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13일 수요일

[단편] 옆집 아이를 조심하세요 (1/3)

옆집 아이를 조심하세요(1/3)

나는 어느새 온 몸이 흠뻑 젖었음을 깨달았다.

“젠장! 땀에 목욕을 하네.”

뇌와 상관없이 심장이 다이렉트로 성대를 조작해서 투덜거렸다. 돈을 아낀다는 목적을 갖춘 뜻깊은 이사라지만, 내 입장에서는 머리칼이 쥐어뜯기는 이사였다. 하! 다수의 의견을 충실히 반영한 민주주의 원칙적 익스프레스? 젠장. 빌어먹을! 지축을 향해 ‘강하게’ 내달리는 물건들을 진정시키는 임무는 누가 다 맡았는데? 이걸 지금 누가 다 옮기고 있냐고! 아빠라도 살아 계셨다면 그나마 부자유친이라도 하며 훌러덩 옮기기라도 하지. 엄마, 큰누나, 둘째 누나, 셋째 누나, 작은 누나 중에서 누가 날 도와 이 골동품 목재 장롱을 옮기겠냔 말이다. 그래, 돕고는 있었다. 내 반대편에서 다섯 아낙들이 낑낑대며 애를 쓰고는 있었다. 그저 있었다. 젠장! 허망하다고!

“허망하다고!”

“문영아, 그렇게 불평만 하지말고 힘 좀 써봐.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잖니, 응?”

엄마가 구슬땀을 흘리며 외쳤다. 유후, 눈물난다. 지금 장롱 바닥의 고도는 어느 쪽이 더 높은데 저런 말을 찬연한 웃음과 함께 내뱉을 수 있으실까.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요? 혹시 지금 맞들어주고 있는 존재가 백짓장 아니세요? 이런 관점에서 난 외쳤다.

“정말 힘 안 쓸 거예요? 누나들, 나 2대 독자야! 이러다가 나 정말로 죽겠다구! 우리 집 혈통을 몽땅 외간남자에게 넘길 거야?”

“힘쓰고 있잖니이?”

“그래. 나도 힘을 다 쓰는 중이야. 어머. 근데 이거 너무 무겁다 얘.”

“제기랄! 이 공주병 유전인자들! 거기 옆집 형! 집안으로 들어가던지, 아니면 와서 도와주던지 선택해요! 형만 없으면 이 장롱이 스스로 기어 들어갈 거라구!”

드디어 참고있던 말을 뱉었다. 초면의 옆집형에게 이렇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은 장롱의 도움이 컸다. 대들보 빠진 남대문을 지탱하고 있는 기분이었단 말이다.

“아아…….”

그나마 유서 깊은 양가댁 형인지 아니면 벌써 4명의 여시에게 혼백을 잡아먹힌 것인지 담 너머의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 장독대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누나들을 힐끗 바라보는 모습에 안도감이 들었다. 도와주러 올 것이 분명하다. 불쌍한 것. 4명 누나 중에 하나라도 건져볼 생각인가 본데, 그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자네의 인생은 깃털 빠진 닭껍질로 포장될 운명이라네.

“도와드릴게요.”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그 형의 상판이 내 인생을 깃털 빠진 닭껍질로 포장했다. 하지만 참았다. 중요한 것은 장롱이니까.

“이여!”

그래도 지금만큼은 믿음직했다. 옆집형이 돕자마자 장롱이 안방으로 워프했고, 냉장고가 부엌을 향해 질주했으며, 세탁기가 ‘비켜비켜!’외치며 욕실을 향해 굴러갔다. 그 순간부터 누나들은 자아를 되찾았다. 옆집형의 곁에 들러붙으며 십수년 수련을 해왔던 각종 아양과 칭찬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어깨에 있지도 않은 먼지도 털어 준다. 셋째 누나가 힘들다며 아리땁게 주저앉기도 한다. 아직 옮길 물건이 많다고! 지금 주걱 들고 햇빛 가릴 때가 아니라고! 잡다한 물건이라도 제발 옮겨 줘! 아직은 가출외인도 아니니까 현재진행형 불효녀란 말야, 이 망할 누나들아! 누나들이 여시짓을 하고있는 동안 엄마 혼자 다른 잡동사니를 옮기느라 얼마나 고생… 오 쉐엣! 뭐야, 엄마! 아빠 무덤에서 손가락 하나 튀어나왔겠다! 다 늙어서 새파란 젊은이에게 그 표정 뭐야? 눈매가 왜 엎어진 초승달인데!

