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 22일 금요일

한일전 후기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이런 날은 몸이 좋지 않아서 비몽사몽으로 있었다. M작가가 주방 텔레비전을 틀었는데 야구 한일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7회 주자 1, 2루. 난 말했다.

"꺼. 내가 보면 져."

우생순2 이후, 올림픽 경기는 안 봐야겠다고 다짐하던 터였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점. M작가는 당연히 끄지 않았고 나도 화면에 집중했다.

후지산이 휘청거리자 호시노는 강판했다. 난 이것이 가장 커다란 실책이라고 생각한다. 동점을 허용했지만, 내가 보기에 스팀팩 사용한 마린처럼 강력한 구질을 가진 투수였다. 이 선수가 9회까지 던졌다면 일본은 박빙의 승부를 펼칠 수도 있었으리라 본다.

는 내 몽상이고.

영화 메이저리그에서 '포수의 붉은 글러브에 대한 비밀'을 드디어 공개한 김광현의 경기. 8회초도 예외는 아니었다.

포수가 글러브를 펼치면 붉은색이 번쩍! 그 색은 훈련소 교관의 모자색과 똑같았다. 글러브가 손짓한다. 빠닥빠닥 오십시오. 너와 내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습니까. 김광현은 8회초에도 눈을 까뒤집으며 던졌다. 죽어버려! 나는 결코 빨간 모자를 쓴 당신과 함께 하지 않을 거야! 세 배 빨라지지 말입니다. 필요 없어! 8회초도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선수들이 타석을 준비하기에 앞서 김경문 감독이 말했다.

"동점이라... 경기가 길어지면 다음 상대와 싸울 때 불리하지. 이기건 지건 빨리 결론을 지어야겠어. 기주야, 몸 풀어."

막 타석으로 들어가려던 이용규가 흠칫했다. 고개를 돌리니 한작가는 품에 안고 있던 종이뭉치를 벤치에 놓아두며 곱게 정돈한 뒤 글러브를 쥐는 중이었다. 국내 정상급 투수로서 활약한 한작가는 박카스 CF에도 출연하여 "꼭 가고 싶습니다!" 라는 대사로 많은 인기를 얻은 바 있는 유명인이다. 이용규는 한작가가 정돈한 종이뭉치에서 자신의 이름을 보았다. 14장의 입대영장. 어지간한 점수차로는 영장의 손짓을 떨치기 어려울 것이다. 이용규 눈에 핏발이 섰다.

안타. 이용규는 마음 속으로 절규했다. 안타라니! 고작 안타라니! 잠시 후, 이용규는 안정을 되찾았다. 그래. 다음은 현수잖아. 현수야, 내 맘 알지? 한작가 올라오면 나도 가고 너도 간다. 기대에 어린 눈으로 김현수를 바라보던 이용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김현수의 눈빛이 좀비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서였다. 김현수는 이미 넋이 나가 있었다. 가는 구나. 내가 야구빳다로 나라를 지키러 가는 구나. 김현수는 삼진 아웃을 당했다.

이용규는 애원하는 눈초리로 김경문 감독을 보았다. 덕아웃은 지금 흥분상태였다. 감독님! 승엽이형만은 제발! 요즘 형이 이상해요. 이명박 친아들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감독님! 수많은 선수가 소리 없이 항의했다. 김경문 감독이 고심하다가 의견을 내놓았다.

"승엽이로 할래, 아니면 기주로 할래?"

선수들이 일순 움찔했으나 망설이지 않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냥 차라리 승엽이형 할래요!"

이승엽은 감동했다. 이런 츤데레 자식들. ㅠㅠ 한작가는 투덜거리며 글러브를 내려놓고 영장을 다시 품에 안았다.

이승엽은 결심했다. 그래, 얘들아. 내가 오늘 색다른 걸 보여줄게. 이승엽은 오랜 시간 연습해왔던 전설의 그것을 선보일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삑싸리 홈런! 세계는 열광했다. 사토가 제일 열광하며 GG를 선언했다. 한국인을 대표하여 당신의 열광에 감사드립니다.

9회초.
약속대로 김경문 감독은 작가를 내보내지 않았다. 끗.

이로써 한국 야구는 8연승이라는 절대승률로 세계제패를 눈앞에 두었다. 김경문 감독은 한작가가 울고불며 찢어버린 최종병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것 없이 어떻게 싸우지? 난감했지만, 기뻐하는 선수들 앞에서 내색하지 않았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 때 전화가 왔다.

