 올림

3일 새고...

불태웠어. 재가 됐어. 뿌듯해. 잠이 잘 올 거야.

이런 각종 포만감에 젖어서 노곤함을 베개 속에 묻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는다. 커피로 버텼더니 카페인마저 산화시키라는 요구를 하는 것일까. 결국 몸을 일으켜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하지만 컴퓨터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또 고장인 거냐! 긴장하던 나는 키보드의 Num Lock이 불빛을 발하는 걸 봤다. 빌어먹을! 켜놓고 있었구나. 차분하게 의자에 앉아 게슴츠레한 눈으로 모니터의 하얀 화면을 기다렸다.

옛날에, 아주 옛날에...

나 어린 시절에 무서운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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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16일 토요일

125권째...

만화책을 읽는 중...

언제 잠자나... -_-;;

졸려 죽겠는데 아직 절반도 못 읽었다. 크흑!

레디 오스 성화 올림

2005년 7월 15일 금요일

전대협과 한총련

일어섰다 우리 청년학생들. 민족의 해방을 위해.
뭉치었다 우리 어깨를 걸고. 전대협의 깃발 아래.
강철같은 우리의 대오. 총칼로 짓밟는 너.
조금만 더 쳐다오.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
아아 전대협이여. 우리의 자랑이여.
나가자. 투쟁이다! 승리의 그 한 길로.

대학 시절에 하도 자주 불러서 지금도 외우고 있는 '전대협 진군가'다. 당시의 나는 경인총련 소속이었고, 경인총련은 한총련 소속이었다. 한총련 소속이었던 나는 '전대협 진군가'는 기억해도 '한총련 진군가'는 기억하지 못한다. 전대협 진군가가 더 부르기 편해서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느낀 노래의 의미는 '당시의 한총련이 전대협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가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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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다루는 방법은 공포가 아니다.

어느새 사람들은 인생을 공포에게 내맡기고 있다.

암에 걸리면 끔찍하게 죽는대. 담배를 피우면 몸에 해롭대. 하나님 믿지 않으면 지옥간대. 밤길 조심해, 위험하대. 공부 열심히하지 않으면 나중에 고생한대. 누가 사고로 죽었대. 경제가 어려워서 살아가기 힘들어졌대. 안녕하세요? 등등 수많은 언어들이 공포로 점철되어 있다.

매스미디어의 영향이 제일 크다. 꿋꿋하게 희망적인 정보를 안겨주는 매스미디어는 대한뉴스 밖에 없는 것만 같다. 그나마 대한뉴스도 '이런 거 없으면 국민들이 안 속아주고 우릴 쫓아낼 거야'라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의 공포심리 발동물이다.

모든 것이 공포다. 보는 것마다 사고가 터지고, 누군가에게 뭔가를 강력히 요구하고 싶을 때는 공포로 양념을 쳐서 설득한다. 사람들은 어느새 희망을 위해 살아가지 않고,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살아간다. 난자가 정자에게 물었다. "내가 보고싶어서 왔니?" 정자가 대답했다. "아니, 내 뒤에서 정자들이 쫓아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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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 14일 목요일

머리카락과 모가지

난 머리숱이 적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머리카락이 남들보다 늦게 성장하는 편. 미용실 가는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헤어스타일을 내 마음대로 조절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언제부터 미용실에 갔었는 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릴 때는 미용실 가는 것을 여자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쪽팔려했다. 물론 지금의 나는 미용실도 가고 여자목욕탕도 가... 고싶다.(;ㅁ;)

그 결과 나는 늘 장발족이다. 미용실을 자주 가지 않아서다. 그러다 때가 되면 가차없이 벅벅 잘라서 '애인과 무슨 일 있니?'라는 말을 듣거나, 애인마마에게 '너 나한테 불만있니?' 소리를 듣곤 하지만, 이 패턴은 현재까지 불변한다. 그 과정에서 느꼈던 것중 제일 큰 부분이 모가지의 고통이다.

'머리카락이 무거워봤자 얼마나 무겁겠느냐'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무거운가 보다. 장발족이 되면 여지없이 내 모가지는 통증을 호소하며 잠조차 못자게 만든다. 머리를 저을 때마다 목뼈는 '뚜두둑!'소리를 내며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그 통증은 얼마 후 어깨로 옮겨간다. 팔을 저어도 '뚜두둑' 길을 걷다 상반신이 너무 흔들려도 '뚜두둑'. 손마디를 자주 꺾으면 마디가 굵어진다고 했던가? 분명 10년 후의 내 상반신뼈는 다 통뼈가 될 것이다.(뼈들의 합체인 건가!)

단발일 때는 목의 통증이 미약하다. 그래서 상쾌하다. 그러나 나는 미용실에 자주 가지 않는다. 귀차니즘도 있지만 외모와 관련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부르스 윌리스가 내 숨겨진 아버지라고 착각할 만큼 세부적 헤어스타일이 비슷한 나로서는 머리카락으로 이마를 가리고싶은 욕구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내 손바닥놈들이 그걸 용납하지 않고 꼬박꼬박 머리를 뒤로 넘긴다. 그렇게 넘길 때마다 내 고개는 뒤로 젖혀지고, 모가지는 '뚜두둑' 소리를 낸다.

머리카락과 모가지. 지금 나는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상황에 놓여있다. 남자답지 않게 가녀린 모가지를 볼 때마다 내 손으로 '또깍?' 꺾어버리고 싶은 욕구가 든다. 왜 이렇게 내 모가지는 약할까. 만약 영화배우가 됐다면 모든 감독들이 나를 보초 배역으로 캐스팅하겠지? 주인공에게 모가지가 또깍 꺾이는 역할로...(진짜 꺾일 지도 모른다고!)

어쩔까나. 내 손에는 미용실에 갈 비용이 쥐어져 있다. 갈까? 가서 가차없이 시원한 여름을 맞이할까? 내 모가지를 위해 이 돈을 쓸까!

담배갑을 열었다. 12개비.

미용실은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모가지가 뚜둑거리는 건 참을 수 있지만 담배가 떨어지는 건 못참으니까.

언제나 내 행동을 결정하는 놈은 선택의 갈림길이 아니라 그 길 앞에 놓여진 동전 하나다. -_-

이 즉흥적인 삶에 가끔은 회의를 느낀다.

레디 오스 성화 올림

추잡: 주제는 담배냐? -_-

스킨을 바꿨다.

주제에 되도않는 스킨편집 씩이나 하면서 이글루 장식에 열을 올렸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해괴한 문자들이 나를 노려보며 '고칠 테야? 고칠테야?' 약올렸다. 묵묵히 덮자니 뭔가 억울해서 글자색 바꾸는 것을 간신히 찾았다. 하지만 바꾼 건 메인화면의 글자뿐이었다. 예전 VT시절의 색채가 되려고 노력했건만 바탕색 바꾸는 방법을 아직 못찾았다. oTL

능력이 된다면 VT시절의 느낌을 살려서 스킨을 만들어봐야겠다.

물론...

마감 끝나고.(털썩)

레디 오스 성화 올림

2005년 7월 13일 수요일

[단편] 옆집 아이를 조심하세요 (3/3)

옆집 아이를 조심하세요(3/3)


나는 몸을 뒤척였다. 꿈결 속에서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또 들렸다.

“오빠아, 일어나. 아침이야아야아야아아아.”

“우우웅…….”

나는 또 한 번 몸을 뒤척였다. 조용해졌다. 그 정적을 행복이라고 여길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끄아아아악!”

난 비명을 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와! 오빠! 오늘은 다섯 개야! 기록이다.”

눈곱을 통과하는 나의 시야 속으로 5개의 꼬부랑 털을 들고있는 희진이가 들어왔다. 난 외쳤다.

“종아리털 뽑지 말랬지!”

“잘못했어 오빠.”

“그렇게 웃으면서?”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희진이는 곧 2초 가량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뒤 다시 웃었다. 난 더 이상의 구박을 포기한 채 희진이가 내민 볼에 뽀뽀를 했다. 그러자 희진이는 잽싸게 몸을 일으키며 방을 나갔다. 옷을 갈아입으라는 무언의 명령이다. 내가 옷을 다 갈아입기도 전에 방안으로 들어온 희진이는 곧장 TV리모콘을 찾았다. 난 희진이가 리모콘의 버튼을 누르는 순간에 방을 나왔다. 일단 세수는 해야 하니까.

거실로 나오니, 둘째 누나와 셋째 누나, 그리고 희청이형이 신나게 떠들어대며 마당에서 복식탁구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불쌍한 셋째 누나만 빼고는 모두가 행복해 보인다. 난 세수를 마친 뒤, 방으로 들어왔다. 예상대로 희진이는 게임준비를 완료한 상황이었다.

'레지던트 이블 투!'

어젯밤에 희진이가 찾아와서 내밀었던 CD였다. 롤플레잉의 성격은 아주아주 쬐금만 있는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희진이는 그것을 고집했다.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근에 느껴지는 건데 이 녀석의 취향이 점점 변한다. 아니, 어쩌면 원래 취향이 이건 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나에게 맞춰주었다가 은근슬쩍 내 취향 자체를 자신의 취향에 맞추어 버리려는 음험한 음모. 희진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아이다.

“희진아. 너 말야…….”

난 오락을 하는 희진이에게 매뉴얼을 읽어주면서 슬쩍 말을 걸었다.

“응?”

“어제 너… 내 친구들한테…….”

“응? 아! 그 개떼들?”

“그래. 개떼… 아니, 바로 그거야. 오빠 친구들한테 개떼가 뭐냐?”

“잘못했어, 문영오빠.”

눈은 텔레비전을 보고, 입가는 미소를 띄우고, 손가락은 패드를 누르고, 발바닥은 통통거리고……. 도대체 ‘잘못했어, 문영오빠’라는 육성을 제외한 나머지에게서 잘못을 인정하는 무언가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드디어 내가 화났다. 아니지. 드디어 내가 화난 것을 표현하는… 이른바 ‘화냈다’를 했다.

“에잇!”

난 과감하게 게임기의 코드를 뽑아버렸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희진이를 향해 외쳤다.

“그게 사과하는 태도야? 너무한 거 아냐? 자꾸 이런 식이면 앞으로 너 안 볼 거야!”

“…….”

희진이는 많이 놀란 것 같았다. 당연하다. 내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 봤을 테니까. 희진이는 잠시 멍한 얼굴로 날 응시했다. 그리고 몇 번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뭔가 불안했다. 저 끄덕거림은 ‘그래. 난 정말 잘못했어. 나는 너무 못됐던 것이야. 반성해야지. 지금이라도 반성해야 앞으로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 거야.’보다, ‘그래. 넌 정말 겁이 없어. 나는 너무 순했던 것이야. 죽여놔야지. 지금이라도 죽여놔야 앞으로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 거야.’의 성격이 더 강했다. 난 뒤늦게 후회하며 돌아서는 희진이의 손을 잡았다.

“희, 희진아!”

탁!

희진이는 야멸치게 내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여전히 입을 다문 채 방을 나갔다. 난 곧바로 희진이의 뒤를 쫓는 대신 방안에서 이것저것 엎어버리며 분을 풀었다. 그리고 희진이에게 제대로 사과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뒤, 방문을 열었다. 희진이가 화를 내서 사과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애가 아닌가! 내가 지금 어린애를 상대로 왜 이렇게 화를 냈단 말인가! 정말로 희진이에게 미안했다. 난 진심 어린 사과를 가슴속에 담고 방을 나왔다.

“…….”

