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정하고 쓰겠다. 할 말이 너무도 많다. 물론 글이 잘 안 써져서 현실도피를 위한 길을 모색하다가 여기에 이르렀다는 사항 따위는 예외로 치자.
일단 다들, 심지어 나까지 주절대는 '장르문학'이라는 말부터 꺼내보자.
이 장르문학이라는 말이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판타지, 무협 작가들이 "우린 순수문학을 쓰시는 고결하신 분들과는 수준이 다른 글을 쓰고 있으니 감히 '문학'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는 것이야."라고 스스로를 자학하기 위해서 만든 단어일까. 그럴 리 없다. 장르문학이라는 말은 소비자들(독자들이 아니라 소비자들이다)에게 팔기 쉽게(상품을 알아보기 쉽게) 구분 지은 출판사의 단어이다. 과자 사탕 라면 껌과 같이 기호품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판매자가 구별해놓은 상품목록표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런 단어에 작가마저 휘둘려서 스스로를 장르문학가로 평가하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작가가 쓰는 것은 창작품이고 글일 뿐, 장르문학도 아니고 순수문학도 아니다. 순수문학은 또 뭐냐? 어디서 그런 말이 나온 거냐. 문학에 혈통 따져서 순수문학을 찾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엔 다 혼혈 종족이고 순수 혈통은 없다.
구분을 짓는 거야 상관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이 자신을 구분짓는 오류는 피해야 한다. 창작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구분한다면 창작의 영역을 좁히는 것 외에 다른 무엇으로 해석해야 할까.
이어지는 내용
비평가들도 구분 짓기를 좋아한다. 구분을 지을 수록 비평하기에 편하기 때문이다. 또한 구분되는 영역이 많을수록 할 말도 많아진다. 비평은 정리에 근간하며 기준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작가를 통해 이루어지는 창작물은 정리나 기준점이 모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평과 감상을 (말, 또는 글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지, 그것이 작품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세상의 어떠한 말, 또는 글도 작품의 전부를 보여줄 수는 없다. 작품의 전부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작품 자체의 어느 한 곳도 손대지 않은 작품 그대로다.
그렇다면 현재 대중을 중심으로 하여 출간되는 창작물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글이다. 소설이다. 문학이다. 괜히 무협이니, 판타지니, 이계물이니, 영지물이니, 먼치킨이니 고민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한계에 빠뜨리는 것이다. 만화를 봐라. 만화 쪽에도 똑같이 출판사가 구분지어 놓은 목록표가 있다. 순정이니 무협이니 판타지니 학원물이니 잡다하게 많이 깔려있는데, 그것에 정작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출판사 관계자다. 그런 정신상태를 가진 기자들이 작가에게 요구해서 평작 가득한 결과물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자들을 가볍게 누르는 만화가들이 꼬박꼬박 등장한다. 기자들의 사고방식을 짓누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뭐겠는가. 재미다. 재미있는 작품을 보여주면 기자들은 스스로의 사고방식을 발바닥 밑에 감춰두고 콜사인을 보낸다.
국내의 소설계가 인기도면에서 만화에게 뒤지는 이유를 역사만으로 따져서는 안된다. 만화에 비해 자유로움이 더 부족하다. 이상하지 않은가? 만화에 비해 소설이 더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아, 순서가 바뀌었군. 먼저 말할 부분이 있다. 현재 만화와 소설이 유통되는 경로는 아예 똑같다. 그것을 감안한 상태에서 만화가 소설보다 인기가 높은 이유는 2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만화가 그림을 포함하여 '독자에게 좀 더 쉽게 이해시킨다는 부분+그림 자체의 매력으로 독자에게 어필'이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소설보다 자유롭게 표현된다는 점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왜 만화가 소설보다 자유롭다는 것이 이상한 지를 언급하겠다. 만화는 그림이라는 큰 제약이 있다. 만화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소설이 표현할 수 있으나, 소설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만화도 표현할 수 없다. 같은 맥락으로 만화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소설은 표현할 수 있다. 다만 필력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능력만 된다면 어떠한 문장으로든 만화가 보여주는 모든 영상을 언급하는 게 가능하다) 적어도 만화보다는 소설이 더 자유롭다. 만화의 지문과 대사에서 소설의 모든 문장을 써 놓았다고 해도, 그것과 포함된 그림 하나가 독자에게 인식의 기준점을 만들어 버린다. 좀 더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었던 인식의 공간을 좁혀버린다는 얘기다.
그런데 결과가 왜 이러냐. 왜 소설의 영역이 만화의 영역을 감당하지 못할까. 단지 역사 때문에? 출판사의 압박 때문에?
아니다. 신인 작가의 인식이 오마주와 독자의 목소리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것이 없었다면 이미 인터넷을 통해 보노보노나 라이처럼 비유된 캐릭터, 또는 아예 창조된 캐릭터가 나와서 이야기를 끌었을 것이다. 스포츠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도 나왔을 것이고, 만화가 대중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던 모든 세계관들이 아낌없이 표현되었을 것이다. 어떤 소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야기가 중요하다. 간단히 얘기해서 재미가 문제다. 재미만 있다면 뭐가 나와도 상관없다.
