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13일 수요일

[단편] 피리의 도시

피리의 도시

피리가 좋다. 그저 일직선의 가늘고 긴 통에 구멍 몇 개를 뚫은 것만으로도 그 속에 진한 우주를 담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 생명이 있다.

김경훈은 그 생명의 소리가 자신의 숨결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김경훈은 피리가 좋고 피리소리가 사랑스러웠다.

월화수목금토의 여섯 날 중에서 어떠한 날도 김경훈은 자유를 갖지 못했다. 일은 끝이 없었다. 좁은 땅덩어리에 둥지를 튼 회사이건만, 추구하는 영역은 세계였다. 김경훈이 평생을 노력한다고 해서 회사의 모든 욕망을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김경훈은 노력하는 사원이었으나 시간이 노력의 분량을 결정해줬고 그 보답 또한 결정되어 있었다.

삐.

일요일의 하늘을 가린 구름이 느닷없는 피리소리에 놀라 모세의 바다처럼 갈라졌다. 햇살이 피리소리의 용기를 얻어 일직선의 광채를 거리에 쏟았다. 일요일이 좋았다. 일요일의 시간을 모두 할애하여 '광장의 거리'에서 피리를 부는 것이 좋았다. 그것은 김경훈만의 즐거움이 아니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피리를 부는 이 사내를 좋아했다. 햇살이 없어도 피리소리에 표정이 밝아졌고 바람이 없어도 피리소리에 상쾌함을 느꼈다.

삐이. 부후후우. 우후우.

광장의 거리는 일요일을 위한 거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김경훈의 피리소리를 듣기 위해 모였다. 연인이 서로를 기대며 빙긋 웃었고, 노인이 악다문 입술로 즐거운 침묵을 지켰다. 끝없이 들릴 듯 거리를 떠도는 피리소리가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김경훈이 피리소리를 더 좋아하게 된 이유는 이들의 행복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경훈은 피리소리가 좋았고 거리가 좋았다. 자신의 피리소리를 듣고 행복에 겨워 발놀림과 어깨의 떨림을 발하는 것을 구경하는 게 피리 부는 사내의 낙이었다.

"축하하네. 자네는 이 회사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네."

어느 날, 사장이 찾아와 웃었다. 피리에 열중하듯, 김경훈은 자신의 직업에도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 보답이 돌아왔다.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김경훈이 직장의 시간 속에서 가장 많은 성과를 올리는 것은 당연했다. 회사는 보답했다. 더 높은 급여. 그리고 더 많은 직장에서의 시간을 주었다. 사장은 사소한 웃음으로 김경훈의 일요일을 원했다.

김경훈은 고민했다. 직장의 일도 사랑하지만 더욱 사랑하는 것은 피리였다. 김경훈 일요일에 피리를 불고싶었다. 김경훈은 솔직히 말했고 사장이 대답했다.

"자네에게 실망이네. 나는 자네의 모든 것이 필요하지, 어떤 것이 필요한 건 아니야. 자네는 나를 속였네. 자네의 지난 일요일들은 자네를 위한 일요일이 아니라 일을 더 능률적으로 하기 위한 휴식의 시간이었네. 그것을 또 다른 열정에 쏟았다는 것을 나는 용납할 수 없네. 자네는 지금 피리와 나를 선택할 시간이 왔네. 결정하게."

김경훈은 사장에게 말했다.

"저는 제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렇기에 제게 주어진 시간에 충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만약 일요일에 피리를 불지 않으면 저는 더 이상 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직장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직장을 잃어도 피리가 있다면 저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장은 김경훈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공감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장 역시 김경훈처럼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자였다. 사장은 피리를 질투했고, 그 질투를 솔직하게 말했다. 김경훈은 회사를 그만 두어야 했다.



피. 피이부우우.

김경훈은 일요일이 아닌데도 광장의 거리에서 피리를 불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일요일의 사람이 그 변화에 놀라며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사람은 요일과 함께 변화된 것이 있음을 알았다. 김경훈의 곁에는 은빛의 그릇이 놓여있었다. 일요일의 사람은 화요일의 사람이, 그리고 일주일의 사람이 되기로 결정하고 은빛 그릇에 천원을 넣어주었다. 김경훈은 고갯짓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 날 밤까지 김경훈의 피리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삐루루. 루루비부우루루.

어느 날부터 광장의 거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람들이 가득 찼다. 김경훈을 해고했던 사장도 피리소리에 매료되어 광장의 거리를 찾았다. 거리의 이름은 '피리의 거리'로 바뀌었다. 언제나 은빛 그릇은 지폐로 가득 찼고, 그것은 김경훈이 마음껏 피리를 불 수 있는 제2의 힘이 되었다. 김경훈은 은빛 그릇의 행복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고마웠기에 더욱 열심히 피리를 불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노래들을 아낌없이 불렀으며,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더 즐겁게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김경훈의 피리소리는 언제나 새로웠고 사람들은 하루도 그 아름다운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젊은 실업가가 찾아와 말했다.

