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8일 월요일

창밖을 보면

오후 2시 반이 약간 안 된 시간임에도 어둑어둑하다. 저것이 안개인지 스모그인지 몰라 창밖 세상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숨이 턱 막힌다. 오늘도 전광판은 해태광고에 여념이 없고, 자동차는 한쪽 길만 빼곡하다. 저렇게 반대차선이 텅 비었으면 가끔 멋드러지게 유턴하는 차량 하나쯤 나와도 될 것 같은데.

 

사무실이 조용하다. 최근에 중2병이 들어서 얌전히 있지를 못하겠다. 나연님한테 놀아달라고 칭얼대고, 이든군과 몸싸움하고, 명운님을 살살 갈구고, 머깨비 타쿠양에게 들러붙어 닥치는대로 먹는다. 배는 점점 나오고... 달이 차오른다. 애기야, 가자.

 

얼마전 해한가 감상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제는 떠나버린 이글루스 포스팅에서 봤던 글인데, 내 취향의 감상(-_-?)이 아니어서 그냥 넘어갔었다. 그다지 이슈가 될 감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될만 했나 보다. 아직까지 얘기가 이어지고 있었던 듯.

 

실현 가능성을 점치며 글을 읽는 거야 개인 취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친구가 그렇게 글을 읽으면 보따리 싸들고 쫓아다니면서 말리고 싶은 것이 내 심정이다. 나는 밀덕후급 독서법을 여타 작품에게까지 반영하며 읽는 취향에 대하여 고개를 젓는다.

 

그 이유는 '친구와 대화하며 독서하는 방법'과 더불어 '책을 재미없게 읽는 방법의 양대산맥'으로 저 독서법이 있다고 여겨서다.

 

책을 읽는 순간부터 '2002년 8월 12일 2시 용산역 철도회관 앞'이라는 배경설정을 보자마자, 그 날짜 2시에 철도회관 앞은 방송촬영중이어서 정문 기둥에 기대고 누군가를 기다릴 수 없었다고 투덜댄다면 다음 얘기에 몰입하기 어렵다. 12세의 천재소년 목록을 죽 늘어놓고 그 중에 책 속 인물은 없었다고 투덜대면 역시 몰입하기 어렵다. 27세의 의사, 26세의 자리 잡힌 변호사라는 설정을 불만스럽게 여기는 밀덕후식 꼬집기가 독서 중에 떠올린 의식이라면 세상 어떤 문호, 어떤 대중창작가의 작품을 내밀어도 쉽게 재미를 줄 수 없다.

 

그렇기에 물망초에 대한 지적도 동일급부의 꼬집기로 치부된다. 물망초는 초여름에 피는 꽃이지만, 실내에서 키우기에 따라 빠르게, 또는 늦게 꽃을 피울 수 있다. 해한가에 대한 누군가의 감상은 이런 사소한 딴지도 감수해야 할 꼬집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밀덕후식 감상의 피해다.

 

지금 내가 밀덕후식 감상을 언급한다고 하여 그러한 감상 방식이 문제라고 여기는 건 아니다. 밀리터리 소설은 집필에 밀덕후의식이 반영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글이 많다. 이는 일종의 SF이며 여타 작품보다 관련항목에서 세밀한 지적을 받아들일 각오를 하고 쓰는 글이다.(그러니 내가 못 쓰지. 보통 열정과 노력이 아니고서는 쓰기 어려운 글이 밀리터리 소설이다.)

 

단지 잣대가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거다.(잠깐, 나 지금 뭘 쓰는 거지? 애초에 창밖을 보다가 일상얘기 몇 마디 끄적거리고 덮으려던 거 아니었어?)

 

추리소설을 썼다. 사망자가 1930년산 프랑스의 유명 와인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와인은 아직 한국에 유입된 적 없다. 하지만, 사망자는 불법루트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경로를 걸쳐서 간신히 손에 얻었다. 문제는 그 와인 자체가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손님 접대에 사용되는 것 외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그저 사망자가 어느 정도 부유하고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는 지를 단적으로 표현하려고 사용한 소도구였다. 작가는 소도구의 역사까지 블라블라했다가 글의 재미를 잃을까 걱정되어 '불법루트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경로를 걸쳐서 간신히 손에 얻은 과정'을 언급하지 않았다. 작가의 지식 속에 그 와인이 사망자의 손에 쥐어지기까지의 개연성은 모두 존재하지만, 글의 재미를 위해 일부러 넣지 않은 것이다.

 

밀덕후식 감상에서는 이것이 까인다. 글의 재미를 떠나서 저 와인을 손에 넣는 과정을 넣어야만 한다.