“요즘 젊은이들은 참 힘도 좋아, 호호호. 아참! 내 정신 좀 봐. 저기 학생. 이거 얼음 넣은 꿀물인데 좀 마시면서 해요.”

그거 내꺼잖아.

“아유, 뭘 먹고 자랐기에 이렇게 키가 크나?”

내가 더 커, 엄마.

“학생이 참 미남이네. 이런 아들 하나만 있으면 얼마나 좋아?”

원한다면 가출해 주겠어. 엄마가 웬놈에게 해피할수록 난 점점 시니컬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옆집형이 각종 여시짓을 헤쳐가며 끊임없이 짐을 옮겨준 덕분에 대부분의 이삿짐이 해결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난 안도의 숨을 쉬며 엄마가 줬다 뺏은 꿀물대신 시데르칸(CIDER CAN)을 음미했다. 그 때 누군가가 나의 등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오빠, 안녕?”

고개를 돌린 내게 대뜸 반말로 인사를 던져온 소녀. 초등학교 5-6학년쯤 될 듯 앳된 얼굴이었다. 귀여웠다. 눈망울이 크고 아직 아기살이 남은 볼에 보조개가 담겨진 얼굴. 정말이지 너무 귀여워서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엄청난 큐티퀄리티를 가진 소녀였다. 이래서 로리카와 변태가 있구나! 난 말을 더듬었다.

“어… 아, 안녕? 근데 넌… 누구? 이, 이 동네에 사니?”

“응. 저기서 모큐한 짓거리를 하는 사람이 우리 오빠야.”

“응?”

“저기 봐. 잘하면 여관 가겠네.”

“응?”

뭔가 상황이 진정되질 않았다. 내가 지금 누구한테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모큐는 뭐고 여관은 또 누구 입에서 나온 말이지? 이 언밸런스아스트랄한 언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입술이 왜 내 앞의 귀여운 소녀 얼굴에 붙어있는 거냐. 정신이 혼미해질 것만 같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소녀가 가리키는 검지를 따라 시선을 옮겼을 때, 더 혼미할 상황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난 옆에 있는 소설책 박스를 급히 들어서 표적을 향해 달려갔다.

“비켜봐, 거치적거리잖아!”

둘째 누나의 손금을 봐주면서 꼭 볼을 맞대야만 했었던 옆집형은 나로 인해 깜짝 놀라며 물러섰다. 나는 거침없이 둘 사이를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소설책 박스가 너무 무겁고, 내가 서둘러 이동했기 때문에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다. 위치측정을 잘못했던 것이다. 둘째 누나가… 그나마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공주병에 걸릴 자격이 있는 둘째 누나가!

“아, 좀 도와줘요!”

우엉! 옆집형 쪽으로 비켜주는 바람에 둘이 안았다! 둘째 누나의 볼이 옆집형의 가슴에 붙었다. 우엉! 내가 좀 더 심하게 인상을 찌푸리며-어쩌면 우는 얼굴이었을 지도- 옆집형을 쏘아보자, 빨개진 얼굴이 배실배실 웃었다.

“아, 다 끝난 줄 알고…….”

옆집형은 다시 주변의 짐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둘째 누나가 새침한 얼굴로 날 쏘아봤지만, 겁날 것이 없었다. 그보다 더 새침한 얼굴 3개가 둘째 누나를 쏘아봤기 때문이다. 첫날부터 독식하면 다른 누나들이 활짝 웃으리? 외모에 맞는 지혜를 갖추시게, 둘째 누님.

“오빠는 이름이 뭐야?”

“엇?”

어느새 그 소녀가 내 뒤에 놓여있었다. 난 소녀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이 오빠의 이름은 류문영이란다. 넌 이름이 뭐니?”