"금메달 따면 예비군 면젤세."

될까?

먼 옛날 김재박의 번트와 한대화의 홈런으로 붐을 일으켰던 야구가 2002월드컵 축구에 먹힌지 6년.

20년만에 빼앗겼던 그 영광을 6년 만에 다시 찾아오는 군요. 결승전 기대합니다. ^^

레디 오스 성화 올림

댓글 45개:

  1. "그냥 차라리 승엽이형 할래요!"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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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금메달 따면 예비군 면젤세." <- 병무청은 뭐하나요 얼른 전화 걸읍세(...)!

    아 입시노 ㅋㅋㅋㅋㅋㅋㅋ 병역면제브로커 승엽 -_-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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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며,명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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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그냥 차라리 승엽이형 할래요!'...역시 최강의 병역면제 브로커 승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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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레디옹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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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이야 예비군 면제. 진짜면 반드시 금 따야겠군요.-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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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안됐군요..... 일본은 군면제 카드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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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관 속에 묻혀 못질까지 당한 순간에 뚜껑을 뜯고 부활하신 승엽신께 경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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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출처 표시하고 퍼가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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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알흠다운 이야기입니다. 아아.. 역시 습홋츠의 세계는 맑고도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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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퍼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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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하도 덧글이 많이 달려서(게다가 지금 동생과 약속이... ;ㅅ;) 나중에 답플 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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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이승엽이 여태까지 삽질한 이유는 오직 하나 입니다.



    : 일본을 묻어버리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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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명답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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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쿨럭! 이...이거 멋진데요!

    순간 뿜어져 나왔습니다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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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코스모스 스토리의 작가분 블로그라니<-

    몇년전 그거 보고 정말 좋아했는데<-

    링크 추가 해도 될까요?(묻기도 전에 해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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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a href="http://blog.naver.com/stevelim01">http://blog.naver.com/stevelim01</a>



    존재함에 의미가 있는 진귀한 포스팅이 시간에 밀려 사라지는것이 슬픈 나머지, 펌을 하고자 하는 욕망에 주인장께 허락을 구합니다.

    출처표시 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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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푸하하하 웃다가 턱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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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오마이갓 웃다가 죽을수도있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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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입대라니! 내가, 내가 입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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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이런 츤대레 자식들...ㅡㅡ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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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아 진짜 인생은 한방이라는 걸 승짱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했네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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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최곰니다! (by 아베)



    정말 주옥같은 후기로군요.. 이용규선수.."안타!! 겨우 안타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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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명문장이십니다. 핑백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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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재밌긴 한데.... 분명 잘 쓴 글인데.... 이 뭔가 이상한 느낌은 저만 가진건가요? 아, 여기가 레디님 블로그라 그런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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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역시 레디님 센스 작렬!



    3분동안 배잡고 웃었습니다



    "승엽이로 할래, 아니면 기주로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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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강렬히 느낌있는 글이군요. 덕분에 3분 간 디굴디굴 굴렀습니다^^ 이글루 아뒤가 없어서 수동으로 퍼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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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지금 금메달 땄네요. 아아 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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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아, 뿜었습니다. 최고입니다...



    이 정도의 센스라면 드라마 작가로 활동하셔도 충분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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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재미있는듯 하지만, 선수들의 노력을 반감시키는 것 같아 좀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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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데굴데굴데굴데굴.......레디님. 이런 센스로 사람들을 홀리시는군요...여.전.히.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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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넵. 마음껏 퍼가셔도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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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trackback from: 단편 야구 한일전
    한일전 후기 가장 감명깊었던 부분 8회초도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선수들이 타석을 준비하기에 앞서 김경문 감독이 말했다. "동점이라... 경기가 길어지면 다음 상대와 싸울 때 불리하지. 이기건 지건 빨리 결론을 지어야겠어. 기주야, 몸 풀어." 막 타석으로 들어가려던 이용규가 흠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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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trackback from: 한일전 후기
    오늘 야구경기를 소설형식으로 표현한 팬픽(?)입니다. 폭소가 터져나올겁니다. 보장해드리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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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trackback from: Spearhead의 생각
    눈물없이는 볼 수 없었던 준결승 한일전의 숨겨진 뒷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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