"당신의 피리소리를 더 많은 사람이 듣게 할 방법이 있습니다."

김경훈은 그 말이 반가웠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자신의 피리소리를 듣게된다면 그 이상의 행복이 없을 것만 같았다. 김경훈은 젊은 실업가의 손을 잡고 기뻐했다. 젊은 실업가도 기뻐하며 말했다.

"당신은 제가 만들어낸 작은 방안에서 피리를 불어야 합니다. 그 피리소리는 전파를 타고 거리마다 배치된 스피커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할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출근을 하면서 당신의 피리소리를 들을 수 있고, 일을 할 때도 창 밖의 거리에서 들려오는 당신의 피리소리에 행복해할 수도 있습니다."

"좋습니다."

김경훈은 말했다. 그러자 젊은 실업가가 빙긋 웃으며 은빛 그릇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렇다면 이 더러운 그릇은 필요 없습니다. 저는 스피커가 있는 거리마다 금빛 상자를 둘 것입니다. 거리의 사람들은 그곳에 당신의 피리소리 한 곡 당 10원을 넣게 됩니다. 이제껏 당신에게 천 원을 주던 사람들도 10원을 넣겠죠. 하지만 당신의 피리소리를 듣는 사람이 무려 천 배로 늘어나게 되니까 오히려 이익입니다. 게다가 한 곡 당 10원이기 때문에 하루동안 열심히 피리를 불면 당신은 부유해질 것입니다."

김경훈은 젊은 실업가에게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김경훈은 젊은 실업가가 만들어준 작은 방 안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피리리. 부우. 피이리리.

피리소리는 이제 수많은 거리를 맴돌았다. 사람들은 기뻐했다. 그리고 아낌없이 금빛 상자에 10원을 넣었다. 김경훈은 하루에 열 곡을 넘게 불렀고 사람들은 100원이 넘는 자신의 돈을 아깝게 여기지 않았다.



삐리. 삐후후.

어느 날 밤 김경훈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다가 피리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피리소리가 아니었다. 김경훈은 자신의 피리소리가 흐르는 스피커가 어느 거리에 있는 지를 모두 알고있었다. 그 거리는 모두 다 자신의 집과 동떨어진 곳에 있었다. 김경훈은 자신의 집 주변에 흐르는 피리소리를 따라서 걸었다. 멀지 않은 곳에 새로 단장한 스피커가 있었고, 그 옆에는 비취빛 상자가 있었다. 김경훈은 신기해하면서도 그 상자 안에 10원을 넣었다.

세상은 피리소리로 가득 찼다. 수많은 거리 속에 흐르는 피리소리가 김경훈을 즐겁게 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부르는 피리소리는 때로는 참신하고 아름다웠으며, 때로는 거칠고 투박했고, 때로는 듣기에 불편할 정도로 괴로운 것이 있었다. 개중에는 자신의 피리소리를 어설프게 흉내낸 것도 있었다. 하지만 김경훈이 세상이 피리소리로 가득 차는 것을 기꺼워했다.



어느 날 김경훈이 젊은 실업가를 찾아가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놀라운 곡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만들었으나 너무 아름다운 곡이에요. 저는 아직까지 이렇게 좋은 곡을 만들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젊은 실업가도 크게 흥분하며 기뻐했다. 김경훈은 젊은 실업가의 앞에서 피리를 불었다.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피리소리는 훌륭했다. 아름다운 선율과 가슴을 조이는 바람의 속삭임. 노래가 흐르는 동안 젊은 실업가의 마음은 알 수 없는 뭉클함에 젖어 천국을 떠도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피리소리가 끝났을 때 젊은 실업가는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와 냉담하게 말했다.

"노래가 너무 길어요. 맙소사. 5시간 짜리 피리소리라니! 당신은 미쳤습니다.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곡이 짧아야 해요! 그것을 4번만 부르면 하루가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40원으로는 스피커의 수리비조차 감당할 수 없습니다."

김경훈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노래를 엉뚱한 이유로 배척하는 젊은 실업가에게 화가 났다.

"우리가 돈을 버는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저는 당신이 설치한 스피커의 숫자만큼 돈을 받습니다. 저야말로 맙소사로군요. 시간이 길다고 이 노래를 부르지 말라는 겁니까? 당신은 제 피리소리를 좋아하지 않는군요. 지금의 피리소리는 제가 불렀던 그 어떤 곡보다도 훌륭했습니다!"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다시 말하겠습니다. 짧은 노래를 부르세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더 이상 제 작은 방에 들어오지 못 할 것입니다!"

김경훈은 괴롭게 말했다.

"저는 당신의 작은 방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당신의 작은 방과 스피커를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리소리를 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는 반갑지 않습니다. 피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도 피리를 불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기쁜 마음으로 피리소리를 들어주던 사람들이 지금은 그 괴로운 소리 때문에 귀를 막고 있습니다! 아시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피리소리를 싫어하게 됐다고요!"