소녀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덕분에 놀라서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를 중단했지만, 아마도 내가 잘못 본 것일 지도 모른다. 어느새 소녀는 보조개가 살짝 들어간 웃는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희진이. 강희진.”

“와. 예쁜 이름이구나? 몇 살이야, 희진아?”

그 순간 소녀, 아니 희진이가 다른 방법으로 웃었다. 뭐랄까, 표정에 별다른 변화를 준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데 뭔가 달랐다. 희진이는 말했다.

“벙찐 것. 숙녀 나이를 물어보는 건 실례야.”

“아, 아. 그, 그렇지. 미안해, 희진아.”

급히 대답해서 넘기기는 했지만, 정말로 벙쪘다. 그래. 숙녀라고 치자. 나이를 물어보는 건 실례가 맞다고 치자. 근데 벙찐 것이라……. 난 짧은 시간에 최대한 고민했다. 이건 욕 아닐까? 지금 이 여자애는 나랑 한 판 붙어볼 마음을 먹고있는 것이 아닐까? 이 동네 꼴통이 기선제압을 하기 위해 맞짱을 요구하는 중이 아닐까? 별별 생각을 다 떠올리다가 ‘내가 이런 소리까지 들어가며 살아야 하나?’라는 부분에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비로소 화가 났다.

“저기… 근데… 너 말야.”

희진이를 향해 나는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그 순간 희진이가 웃었다.

“응? 왜?”

생글거렸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앵두처럼 통통한 어린아이의 입술이 예쁘게 비틀렸다. 보조개가 곱게 들어갔다. 내가 미쳤지. 이렇게 귀여운 애한테 화를 내려고 했단 말인가! 정신차려, 류문영! 5년만 젊었다면 난 이 애의 신발을 핥아서라도 곁에 붙어있어야 했을 거라고!



그날 이후로 희진이는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 집에 놀러왔다. 이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마치 오래된 여동생-이건 또 무슨 여동생을 말하는 것인가!-처럼 희진이와 나는 사소한 부분까지 공통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좋아하는 책은 환․타․지. 싫어하는 책은 안․환․타․지. 좋아하는 게임은 R․P․G. 싫어하는 게임은 AN․R․P․G. 어느 것을 하던지, 희진이와 나는 죽이 척척 맞으며 새벽 2시까지 밤을 지새곤 했다. 옆집 양아치형이 희진이를 데려가는 시간까지 말이다. 난 그런 일과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와 같은 종목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그렇게 20여 일이 지났다. 나는 학원에 등록을 하고 밤 10시가 넘어서 귀가를 해야하는 새로운 스케줄러의 종이 되어야 했다. 난 재수생이었다. 세상 모든 부모님이 다 그렇듯, 엄마도 내게 ‘3수는 꿈도 꾸지 말라’고 하셨다. 일단은 초반을 필사적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 재수생의 의무다. 나는 꼭두새벽 8시에 일어나서 학원에 나가 수업을 받고, 꼭두새벽 23시에 집에 돌아와야 했다. 그런 내가 희진이와 이전처럼 놀아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희진이는 입시학원에게 서방님을 빼앗겼다고 대성통곡을 했다. 언제 내가 그 행복한 서방님의 자리를 꿰어찼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계약서를 작성하고 말았다.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24시간 모두를 희진이에게 넘겨준다는 노예 계약서. 이것이 작성된 뒤에야 무사히 학원에 갈 수 있었다.

한 달이 지났다. 토요일 오후 2시에 나는 색다른 귀가를 했다. 학원에서 친해진 성필이라는 녀석과 이번 모의고사에 대해 심도 깊은 토론을 하자고 약속한 결과물이었다. 나와 같이 집으로 가던 중, 성필이가 눈을 번득였다.

“저기, 문영아. 쟤, 너 동생이냐?”

“엥? 내 평생소원? 엄마를 바꾸면 가능은 한데…….”

“농담말고. 저기 200미터 전방에서부터 100미터 전방에 이르기까지 두 팔 쫙 벌리고 입도 찢어지게 열어놓은 채 굴러오는 여자애 말야.”

