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17일 토요일

편집자가 글 쓰기 어려운 이유

어쩌다 보니 각 출판사 편집진을 많이 알게 되었다. 편집진이라서 출판관련으로 알게 된 경우보다 그분이 이전에 작가였을 때 알았던 경우가 더 많다. 가끔 이런 경우를 차범근 선수가 해설위원석에 앉은 모습과 비교하기도 한다. 물론 다르다. -_-

그중 상당수가 글을 쓰지 않는다. 물론 예외도 있다.(아우라던지 동생이라던지 의제라던지...)

글을 쓰겠다며 편집진을 그만 둔 세 분도 있다. 이 세 사람은 한 때 VT를 들끓게했던 유명작가이며 내심 기대하고 있다. 아직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향수와 바람을 한꺼번에 불러 일으켜 나를 포함한 독자분들을 기쁘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연이 겹쳐 세 분이 한꺼번에 비슷한 선택을 했다. 난 어려운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편집진이었던 작가가 다시 글을 쓰는 일이 쉽지 않아서다. 지금 편집진에 있는 몇몇 작가출신 분들 또한 마찬가지다. '언제고 글을 써야지.'라고 마음 먹어도 수월하게 글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대중 창작과 편집의 과정이 상극이어서다.

드라마 온 에어처럼 감독이 작가 원고에 빨간 색연필로 동그라미 때리는 것은 편집이 아니다. 감독이 직접 말했듯, 그것은 독자의 눈이다. 편집진이 원고를 보고 할 일은 빨간 색연필로 찍! 긋는 거다. 잘못된 부분을 찾아 교정하는 것이 편집진의 1차 목표이며, 좀 더 좋은 글이 되도록 더 잘될 부분을 같이 고민하는 것이 2차 목표다. 원고를 망가뜨리지 않는 경계선에서 더 잘 팔 수 있도록 작가와 고민하여 정리하는 것이 3차 목표다.

위 과정에 전제되는 편집자의 기본 행동은 원고에서 단점을 찾는 작업이다.

글을 쓸 때 이런 사고를 가지고 글을 대하면 죽 쑨다. 그나마 잘 쓰면 흠 잡을 데는 없는데 재미도 없는 글이 나온다. 잘 썼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는데 선뜻 눈이 가지 않고 손도 잘 안 가는 책이 나온다. 이 또한 이유가 간단하다.

대중창작은 대중이 앞에 붙어 있어서 대중창작이다. 독자와 공감하지 않는 창작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었다면 그것은 특별한 예외(이건 잠시 후에 적겠다)거나 출판사의 눈물겨운 노력 탓이다.

대다수 독자는 작품의 단점을 그냥 넘긴다.(물론 어지간한 단점이어야 한다.) 단점을 몽땅 짓밟아 구덩이에 넣고 흙으로 덮어버릴 만큼 강한 장점이 있을 경우, 심한 독자들은 단점마저 매력으로 본다. 이러한 독자들이 대다수가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물건이 잔뜩 진열되어 있을 때, 이것저것 따지는 손님들은 기껏 사야 한두 개 산다. 하지만 '이거 좋아! 저거 괜찮군!'이라며 물건의 세세한 면모를 따지지 않는 손님은 일단 다량이 되어도 사고 본다. 단점을 찾는 사람과 장점을 찾는 사람 중에 장점을 찾는 사람들이 상품을 더 많이 구입하는 근거는 간단하다. 책 한 권에 장단점이 분명 한두 개씩 있을 텐데, 단점을 찾는 사람은 책을 사지 않고, 장점을 찾는 사람은 책을 산다. 누가 더 많이 사겠는가.

그러니 단점에 연연하지 않고 장점을 살리는 집필 방식이 대중창작에서는 더 효율적이다.(이 또한 극단적으로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 둘을 조율할 때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둘 것이냐하는 의미를 과장되게 말했다.)

편집자 출신, 또는 현역 편집자가 글을 쓴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이 단점을 보는 버릇을 고쳐야 한다. 단점을 찾아 읽는 천 명도 안 될 소수 독자와 오손도손 놀 생각이 아니라면.

이제 위에 잠깐 괄호 치고 언급했던 특별한 예외.

마스터는 이 글과 관계 없다.

단점의 대안을 몸에 익혀서 이미 손에서 단점을 지우고 글을 쓸 정도의 마스터라면 위 얘기들이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이러한 마스터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머리가 하얗더라. -_- 자기가 마스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단 거울 두 개 들고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지워졌는지부터 확인해라.

판타지, 무협, 추리, SF 등 자신이 써야 할 글에 장르부터 먹이는 버릇도 일종의 편집자적 집필법이다. 장르라는 규칙은 글에서 무엇을 찾기 쉽도록 구분하는 정리법이다. 이건 편집자적 정리법이지 창작가적 정리법이 아니다. 창작가적 정리법은 따로 있으며, 누가 특별히 언급하지 않아도 알아서 세상에 깔렸다. 통칭 네임밸류라고 부르는 작가별 정리법이 그것이다. 이렇게 공공연히 존재하는 정리법을 놔두고 판타지니 무협이니를 따진다면, '아아, 아직 SF는 서툴러서...'라느니, '무협은 좀 쓰겠는데 판타지는 좀 어렵네.'같은 헛소리를 해대는 작가들이 나온다. 내 작품에 책임을 지는 정리법은 오로지 하나다. 편집자적 정리법까지 작가가 일일이 신경쓰지 말고, 내 작품 재미에나 신경쓰는 것이 옳다.

편집자 출신 작가분들이 이 난관에 거의 90%다 싶을 정도로 부딪친다. 정해놓은 틀을 꼭꼭 챙기며 글을 쓰니까.(이건 마스터도 예외가 아니다.)

요즘 출간되는 글이 무척 재미있다. 다양한 이야기뿐 아니라 몰입도를 높이는 이야기가 속속 등장하여 기분 좋다. 써야 할 글만큼이나 읽고 싶은 밀린 글이 많다. 개중에(특히 신인의 글중에) 편집자적 관점을 미리 가지고 글을 쓰는 분들이 있어서 적는다. 재미 있다. 그래서 아쉽다. 그 이상 재미가 글 속에 녹아 있는데, 도통 꺼내지를 않는다. 이건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외칠까. 파이팅!

레디 오스 성화 올림

댓글 9개:

  1. 오, 드디어 금슬상화라가 재연재 되는건가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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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음....마스터가 되어야 하는거군요...(편집자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무언가를 '창조'한다는건 참 힘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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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아래에서 던져주신 조언은 정말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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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뻘글은 좀 쓰겠는데 원고는 어렵네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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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이 내용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ㅋㅋ;

    데뷔 7년이나 지나서 문협회원 좀 돼볼까 했더니 신작을 가지고 오라는데

    이궁... 당췌 써져야 말이죠. 게다가 결벽증도 작용하구요. 맨날 미루다 언제나...ㅠ.ㅠ;

    그래도 다행이예요. 거울들고 엉디 들여다보지 않아도 돼서...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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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확실히 쉽지 않죠.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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