레지던트 이블 2의 세계가 여기로 나왔나? 세수하고 방에 들어갈 때까지 활기찼던 우리집이 갑자기 왜 이렇게 됐지? 고요했다. 음산한 바람이 내 주변을 휩쓸었다. 냉장고문과 욕실문과 기타 등등의 막힌 것을 개방하면 그곳에서 좀비가 우어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거실청소를 하던 엄마도, 소파에 앉아 책을 읽던 큰누나도, 히데의 사진을 파일에 붙이던 작은누나도, 탁구를 하던 3마리도……. 없었다. 몽땅 사라져 버렸다. 난 청각을 곤두세웠다. 무슨 일이냐! 지금 뭐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거냐!

“저기다!”

청각을 곤두세운 덕에, 나는 보스룸을 찾을 수 있었다. 희진이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곳은 옆집이었다. 나는 잽싸게 담으로 달려가서 옆집을 정탐했다.

“엉엉엉엉엉!”

“희진아, 울지마. 응? 그쳐, 뚝! 아줌마가 오빠를 막 혼내줄 테니까 걱정말고… 응?”

“아유! 남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게 왜 그렇게 속이 좁지? 희진아, 걱정하지 마. 금방 와서 잘못했다고 빌 거야. 응? 그러니까 그만 울어.”

“기타등등…….”

그날 나는 굶었다.



한 달이 지났다. 성필이가 목숨 걸고 우리집에 왔다. 새로 출시된 격투게임 때문이었다. 성필이는 ‘버쳐 태켄 얼라이브’의 마니아였고, 그것의 신작을 꼬박꼬박 구입할 돈이 없었다. 나는 돈이 있었고, ‘버쳐 태켄 얼라이브’의 마니아가 아니었다. 성필이는 힘이 세고 집요했다.

“그건 얍삽이잖아!”

내가 외쳤다. 성필이는 앉아서 발질만 하는 괴상하고도 얄미운 기술로 승리하고 있었다. 그게 마니아라는 작자가 할 짓이냐! 성필이가 19연승을 했을 때, 난 결국 못 참고 실전 격투를 원했다. 힘이 세면 다냐? 홈 그라운드의 이점이 뭔지 확실하게 보여주마!

콰당탕!

게임기 앞에서 성필이의 목을 조르며 뒹굴기 시작했다. 곧 성필이가 우악스러운 힘을 앞세워 상황을 뒤집었다. 깔린 채로 손을 파닥거리던 나는 잽싸게 게임패드를 쥐고 전선으로 성필이의 목을 감았다. 마지막 반전을 위해서 성필이의 목을 조르는 순간에 문이 열렸다.

덜컥.

“뜨어어어어!”

희진이가 문지방에 선 채 입을 쩍 벌리고 비명을 질렀다. 우리가 서로를 죽이는 중이라고 착각해서 지른 비명이었을까? 아니었다. 희진이는 빨개진 얼굴로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문 옆 옷장 위에 놓여진 꽃병을 들었다. 그리고 던졌다.

“뭐야! 추잡해!”

추잡이라고? 어째서! 성필이와 난 그 한 마디에 상당히 당황했다. 성필이는 추잡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한 채 멍하니 있다가 꽃에 맞았고, 난 빠른 동작으로 회피했다가 병에 맞았다. 천장이 그래서 노랗구나.

“으음…….”

내가 깨어났을 때 희진이의 옆얼굴이 보였다. 생글거리고 있었다. 그 너머로 성필이의 턱이 보였다. 싱글거리고 있었다. 내가 신음하며 몸을 일으키자 희진이가 말했다.

“깼어 오빠? 미안해.”

날 돌아보지도 않고 있다. 생글거리고 있었다. 키패드를 열심히 누르고 있다. 싱글거리고 있었다. 둘은 지금 기절했던 나를 옆에 놔두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 주둥이만 미안하면 다냐!

“왜… 왜 던진 거야, 꽃병을!”

목소리에 분노를 담았다. 하지만 희진이는 여전히 날 돌아보지 않고, 턱짓으로 성필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난 이거랑 오빠가 섹스 준비하는 줄 알았어.”

이거가 놀라서 희진이를 돌아봤다가 게임에서 패배했다. 이거는 허망한 얼굴로 고개를 꺾었다. 34연패? 대체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던 거야! 난 외쳤다.

“뭔 소리야? 남자끼리 무슨 섹… 넌 제발 나이답게 살아! 그런 말은 애들이 하는 게 아냐! 아무튼 남자끼리 무슨 섹… 그런 말 쓰지 마! 응? 그러니까… 미치겠네. 뭐라고 말해야 돼?”

그제야 희진이가 날 돌아봤다.

“나도 알 건 다 알아. 저번에 ‘절애’를 보니까 남자끼리도 잘 하더만.”

“절애가 뭐야?”

“재미난 만화영화.”

“근데? 무슨 만화영화인데 그런 게 나와?”

“그게 주제야, 문영오빠. 근데 내가 문을 열었을 때 오빠랑 이게 똑같은 짓거리를 하더라고. 그래서 던진 거니까 봐줄 거지?”

“19금을 봤구나! 내가 지금 19다! 너 미쳤니? 게다가 우린 그냥 사심 없이… 성필이 넌 왜 물러나는 거야! 장난이었잖아!”

“아, 아니… 음……. 정말 장난이었지? 그치?”

“…….”

내 참을성에 한계가 왔다. 이제는… 이제는… 인생도 싫어졌다. 난 드디어 희진이에게 마지막 폭탄을 던졌다.

“희진아.”

“응? 백수오빠, 캐릭터 새로 고를 거야? 문영오빠는 말 계속해.”

“너 이제 내 방에 오지 마.”

그 순간 희진이의 손이 굳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길에서 만나도 아는 척하지 마.”

희진이의 얼굴도 굳었다.

“앞으로 네가 우리집에 찾아오거나 날 아는 척하면 난 자취방 구해서 나갈 거야. 지금 당장 나가.”

희진이가 창백한 얼굴로 날 돌아봤다.

“정말?”

“정말.”

“그럼 뽀뽀는?”

“장난하냐?”

“나… 실연당한 거야, 문영오빠?”

“그래.”

“…….”

“…….”

“…….”

“…….”

“나 가슴 나왔는데 보여줄게.”

“나갓!”

난 희진이의 손에서 게임패드를 빼앗고, 완력으로 일으켜 내쫓았다. 잠긴 문 밖에서 희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괴로웠다.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다 못해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였다. 그래도 울음소리가 들렸다. 곁에서 성필이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날 주시했다. 그것이 더 싫어서 인상을 찌푸렸다. 눈도 감았다. 내 생활이 누군가에 의해서 흔들리는 것보다는 지금 잠깐 겪는 고통을 넘기는 것이 나으리라. 난 이를 악물고 희진이의 울음소리에 저항했다.

“어어엉… 문영오빠아…….”

울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반성했을까? 어린아이인데 내가 너무 심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버텼다. 이제는 뭐가 잘못한 것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혼란에 빠졌지만 버티고 또 버텼다. 그 이유는 자존심이었다. 내 곁에는 성필이가 있었다. 성필이에게 나 자신의 냉혹함을 보여주고만 싶었다. 하지만 희진이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건지 계속 울었다.

“우어어엉! 오빠…….”

마음이 점점 풀어졌다. 성필이도 내게 용서해주는 것이 어떻겠냐며 물었다. 결국 나는 지는 것인가. 내가 한숨을 쉬며 잠긴 문을 향해 누그러진 얼굴을 향하는 순간 희진이의 울음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엉엉엉. 오빠들 지금 그거하고 있지?”

“…….”

“…….”

“문영아. 난 집에 갈래.”

성필이가 나갔다. 열린 문틈으로 눈을 흘기는 희진이의 얼굴이 살짝 보였다. 덕분에 나는 더 독해질 수 있었다. 그 날 밤 희진이는 눈이 퉁퉁 부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난 끝까지 용서해주지 않았다.



한달 간 희진이와 나는 만나지 못했다. 그 한달 동안 나는 또 다른 괴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공허함. 내 생활패턴이 원래대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것과 다른 생활에 이끌리는 것만 같았다.

“문영아.”

수업 중에 옆에서 유나가 속삭였다. 유나는 내 얼굴 앞에 영화표 2장을 흔들었다.

“볼 거지?”

“으응…….”

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유나에게 흥미를 잃고 있음을 깨달았다. 유나의 얼굴이 예전처럼 예뻐 보이지가 않았다. 어쩌면 유나가 들고있는 영화표도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오래 전부터 기대하던 영화여서 유나가 일부러 표를 끊었던 것 같은데, 감동은커녕 고맙지도 않았다.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내 공허함은 허접이 되었다. 영화는 재미있었고 난 즐거워졌다. 유나와 함께 활짝 웃으며 극장을 나왔고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주점을 찾았다. 주점에서 레몬피처를 시킨 나는, 유나가 초청한 숨겨진 남자친구를 만나서 1시간 넘게 웃음꽃을 피웠다가 헤어졌다.

“그 따위 지문으로 끝낼 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잖아! 그리고 웃음꽃이 아니라 쓴웃음꽃이라고!”

난 아무도 없는 야밤의 골목길을 외로이 걸으며 투덜댔다. 제기랄. 스피디한 실연을 당하고나니 희진이가 더 그리워졌다. 가로등만 희미하게 비추는 쓸쓸한 골목길이다. 곧 모퉁이를 돌면 우리집이 보일 것이다. 그 앞에 희진이가 기다리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곧 고개를 가로저으며 쓰게 웃었다. 지금은 새벽 2시다, 류문영. 정신차려라. 난 현실로 돌아가서 모퉁이를 돌았다.

“어.”

기적이 일어났다. 그토록 그립던 작은 꼬마가 우리집 대문 앞 가로등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움찔하는 저 여린 어깨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숨을 죽인 듯, 울음이 섞인 듯 낮게 흘러나오는 저 목소리.

“문영 오빠…….”

다시 한 번 가슴이 뭉클해졌다. 등에 맨 쌕과 교복을 보니 바로 옆에 있는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날 기다린 것 같았다. 왜! 나같은 놈한테 왜 그렇게까지 하니, 이 바보야. 울고싶었다. 하지만 그 감동을 감춘 채 난 무뚝뚝한 표정으로 희진이를 향해 걸었다. 그리고 가로등 아래서 울먹이는 희진이의 앞에 섰다.

“나… 많이 반성했어, 오빠. 그러니까 옛날처럼 같이 놀면 안 돼? 앞으로는 버릇없이 굴지 않을게.”

안아주고 싶었지만 안을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가진 감정은 또 다른 의미의 포옹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면 안 된다, 류문영! 미친 거냐! 첫사랑에 성공만 했어도 이만한 막내딸이 있을 거다! 이렇게 깜찍한 교복을 입은 꼬마애한테 입힌 교복이 깜찍해서 이렇다니. 교복이라니? 교복! 난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악! 너 고등학생이었냐?”

“으응. 그래서 오빠한테 버릇없이 굴었던 거야. 나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도 않고 늘 어린애 취급만 하니까 심통났었어.”

“그, 그럼… 내가 지금까지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여고생한테 뽀뽀를 하고 있었단 말야?”

“…….”

희진이는 대답대신 배시시 웃었다. 하하하. 웃음만 나왔다. 어쩌란 말인가! 이제 내게 무슨 선택권이 있단 말인가! 꺼져라, 유나. 늙은게 큐티도 못한 주제에 남자도 숨겨? 희진이를 본받아! 이런 횡재가 일편단심도 한단 말이다! 난 미쳐가는 정신을 급히 바로잡고 웃었다.