이렇게 한계를 짓는 것도 좋다 치자.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더 큰 문제는 왜 자신이 쓰는 글에 주눅이 드냔 말이다. 우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맞춤법이니 문장이니 하는 것은 나중의 문제다. 이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너무 말을 더듬고 어벅거리고 산만하게 얘기하면 듣는 사람들이 이야기에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들이 좀 더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거기서 더 나아가서 이야기를 감칠맛나게 들을 수 있도록 문장력을 키우는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감칠맛에 푹 빠져버려 이야기가 뒷전이 되면 막 나갔다고 봐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야기다. 내가 있는 공간은 이야기를 말하고 듣는 공간이지, 말 잘하고 말 잘듣는 공간이 아니다. 생각이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이 얼마나 현묘하냐에 푹 빠진 사람들을 생각하느라 자신이 할 이야기의 맥을 잃어버리는 짓은 하지 말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이 모였다. 그 중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다. 그 사람들이 이야기가 재미없어서 자신의 관점대로 원하는 것을 말한다고 그것에 휘둘린다면 곤란하다. 참조는 하되 그것이 이야기에 도움이 되는 지 방해가 되는 지부터 확실히 인지해야 한다. 그걸 안다면 자신이 꺼내는 이야기를 창피하게 여길 이유가 없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재미없다면 부끄러워해도 좋다. 하지만 엉뚱한 이유로 자신의 이야기에 부끄러움을 담는 것은 재미있게 듣는 사람을 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뭐? 대여점용 작가? 그런 게 어딨냐? 미친놈. 대여점 없어지면 작가 관둘 거냐? 지금 자신의 글을 읽는 독자들이 대여점용 독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인가? 이런 관점을 만든 사람 입장 따위 내가 알 바 아니고 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관점에 휘둘려서 시니컬해지는 몇몇 사람들을 보면 같잖다. 시장이 이 꼴 된 건 작가 탓도 아니고 독자 탓도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시장을 바꿀 만큼 대단한 작가는 나온 적 없다. 또한 시장을 바꿀 만큼 독자가 크고 아름답게 목소리를 높였던 적도 없다. 시장이 바뀐 이유는 시장에 직접 관여하는 출판사와 총판이 운영을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시장이 바뀌려면 출판사와 총판이 '어떻게 해야' 가능하고, 아니면 그 힘을 능가할 다른 무엇이 개입되어야 한다. 그 다른 무엇에 독자와 작가는 포함되지 않는다. 독자는 바뀐 시장이 자신의 기호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수동적 존재이고,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그 시장에 내놓는 1차 생산자에 불과하다. 그러니 시장이니 뭐니 따지지 말고 글 써라. 작가인 당신은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글을 쓰는 게 임무이자 목표다. 그리고 세상이 아무리 뒤바뀐다 해도 그 글은 '재미있는 글'이 될 것이다. 장르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다. 독자는 재미있는 글을 원하고, 작가는 재미있는 글을 쓴다. 그 사이에 있는 시장따위를 고민할 필요는 애초에 없었다. 고민하면 뭐 달라지나? 정말 달라지기를 바란다면 작가 때려치고 출판사 차려라. 독자로 만족하지 말고 출판사 차려라. 옆에서 친구한테 백 날 배틀크루저 뽑으라고 구박해봐라. 닥치라고 화내면서 끝내 시즈탱크랑 골리앗 뽑을 거다. 배틀크루저 뽑고 싶으면 댁이 테란 선택해서 게임 시작해라.
일부 작가, 일부 독자들. 왜 이렇게 휘둘리는 거냐. 우리나라 장르문학이 어쩌고 저쩌고 주절대지 마라. 그래서 엿되고 있다. '장르문학'에 새로운 글 없다고 투덜대는 말이 얼마나 패러독스인지부터 깨달아라. 고도의 지능범이 자유로운 세상으로 이끄는 척 하며 어떤 한계에 가둬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글이다. 이야기다. 문학이다. 비틀즈에게 모짜르트보다 못하다고 손가락질하지 마라. 비틀즈 팬들한테 맞아 뒈진다. 지미 핸드릭스에게 쇼팽보다 자기 악기를 못다룬다고 쫑알대지 마라. 역시 뒈진다. 우린 지금 이 세상의 이야기를 말하고 듣는 중이며, 과거 따위에 연연할 시간이 없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여전히 창창하고 그것을 찾는 사람들이다. 자신이 밟아야 할 길에 내밀어야 할 것은 발바닥이지 가래침이 아니라는 말이다.
레디 오스 성화 올림
후와. 잘 읽었습니다. 학교라 꼼꼼히 못 읽었지만... 뭐라 하시고 싶은지는 대강 알겠네요.
답글삭제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라는것과, 설정놀음 자가당착의
답글삭제문제들 내용이 생각하고 있던것과 많이 일치하고 있어서
기뻤습니다. 역시 좀더 뻔뻔해 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부끄러워 빼고 걸려 넘어지는것보다 나아가는쪽에 발전이
있고 의미가 있겠죠
때론 진정으로 '이야기' 자체를 가지고 밀어부치는 사람들은 60년 전만 해도 남아있었다던 떠돌이 이야깃꾼들로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답글삭제이야기에 대한 입장에는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시장과 창작자/독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물론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함이었지만서도) 비관적으로 보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
별밤// 비관이라기보다 작가와 독자가 시장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대하지 말라는 의미죠. 작품 모독은 둘째 치고 그것은 작가에겐 도박이고 독자에겐 월권이거든요. 작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작품을 쓰다보면 그 중 하나가 대박이 되는 것이고, 독자는 좋은 작품을 찾다보면 어느새 시장에 영향을 주는 인물 중 한 명이 되는 거라고 봐요. 뭘 먼저 생각하느냐에 대한 문제죠. ^^;;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