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13일 수요일

머피의 창작법칙

글을 쓰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핑계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그 종류는 각각이지만, 결론은 '마감 날짜를 미뤄달라'다.

21세기가 작가에게 준 가장 큰 혜택.

"컴퓨터에 문제가 생겼어요!"

타자기 쓰시던 작가분들은 어떤 핑계를 대셨을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작가들은 빌게이츠의 파란화면을 사랑한다. 물론 짝사랑이라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진짜로 파란 화면이 앞을 가리면 세상 누구보다 괴로워할 사람이 작가들이다.

21세기가 작가에게 준 가장 큰 저주.

"믿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정보화시대다. 컴퓨터 핑계를 대는 작가들은 졸지에 개나 소가 되어버렸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핑계거리를 찾는 작가들이 늘고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컴퓨터가 대세다. 그 이유는 정말로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서 마감을 챙기지 못하는 작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알면서도 넘어가주시는 고마운 기자분들 때문이다.

이제부터 본론.

글이 제일 잘 써지는 때가 언제인지 아는가?

아침? 새벽? 밤? 기분이 좋을 때? 좋은 창작물을 접해서 감명받았을 때? 우울할 때? 사귄지 100일째 되는 날, 애인마마께서 "나 딴 남자 생겼어. 일단 너랑은 끝이고, 이 두 남자 중에서 누가 더 괜찮은 지 얘기 좀 해줄래?"라고 말해서 충격먹었을 때?

이런 레벨이 아니다. 글이 제일 잘 써질 때는 마감에 직면했을 때다. 우리네 인생은 언제나 벼락치기 아닌가!

놀랍게도 이럴 때 꼭 컴퓨터가 시비를 건다. 마치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빠는 순간에 30분 동안 오지 않던 버스가 모퉁이를 돌며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놈은 몸상태가 좋지 않음을 호소한다.

그럴 때 나는 생각한다.

'컴퓨터가 이래도 글은 쓸 수 있어. 글부터 써야 해. 아무리 버벅거려봤자, 286을 쓰던 시절보다는 낫잖아? 한글 1.7을 쓰던 시절을 생각해라! 컴퓨터가 버벅거리는 것쯤은 내가 알 바 아닌 것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난 컴퓨터를 점검한다. 그렇다. 낚인 것이다. oTL

생각해보라. 마감 때 글을 제일 잘 쓴다고해도 마음은 언제나 도망칠 구멍을 찾고 있다. 이보다 더 좋은 탈출구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래, 성화야. 넌 글을 좀 더 열심히 쓰기 위해서 컴퓨터를 고치는 중인 것이야. 아이, 이쁜 녀석이기도 하여라. 고쳐고쳐. 이건 다 글을 위해서야. 고쳐고쳐. 난 행복한 마음가짐으로 고친다. 물론 그 속마음 속에는 불안감이 싹튼다.

평소같으면 컴퓨터의 사소한 문제쯤 쉽게 해결한다. 하지만 마감을 앞둔 상태에서의 점검은 반드시 비극을 부른다. 열에 아홉은 컴퓨터를 포맷하기에 이른다.

포맷이 끝이 아니다. 평소같으면 포맷을 해도 금방 원상복귀시킨다.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예외다. 빌 게이츠가 모든 작가들에게 원성을 사는 이유는 마감직전의 컴퓨터 프로그램 설치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명 LCV(Lan Card Virus)라 불리는 극강의 바이러스는 운영체제를 새로 까는 순간부터 '이 작가가 마감중이냐, 아니냐.'를 결정한다. 그리고 마감중임을 확인하면 가차없이 랜카드의 기능을 정지시킨다. 존재하는 모든 IP에 KIN모드가 발동되고, 어떠한 드라이버 설치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때 각종 하드웨어의 드라이버는 바이러스의 지시대로 모습을 감춘다. 예외적으로 모습을 감추지 않는 드라이버도 있는데, 그것은 랜카드 드라이버를 찾는 작가에게 염장을 지르기 위한 목적성을 갖고 있다.

이 머피의 법칙이 며칠 전에 나를 찾아왔다. 하도 당해서 그것에 적응된 나는 다음날 망설임 없이 용산으로 향했다.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며 버텨봤자 소용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덕분에 컴퓨터는 복구되었다.

지금...

한글97이 안된다. oTL

꾹 참고 한글2002를 사용하고 있다. 원래 한글2002는 사전기능만을 쓰기 위해 깔아둔 것이었다. 그게 덕이 되어 글이 중단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잡다한 스트레스가 의욕을 꺾어서 마감글은 팽개치고 이글루 놀이만 한다. -_-

이 글만 쓰고 진정한 뒤에 마감글에 전념할 생각이다. 과연? 아냐, 전념해야만 한다.



마감 때가 되면 왜 이렇게 도피하고 싶을까? 가장 잘 써지는 때라는 것을 잘 알면서 왜 이렇게 딴짓을 하고 싶을까? 혹시 컴퓨터는 이런 내 마음을 알고 주인을 위해 자해하는 것일까?

컴퓨터가 잠잠해지면...

분명히 또 다른 머피의 창작법칙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 -_-



레디 오스 성화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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