“아하하하.”

“오빠… 용서해… 줄 거야?”

난 대답대신 희진이의 볼을 손끝으로 눌렀다.

“용서해 주는 거야?”

“용서는 무슨. 내가 미안해, 희진아. 너한테 사과하고 싶었는데 용기를 못냈을 뿐이야. 정말 미안해.”

“헤헤헤. 흑.”

희진이는 내 앞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흐느끼는 희진이의 뒤통수를 쓰다듬다가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얘는 고등학생이었지. 난 희진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울지마. 정말 미안.”

“안 울어. 흐… 헤헤.”

희진이는 몸을 일으키며 눈과 볼에 가득했던 물기를 손바닥으로 지웠다. 그리고 작은 몸을 내게 날렸다. 아아, 비로소 징했다. 내가 지금 이성과 포옹하는 중이구나. 희진이는 아직도 물기가 남은 눈으로 날 보며 말했다.

“나… 대학가면 오빠랑 약혼해도 되는 거야?”

“응. 네 맘대로 해.”

진심이었다. 어쩌면 너보다 내가 더 안달일지도 모르는 걸?







에필로그

“나… 대학가면 오빠랑 약혼해도 되는 거야?”

“응. 네 맘대로 해.”

문영은 희진의 눈가에 맺힌 물기를 닦아주며 환히 웃었다. 가로등 아래서 둘은 다시 한 번 기쁨을 담고 포옹했다. 그 모습을 골목 모퉁이에서 몰래 지켜보던 문영의 둘째 누나가 코웃음을 쳤다.

“재들 웃긴다. 안 그래, 희청오빠?”

“뭐 귀엽잖아? 걱정할 것도 없고. 네가 올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하자. 그럼 끝이지 뭐.”

“알아 오빠. 그래서 하는 말이야. 후훗.”

웃음을 흘리는 문희의 입술을 희청의 입술이 가볍게 덮었다. 2개의 가로등이 각각의 연인을 비추며 이따금 깜빡거렸다. 희진이네 옥상에서 홀아비인 희진이 아빠와 문영이의 엄마가 서로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골목의 4명을 가소롭게 주시하는 좋은 밤이었다.

C'est Fin

레디 오스 성화 올림(거 참 힘드네... -_-;;)

[단편] 옆집 아이를 조심하세요 (2/3)

옆집 아이를 조심하세요(2/3)

희진이는 곧 과일이 잔뜩 담겨진 접시를 들고 우리에게 걸어왔다.

“오빠. 과일 먹어.”

“어, 나는 먹으면 안 돼?”

과일을 보고 안도한 듯 성필이가 농담을 던지며 웃었다. 그러자 희진이도 농담을 받아줬다.

“백수 오빠, 이런 거 먹을 줄 알아?”

성필이가 들고 있던 샤프가 부러졌다. 성필이는 반쯤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어, 어저께 연습해서 먹을 줄 알아.”

“영물이네.”

“…….”

친해진 건가, 얘네들?

“자, 문영오빠. 아아…”

희진이는 포크에 찍혀있던 사과를 내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난 성필이의 눈치를 잠깐 보다가 입을 반쯤 벌렸다. 사과가 희미하게 미소짓는 것을 난 눈치채지 못했다.

퍼걱!

“…….”

내가 뒤로 엉덩이를 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희진이의 손이 타키온의 가속을 발하며 내 아가리를 향해 날아들었고, 내 이빨은 사과를 급히 막아서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사과가 분신술을 펼치며, 속에 감춘 포크의 추진력을 가동시켰다. 결과적으로 사과 2조각은 바닥을 뒹굴었고, 외롭게 남은 은빛 포크만 내 아가리가 포용할 수 있었다. 지금은 내 혓바닥과 입천장을 비추는 금속체의 끄트머리가 목젖을 희롱하는 중이다.

“그럼 공부해, 문영오빠.”

희진이는 깜찍하게 웃더니 몸을 일으켜 나갔다. 오후 2시부터 4시까지의 120분 동안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나는 희진이의 그림자에 감춰진 다크소울을 깨닫게 되었다. 만약 성필이가 아니라 늘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유나와 함께 왔었다면, 포크는 목젖 앞에서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덜컥.

“유나?”

“지문을 읽지 마!”



그날 이후, 난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오는 것을, 아니 아예 집 근처로 데려오는 것조차 금기시했다. 하지만 세상일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는 않는 법이다. 학원에 다닌 지 4개월쯤 지났을 때, 난 옆자리의 유나와 학원커플이 되어 있었다. 학원에서는 이미 그 사실을 다 알고있었는데 나만 모르는 괴상한 커플이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내가 고백했단다. 녹두전 집에서 술을 잔뜩 마신 내가 성필이를 밀치고 유나 옆자리에 앉더니 고백을 하면서 유나 옆구리에 손을… 우레베레레베게! 아무튼 그 날 이후 나와 유나는 공식적인 학원커플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좀 그렇다, 유나야.”

난 투덜거렸다. 밤 11시가 넘어서 집에 바래다주는 것은 다소 낯뜨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바래다주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유나라는 점이 더 문제였다. 어느새 우리 집 앞까지 조르르 쫓아온 유나가 내 옆구리에 손을 넣어 팔짱을 꼈다.

“뭐 어떠니? 어차피 난 돌아가면 오빠가 버스정류장에서부터 기다려주는 걸? 행여나 납치라도 당하면 문자 보낼 테니까 영화 한 편 찍어 줘.”

“내 실력으로?”

유나가 ‘꺄르르’웃으며 내가 죽어도 굳건히 살아남아서 해피앤딩을 만들겠다고 떠든다. 불안했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질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유나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 공인되지 않은 비극을 나누기에는 우리 집, 그리고 희진이의 집이 너무 가까웠다. 공인된 비극이 아닌가, 이건! 하지만 유나는 아랑곳 않고 내 옆구리에 볼을 묻으며 적극적 대시를 했다. 비극이고 나발이고 지금은 해피였다. 난 유나의 대담성에 감격하며 조심스레 팔을 뻗었다. 그리고 유나를 품에 안듯 감쌌다. 그 순간 유나가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하더니 말했다.

“너… 키스해봤니?”

“으, 응?”

난 당황했다. 첫키스의 경험이란 게 선택받은 자들만의 이야기라고 여기는 쑥맥 중의 쑥맥이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우리들은 집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유나는 나와 마주한 채 표정으로 분위기를 잡았다. 아마도 내 얼굴 역시 분위기를 잡고 있었을 것이다. 유나가 흡족한 듯 눈을 천천히 감았다. 난 용기를 내어 유나의 얼굴에 가까이 접근했다.

“문영오빠아!”

온 세상에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가 어쩜 이렇게 왕짜증일까? 젠장, 희진이였다. 유나와 난 기겁하며 거리를 벌린 뒤 고개를 돌렸다. 희진이는 밤 11시가 넘도록 날 기다렸던 것인지 하염없이 웃으며 팔을 벌렸다. 그리고 내 품에 뛰어들면서 사정없이 즐거워했다. 유나가 물었다.

“누구야?”

“옆집 동생.”

“또는 붙어사는…”

재빨리 희진이의 입을 막았다. 유나는 가로등에 비친 희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낮은 신음을 터뜨렸다.

“너 정말 귀엽다. 이렇게 예쁜 애, 첨 봤어. 얘, 너 이름 뭐니?”

희진이는 대답대신 날 돌아봤다.

“이건 또 뭐야?”

“응? 으응? 그… 저…….”

나와 유나는 동시에 당황했다.

“저기… 희진아. 얘는 유나라고 하는데 오빠의 친구야. 같은 학원에서 공부하는… 그러니까… 동급생?”

“재수 파티겠지. 화장빨 보니까 재수하게 생겼네.”

“호호호호호.”

유나의 간드러지는 웃음소리에서 채찍과 하이힐이 느껴졌던 것은 착각이었을까? 유나와 희진이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고 있었다. 나도 가운데 낑겨서 웃고는 있었지만, 다들 그만 웃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 때 희진이가 나를 돌아보더니 턱을 반쯤 들며 말했다.

“문영오빠.”

“응?”

희진이가 고개를 좀 더 돌려서 역동적으로 볼을 내밀었다.

“인사 안 해?”

“아.”

난 유나의 눈치를 보다가 희진이의 볼에 입술을 가져갔다. 유나가 놀란 눈으로 날 응시했다가 곧 헛웃음을 터뜨리며 뽀뽀뽀를 구경할 마음가짐을 갖췄다. 관대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긴 했지만, 희진이의 버릇에 대해서 내일이라도 따질 것같은 태세다. 빨리 이 원수의 볼에 뽀뽀해주고 유나랑 도망가야지. 오늘은 진짜 뽀뽀를 하고 싶었다고! 이, 애송이 볼따귀야! 난 원수같은 볼을 향해 후딱 주둥이를 날렸다.

쪽.

“…….”

“음?”

쪼옥.

“읍?”

지금……. 무슨?

쪼오오옥!

저, 저기 여보세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죠? 왜 희진이의 볼이 방향전환을 해서 입술과 교체된 거죠? 이 입술은 또 왜 이렇게 안 떨어지죠? 억? 에일리언인가? 방금 들어온 게 뭐죠? 아니, 여보세요! 하나님, 내 볼을 꽉 잡고 있는 이 고사리 손의 ‘꽉’이 3년 전 공업시간에 배운 프레스급 파워예요! 하나님, 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은데 자꾸 더 들어와요! 으앙, 막 돌아다녀요! 뭐야, 이 꼬마! 뭐 하는 거야, 지금!

“파하!”

희진이는 내 입술 등등을 무려 5초나 음미… 크아악! 음미한 뒤에야 시원하게 떨어지며 상쾌한 밤공기를 들이켰다. 그리고 만세를 부르듯 치켜들었던 손을 옆구리에 가져가며 여왕님의 자세를 취했다. 곧 희진이의 손 한 개가 스스로의 턱을 치켜세우더니 더 여왕님같은 자세를 만들었다. 희진이는 창백해진 유나를 향해 진정한 여왕님의 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깔깔깔깔깔! 턱없는 애송이! 감히 내 문영오빠의 첫 키스를 강탈하려고 해? 나조차도 아껴두고 있었던 걸? 머리가 어떻게 된 언니 아냐? 엄마 젖이 아직 뇌에는 도달하지 않은 것 같은데, 집에나 가서 맘마밀이나 충분히 먹고 온 뒤에 까불지 그래?”

“오 마이 갓!”

이이이이이게 저저저 귀귀여운 여여자 아아이가 내내내뱉을 수 있는 마마마말인가? 나와 유나는 끝없이 어버버하며 희진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희진이의 거침없는 웃음소리가 동네방네 퍼지면서 두 집안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문영아, 왔으면 들어오지 여기서 뭐하… 어머, 희청오빠! 잠옷 참 이쁘다! 어디서 샀어?”

“으, 으응. 문희 네 잠옷도 이쁜걸?”

“안녕하세요. 옆집에 살면서 한 번도 인사를 드리지 못했네요. 이사온 지 꽤 됐는데…….”

“아아. 이번에 이사오신 분이시군요. 우리 희청이와 희진이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자주 인사드리겠습니다.”

소란에 놀라 뛰쳐나온 주제에 이웃상봉을 하고 있다. 그 새 유나는 주변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는 것은 잊지 않았다. 난 새벽 5시까지 일기장에다 서러운 나의 첫 키스 경험담을 적으며 눈물을 쏟았다.


