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 20일 토요일

비몽사몽

난 커피를 좋아한다. 그렇다고해서 다양한 종류를 커피를 알고 익히고 찾고 구해서 음미하는 품격을 갖춘 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건 '간편하게 마실 수 있는 커피'니까. 그래서 커피믹스 100봉 짜리를 구입해 퍼 마신다. 말 그대로 입에 쏟아붓는다. 예전에 말했듯 글을 쓰는 건 내가 아니라 커피와 담배가 내 몸을 빌어 쓰는 거다.

커피는 다 나쁜데 제일 나쁜 게 하나 있다. 다량을 마시면 뇌기능에 이상이 온다는 것. 어느 부분에서 이상이 오는 지는 귀찮아서 알아보지 않았지만, 확실한 건 커피를 무진장 마셨을 때 장자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잠을 자도 잠을 자는 건지 걍 눈만 감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와중에 꿈은 더 잘 꾼다. 그 꿈이라는 것도 내가 누운 채 생각에 빠져있는-난 자기 전에 벼라별 스토리를 다 떠올리는 천상의 특권을 갖고있다- 상황의 연장선이다. 개중 어떤 것은 너무 현실성 있게 이어져서 현실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잠을 자다가 빨래를 세탁기에 넣어둔 채 돌리지는 않았다는 걸 깨닫고 급히 일어나서 보일러 스위치를 누른다. 뜨거운 물로 세탁기 모드를 조정한 뒤 빨래를 돌리고 다시 눕는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잠을 자려고 노력하던 와중에 세탁기의 경보음을 듣는다. 빨래가 끝났음을 알고 '잠이 왜 이렇게 안 오지?'라 불평하면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빨래를 널기 위해 세탁기 뚜껑을 열어보니 빨래가 없다, 제기랄! 그런데 보일러 스위치는 눌러져있다, 제기랄! 나는 지나간 과거의 조각들을 열심히 끼워맞추면서 왜 보일러 스위치가 눌러져 있고, 왜 세탁기 안에 빨래가 없는 지를 고민한다. 미스테리가 오래 지속되면 최선을 다 하여 딴 생각을 한다. 잊고 있었는데 난 꽁지머리고, 우리 할아버지는 명예가 있으셨었다.

이런 식의 비몽사몽은 때부분 즐겁다. 괴로운 것은 깨어있을 때다.

내 백골이 진토라도 됐다면 이해하겠는데, 그런것도 아니면서 넋이 있는 지 없는 지를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피곤하고 어지럽고 환청도 들린다.-이 환청이 들리는 부분은 정말 신난다! >ㅁ<- 이럴 때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커피를 마신다.

당연히 속이 쓰리다. 난 속이 쓰리건 속이 뒤집히건 배쪽에서 뭔가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면 "배가 고프구나"라는 결론을 내린다. 커피로 인한 이몽롱이 심화되어 성춘향에 중독되면 밥을 언제 먹었는 지도 까먹는다. 1시간 전에 밥을 먹고도 또 먹는다. 그리고 식곤증으로 눕는다. 아기 맘모스가 춤을 추고 크레파스 병정들이 내 얼굴에 낙서한다.

내가 커피를 잠시 중단하기에 이를 때는 그 비몽사몽의 효과가 글에게까지 미칠 때다.

이제와서 밝히는 말이지만, 내 소설 투귀류의 백도운이 쓰는 무공은 원래 '진절도'가 아니었다. 어느 날 한글창을 열어보니 백도운의 무공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제갈폭룡의 진절도가 떡하니 놓여있더라. 난 하늘의 뜻이려니하고 그대로 진행했다. 알고보니 하늘의 뜻이 아니라 커피의 뜻이셨다.

커피를 좀 더 즐기게 된 지금-그나마 마천루 시절에는 말리는 사람이라도 있었지-은 환술 더 뜬다. 내 글의 인물들이 살아서 춤추는 환술이면 좀 낫겠는데, 그런 감미로운 나의 바람 따위는 늘 도끼눈을 하고 발등을 찍더라. 아무튼 글이 날 무시하고 달려간다.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그 원인을 열심히 추적하다가 루비의 목숨이 위험해서 급히 멈췄다. 일단 현재까지 밝혀진 경과를 보고하자면, 그동안 내가 너무 많은 글을 건드렸다. 지금 쓰던 글에 맨투맨 로맨스 오브 더 나인틴 골드 사태가 벌어졌음을 알고 경악한 결과, 이 포스팅 작성이 시작됐다.(음. 이건 다양한 글을 건드려서라기보다 욕구불만이었을까?) 며칠 전에는 의도되지 않은 퓨전 판타지-매지션이 운기조식을 하는-도 나왔는데 곱게 삭제됐다. <-솔직히 이 사건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게, 꿈인지 현실인지 명확하게 기억할 수가 없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과정을 세밀하게 표현하느라 원고지 매수로 20-30매 분량을 썼다가 지웠는데, 그 정도의 분량이면 난 지우지 않고 삽질함에 등록시킨다. 아쉽게도 삽질함 내의 최근 글은 세계관을 자상하게 설명하여 나까지 하품나오게 만들었던 50매 분량의 글이었다. 그냥 지웠던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꿈이었던 걸까.

슬슬 커피를 줄여야 할 시기가 됐다고 본다. 지금은 속이 쓰려서 밥을 먹어야겠다. 근데 내가 언제 밥을 먹었더라?

레디 오스 성화 올림

댓글 9개:

  1. 역시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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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좀비구려. 네크로맨서는 누구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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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저기 '환술' 더 뜬다라는건;;;; 역시 커피님의 강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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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오빠는 신장이 튼튼하신가봐요. T.T

    저는 카페인 섭취가 어느 한도(컨디션에 따라 틀리지만)를 넘어서는 순간 뇌기능 이상이 오기 전에 몸살 걸립니다. 헛구역질에 오한에 현기증에 전신무력증에 이르기까지 딱 몸살이죠.

    물론 밥도 못 먹고 온종일 끙끙거리고 누워서 데굴거려야 일어나지더군요.



    평소 밥 좀 드시고 사세요 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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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밥은... 상황에 따라서 누구보다 많이 먹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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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커피신의 강림 맞아요. 삼국지5에서 튀어나온 화타가 환타로 업그레이드된 김에 푹 썩혀서 커피신이 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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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저 스스로는 사람답다고 느끼긴하지만, 좀비가 자길 좀비로 알고있기나 하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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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ㅇ<-< [정곡을 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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