“어?”

비로소 난 성필이가 바라보는 곳으로 눈매를 찌푸렸다. 그리고 아직 80미터 전방에 있는 희진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걸 200미터 전방에서 봤다는 성필이의 600만불스러움을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젠장. 귀찮게 됐다. 저 녀석… 보나마나 날 붙잡고 대마왕 흐림님을 아작내자고 땡깡 부릴 텐데. 으으… 저걸 떼어버릴 좋은 아이템이 없을까?

“문영 오빠!”

희진이는 다짜고짜로 내 품에 털푸덕 안겼다. 그와 동시에 볼을 내민다. 평소에는 이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옆에는 보는 눈이 있었고, 거기에 달린 입은 말도 할 줄 안다. 학원에 소문이 쫙 퍼지겠지. 누구누구는 애 하나 잡아먹는 중이었대요. 아아, 난처했다.

“문영 오빠?”

희진이가 볼을 내민 채 경고적으로 웃었다. 난 더욱 당황했다. 버텨야 하는 건가! 이걸 기회로 삼아서 남녀칠세 부동석을 가르쳐야 하는 것인가!

“문영 오빠.”

희진이가 볼을 내민 채 적대적으로 웃었다. 더더욱 당황했다. 버텨야 하는 건가! 이걸 기회로 삼아서 이 녀석의 각종 버릇을 고쳐줘야 하는 것인가!

“문영 오… 훗.”

희진이가 볼을 내민 채 덤덤하게 웃었다. 내가 미쳤지. 버틸 게 따로 있지.

쪽.

난 희진이가 내민 볼에 뽀뽀했다. 이걸 해주지 않으면 희진이는 삐진다. 그 삐짐은 내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으나, 나를 제외한 주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희진이의 오빠인 희청이형이 제일 먼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곤 했다. 그렇게되면 희청이형이 곧장 우리 집으로 달려와서 자신을 뒤덮은 마(魔)를 큰누나, 둘째 누나, 셋째 누나, 작은 누나에게 전달한다. 그 때부터 내게 직접적 영향력이 행사되는데, 특이한 것은 그 영향력 행사물 중에 엄마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체 어떤 경로를 통해서 그 여파가 엄마에게까지 미치는 지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그 날의 반찬이 달라진다는 것. 어쩌면 희청이형의 여파가 엄마에게 직접… 아! 우! 에! 생각하기 싫다.

“누구야, 얘?”

성필이가 놀란 얼굴로 내게 물었다. 난 솔직하게 대답했다.

“옆집 동생이야.”

“또는 붙어사는 애인이라고도 하지.”

희진이가 시니컬하게 중얼거렸다.

“희진아…….”

내가 불평했지만, 희진이는 아랑곳 않고 ‘애도 낳아야 할텐데…….’라며 한 술 더 떴다. 대체 얜 몇 살일까? 요즘 애들이 어떻게 되려고 이 정도의 상승문화를 습득한단 말인가! 인터넷의 폐해가 확실하다, 이것은! 아무튼 희진이는 자신의 언어표현을 폐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 확실했다.

“귀여운 애네.”

성필이가 이 말을 내게 해 주었던 시간은 대략 5분쯤 지난 뒤였다. 어떤 말을 해주어야 가장 무난할지 생각해본 결과인 것 같았다. 나라도 그런 대사가 나왔을 것이다.

“알아요. 다들 그렇게 말해요, 백수같은 오빠.”

희진이가 곧바로 웃으며 대답했다. 어쩌면 그렇게 짧은 시간에 성필이의 금기를 눈치깠을까. 성필이는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긴 머리카락을 전혀 꾸미지 않고 다니기 때문에, 가끔 그런 말을 듣곤 했다. 하지만 그래서 금기는 아니었다. 3개월 전에 성필이 여자친구가 ‘네가 백수처럼 보여서 싫은 게 아니라 영원히 백수가 될 것 같은 포스가 풍겨서 싫어’라며 찼던 것이 금기의 시초였다. 성필이의 눈에 금세 핏발이 돌았고, 두툼한 손바닥이 조금씩 상승했다. 하지만 희진이를 때린다는 것은 개나 소도 못한다. 성필이는 희진이의 귀여운 얼굴을 보며 잠시 울상을 짓다가 나에게 살기를 뿌렸다.

