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고한 철학적 헛소리를 제일 먼저 꺼내놓은 이유는 저놈이 예시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내용
작가 스스로가 글을 써서 출간작으로 내놓는 것은 자신이 그 글에 대해 완벽하다 여기는 흡족함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완벽한 글이 먼 훗날 "빌어먹을! 책 모두 수거 못하나?"의 패닉 상태에 빠지게 만들 만큼 안티 완벽의 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글을 낼 당시의 작가는 스스로의 능력에서 최선을 다하고 완벽을 기한 작품을 내놓는 것이다.
"사실 난 아닌데……. 레디 쟨 그래서 연중하는 구나. 와. 존경스럽다. 씨발."
라고 중얼거리며 괴로워할 필요도, 좌절할 필요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대중창작에 목을 맨 놈이다. 그것은 곧 프로작가로서의 관점에서 언급하는 '완벽'이다. 뒷권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독자우롱이나 해싸는 글이 무슨 놈의 완벽인가. 나야말로 프로작가 입장에서 가장 덜 완벽한 글을 출간하는 정신 나간 작가다. 프로작가로서의 완벽은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글'로서의 완벽이다. 이 속에는 꾸준한 출간과 완결도 포함되어 있으며, 그 시간과 작품의 완성도를 조율하는 것이 필수다. 그런 의미에서 난 여러 모로 문제가 많다. -_-
아. 오랜만에 글을 쓰니 본능적으로 삼천포다. 세 살 때 이 버릇이 생겼나 보다. 앞으로 43년 간 이 짓을 더 해야되는 거냐!
아무튼 그러한 의미에서 글은 완벽하지 않다. 스스로의 평가에 의한 일시적 완벽은 말 그대로 한시적이다. 자신이 발전함에 따라서, 또는 변화함에 따라서 옛글은 완벽성을 잃는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또 다르다. 작가가 잃어버린 완벽성을 어떤 독자가 품에 안는다. 그 독자는 작가마저 놓쳐버린 완벽함의 기쁨을 간직한 채 읽고 또 읽는다. 이것도 한시적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떠한 의미에서는 작가보다 오래 보존되는 완벽함이다. 이와 함께 또 다른 독자들은 같은 글을 두고 완벽하지 않다고 외친다. 이래서 완벽성은 지역적이다.
자. 이제 문제를 얘기해보자.
혹시 자신의 작품을 화두에 놓고 누군가에게 완벽, 또는 완벽에 가까운 평가를 바라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아해주기를 바라지는 않는가.
막말로 어떤 이들에게 '겉멋만 잔뜩 들었군'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위험성을 간직한 글을 쓰면서, 그것이 대중적이기를 원하는 작가도 있다. 맨 처음 언급한 문장처럼 뭔 소리를 하는 지 '나만 아는겨'식으로 써놓고 "왜 모르는데!"라고 따지는 작가를 말하는 것이다. 파고다 공원에 터를 잡으신 어르신들께 당신의 글을 진심으로 인정받는 것 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며, 쓸 데 없는 짓이다. 당신의 글을 좋아할 독자들은 따로 있다. 그리고 그 수치에 따라 대중성이 결정된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러한 작가들이 일순간 마음을 바꾸고 대중화 선언을 한다. 그리고 [막말로 어떤 이들에게 '양산형을 쓰는군'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위험성을 간직한 글]을 쓴다. 이 글이 대중적 호응을 얻지 못하면 또 투덜댄다.
난 아직까지는 양산형이라 불릴만한 글을 쓴 적이 없다. 시기가 항상 삐꾸나서 한참 흥행을 올리는 유형의 글과 동떨어진 소재, 세계, 이야기를 붙들고 글을 쓰게 된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양산형 독자 옹호 좀 해 보자.
일부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느낀 부분이 있다. '이 작가분은 양산형을 우습게 아시는 구나'라는 생각이다.
세계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저 편에서 소리가 희미한 텔레비전의 어렴풋한 영상을 보는 느낌이다. 세계 속에 담겨진 사람을 보는 것 같지가 않다.
"그 개구리를 죽이지 마! 옥동자일 수도 있어!"
라는 대사가 나오더라도 어떤 책은 가슴 깊이 와닿고, 어떤 책은 액면 그대로 "장난 하나?" 소리가 튀어나온다.
나도 그 경지까지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만, 적어도 해볼 생각도 하지 않는 글은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작가가 먼저 몰입해야 독자도 몰입할 가능성이 생긴다.
"아, 이러면 독자들이 좋아해 주겠지."