학원 자습실. 나와 유나를 위시하여 또 다른 4명의 친구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차라리 새로 이사를 가버리는 것이 어때?”

“후후후……. 울 엄마랑 누나들과 분가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어. 아니면, 그 애의 오빠가 차바퀴에 얼굴이 깔려버리던지.”

“그렇게 할까? 현진이 너 차 몰고 다니지?”

“이봐…….”

애초에 갑작스레 튀어나온 희진이 얘기였다. 제대로 된 대안이 나올 리 없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지푸라기 하나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희진이의 그 처참막지한 포스를 깔아뭉갤 대안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것들 장난포스도 만만치 않았다.

“아가리를 찢어버릴까?”

“아가리를 찢어버린다. 좀 진지하게 얘기해 봐.”

“이번에 정부에서 새롭게 어린이 삼청교육대를 신설했다는데, 거기에 보낼까?”

“정말?”

“내 말을 믿어주려는 놈도 있었군.”

“배 짼다. 농담하지 말고 진지하란 말야!”

“우리가 단체로 너희 집에 놀러 가는 것은 어때?”

“응?”

성화의 의견에 모두가 정신을 집중시켰다. 성화는 모두를 한 번씩 돌아본 뒤 말을 이었다.

“이에는 삼, 눈에는 안경이라고 했어. 그 계집애의 말하는 싸가지가 문제라면, 우리들은 좀 더 강력한 말공격을 펼치는 거야. 설마 여섯 명이 애 하나를 못 당하겠니?”

“…….”

“흠. 그것 괜찮군.”

“…….”

“성화는 언제나 똑똑해서 마음에 들어.”

“성화야, 너 혼자 뭐 하냐? 생각 좀 하게 입 좀 다물어.”

모두가 불평했지만, 성화는 자신의 의견을 강력하게 고집했다. 생각해보니 나쁜 의견도 아니었다. 다수의 파워가 무엇인가! 백두산까지 진격했던 국군도 개떼에 밀려 장동건을 죽이지 않았던가. 결국 우리들은 성화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성화가 신이 나서 외쳤다.

“좋았어! 지금 당장 가자!”

“그래! 개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가자!”

빠앙!

성화가 폭죽까지 터뜨리며 미래를 밝혔다. 그 순간 우리들은 잽싸게 침묵했다. 또 하나의 폭죽을 터뜨리는 성화의 뒤에서 학원 수위아저씨와 장수생 형들이 찌를만한 것을 들고 미소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요일 오후 1시.

“흠. 동네가 마음에 드는군. 무척 깨끗해.”

풍문에 의하면 남의 집에 초대를 받아본 적이 전혀 없다는 성화에게서 즐거운 콧노래가 흘렀다. 6명의 결사대는 마음속으로 ‘타도 강희진’을 외치며 우리 집을 향해 걸었다. 이번에야말로 희진이가 작살나는 날이리라. 얼마 전처럼 희진이가 나를 향해 굴러오기를 기대했지만, 대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난 희진이의 등장을 기원하며 초인종을 무시했다.

“엄마! 문 열어!”

쾅쾅쾅쾅쾅!

주먹을 쥐고 열심히 대문을 두드렸다. 최대한 커다란 소리가 나도록. 그러면서 희진이의 집을 향해 눈을 흘겼는데, 목표물이 좀처럼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새 대문이 열렸다. 난 잽싸게 대문을 잠그고 다시 두드렸다.

“안 열렸어, 엄마! 다시 열어줘!”

쾅쾅쾅쾅쾅!

“어, 문영 오빠.”

비로소 옆집 2층에서 희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고개를 돌렸다.

“어어, 희진아! 집에 있었구나!”

“응. 근데 그건 또 웬 개떼들이야?”

“응?”

“희진이 졸려. 잠깐만 잤다가 밤에 갈게, 오빠.”

희진이는 피곤함이 담겨진 음성으로 짤막하게 말한 뒤 모습을 감췄다. 내가 반박할 틈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또한 내 주변의 개떼들이 힘을 발휘할 타이밍도 없었다.

“음…….”

난 지원견들을 돌아봤다.

“너희들… 오늘 우리집에서 밤 샐 생각 없냐?”

“훗날의 기약이 더 행복할 것 같은데?”

“난 좋아! 밤 새자!”

“성화, 넌 안돼.”

“…….”

“…….”



세월이 흐르고 흘러 다음날이 되었다. 일요일. 희진이가 아침부터 쳐들어오는 날이다. 나는 어제 오후의 충격으로 말미암아 몸져누운 채 코를 골고 있었다. 아침 8시. 때르르르르 울려대는 시계의 알람소리를 닥치게 하고서 재차 단잠에 빠져든 내 주위로 음험한 그림자가 접근했다. 물론 그랬을 것이라는 얘기다.

“문영오빠아?”

귓불을 간질이는 나긋한 음성에 난 잠깐 미소를 지었다.



2회 끝(2회로도 나눌 수 없다니... ㅠ_ㅜ)

레디 오스 성화 올림

[단편] 옆집 아이를 조심하세요 (1/3)

옆집 아이를 조심하세요(1/3)

나는 어느새 온 몸이 흠뻑 젖었음을 깨달았다.

“젠장! 땀에 목욕을 하네.”

뇌와 상관없이 심장이 다이렉트로 성대를 조작해서 투덜거렸다. 돈을 아낀다는 목적을 갖춘 뜻깊은 이사라지만, 내 입장에서는 머리칼이 쥐어뜯기는 이사였다. 하! 다수의 의견을 충실히 반영한 민주주의 원칙적 익스프레스? 젠장. 빌어먹을! 지축을 향해 ‘강하게’ 내달리는 물건들을 진정시키는 임무는 누가 다 맡았는데? 이걸 지금 누가 다 옮기고 있냐고! 아빠라도 살아 계셨다면 그나마 부자유친이라도 하며 훌러덩 옮기기라도 하지. 엄마, 큰누나, 둘째 누나, 셋째 누나, 작은 누나 중에서 누가 날 도와 이 골동품 목재 장롱을 옮기겠냔 말이다. 그래, 돕고는 있었다. 내 반대편에서 다섯 아낙들이 낑낑대며 애를 쓰고는 있었다. 그저 있었다. 젠장! 허망하다고!

“허망하다고!”

“문영아, 그렇게 불평만 하지말고 힘 좀 써봐.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잖니, 응?”

엄마가 구슬땀을 흘리며 외쳤다. 유후, 눈물난다. 지금 장롱 바닥의 고도는 어느 쪽이 더 높은데 저런 말을 찬연한 웃음과 함께 내뱉을 수 있으실까.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요? 혹시 지금 맞들어주고 있는 존재가 백짓장 아니세요? 이런 관점에서 난 외쳤다.

“정말 힘 안 쓸 거예요? 누나들, 나 2대 독자야! 이러다가 나 정말로 죽겠다구! 우리 집 혈통을 몽땅 외간남자에게 넘길 거야?”

“힘쓰고 있잖니이?”

“그래. 나도 힘을 다 쓰는 중이야. 어머. 근데 이거 너무 무겁다 얘.”

“제기랄! 이 공주병 유전인자들! 거기 옆집 형! 집안으로 들어가던지, 아니면 와서 도와주던지 선택해요! 형만 없으면 이 장롱이 스스로 기어 들어갈 거라구!”

드디어 참고있던 말을 뱉었다. 초면의 옆집형에게 이렇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장롱의 도움이 컸다. 대들보 빠진 남대문을 지탱하고 있는 기분이었단 말이다.

“아아…….”

그나마 유서 깊은 양가댁 형인지 아니면 벌써 4명의 여시에게 혼백을 잡아먹힌 것인지 담 너머의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장독대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누나들을 힐끗 바라보는 모습에 안도감이 들었다. 도와주러 올 것이 분명하다. 불쌍한 것. 4명 누나 중에 하나라도 건져볼 생각인가 본데, 그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자네의 인생은 깃털 빠진 닭껍질로 포장될 운명이라네.

“도와드릴게요.”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그 형의 상판이 내 인생을 깃털 빠진 닭껍질로 포장했다. 하지만 참았다. 중요한 것은 장롱이니까.

“이여!”

그래도 지금만큼은 믿음직했다. 옆집형이 돕자마자 장롱이 안방으로 워프했고, 냉장고가 부엌을 향해 질주했으며, 세탁기가 ‘비켜비켜!’외치며 욕실을 향해 굴러갔다. 그 순간부터 누나들은 자아를 되찾았다. 옆집형의 곁에 들러붙으며 십수년 수련을 해왔던 각종 아양과 칭찬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어깨에 있지도 않은 먼지도 털어 준다. 셋째 누나가 힘들다며 아리땁게 주저앉기도 한다. 아직 옮길 물건이 많다고! 지금 주걱 들고 햇빛 가릴 때가 아니라고! 잡다한 물건이라도 제발 옮겨 줘! 아직은 가출외인도 아니니까 현재진행형 불효녀란 말야, 이 망할 누나들아! 누나들이 여시짓을 하고있는 동안 엄마 혼자 다른 잡동사니를 옮기느라 얼마나 고생… 오 쉐엣! 뭐야, 엄마! 아빠 무덤에서 손가락 하나 튀어나왔겠다! 다 늙어서 새파란 젊은이에게 그 표정 뭐야? 눈매가 왜 엎어진 초승달인데!

“요즘 젊은이들은 참 힘도 좋아, 호호호. 아참! 내 정신 좀 봐. 저기 학생. 이거 얼음 넣은 꿀물인데 좀 마시면서 해요.”

그거 내꺼잖아.

“아유, 뭘 먹고 자랐기에 이렇게 키가 크나?”

내가 더 커, 엄마.

“학생이 참 미남이네. 이런 아들 하나만 있으면 얼마나 좋아?”

원한다면 가출해 주겠어. 엄마가 웬놈에게 해피할수록 난 점점 시니컬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옆집형이 각종 여시짓을 헤쳐가며 끊임없이 짐을 옮겨준 덕분에 대부분의 이삿짐이 해결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난 안도의 숨을 쉬며 엄마가 줬다 뺏은 꿀물대신 시데르칸(CIDER CAN)을 음미했다. 그 때 누군가가 나의 등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오빠, 안녕?”

고개를 돌린 내게 대뜸 반말로 인사를 던져온 소녀. 초등학교 5-6학년쯤 될 듯 앳된 얼굴이었다. 귀여웠다. 눈망울이 크고 아직 아기살이 남은 볼에 보조개가 담겨진 얼굴. 정말이지 너무 귀여워서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엄청난 큐티퀄리티를 가진 소녀였다. 이래서 로리카와 변태가 있구나! 난 말을 더듬었다.

“어… 아, 안녕? 근데 넌… 누구? 이, 이 동네에 사니?”

“응. 저기서 모큐한 짓거리를 하는 사람이 우리 오빠야.”

“응?”

“저기 봐. 잘하면 여관 가겠네.”

“응?”

뭔가 상황이 진정되질 않았다. 내가 지금 누구한테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모큐는 뭐고 여관은 또 누구 입에서 나온 말이지? 이 언밸런스아스트랄한 언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입술이 왜 내 앞의 귀여운 소녀 얼굴에 붙어있는 거냐. 정신이 혼미해질 것만 같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소녀가 가리키는 검지를 따라 시선을 옮겼을 때, 더 혼미할 상황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난 옆에 있는 소설책 박스를 급히 들어서 표적을 향해 달려갔다.

