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13일 수요일

대여점 문제 #3

대여점 문제 #3

페이퍼백.

비록 해적판이긴 했습니다만, 국내에서 가장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책자가 바로 페이퍼백입니다. 라이센스료를 지급하지 않은 불법책자라서 제작비가 거의 들지 않았고, 그만큼 가격이 저렴해서 초중고교생에게 컬렉션의 취미를 살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명 '갱지'라 불리는 최저가의 종이질로 인쇄를 할 경우, 이 페이퍼백은 지금도 저렴한 가격으로 출시할 수 있습니다. 인쇄는 처음 필름을 만들 때만 많은 비용이 들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수가 많아질수록 순수익이 높아지게 되죠. 2쇄판, 3쇄, 4쇄 등등 부수를 늘려도 1쇄 때 제작한 필름이 그대로 사용됩니다. 후기의 일반본, 양장본을 염두에 둔다면 페이퍼백의 제작원가는 대단히 미미하며 권당 700-800원 선으로도 2만부 이하의 손익분기점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페이퍼백의 장점은 단연코 가격입니다. 대여점이 대여가격을 50원으로 낮춘다고 해도 650-750원의 가격차 밖에 나지 않습니다. 기존의 가격차이가 3,000원 이상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줄어드는 셈이죠. 하지만 대여점은 페이퍼백의 가격을 극단적으로 낮추는 게 불가능합니다.

제작과 관련된 이유로서 페이퍼백은 최저의 질로 출간되어야 합니다. 장시간 구독하면 책 자체에 문제가 생길 정도의 질이 필요한 상품이죠. 몇몇 출판사가 페이퍼백을 출시했다가 실패한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출판사는 '페이퍼백을 출시한 적이 있으나 실패했었다'라는 것을 이유로 들어서 그것의 실패를 확정짓는데, 페이퍼백의 가장 중요한 점을 간과한 채 출시해서 생긴 문제일 뿐입니다. 고급의 질로 출간한 페이퍼백은 제대로 된 페이퍼백이 아닙니다. 3,500원짜리 책을 페이퍼백으로 만들어서 3,000원에 팔면 누가 사겠습니까. -_-

'독자들은 예쁜 책만 산다'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주장일 뿐입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저는 그 말이 주정으로 들립니다. 페이퍼백은 미워도 되며, 아니 미워야 하며 처음에 언급했듯 최저의 제작단가로 최악의 책이 되어야 합니다. 내용이 중요할 뿐이죠.

그럴 경우, 대여점 시스템에서는 페이퍼백이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대여점은 책의 손실을 독자에게 넘길 수도 있고, 또는 관대하게 자신이 책임질 수도 있습니다. 그게 어느 쪽이건 대여점은 다시 페이퍼백을 구매해야 합니다. 반품하기가 어려운 것은 둘째 치고(애초에 페이퍼백을 출시할 때 반품불가 정책을 펼쳐야 살아남습니다) 안정적인 대여를 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품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페이퍼백에 대한 독자의 직접적 구매력이 강화됩니다. 흔히 돌아다니는 말로 '군것질 한 번만 참고 책을 사라'는 얘기가 직접적으로 실현될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대여점이 갖고 있던 '값이 싸다'의 장점이 판매시장 쪽에도 구축됩니다.

이제 남은 것은 '가깝다'의 장점 흡수입니다.

대여점에 대해 아시는 분들은 반품제도가 무엇인지도 아실 겁니다. 요즘 대여점이 어렵다고 하시는데, 이것은 대중창작계의 몰락 이전의 문제입니다. 대여점의 수를 축소발표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여전히 대여점은 포화상태입니다. 그래서 망하는 대여점이 생기는 겁니다.

그 이유가 반품제도입니다. 대여점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던 것은 '적은 투자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특이성 때문에, 한 동네에 3-4개의 대여점이 들어서도 손해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언급한 '적은 투자'가 바로 '반품제도'입니다. 이 반품제도를 믿고 수요와 공급의 한계치까지 대여점이 만들어진 상황에서, 갑작스레 출판사가 '반품제도'를 막아버렸습니다. 이로 인하여 대여점은 그동안 쌓인 거품이 일시에 빠지며 대 포화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대여점은 아직도 포화상태이며, 거품이 모두 빠지기 전까지는 고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 과정이 말로는 쉽지만, 직접 당하는 대여점의 입장에서는 미칩니다. 적은 투자를 한 만큼, 다른 업종으로의 변환이 쉽지 않죠. 죽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연명해야 할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런 대여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현재 얻고있는 수익 이상의 것을 얻어내어 거품이 자리잡은 공간을 메꿔야 합니다. 즉, 대여점은 자신들의 거품을 메꿔줄 새로운 수익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을 것이라는 얘기죠.