이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계산하는 거다. 작가가 아니라 상인에 더 가깝다. 이런 생각에 앞서 내가 떠올려야 할 생각은 "꺄! 이거 너무 좋아!"다. 모니터와 노트는 나의 글을 확인하는 최종 매개물이다. 나의 글을 만드는 과정의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써야 할 글이 무엇이건 그놈의 전부를 이해할 생각부터 해라. 당신은 글의 창조주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모든 것을 이해하지도 못하면, 무신론자가 판치며 세상이 깽판난다. 그러니 양산형을 쓰건 포르노를 쓰건 제발 그 속에 몰입 좀 해라. 첫 번째 독자는 자신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작가조차 몰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한 글을 읽게되면 정말 괴롭다. 슬프다. 섭섭하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 지 모르겠으나, 아무 것도 모른 채 유행형 소설을 처음 손대는 작가가 몇십 배 낫다. 몇백 배 낫고, 몇천 배 낫다.
잘 팔린 작품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작가는 그 작품을 아끼는 독자들에게 손가락질하는 것과 같다. 그 말은 곧 다수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는 소리다. 그 순간, 스스로는 대중창작가 임을 포기한 셈이 된다.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 독자를 제외한 나머지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쓰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자신의 책이 안 팔리는 것을 불평할 수가 없는 존재다. 자신이 그것을 선택했으니까.
대박을 노리는 거야 뭐 개인취향이니 뭐라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방법론에 대해 한 마디 하겠다.
'독자의 취향을 고민하며 쓴 글보다, 내가 몰입해서 쓴 글이 더 대박확률이 높다.'
레디 오스 성화 올림
"사실 난 아닌데……. 레디 쟨 그래서 연중하는 구나. 와. 존경스럽다. 씨발."
라고 중얼거리며 괴로워할 필요도, 좌절할 필요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대중창작에 목을 맨 놈이다. 그것은 곧 프로작가로서의 관점에서 언급하는 '완벽'이다. 뒷권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독자우롱이나 해싸는 글이 무슨 놈의 완벽인가. 나야말로 프로작가 입장에서 가장 덜 완벽한 글을 출간하는 정신 나간 작가다. 프로작가로서의 완벽은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글'로서의 완벽이다. 이 속에는 꾸준한 출간과 완결도 포함되어 있으며, 그 시간과 작품의 완성도를 조율하는 것이 필수다. 그런 의미에서 난 여러 모로 문제가 많다. -_-
아. 오랜만에 글을 쓰니 본능적으로 삼천포다. 세 살 때 이 버릇이 생겼나 보다. 앞으로 43년 간 이 짓을 더 해야되는 거냐!
아무튼 그러한 의미에서 글은 완벽하지 않다. 스스로의 평가에 의한 일시적 완벽은 말 그대로 한시적이다. 자신이 발전함에 따라서, 또는 변화함에 따라서 옛글은 완벽성을 잃는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또 다르다. 작가가 잃어버린 완벽성을 어떤 독자가 품에 안는다. 그 독자는 작가마저 놓쳐버린 완벽함의 기쁨을 간직한 채 읽고 또 읽는다. 이것도 한시적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떠한 의미에서는 작가보다 오래 보존되는 완벽함이다. 이와 함께 또 다른 독자들은 같은 글을 두고 완벽하지 않다고 외친다. 이래서 완벽성은 지역적이다.
자. 이제 문제를 얘기해보자.
혹시 자신의 작품을 화두에 놓고 누군가에게 완벽, 또는 완벽에 가까운 평가를 바라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아해주기를 바라지는 않는가.
막말로 어떤 이들에게 '겉멋만 잔뜩 들었군'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위험성을 간직한 글을 쓰면서, 그것이 대중적이기를 원하는 작가도 있다. 맨 처음 언급한 문장처럼 뭔 소리를 하는 지 '나만 아는겨'식으로 써놓고 "왜 모르는데!"라고 따지는 작가를 말하는 것이다. 파고다 공원에 터를 잡으신 어르신들께 당신의 글을 진심으로 인정받는 것 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며, 쓸 데 없는 짓이다. 당신의 글을 좋아할 독자들은 따로 있다. 그리고 그 수치에 따라 대중성이 결정된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러한 작가들이 일순간 마음을 바꾸고 대중화 선언을 한다. 그리고 [막말로 어떤 이들에게 '양산형을 쓰는군'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위험성을 간직한 글]을 쓴다. 이 글이 대중적 호응을 얻지 못하면 또 투덜댄다.