"저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김경훈씨! 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얼마전부터 저는 그 사람들을 위해 귀마개를 만들어 팔고 있으니까요."

김경훈은 화를 내며 젊은 실업가의 저택을 나왔다. 그리고 자신 덕분에 새 이름을 얻었던 '피리의 거리'로 갔다. 그러나 그곳의 이름은 또 다시 바뀌어 있었다. 김경훈은 '피리소리 금지'의 팻말이 붙어있는 '냉혹한 거리'에서 망연자실했다.

"왜 이런 팻말이 붙어 있습니까?"

김경훈은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사람은 김경훈의 손을 뿌리쳤다.

"피리소리가 싫어졌소. 그 지독한 불협화음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란 말이오!"

"제 피리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싫소. 나는 피리소리 따위에 내 돈 10원을 투자할 마음이 없소."

"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냥 들어만 주십시오."

김경훈은 막무가내로 피리를 불었다. 화를 내며 귀를 막으려던 사람이 비틀거렸다.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피리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이봐요! 이곳에서 피리소리는 금지…"

김경훈의 뒤에서 달려오던 경찰이 스스로의 손으로 입을 막았다. 경찰도 부근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김경훈의 피리소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군가가 거리의 중앙에 붙어있던 '피리소리 금지'의 팻말을 부서버렸다.

김경훈은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은빛 그릇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다시 옛 거리를 찾아 피리를 불었다. 사람들은 다시 모였다. 비록 예전처럼 많은 사람들은 아니었으나 김경훈은 행복했다.



삐리이. 피피이.

어느 날부터 김경훈의 피리소리는 힘을 잃었다. 오랫동안 굶었기 때문에 김경훈의 숨결은 미약했다. 사람들은 은빛 그릇에 10원 이상의 돈을 넣지 않았다. 그들은 피리소리가 10원의 가치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미 금빛 상자에 적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경훈은 40명에게 얻은 400원으로 하루를 버텨나가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김경훈의 숨결을 미약하게 했다. 사람들은 점점 희미해지는 김경훈의 피리소리에 감동을 잃어갔다.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김경훈의 숨결은 더 미약해졌다.

피이이. 휘이이이.

"여보세요?"

젊은 실업가의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들려왔다. 김경훈은 젊은 실업가의 작은 방이 필요할 지경에 이르렀다. 힘을 잃은 김경훈은 자신의 피리소리가 그리웠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

김경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자신이 작은 방안에서 다시 피리를 불게된다면 피리소리의 가치는 영원히 10원짜리가 될 것이다. 김경훈은 언젠가 들었던 참신한 음색의 피리소리를 기억했다. 자신의 뒤를 따라 피리소리를 사랑하게된 자의 노래일 것이다. 결국 김경훈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누군가의 피리소리를 위해 피식 웃었다.

삐이이! 부후우 삐이이이리!

거리와 떨어진 곳의 사람들조차 놀라며 거리로, 거리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너무도 아름다운 피리소리에 모두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사람들은 거리를 메웠다. 힘차게 들려오는 피리소리. 사람들은 김경훈의 피리소리에 넋을 잃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천국의 음악을 들었다.

한 곡이 끝났다. 김경훈은 파리해진 얼굴로 말했다.

"며칠 전에 제 집을 팔고 그 돈으로 목욕을 했습니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었고, 병든 제 몸을 잠시나마 견딜 수 있는 약도 사서 먹었습니다. 이제 제게 남은 것은 이 은빛 그릇과 피리, 그리고 피리소리와 저뿐입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김경훈의 피리소리가 남긴 여운에 취해있었다. 그 때 김경훈이 외쳤다.

"천원을 주십시오."

사람들은 귀와 가슴에 담겨있던 피리소리가 말끔히 가시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미친놈'이라 외쳤다. 그러나 김경훈은 그 외침을 듣지 못했고, 그렇게 외친 사람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다시는 피리를 불 수 없고, 다시는 은빛그릇의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사내가 차게 식어가고 있었다. 김경훈은 피리소리에 대한 최후의 애정만을 남기고 거리를 떠났다. 차게 식은 김경훈의 곁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은빛 그릇에는 어느새 천원짜리가 가득 담겼다. 거리는 다시 피리의 거리가 되었다.



이 글은 반 대여점 운동에 오랜 시간 노력하시는 ANTIKIM(김경훈)님께 선물했던 단편입니다.(김경훈님은 ‘라스트 판타지’ ‘학교가지마’ 등 다수의 만화스토리를 창작한 ‘작가집단 혼’의 멤버로 활동중이십니다.)

레디 오스 성화 올림

댓글 2개:

  1. 대여점이야기일거란 생각은 했지만, 5시간짜리~ 부분에서는 Queen생각도 나더군요^^

    글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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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감사합니다.(퀸은 저도 미치도록 좋아하는 음악가들입니다. 어쩌면 이 글을 쓸 때 보헤미안 랩소디를 듣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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