그렇기 때문에 대여점은 페이퍼백의 판매를 환영할 것입니다. 서점, 편의점, 문구점뿐 아니라 대여점 자체도 판매망으로 이용하자는 얘기입니다. 대여점이 '대중창작 전문서점'으로 바뀌는 거죠. 이렇게 되면 대여시장이 가지고 있었던 '가깝다'의 장점을 그대로 흡수하게 됩니다.

이제 판매시장은 페이퍼백에 관련해서 '싸고 가깝다'라는 부분으로 대여점과 대적하게 됐습니다. 남은 것은 '좋다'의 독점입니다.

아무리 값이 싼 페이퍼백이라고 해도 안팔릴 책은 안팔립니다. 재미없는 책을 보느니 군것질을 할 독자들이 우리나라의 대다수입니다. 그것을 제일 먼저 인지하는 쪽은 출판사입니다. 초기의 페이퍼백은 분명 양으로 밀어붙이겠지만(이것은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페이퍼북 자체에 대한 홍보력을 주니까요) 중기에 들어서 그 중 상당수가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출판사들은 페이퍼북이라고 해도 팔릴만한 작품만을 선정하게 될 공산이 큽니다. 그 때 제일 먼저 따지는 부분이 작품의 퀄리티입니다. 책 자체가 페이퍼북이기 때문에, 원고의 그림보다는 스토리를 더 중시하는 현상이 벌어지겠죠. 하지만 페이퍼북에 이어서 출간되는 일반본과 양장본은 그림에도 독자분들의 많은 투자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럴 경우, 페이퍼북의 대상에서 제외된 작가들은 어떻게 될까요? 뭘 먹고 살죠? 신인들은? 페이퍼북은 일반본과 양장본의 수익까지 포함하여 제작되는 책인데, 성공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신인작가들을 과연 쓸까요?

이들은 대여시장을 이용하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 대본소 작가들이 따로 있고 잡지 연재의 판매 시장 작가들이 따로 있었던 것처럼, 대여 시장 작가군이 형성됩니다. 과거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죠. 신인들의 데뷔기회나 밀려나간 노장들의 공간으로 대여 시장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대여시장은 마이너로서의 역할을 하고, 그 공간을 통해 판매시장인 메이저로의 진출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대여시장과 판매시장의 분리이며, 이전의 안정된 시장형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사항은 페이퍼백 시스템에 한정된 이야기입니다. 이제부터는 또 다른 파급효과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페이퍼백의 제일 큰 장점은 컬렉션 문화의 형성입니다. 국내의 컬렉션 문화가 가장 활성화된 때는, 바로 이 페이퍼백이 양산된 시기였습니다. 이것은 페이퍼백에만 극한되지 않고 코믹판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결과적으로 판매시장의 활성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다만 초기의 현상 때는 페이퍼백이 코믹판을 훨씬 앞섰기 때문에, 메이저 출판사들이 서둘러서 라이센스의 습득에 열을 올렸죠. 페이퍼백이 가라앉은 이유는 메이저의 라이센스 습득에 따른 법적대응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주장하는 새로운 페이퍼백은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고, 코믹판이나 양장본도 같이 출간하는 동일 출판사의 페이퍼백입니다. 충분히 병행 발전할 수 있는 상품이며, 출판사의 시장조절 또한 가능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적절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작가와 출판사의 일부 희생이 필요합니다. 작가는 페이퍼백에 대한 수익을 최소화하는 데 동의하고, 출판사 또한 페이퍼백의 책정가를 최소화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어느 한 쪽이라도 페이퍼백 자체만으로 수익을 얻기 위한 모습을 보인다면, 이 상품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페이퍼백은 시장질서의 조율과 컬렉션 문화의 형성, 그리고 상품홍보의 관점이 더 우선적이어야 합니다. 컬렉션에 맛들인 독자들은 분명히 코믹판과 양장본에도 관심을 갖게될 것입니다. 또한 대여시장은 대여시장대로 페이퍼북에 참여하지 못한 작가들의 작품으로 시장을 형성하며, 대중창작 서점으로서의 이익에 추가보상을 받는 경우를 얻게 될 공산이 큽니다. 이제까지 주가 되었던 대여상품이 서브적인 존재가 되어 수익을 주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대여시장은 규모가 축소되면서 '싸고 가깝다'의 명맥을 유지하게 됩니다. 판매시장은 '좋고 가깝고 내꺼다'라는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게 될 것입니다. 즉, 대여시장의 기반이 흔들리는 결과겠지만, 현 시점의 대여시장에서 가장 큰 문제인 '대여점의 위기'가 해결됩니다. 대여시장은 축소되지만, 대여점의 수익은 '대중창작 전문서점'으로써 확대되니까요.

다음 글에서는 페이퍼백 출시에 대한 과정을 언급하겠습니다.

레디 오스 성화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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