“얘… 정말 귀엽다, 문영아. 깨물어서 죽이고 싶어.”

“자자. 들어가자, 들어가.”

난 성필이의 떨리는 몸을 열심히 밀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희진이는 뒤따라 들어왔다. 못 들어오게 막고 문을 잠가봤자, 장독대로 넘어오겠지. 들어가자마자 성필이의 몸이 움찔했다. 성필이의 등에 가려져 보이진 않았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보나마나 엄마와 둘째 누나, 셋째 누나가 복식탁구를 하고 있겠지. 난 보지도 않고 말했다.

“또 다이어트냐?”

“마, 말시키지 마! 컥! 허억!”

양쪽 코트를 뛰어다니며 열심히 탁구를 하는 셋째 누나가 측은하기만 했다. 엄마랑 셋째 누나 VS 둘째 누나랑 셋째 누나의 탁구대결인 것이다. 물론 이 특별한 복식탁구는 셋째 누나가 저울대에 올라가서 비명을 지른 다음날부터 1주일간 벌어지는 이벤트다.

방문을 열었을 때, 나와 성필이보다 먼저 희진이가 입장했다. 성필이가 처음 발견했을 때처럼, 희진이는 방바닥을 몇 번 구르더니 곧장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그리고 1미터 전방의 텔레비전 스위치를 무시한 채 사방으로 손을 휘젓다가 날 돌아봤다.

“오빠. 리모콘 어디 있어?”

“그냥 손으로 눌러도 켜져. TV란 그런 거야.”

“잡소리 닥치고, 리모콘 어디 있냐니까?”

“TV위에…….”

성필이가 측은한 표정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내 존재가 절대로 측은함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게임 세이브파일을 여는 희진이에게 말했다.

“희진아. 오빠는 내일 모레 모의고사거든?”

“응. 알아.”

돌아보지도 않은 희진이의 대답이었지만 난 상쾌해졌다. 성필이도 나를 응시하던 측은한 눈빛을 지웠다.

“오, 아냐? 그럼 말이 통하겠다. 오빠는 오늘 공부해야 해. 얘랑 같이.”

“해.”

성필이가 날 다시 그 눈빛으로 돌아봤다.

“무, 물론 해야지. 근데 말야, 희진아. 오빠들이 공부하는데 네가 옆에서 게임을 하고 있으면 방해가 될까 안될까?”

“공부하는 법에 체계가 안 잡힌 돌대가리들이면 방해가 좀 되겠지.”

대체 너 몇 살이야! 그 정도 어휘력이면 교통사고로 대가리가 뽀개져도 업그레이드가 되어서 이계로 간다고! 난 침착을 가장하며 웃었다.

“미안해, 희진아. 오빠가 좀 예민해서 주변에 누가 있으면 공부를 잘 못하거든. 오늘만 희진이 네가 양보해라, 응?”

그제야 희진이가 날 돌아봤다.

“내일은?”

“내일은 물론! 일요일이잖아? 공부해야 하거든. 월요일에 모의고사라니까.”

희진이는 잠시 침묵했다. 세이브 파일이 열리며 게임의 시작을 알렸으나, 희진이는 키패드를 쥔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성필이와 내가 타임스톱에 괴로움을 느껴 자살을 고민할 즈음이 돼서야 희진이는 말했다.

“다음 모의고사 때도 이럴 거야?”

“다음 모의고사가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았어?”

“뭐든 인터넷.”

“다음 번엔 안 그럴게.”

희진이는 키패드를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터뜨렸다.

“알았어. 그럼 뽀뽀.”

난 거침없이 희진이의 볼에 뽀뽀했다. 희진이는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더니 밖으로 나갔다. 아아, 해결됐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때도 있구나. 난 자랑스럽게 가슴을 내밀며 성필이에게 위업을 과시했다. 얄밉게도 성필이는 여전히 그 눈빛이었다.