 

그렇게 읽으면 재미 없을 확률이 높다. 추리소설을 읽을 때의 개연성 잣대는 추리에 한정짓는 것이 읽기에 좋다. 판타지소설을 읽을 때의 개연성 잣대도 판타지소설에 한정짓는 것이 읽기에 좋다. 그 세계만의 개연성을 받아들일 때, 작품이 가진 모든 재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배 고플 때 먹는 밥이 맛있고, 제 철에 먹는 음식이 맛있다. 센티한 마음으로 창밖을 볼 때와 쾌활한 마음가짐으로 창밖을 볼 때 느껴지는 스모그 풍경이 전혀 다르듯, 재미라는 녀석은 자신을 알아주려는 독자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이야아아! 포스팅 제목과 연결했어! 나 쫌 횡설수설급인듯)

 

자기 취향이 있다는 건 안다. 깔 생각 없이 읽었을 뿐인데, 갑작스레 거슬리는 내용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래도 끝까지 읽을 생각이라면 내 취향을 접어두고 글 속 세계에 빠져드는 것을 권장하고 싶다. 그렇다고 내 취향이 어디로 도망가거나하지는 않으니까. 독서하면서, 영화관람을 하면서, 내 취향을 버릴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채 '볼 것 없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몇 배 낫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레디 오스 성화 올림

댓글 18개:

  1. 저라면 귀찮아서 그렇겐 못 읽겠더라고요. 소설 내 버그 따지는 거라면 모를까

    암튼 우리 언능 배에서 애 떼염 ㅠ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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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취향은 관점...

    다른사람이 머라할 만한 것이 아니지..!

    책에서 해엄치는것은 바이블매니아 의 꿈..!!

    ps:요즘 고민이 많아서 잠을 못자 다크서클이 생겻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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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제가 보기엔 어지간히 취향에 안맞아서 재미가 없었나보네..개연성 이야기가 나온걸 보니 라는 기분이였습니다. '재미없어'라고 쓴 감상 치고는 꽤 오래 화제가 되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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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그 감상글을 떠나서, 해한가라는 글에 대해 찬사만큼이나 몰입해 읽기가 어려웠다, 재미없다, 라는 평이 나오는 걸 봐서 좀 생각해볼 문제는 있긴 있겠다라고 생각해요. 그나저나 저는 좀 재미없게 봐서... -_-;



    제 아랫배에는 세 쌍둥이가 있지요. 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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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키라님의 해한가감상의 떡밥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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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사아기 - 2008/12/08 17:17
    어서어서 떼염.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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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오시 - 2008/12/08 17:56
    잠을 안 자서 고민이 가중되는 것일 지도... 힘 내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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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실버 - 2008/12/08 20:13
    그러게요. 처음 읽을 때는 한 번 슥하고 지나갈 글이라 여겼는데 예상 외였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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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김현 - 2008/12/08 21:34
    거치적거리는 부분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걸 꼭 집어서 표현할 능력이 못되었달까. 취향이 많이 갈리는 글인 듯 해.



    세 쌍둥이... 머잖아 나도...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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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진주여 - 2008/12/08 22:19
    넵! 떡밥이 되더라고요.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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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레디여 떡밥을 던져라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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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답글들 보다가 한마디... '머잖아'가 아니라, 레디님은 이미 태중에 세 쌍둥이가 잠들어 있는 거 아니었어요? ㅁㅅㅁ 그러게 저처럼 소식하시지. 쯧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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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깔려고 글을 읽기 시작하면 참 글이 재미없어지죠. 해한가에 대해서는 정말 내 취향은 아니구나-란 생각만 들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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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다만 "이는 일종의 SF이며 여타 작품보다 관련항목에서 세밀한 지적을 받아들일 각오를 하고 쓰는 글이다."를 지적하고 싶네요. 대부분의 SF도 '밀덕후의 감성'으로 읽으면 더럽게 재미없습니다. SF도 결국 픽션이고, 현대 과학에 100% 엄정한 글은 거의(하루가 다르게 과학이 발전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아예) 없거든요. 심지어 하드 SF도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위해 약간의 리얼리티를 희생/왜곡/축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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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바비 - 2008/12/09 13:08
    투투투투투척!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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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펜타쿠 - 2008/12/09 14:36
    님한테까지 그런 소식하라는 말 듣고싶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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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Filia - 2008/12/09 16:02
    호불호가 갈리는 글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창작 영역이 넓어진다는 소리처럼 들려서 기분이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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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파인로 - 2008/12/09 20:37
    으윽. 그렇군요. -ㅁ-;;



    실은 밀덕후의 감성이라는 것을 전 잘 몰라요. 예전에 클라크경의 낙원의 샘을 읽고, 후에 우주 엘리베이터가 실현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를 접했을 때의 기분이 밀덕후와 같지 않을까 싶어서 추론하여 적은 거죠.(때려맞추기 뽀록... ㅠㅠ)



    역시 그렇군요. SF도 현실성에 앞서 이야기를 우선하여 읽는 것이 재미있는 것이었어요!(개인적으로 SF독자급은 못 된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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