난 아직까지는 양산형이라 불릴만한 글을 쓴 적이 없다. 시기가 항상 삐꾸나서 한참 흥행을 올리는 유형의 글과 동떨어진 소재, 세계, 이야기를 붙들고 글을 쓰게 된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양산형 독자 옹호 좀 해 보자.
일부 작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느낀 부분이 있다. '이 작가분은 양산형을 우습게 아시는 구나'라는 생각이다.
세계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저 편에서 소리가 희미한 텔레비전의 어렴풋한 영상을 보는 느낌이다. 세계 속에 담겨진 사람을 보는 것 같지가 않다.
"그 개구리를 죽이지 마! 옥동자일 수도 있어!"
라는 대사가 나오더라도 어떤 책은 가슴 깊이 와닿고, 어떤 책은 액면 그대로 "장난 하나?" 소리가 튀어나온다.
나도 그 경지까지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만, 적어도 해볼 생각도 하지 않는 글은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작가가 먼저 몰입해야 독자도 몰입할 가능성이 생긴다.
"아, 이러면 독자들이 좋아해 주겠지."
이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계산하는 거다. 작가가 아니라 상인에 더 가깝다. 이런 생각에 앞서 내가 떠올려야 할 생각은 "꺄! 이거 너무 좋아!"다. 모니터와 노트는 나의 글을 확인하는 최종 매개물이다. 나의 글을 만드는 과정의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써야 할 글이 무엇이건 그놈의 전부를 이해할 생각부터 해라. 당신은 글의 창조주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모든 것을 이해하지도 못하면, 무신론자가 판치며 세상이 깽판난다. 그러니 양산형을 쓰건 포르노를 쓰건 제발 그 속에 몰입 좀 해라. 첫 번째 독자는 자신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작가조차 몰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한 글을 읽게되면 정말 괴롭다. 슬프다. 섭섭하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 지 모르겠으나, 아무 것도 모른 채 유행형 소설을 처음 손대는 작가가 몇십 배 낫다. 몇백 배 낫고, 몇천 배 낫다.
잘 팔린 작품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작가는 그 작품을 아끼는 독자들에게 손가락질하는 것과 같다. 그 말은 곧 다수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는 소리다. 그 순간, 스스로는 대중창작가 임을 포기한 셈이 된다.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 독자를 제외한 나머지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쓰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자신의 책이 안 팔리는 것을 불평할 수가 없는 존재다. 자신이 그것을 선택했으니까.
대박을 노리는 거야 뭐 개인취향이니 뭐라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방법론에 대해 한 마디 하겠다.
'독자의 취향을 고민하며 쓴 글보다, 내가 몰입해서 쓴 글이 더 대박확률이 높다.'
레디 오스 성화 올림
하지만 독자의 취향을 고민하며 쓴 글은 중간은 갈 확률이 더 높다는 슬픈 상황도 존재합니다... 특히 요즘의 한국 판타지 시장이 그렇지요. (한숨)
답글삭제개인적으로 중간 정도 가려면 일단 자칭 개념 있다는 독자들의 말은 싸그리 씹고 보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르는군요. -_-;
답글삭제마지막 말에 공감합니다.
답글삭제독자의 취향을 고려하며 글을 쓰는 이유, 그리고 그것이 중간은 갈 확률이 높다는 말은 출판사가 그러한 글만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러한 가치관 자체가 출판사에게서 비롯되었고 그게 기정사실인 것처럼 자기최면을 걸었다는 거죠. 시장환경이 좋지 않은 만큼 출판사 입장에서는 모험을 자제하려고 노력중입니다. 그에 대한 결과물이죠.
답글삭제문제는 이러한 출판사들도(하물며 독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독자 취향 무시했어도 초반부터 심하게 재미있는 글'은 눈을 까뒤집고 계약하려 든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한 글이 '독자 취향을 고민하며 쓴 글'보다 더 중간 '이상'을 갈 글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개념있다는 독자의 말도 참 여러 모로 다양하게 표출되지만, 결론은 대부분 하나입니다. 개연성 좀 있게 글을 써달라는 얘기죠. 독자가 글에 몰입한 상태를 방해하지 말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그 기준에서 파생된 삼천포식 잡소리들이 눈에 밟힌다고해서 기본적인 요구까지 무시하면 곤란하죠. 뭐랄까... 관련공식 100개를 외운 사람보다 공식의 기본원리 1개를 이해한 사람이 더 수학을 잘하는 것과 같달까요?
답글삭제요는 글을 재미있게 쓰면 장땡이고, 작가와 독자를 몰입시키는 글이 장땡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얘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