“비켜봐, 거치적거리잖아!”

둘째 누나의 손금을 봐주면서 꼭 볼을 맞대야만 했었던 옆집형은 나로 인해 깜짝 놀라며 물러섰다. 나는 거침없이 둘 사이를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소설책 박스가 너무 무겁고, 내가 서둘러 이동했기 때문에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다. 위치측정을 잘못했던 것이다. 둘째 누나가… 그나마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공주병에 걸릴 자격이 있는 둘째 누나가!

“아, 좀 도와줘요!”

우엉! 옆집형 쪽으로 비켜주는 바람에 둘이 안았다! 둘째 누나의 볼이 옆집형의 가슴에 붙었다. 우엉! 내가 좀 더 심하게 인상을 찌푸리며-어쩌면 우는 얼굴이었을 지도- 옆집형을 쏘아보자, 빨개진 얼굴이 배실배실 웃었다.

“아, 다 끝난 줄 알고…….”

옆집형은 다시 주변의 짐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둘째 누나가 새침한 얼굴로 날 쏘아봤지만, 겁날 것이 없었다. 그보다 더 새침한 얼굴 3개가 둘째 누나를 쏘아봤기 때문이다. 첫날부터 독식하면 다른 누나들이 활짝 웃으리? 외모에 맞는 지혜를 갖추시게, 둘째 누님.

“오빠는 이름이 뭐야?”

“엇?”

어느새 그 소녀가 내 뒤에 놓여있었다. 난 소녀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이 오빠의 이름은 류문영이란다. 넌 이름이 뭐니?”

소녀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덕분에 놀라서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를 중단했지만, 아마도 내가 잘못 본 것일 지도 모른다. 어느새 소녀는 보조개가 살짝 들어간 웃는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희진이. 강희진.”

“와. 예쁜 이름이구나? 몇 살이야, 희진아?”

그 순간 소녀, 아니 희진이가 다른 방법으로 웃었다. 뭐랄까, 표정에 별다른 변화를 준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데 뭔가 달랐다. 희진이는 말했다.

“벙찐 것. 숙녀 나이를 물어보는 건 실례야.”

“아, 아. 그, 그렇지. 미안해, 희진아.”

급히 대답해서 넘기기는 했지만, 정말로 벙쪘다. 그래. 숙녀라고 치자. 나이를 물어보는 건 실례가 맞다고 치자. 근데 벙찐 것이라……. 난 짧은 시간에 최대한 고민했다. 이건 욕 아닐까? 지금 이 여자애는 나랑 한 판 붙어볼 마음을 먹고있는 것이 아닐까? 이 동네 꼴통이 기선제압을 하기 위해 맞짱을 요구하는 중이 아닐까? 별별 생각을 다 떠올리다가 ‘내가 이런 소리까지 들어가며 살아야 하나?’라는 부분에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비로소 화가 났다.

“저기… 근데… 너 말야.”

희진이를 향해 나는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그 순간 희진이가 웃었다.

“응? 왜?”

생글거렸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앵두처럼 통통한 어린아이의 입술이 예쁘게 비틀렸다. 보조개가 곱게 들어갔다. 내가 미쳤지. 이렇게 귀여운 애한테 화를 내려고 했단 말인가! 정신차려, 류문영! 5년만 젊었다면 난 이 애의 신발을 핥아서라도 곁에 붙어있어야 했을 거라고!



그날 이후로 희진이는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 집에 놀러왔다. 이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마치 오래된 여동생-이건 또 무슨 여동생을 말하는 것인가!-처럼 희진이와 나는 사소한 부분까지 공통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좋아하는 책은 환․타․지. 싫어하는 책은 안․환․타․지. 좋아하는 게임은 R․P․G. 싫어하는 게임은 AN․R․P․G. 어느 것을 하던지, 희진이와 나는 죽이 척척 맞으며 새벽 2시까지 밤을 지새곤 했다. 옆집 양아치형이 희진이를 데려가는 시간까지 말이다. 난 그런 일과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와 같은 종목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그렇게 20여 일이 지났다. 나는 학원에 등록을 하고 밤 10시가 넘어서 귀가를 해야하는 새로운 스케줄러의 종이 되어야 했다. 난 재수생이었다. 세상 모든 부모님이 다 그렇듯, 엄마도 내게 ‘3수는 꿈도 꾸지 말라’고 하셨다. 일단은 초반을 필사적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 재수생의 의무다. 나는 꼭두새벽 8시에 일어나서 학원에 나가 수업을 받고, 꼭두새벽 23시에 집에 돌아와야 했다. 그런 내가 희진이와 이전처럼 놀아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희진이는 입시학원에게 서방님을 빼앗겼다고 대성통곡을 했다. 언제 내가 그 행복한 서방님의 자리를 꿰어찼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계약서를 작성하고 말았다.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24시간 모두를 희진이에게 넘겨준다는 노예 계약서. 이것이 작성된 뒤에야 무사히 학원에 갈 수 있었다.

한 달이 지났다. 토요일 오후 2시에 나는 색다른 귀가를 했다. 학원에서 친해진 성필이라는 녀석과 이번 모의고사에 대해 심도 깊은 토론을 하자고 약속한 결과물이었다. 나와 같이 집으로 가던 중, 성필이가 눈을 번득였다.

“저기, 문영아. 쟤, 너 동생이냐?”

“엥? 내 평생소원? 엄마를 바꾸면 가능은 한데…….”

“농담말고. 저기 200미터 전방에서부터 100미터 전방에 이르기까지 두 팔 쫙 벌리고 입도 찢어지게 열어놓은 채 굴러오는 여자애 말야.”

“어?”

비로소 난 성필이가 바라보는 곳으로 눈매를 찌푸렸다. 그리고 아직 80미터 전방에 있는 희진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걸 200미터 전방에서 봤다는 성필이의 600만불스러움을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젠장. 귀찮게 됐다. 저 녀석… 보나마나 날 붙잡고 대마왕 흐림님을 아작내자고 땡깡 부릴 텐데. 으으… 저걸 떼어버릴 좋은 아이템이 없을까?

“문영 오빠!”

희진이는 다짜고짜로 내 품에 털푸덕 안겼다. 그와 동시에 볼을 내민다. 평소에는 이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옆에는 보는 눈이 있었고, 거기에 달린 입은 말도 할 줄 안다. 학원에 소문이 쫙 퍼지겠지. 누구누구는 애 하나 잡아먹는 중이었대요. 아아, 난처했다.

“문영 오빠?”

희진이가 볼을 내민 채 경고적으로 웃었다. 난 더욱 당황했다. 버텨야 하는 건가! 이걸 기회로 삼아서 남녀칠세 부동석을 가르쳐야 하는 것인가!

“문영 오빠.”

희진이가 볼을 내민 채 적대적으로 웃었다. 더더욱 당황했다. 버텨야 하는 건가! 이걸 기회로 삼아서 이 녀석의 각종 버릇을 고쳐줘야 하는 것인가!

“문영 오… 훗.”

희진이가 볼을 내민 채 덤덤하게 웃었다. 내가 미쳤지. 버틸 게 따로 있지.

쪽.

난 희진이가 내민 볼에 뽀뽀했다. 이걸 해주지 않으면 희진이는 삐진다. 그 삐짐은 내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으나, 나를 제외한 주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희진이의 오빠인 희청이형이 제일 먼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곤 했다. 그렇게되면 희청이형이 곧장 우리 집으로 달려와서 자신을 뒤덮은 마(魔)를 큰누나, 둘째 누나, 셋째 누나, 작은 누나에게 전달한다. 그 때부터 내게 직접적 영향력이 행사되는데, 특이한 것은 그 영향력 행사물 중에 엄마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체 어떤 경로를 통해서 그 여파가 엄마에게까지 미치는 지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그 날의 반찬이 달라진다는 것. 어쩌면 희청이형의 여파가 엄마에게 직접… 아! 우! 에! 생각하기 싫다.

“누구야, 얘?”

성필이가 놀란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난 솔직하게 대답했다.

“옆집 동생이야.”

“또는 붙어사는 애인이라고도 하지.”

희진이가 시니컬하게 중얼거렸다.

“희진아…….”

내가 불평했지만, 희진이는 아랑곳 않고 ‘애도 낳아야 할텐데…….’라며 한 술 더 떴다. 대체 얜 몇 살일까? 요즘 애들이 어떻게 되려고 이 정도의 상승문화를 습득한단 말인가! 인터넷의 폐해가 확실하다, 이것은! 아무튼 희진이는 자신의 언어표현을 폐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 확실했다.

“귀여운 애네.”

성필이가 이 말을 내게 해 주었던 시간은 대략 5분쯤 지난 뒤였다. 어떤 말을 해주어야 가장 무난할지 생각해본 결과인 것 같았다. 나라도 그런 대사가 나왔을 것이다.

“알아요. 다들 그렇게 말해요, 백수같은 오빠.”

희진이가 곧바로 웃으며 대답했다. 어쩌면 그렇게 짧은 시간에 성필이의 금기를 눈치깠을까. 성필이는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긴 머리카락을 전혀 꾸미지 않고 다니기 때문에, 가끔 그런 말을 듣곤 했다. 하지만 그래서 금기는 아니었다. 3개월 전에 성필이 여자친구가 ‘네가 백수처럼 보여서 싫은 게 아니라 영원히 백수가 될 것 같은 포스가 풍겨서 싫어’라며 찼던 것이 금기의 시초였다. 성필이의 눈에 금세 핏발이 돌았고, 두툼한 손바닥이 조금씩 상승했다. 하지만 희진이를 때린다는 것은 개나 소도 못한다. 성필이는 희진이의 귀여운 얼굴을 보며 잠시 울상을 짓다가 나에게 살기를 뿌렸다.

“얘… 정말 귀엽다, 문영아. 깨물어서 죽이고 싶어.”

“자자. 들어가자, 들어가.”

난 성필이의 떨리는 몸을 열심히 밀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희진이는 뒤따라 들어왔다. 못 들어오게 막고 문을 잠가봤자, 장독대로 넘어오겠지. 들어가자마자 성필이의 몸이 움찔했다. 성필이의 등에 가려져 보이진 않았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보나마나 엄마와 둘째 누나, 셋째 누나가 복식탁구를 하고 있겠지. 난 보지도 않고 말했다.

“또 다이어트냐?”

“마, 말시키지 마! 컥! 허억!”

양쪽 코트를 뛰어다니며 열심히 탁구를 하는 셋째 누나가 측은하기만 했다. 엄마랑 셋째 누나 VS 둘째 누나랑 셋째 누나의 탁구대결인 것이다. 물론 이 특별한 복식탁구는 셋째 누나가 저울대에 올라가서 비명을 지른 다음날부터 1주일간 벌어지는 이벤트다.

방문을 열었을 때, 나와 성필이보다 먼저 희진이가 입장했다. 성필이가 처음 발견했을 때처럼, 희진이는 방바닥을 몇 번 구르더니 곧장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그리고 1미터 전방의 텔레비전 스위치를 무시한 채 사방으로 손을 휘젓다가 날 돌아봤다.

“오빠. 리모콘 어디 있어?”

“그냥 손으로 눌러도 켜져. TV란 그런 거야.”

“잡소리 닥치고, 리모콘 어디 있냐니까?”

“TV위에…….”

성필이가 측은한 표정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내 존재가 절대로 측은함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게임 세이브파일을 여는 희진이에게 말했다.

“희진아. 오빠는 내일 모레 모의고사거든?”

“응. 알아.”