덜컥.

닫혔던 방문이 다시 열렸다. 내가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희진이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맴매야, 오빠.”

“응?”

“난 내 서방, 벼락치기 따위로 키우지 않았어.”

퍽!

야구배트였다. 어릴 때부터 저 배트만 있으면 두려울 게 없었다. 3타석에 1안타는 꾸준히 만들어주는 행운의 배트. 내가 그렇게 아끼고 믿었던 배트가 지금은 나의 옆구리로 날아들고 있었다. 물론 피했다.

퍽!

배트의 끄트머리가 포물선을 그리며 성필이의 배꼽 아래를 강타했다.

“어억!”

성필이가 맞은 곳을 부여잡고 창백한 얼굴이 되어 고꾸라졌다. 심하게 아파한다. 배꼽 아래였을 뿐이라고! 그렇게 아파할 필요는 없잖아! 혹시 너 섰던 거냐? 희진이를 보고? 이 놈!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었다. 2번째 스윙이 허벅지 측면을 노리고 있다.

퍽!

“으어억!”

다행히 이번에도 피했다. 더 다행인 것은 대타로 맞은 성필이의 부위가 엉덩이라는 점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아파한다. 혹시 너 치질인 거냐? 지저분한 놈!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었다. 3번째 스윙이 무릎 측면을 노리고 있다! 좋아, 이 녀석! 점점 표적이 낮아지는 것을 보니 배트가 무거운 게로구나. 내 예상은 적중했다.

퍼억!

희진이는 배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윙 도중에 떨궜다. 3타석에 1안타는 꾸준히 만들어주는 행운의 배트가 약속을 지켰다. 난 믿는 배트에 발등을 찍히고 말았다.

“아아아아아아아!”

“공부 열심히 해.”

희진이가 방긋 웃곤 문을 닫았다. 나와 성필이는 전장을 기어가서 손을 마주잡았다. 내가 물었다.

“괘… 괜찮냐, 성필아?”

“괜찮아. 너는?”

“됐어, 괜찮아. 이제… 공부하자.”

“1시간만 쉬자.”

성필이는 진정한 친구인 건가! 우리는 서로 고통스러운 곳-물론 자기 것을!-을 매만지며 시간에게 위로 받았다. 그리고 똑같이 심호흡을 한 뒤 공부를 시작했다.

“영어가 제일 문제지?”

“응. 이 문제집 적중률이 제일 높다니까 믿어보자.”

우리는 두툼한 문제집의 첫 장을 넘겼다. 익숙한 단어들이 보였다. 성필이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페이지를 넘기자는 제안을 했다. 둘째 장도 익숙한 단어와 문제들 투성이다. 3번째 장을 넘겼을 때에야 우리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손때가 묻지 않은 진정한 페이지의 시작이었다.

“16번 문제부터! 음… 해석해봐, 성필아.”

“뭐냐, 음. ‘해리가 탔기 때문에 어째서 전철이 이것일까?’ 맞나?”

“철학은 소피스트와 에피쿠로스 학파만 공부하면 된댔어. 게다가 이건 영어문제집이잖아.”

“아, ‘해리가 어째서 전철을 타야 했는가?’겠다.”

“오케이! 보기에 뭐가 있지? 1번은 아닌 것 같아. 붉은 차가 3배 빠르기 때문이라니? 무슨 의미야?”

“2번, 갑자기 어두워져서 먹혔을까 두렵기 때문이다가 아닐까?”

“그것보다는 3번이 더 적당할 것 같아. 갈아타도 10Km가 넘기 때문에 돈이 더 든다.”

“4번, 이 세상은 단수가 아니다는 아니겠지?”

“문제가 이상해.”

우리가 열성적으로 벼락치기에 빠져있을 때였다. 노크소리가 들렸다. 성필이와 난 본능적으로 긴장하며 문을 응시했다. 귀엽지만 소름도 끼치는 얼굴이 문틈을 통해 기어 나왔다.



1/3회 끝(쳇! 글자수 제한이 있을 줄이야... -_-;;)

레디 오스 성화 올림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