돌아보지도 않은 희진이의 대답이었지만 난 상쾌해졌다. 성필이도 나를 응시하던 측은한 눈빛을 지웠다.

“오, 아냐? 그럼 말이 통하겠다. 오빠는 오늘 공부해야 해. 얘랑 같이.”

“해.”

성필이가 날 다시 그 눈빛으로 돌아봤다.

“무, 물론 해야지. 근데 말야, 희진아. 오빠들이 공부하는데 네가 옆에서 게임을 하고 있으면 방해가 될까 안될까?”

“공부하는 법에 체계가 안 잡힌 돌대가리들이면 방해가 좀 되겠지.”

대체 너 몇 살이야! 그 정도 어휘력이면 교통사고로 대가리가 뽀개져도 업그레이드가 되어서 이계로 간다고! 난 침착을 가장하며 웃었다.

“미안해, 희진아. 오빠가 좀 예민해서 주변에 누가 있으면 공부를 잘 못하거든. 오늘만 희진이 네가 양보해라, 응?”

그제야 희진이가 날 돌아봤다.

“내일은?”

“내일은 물론! 일요일이잖아? 공부해야 하거든. 월요일에 모의고사라니까.”

희진이는 잠시 침묵했다. 세이브 파일이 열리며 게임의 시작을 알렸으나, 희진이는 키패드를 쥔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성필이와 내가 타임스톱에 괴로움을 느껴 자살을 고민할 즈음이 돼서야 희진이는 말했다.

“다음 모의고사 때도 이럴 거야?”

“다음 모의고사가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어?”

“뭐든 인터넷.”

“다음 번엔 안 그럴게.”

희진이는 키패드를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터뜨렸다.

“알았어. 그럼 뽀뽀.”

난 거침없이 희진이의 볼에 뽀뽀했다. 희진이는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더니 밖으로 나갔다. 아아, 해결됐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때도 있구나. 난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밀며 성필이에게 위업을 과시했다. 얄밉게도 성필이는 여전히 그 눈빛이었다.

덜컥.

닫혔던 방문이 다시 열렸다. 내가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희진이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맴매야, 오빠.”

“응?”

“난 내 서방, 벼락치기 따위로 키우지 않았어.”

퍽!

야구배트였다. 어릴 때부터 저 배트만 있으면 두려울 게 없었다. 3타석에 1안타는 꾸준히 만들어주는 행운의 배트. 내가 그렇게 아끼고 믿었던 배트가 지금은 나의 옆구리로 날아들고 있었다. 물론 피했다.

퍽!

배트의 끄트머리가 포물선을 그리며 성필이의 배꼽 아래를 강타했다.

“어억!”

성필이가 맞은 곳을 부여잡고 창백한 얼굴이 되어 고꾸라졌다. 심하게 아파한다. 배꼽 아래였을 뿐이라고! 그렇게 아파할 필요는 없잖아! 혹시 너 섰던 거냐? 희진이를 보고? 이 놈!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었다. 2번째 스윙이 허벅지 측면을 노리고 있다.

퍽!

“으어억!”

다행히 이번에도 피했다. 더 다행인 것은 대타로 맞은 성필이의 부위가 엉덩이라는 점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아파한다. 혹시 너 치질인 거냐? 지저분한 놈!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었다. 3번째 스윙이 무릎 측면을 노리고 있다! 좋아, 이 녀석! 점점 표적이 낮아지는 것을 보니 배트가 무거운 게로구나. 내 예상은 적중했다.

퍼억!

희진이는 배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윙 도중에 떨궜다. 3타석에 1안타는 꾸준히 만들어주는 행운의 배트가 약속을 지켰다. 난 믿는 배트에 발등을 찍히고 말았다.

“아아아아아아아!”

“공부 열심히 해.”

희진이가 방긋 웃곤 문을 닫았다. 나와 성필이는 전장을 기어가서 손을 마주잡았다. 내가 물었다.

“괘… 괜찮냐, 성필아?”

“괜찮아. 너는?”

“됐어, 괜찮아. 이제… 공부하자.”

“1시간만 쉬자.”

성필이는 진정한 친구인 건가! 우리는 서로 고통스러운 곳-물론 자기 것을!-을 매만지며 시간에게 위로 받았다. 그리고 똑같이 심호흡을 한 뒤 공부를 시작했다.

“영어가 제일 문제지?”

“응. 이 문제집 적중률이 제일 높다니까 믿어보자.”

우리는 두툼한 문제집의 첫 장을 넘겼다. 익숙한 단어들이 보였다. 성필이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페이지를 넘기자는 제안을 했다. 둘째 장도 익숙한 단어와 문제들 투성이다. 3번째 장을 넘겼을 때에야 우리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손때가 묻지 않은 진정한 페이지의 시작이었다.

“16번 문제부터! 음… 해석해봐, 성필아.”

“뭐냐, 음. ‘해리가 탔기 때문에 어째서 전철이 이것일까?’ 맞나?”

“철학은 소피스트와 에피쿠로스 학파만 공부하면 된댔어. 게다가 이건 영어문제집이잖아.”

“아, ‘해리가 어째서 전철을 타야 했는가?’겠다.”

“오케이! 보기에 뭐가 있지? 1번은 아닌 것 같아. 붉은 차가 3배 빠르기 때문이라니? 무슨 의미야?”

“2번, 갑자기 어두워져서 먹혔을까 두렵기 때문이다가 아닐까?”

“그것보다는 3번이 더 적당할 것 같아. 갈아타도 10Km가 넘기 때문에 돈이 더 든다.”

“4번, 이 세상은 단수가 아니다는 아니겠지?”

“문제가 이상해.”

우리가 열성적으로 벼락치기에 빠져있을 때였다. 노크소리가 들렸다. 성필이와 난 본능적으로 긴장하며 문을 응시했다. 귀엽지만 소름도 끼치는 얼굴이 문틈을 통해 기어 나왔다.



1/3회 끝(쳇! 글자수 제한이 있을 줄이야... -_-;;)

레디 오스 성화 올림

[단편] 피리의 도시

피리의 도시

피리가 좋다. 그저 일직선의 가늘고 긴 통에 구멍 몇 개를 뚫은 것만으로도 그 속에 진한 우주를 담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 생명이 있다.

김경훈은 그 생명의 소리가 자신의 숨결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김경훈은 피리가 좋고 피리소리가 사랑스러웠다.

월화수목금토의 여섯 날 중에서 어떠한 날도 김경훈은 자유를 갖지 못했다. 일은 끝이 없었다. 좁은 땅덩어리에 둥지를 튼 회사이건만, 추구하는 영역은 세계였다. 김경훈이 평생을 노력한다고 해서 회사의 모든 욕망을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김경훈은 노력하는 사원이었으나 시간이 노력의 분량을 결정해줬고 그 보답 또한 결정되어 있었다.

삐.

일요일의 하늘을 가린 구름이 느닷없는 피리소리에 놀라 모세의 바다처럼 갈라졌다. 햇살이 피리소리의 용기를 얻어 일직선의 광채를 거리에 쏟았다. 일요일이 좋았다. 일요일의 시간을 모두 할애하여 '광장의 거리'에서 피리를 부는 것이 좋았다. 그것은 김경훈만의 즐거움이 아니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피리를 부는 이 사내를 좋아했다. 햇살이 없어도 피리소리에 표정이 밝아졌고 바람이 없어도 피리소리에 상쾌함을 느꼈다.

삐이. 부후후우. 우후우.

광장의 거리는 일요일을 위한 거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김경훈의 피리소리를 듣기 위해 모였다. 연인이 서로를 기대며 빙긋 웃었고, 노인이 악다문 입술로 즐거운 침묵을 지켰다. 끝없이 들릴 듯 거리를 떠도는 피리소리가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김경훈이 피리소리를 더 좋아하게 된 이유는 이들의 행복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경훈은 피리소리가 좋았고 거리가 좋았다. 자신의 피리소리를 듣고 행복에 겨워 발놀림과 어깨의 떨림을 발하는 것을 구경하는 게 피리 부는 사내의 낙이었다.

"축하하네. 자네는 이 회사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네."

어느 날, 사장이 찾아와 웃었다. 피리에 열중하듯, 김경훈은 자신의 직업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 보답이 돌아왔다.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김경훈이 직장의 시간 속에서 가장 많은 성과를 올리는 것은 당연했다. 회사는 보답했다. 더 높은 급여. 그리고 더 많은 직장에서의 시간을 주었다. 사장은 사소한 웃음으로 김경훈의 일요일을 원했다.

김경훈은 고민했다. 직장의 일도 사랑하지만 더욱 사랑하는 것은 피리였다. 김경훈 일요일에 피리를 불고싶었다. 김경훈은 솔직히 말했고 사장이 대답했다.

"자네에게 실망이네. 나는 자네의 모든 것이 필요하지, 어떤 것이 필요한 건 아니야. 자네는 나를 속였네. 자네의 지난 일요일들은 자네를 위한 일요일이 아니라 일을 더 능률적으로 하기 위한 휴식의 시간이었네. 그것을 또 다른 열정에 쏟았다는 것을 나는 용납할 수 없네. 자네는 지금 피리와 나를 선택할 시간이 왔네. 결정하게."

김경훈은 사장에게 말했다.

"저는 제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렇기에 제게 주어진 시간에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만약 일요일에 피리를 불지 않으면 저는 더 이상 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직장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직장을 잃어도 피리가 있다면 저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장은 김경훈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공감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장 역시 김경훈처럼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자였다. 사장은 피리를 질투했고, 그 질투를 솔직하게 말했다. 김경훈은 회사를 그만 두어야 했다.



피. 피이부우우.

김경훈은 일요일이 아닌데도 광장의 거리에서 피리를 불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일요일의 사람이 그 변화에 놀라며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사람은 요일과 함께 변화된 것이 있음을 알았다. 김경훈의 곁에는 은빛의 그릇이 놓여있었다. 일요일의 사람은 화요일의 사람이, 그리고 일주일의 사람이 되기로 결정하고 은빛 그릇에 천원을 넣어주었다. 김경훈은 고갯짓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 날 밤까지 김경훈의 피리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삐루루. 루루비부우루루.

어느 날부터 광장의 거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람들이 가득 찼다. 김경훈을 해고했던 사장도 피리소리에 매료되어 광장의 거리를 찾았다. 거리의 이름은 '피리의 거리'로 바뀌었다. 언제나 은빛 그릇은 지폐로 가득 찼고, 그것은 김경훈이 마음껏 피리를 불 수 있는 제2의 힘이 되었다. 김경훈은 은빛 그릇의 행복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고마웠기에 더욱 열심히 피리를 불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노래들을 아낌없이 불렀으며,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더 즐겁게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김경훈의 피리소리는 언제나 새로웠고 사람들은 하루도 그 아름다운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젊은 실업가가 찾아와 말했다.

"당신의 피리소리를 더 많은 사람이 듣게 할 방법이 있습니다."

김경훈은 그 말이 반가웠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자신의 피리소리를 듣게된다면 그 이상의 행복이 없을 것만 같았다. 김경훈은 젊은 실업가의 손을 잡고 기뻐했다. 젊은 실업가도 기뻐하며 말했다.

"당신은 제가 만들어낸 작은 방안에서 피리를 불어야 합니다. 그 피리소리는 전파를 타고 거리마다 배치된 스피커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할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출근을 하면서 당신의 피리소리를 들을 수 있고, 일을 할 때도 창 밖의 거리에서 들려오는 당신의 피리소리에 행복해할 수도 있습니다."

"좋습니다."

김경훈은 말했다. 그러자 젊은 실업가가 빙긋 웃으며 은빛 그릇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렇다면 이 더러운 그릇은 필요 없습니다. 저는 스피커가 있는 거리마다 금빛 상자를 둘 것입니다. 거리의 사람들은 그곳에 당신의 피리소리 한 곡 당 10원을 넣게 됩니다. 이제껏 당신에게 천 원을 주던 사람들도 10원을 넣겠죠. 하지만 당신의 피리소리를 듣는 사람이 무려 천 배로 늘어나게 되니까 오히려 이익입니다. 게다가 한 곡 당 10원이기 때문에 하루동안 열심히 피리를 불면 당신은 부유해질 것입니다."

김경훈은 젊은 실업가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김경훈은 젊은 실업가가 만들어준 작은 방 안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피리리. 부우. 피이리리.

피리소리는 이제 수많은 거리를 맴돌았다. 사람들은 기뻐했다. 그리고 아낌없이 금빛 상자에 10원을 넣었다. 김경훈은 하루에 열 곡을 넘게 불렀고 사람들은 100원이 넘는 자신의 돈을 아깝게 여기지 않았다.



삐리. 삐후후.

어느 날 밤 김경훈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다가 피리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피리소리가 아니었다. 김경훈은 자신의 피리소리가 흐르는 스피커가 어느 거리에 있는 지를 모두 알고있었다. 그 거리는 모두 다 자신의 집과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김경훈은 자신의 집 주변에 흐르는 피리소리를 따라서 걸었다. 멀지 않은 곳에 새로 단장한 스피커가 있었고, 그 옆에는 비취빛 상자가 있었다. 김경훈은 신기해하면서도 그 상자 안에 10원을 넣었다.

세상은 피리소리로 가득 찼다. 수많은 거리 속에 흐르는 피리소리가 김경훈을 즐겁게 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부르는 피리소리는 때로는 참신하고 아름다웠으며, 때로는 거칠고 투박했고, 때로는 듣기에 불편할 정도로 괴로운 것이 있었다. 개중에는 자신의 피리소리를 어설프게 흉내낸 것도 있었다. 하지만 김경훈이 세상이 피리소리로 가득 차는 것을 기꺼워했다.



어느 날 김경훈이 젊은 실업가를 찾아가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놀라운 곡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만들었으나 너무 아름다운 곡이에요. 저는 아직까지 이렇게 좋은 곡을 만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젊은 실업가도 크게 흥분하며 기뻐했다. 김경훈은 젊은 실업가의 앞에서 피리를 불었다.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피리소리는 훌륭했다. 아름다운 선율과 가슴을 조이는 바람의 속삭임. 노래가 흐르는 동안 젊은 실업가의 마음은 알 수 없는 뭉클함에 젖어 천국을 떠도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피리소리가 끝났을 때 젊은 실업가는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와 냉담하게 말했다.

"노래가 너무 길어요. 맙소사. 5시간 짜리 피리소리라니! 당신은 미쳤습니다.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곡이 짧아야 해요! 그것을 4번만 부르면 하루가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40원으로는 스피커의 수리비조차 감당할 수 없습니다."

김경훈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노래를 엉뚱한 이유로 배척하는 젊은 실업가에게 화가 났다.

"우리가 돈을 버는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저는 당신이 설치한 스피커의 숫자만큼 돈을 받습니다. 저야말로 맙소사로군요. 시간이 길다고 이 노래를 부르지 말라는 겁니까? 당신은 제 피리소리를 좋아하지 않는군요. 지금의 피리소리는 제가 불렀던 그 어떤 곡보다도 훌륭했습니다!"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다시 말하겠습니다. 짧은 노래를 부르세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더 이상 제 작은 방에 들어오지 못 할 것입니다!"

김경훈은 괴롭게 말했다.

"저는 당신의 작은 방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당신의 작은 방과 스피커를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리소리를 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는 반갑지 않습니다. 피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도 피리를 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기쁜 마음으로 피리소리를 들어주던 사람들이 지금은 그 괴로운 소리 때문에 귀를 막고 있습니다! 아시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피리소리를 싫어하게 됐다고요!"

"저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김경훈씨! 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얼마전부터 저는 그 사람들을 위해 귀마개를 만들어 팔고 있으니까요."

김경훈은 화를 내며 젊은 실업가의 저택을 나왔다. 그리고 자신 덕분에 새 이름을 얻었던 '피리의 거리'로 갔다. 그러나 그곳의 이름은 또 다시 바뀌어 있었다. 김경훈은 '피리소리 금지'의 팻말이 붙어있는 '냉혹한 거리'에서 망연자실했다.

"왜 이런 팻말이 붙어 있습니까?"

김경훈은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사람은 김경훈의 손을 뿌리쳤다.

"피리소리가 싫어졌소. 그 지독한 불협화음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란 말이오!"

"제 피리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싫소. 나는 피리소리 따위에 내 돈 10원을 투자할 마음이 없소."

"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냥 들어만 주십시오."

김경훈은 막무가내로 피리를 불었다. 화를 내며 귀를 막으려던 사람이 비틀거렸다.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피리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이봐요! 이곳에서 피리소리는 금지…"

김경훈의 뒤에서 달려오던 경찰이 스스로의 손으로 입을 막았다. 경찰도 부근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김경훈의 피리소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가 거리의 중앙에 붙어있던 '피리소리 금지'의 팻말을 부서버렸다.

김경훈은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은빛 그릇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다시 옛 거리를 찾아 피리를 불었다. 사람들은 다시 모였다. 비록 예전처럼 많은 사람들은 아니었으나 김경훈은 행복했다.



삐리이. 피피이.

어느 날부터 김경훈의 피리소리는 힘을 잃었다. 오랫동안 굶었기 때문에 김경훈의 숨결은 미약했다. 사람들은 은빛 그릇에 10원 이상의 돈을 넣지 않았다. 그들은 피리소리가 10원의 가치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미 금빛 상자에 적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경훈은 40명에게 얻은 400원으로 하루를 버텨나가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김경훈의 숨결을 미약하게 했다. 사람들은 점점 희미해지는 김경훈의 피리소리에 감동을 잃어갔다.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김경훈의 숨결은 더 미약해졌다.

피이이. 휘이이이.

"여보세요?"

젊은 실업가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들려왔다. 김경훈은 젊은 실업가의 작은 방이 필요할 지경에 이르렀다. 힘을 잃은 김경훈은 자신의 피리소리가 그리웠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

김경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자신이 작은 방안에서 다시 피리를 불게된다면 피리소리의 가치는 영원히 10원짜리가 될 것이다. 김경훈은 언젠가 들었던 참신한 음색의 피리소리를 기억했다. 자신의 뒤를 따라 피리소리를 사랑하게된 자의 노래일 것이다. 결국 김경훈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누군가의 피리소리를 위해 피식 웃었다.

삐이이! 부후우 삐이이이리!

거리와 떨어진 곳의 사람들조차 놀라며 거리로, 거리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너무도 아름다운 피리소리에 모두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사람들은 거리를 메웠다. 힘차게 들려오는 피리소리. 사람들은 김경훈의 피리소리에 넋을 잃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천국의 음악을 들었다.

한 곡이 끝났다. 김경훈은 파리해진 얼굴로 말했다.

"며칠 전에 제 집을 팔고 그 돈으로 목욕을 했습니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었고, 병든 제 몸을 잠시나마 견딜 수 있는 약도 사서 먹었습니다. 이제 제게 남은 것은 이 은빛 그릇과 피리, 그리고 피리소리와 저뿐입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김경훈의 피리소리가 남긴 여운에 취해있었다. 그 때 김경훈이 외쳤다.

"천원을 주십시오."

사람들은 귀와 가슴에 담겨있던 피리소리가 말끔히 가시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미친놈'이라 외쳤다. 그러나 김경훈은 그 외침을 듣지 못했고, 그렇게 외친 사람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다시는 피리를 불 수 없고, 다시는 은빛그릇의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사내가 차게 식어가고 있었다. 김경훈은 피리소리에 대한 최후의 애정만을 남기고 거리를 떠났다. 차게 식은 김경훈의 곁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은빛 그릇에는 어느새 천원짜리가 가득 담겼다. 거리는 다시 피리의 거리가 되었다.



이 글은 반 대여점 운동에 오랜 시간 노력하시는 ANTIKIM(김경훈)님께 선물했던 단편입니다.(김경훈님은 ‘라스트 판타지’ ‘학교가지마’ 등 다수의 만화스토리를 창작한 ‘작가집단 혼’의 멤버로 활동중이십니다.)

레디 오스 성화 올림

머피의 창작법칙

글을 쓰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핑계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그 종류는 각각이지만, 결론은 '마감 날짜를 미뤄달라'다.

21세기가 작가에게 준 가장 큰 혜택.

"컴퓨터에 문제가 생겼어요!"

타자기 쓰시던 작가분들은 어떤 핑계를 대셨을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작가들은 빌게이츠의 파란화면을 사랑한다. 물론 짝사랑이라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진짜로 파란 화면이 앞을 가리면 세상 누구보다 괴로워할 사람이 작가들이다.

21세기가 작가에게 준 가장 큰 저주.

"믿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정보화시대다. 컴퓨터 핑계를 대는 작가들은 졸지에 개나 소가 되어버렸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핑계거리를 찾는 작가들이 늘고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컴퓨터가 대세다. 그 이유는 정말로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서 마감을 챙기지 못하는 작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알면서도 넘어가주시는 고마운 기자분들 때문이다.

이제부터 본론.

글이 제일 잘 써지는 때가 언제인지 아는가?

아침? 새벽? 밤? 기분이 좋을 때? 좋은 창작물을 접해서 감명받았을 때? 우울할 때? 사귄지 100일째 되는 날, 애인마마께서 "나 딴 남자 생겼어. 일단 너랑은 끝이고, 이 두 남자 중에서 누가 더 괜찮은 지 얘기 좀 해줄래?"라고 말해서 충격먹었을 때?

이런 레벨이 아니다. 글이 제일 잘 써질 때는 마감에 직면했을 때다. 우리네 인생은 언제나 벼락치기 아닌가!

놀랍게도 이럴 때 꼭 컴퓨터가 시비를 건다. 마치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빠는 순간에 30분 동안 오지 않던 버스가 모퉁이를 돌며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놈은 몸상태가 좋지 않음을 호소한다.

그럴 때 나는 생각한다.

'컴퓨터가 이래도 글은 쓸 수 있어. 글부터 써야 해. 아무리 버벅거려봤자, 286을 쓰던 시절보다는 낫잖아? 한글 1.7을 쓰던 시절을 생각해라! 컴퓨터가 버벅거리는 것쯤은 내가 알 바 아닌 것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난 컴퓨터를 점검한다. 그렇다. 낚인 것이다. oTL

생각해보라. 마감 때 글을 제일 잘 쓴다고해도 마음은 언제나 도망칠 구멍을 찾고 있다. 이보다 더 좋은 탈출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래, 성화야. 넌 글을 좀 더 열심히 쓰기 위해서 컴퓨터를 고치는 중인 것이야. 아이, 이쁜 녀석이기도 하여라. 고쳐고쳐. 이건 다 글을 위해서야. 고쳐고쳐. 난 행복한 마음가짐으로 고친다. 물론 그 속마음 속에는 불안감이 싹튼다.

평소같으면 컴퓨터의 사소한 문제쯤 쉽게 해결한다. 하지만 마감을 앞둔 상태에서의 점검은 반드시 비극을 부른다. 열에 아홉은 컴퓨터를 포맷하기에 이른다.

포맷이 끝이 아니다. 평소같으면 포맷을 해도 금방 원상복귀시킨다.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예외다. 빌 게이츠가 모든 작가들에게 원성을 사는 이유는 마감직전의 컴퓨터 프로그램 설치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명 LCV(Lan Card Virus)라 불리는 극강의 바이러스는 운영체제를 새로 까는 순간부터 '이 작가가 마감중이냐, 아니냐.'를 결정한다. 그리고 마감중임을 확인하면 가차없이 랜카드의 기능을 정지시킨다. 존재하는 모든 IP에 KIN모드가 발동되고, 어떠한 드라이버 설치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때 각종 하드웨어의 드라이버는 바이러스의 지시대로 모습을 감춘다. 예외적으로 모습을 감추지 않는 드라이버도 있는데, 그것은 랜카드 드라이버를 찾는 작가에게 염장을 지르기 위한 목적성을 갖고 있다.

이 머피의 법칙이 며칠 전에 나를 찾아왔다. 하도 당해서 그것에 적응된 나는 다음날 망설임 없이 용산으로 향했다.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며 버텨봤자 소용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덕분에 컴퓨터는 복구되었다.

지금...

한글97이 안된다. oTL

꾹 참고 한글2002를 사용하고 있다. 원래 한글2002는 사전기능만을 쓰기 위해 깔아둔 것이었다. 그게 덕이 되어 글이 중단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잡다한 스트레스가 의욕을 꺾어서 마감글은 팽개치고 이글루 놀이만 한다. -_-

이 글만 쓰고 진정한 뒤에 마감글에 전념할 생각이다. 과연? 아냐, 전념해야만 한다.



마감 때가 되면 왜 이렇게 도피하고 싶을까? 가장 잘 써지는 때라는 것을 잘 알면서 왜 이렇게 딴짓을 하고 싶을까? 혹시 컴퓨터는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주인을 위해 자해하는 것일까?

컴퓨터가 잠잠해지면...

분명히 또 다른 머피의 창작법칙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 -_-



레디 오스 성화 올림

대여점 문제 #3

대여점 문제 #3

페이퍼백.

비록 해적판이긴 했습니다만, 국내에서 가장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책자가 바로 페이퍼백입니다. 라이센스료를 지급하지 않은 불법책자라서 제작비가 거의 들지 않았고, 그만큼 가격이 저렴해서 초중고교생에게 컬렉션의 취미를 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명 '갱지'라 불리는 최저가의 종이질로 인쇄를 할 경우, 이 페이퍼백은 지금도 저렴한 가격으로 출시할 수 있습니다. 인쇄는 처음 필름을 만들 때만 많은 비용이 들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수가 많아질수록 순수익이 높아지게 되죠. 2쇄판, 3쇄, 4쇄 등등 부수를 늘려도 1쇄 때 제작한 필름이 그대로 사용됩니다. 후기의 일반본, 양장본을 염두에 둔다면 페이퍼백의 제작원가는 대단히 미미하며 권당 700-800원 선으로도 2만부 이하의 손익분기점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페이퍼백의 장점은 단연코 가격입니다. 대여점이 대여가격을 50원으로 낮춘다고 해도 650-750원의 가격차 밖에 나지 않습니다. 기존의 가격차이가 3,000원 이상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줄어드는 셈이죠. 하지만 대여점은 페이퍼백의 가격을 극단적으로 낮추는 게 불가능합니다.

제작과 관련된 이유로서 페이퍼백은 최저의 질로 출간되어야 합니다. 장시간 구독하면 책 자체에 문제가 생길 정도의 질이 필요한 상품이죠. 몇몇 출판사가 페이퍼백을 출시했다가 실패한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출판사는 '페이퍼백을 출시한 적이 있으나 실패했었다'라는 것을 이유로 들어서 그것의 실패를 확정짓는데, 페이퍼백의 가장 중요한 점을 간과한 채 출시해서 생긴 문제일 뿐입니다. 고급의 질로 출간한 페이퍼백은 제대로 된 페이퍼백이 아닙니다. 3,500원짜리 책을 페이퍼백으로 만들어서 3,000원에 팔면 누가 사겠습니까. -_-

'독자들은 예쁜 책만 산다'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주장일 뿐입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저는 그 말이 주정으로 들립니다. 페이퍼백은 미워도 되며, 아니 미워야 하며 처음에 언급했듯 최저의 제작단가로 최악의 책이 되어야 합니다. 내용이 중요할 뿐이죠.

그럴 경우, 대여점 시스템에서는 페이퍼백이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대여점은 책의 손실을 독자에게 넘길 수도 있고, 또는 관대하게 자신이 책임질 수도 있습니다. 그게 어느 쪽이건 대여점은 다시 페이퍼백을 구매해야 합니다. 반품하기가 어려운 것은 둘째 치고(애초에 페이퍼백을 출시할 때 반품불가 정책을 펼쳐야 살아남습니다) 안정적인 대여를 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품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페이퍼백에 대한 독자의 직접적 구매력이 강화됩니다. 흔히 돌아다니는 말로 '군것질 한 번만 참고 책을 사라'는 얘기가 직접적으로 실현될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대여점이 갖고 있던 '값이 싸다'의 장점이 판매시장 쪽에도 구축됩니다.

이제 남은 것은 '가깝다'의 장점 흡수입니다.

대여점에 대해 아시는 분들은 반품제도가 무엇인지도 아실 겁니다. 요즘 대여점이 어렵다고 하시는데, 이것은 대중창작계의 몰락 이전의 문제입니다. 대여점의 수를 축소발표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여전히 대여점은 포화상태입니다. 그래서 망하는 대여점이 생기는 겁니다.

그 이유가 반품제도입니다. 대여점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던 것은 '적은 투자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특이성 때문에, 한 동네에 3-4개의 대여점이 들어서도 손해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언급한 '적은 투자'가 바로 '반품제도'입니다. 이 반품제도를 믿고 수요와 공급의 한계치까지 대여점이 만들어진 상황에서, 갑작스레 출판사가 '반품제도'를 막아버렸습니다. 이로 인하여 대여점은 그동안 쌓인 거품이 일시에 빠지며 대 포화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대여점은 아직도 포화상태이며, 거품이 모두 빠지기 전까지는 고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 과정이 말로는 쉽지만, 직접 당하는 대여점의 입장에서는 미칩니다. 적은 투자를 한 만큼, 다른 업종으로의 변환이 쉽지 않죠. 죽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연명해야 할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런 대여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현재 얻고있는 수익 이상의 것을 얻어내어 거품이 자리잡은 공간을 메꿔야 합니다. 즉, 대여점은 자신들의 거품을 메꿔줄 새로운 수익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을 것이라는 얘기죠.

그렇기 때문에 대여점은 페이퍼백의 판매를 환영할 것입니다. 서점, 편의점, 문구점뿐 아니라 대여점 자체도 판매망으로 이용하자는 얘기입니다. 대여점이 '대중창작 전문서점'으로 바뀌는 거죠. 이렇게 되면 대여시장이 가지고 있었던 '가깝다'의 장점을 그대로 흡수하게 됩니다.

이제 판매시장은 페이퍼백에 관련해서 '싸고 가깝다'라는 부분으로 대여점과 대적하게 됐습니다. 남은 것은 '좋다'의 독점입니다.

아무리 값이 싼 페이퍼백이라고 해도 안팔릴 책은 안팔립니다. 재미없는 책을 보느니 군것질을 할 독자들이 우리나라의 대다수입니다. 그것을 제일 먼저 인지하는 쪽은 출판사입니다. 초기의 페이퍼백은 분명 양으로 밀어붙이겠지만(이것은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페이퍼북 자체에 대한 홍보력을 주니까요) 중기에 들어서 그 중 상당수가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출판사들은 페이퍼북이라고 해도 팔릴만한 작품만을 선정하게 될 공산이 큽니다. 그 때 제일 먼저 따지는 부분이 작품의 퀄리티입니다. 책 자체가 페이퍼북이기 때문에, 원고의 그림보다는 스토리를 더 중시하는 현상이 벌어지겠죠. 하지만 페이퍼북에 이어서 출간되는 일반본과 양장본은 그림에도 독자분들의 많은 투자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럴 경우, 페이퍼북의 대상에서 제외된 작가들은 어떻게 될까요? 뭘 먹고 살죠? 신인들은? 페이퍼북은 일반본과 양장본의 수익까지 포함하여 제작되는 책인데,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신인작가들을 과연 쓸까요?

이들은 대여시장을 이용하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 대본소 작가들이 따로 있고 잡지 연재의 판매 시장 작가들이 따로 있었던 것처럼, 대여 시장 작가군이 형성됩니다. 과거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죠. 신인들의 데뷔기회나 밀려나간 노장들의 공간으로 대여 시장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대여시장은 마이너로서의 역할을 하고, 그 공간을 통해 판매시장인 메이저로의 진출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대여시장과 판매시장의 분리이며, 이전의 안정된 시장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사항은 페이퍼백 시스템에 한정된 이야기입니다. 이제부터는 또 다른 파급효과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페이퍼백의 제일 큰 장점은 컬렉션 문화의 형성입니다. 국내의 컬렉션 문화가 가장 활성화된 때는, 바로 이 페이퍼백이 양산된 시기였습니다. 이것은 페이퍼백에만 극한되지 않고 코믹판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결과적으로 판매시장의 활성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만 초기의 현상 때는 페이퍼백이 코믹판을 훨씬 앞섰기 때문에, 메이저 출판사들이 서둘러서 라이센스의 습득에 열을 올렸죠. 페이퍼백이 가라앉은 이유는 메이저의 라이센스 습득에 따른 법적대응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주장하는 새로운 페이퍼백은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고, 코믹판이나 양장본도 같이 출간하는 동일 출판사의 페이퍼백입니다. 충분히 병행 발전할 수 있는 상품이며, 출판사의 시장조절 또한 가능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적절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작가와 출판사의 일부 희생이 필요합니다. 작가는 페이퍼백에 대한 수익을 최소화하는 데 동의하고, 출판사 또한 페이퍼백의 책정가를 최소화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어느 한 쪽이라도 페이퍼백 자체만으로 수익을 얻기 위한 모습을 보인다면, 이 상품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페이퍼백은 시장질서의 조율과 컬렉션 문화의 형성, 그리고 상품홍보의 관점이 더 우선적이어야 합니다. 컬렉션에 맛들인 독자들은 분명히 코믹판과 양장본에도 관심을 갖게될 것입니다. 또한 대여시장은 대여시장대로 페이퍼북에 참여하지 못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시장을 형성하며, 대중창작 서점으로서의 이익에 추가보상을 받는 경우를 얻게 될 공산이 큽니다. 이제까지 주가 되었던 대여상품이 서브적인 존재가 되어 수익을 주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대여시장은 규모가 축소되면서 '싸고 가깝다'의 명맥을 유지하게 됩니다. 판매시장은 '좋고 가깝고 내꺼다'라는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게 될 것입니다. 즉, 대여시장의 기반이 흔들리는 결과겠지만, 현 시점의 대여시장에서 가장 큰 문제인 '대여점의 위기'가 해결됩니다. 대여시장은 축소되지만, 대여점의 수익은 '대중창작 전문서점'으로써 확대되니까요.

다음 글에서는 페이퍼백 출시에 대한 과정을 언급하겠습니다.

레디 오스 성화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