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5일 목요일

코스모스 스토리 7 일리아드편 중 한 꼭지.

바깥의 누구도 듣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소음기를 단 권총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낫을 들고 있는 납덩어리를 토했다. 김유찬은 몇 번 뒷걸음치다가 거실로 통하는 문 없는 문틀에 기대며 천천히 주저앉았다. 잘 만든 화선지 빛깔처럼 옅은 하늘색 정장에 물을 잔뜩 먹인 붓이 내려앉은 것처럼 이질적인 어둠이 번졌다.

 

김유찬은 가슴께에 번지는 핏물을 움켜쥐었다. 아무리 힘내어 짓눌러도 핏물은 점점 번지며 하늘빛을 지웠다. 제갈폭룡은 머릿 속으로 수백 번 리허설했던 두 번째 발사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김유찬이 바라보고 있었다. 정일휘까지 당황하게 했던 이 무모한 대통령은 예상치 못한 눈매로 죽음과 제갈폭룡을 함께 맞이하는 중이었다.

 

"할 말이라도?"

 

얼마나 유치한 말인지 알면서 묻고 말았다. 터무니없는 여유가 방안에 가득했다. 나약한 육체의 대통령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고, 자신은 한 발 앞에서 총을 겨누고 있다. 누가 나타나더라도, 유일하게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존재인 라이온 김용필이 순간이동으로 나타나더라도 제갈폭룡은 김유찬의 암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여유를 즐기려고 유치한 질문을 던졌을 지도 모른다.

 

"뜬금없이 죽는 사람이 할 말이란 몇 개 없지요. 왜 쐈습니까? 저를 쏜 겁니까?"

 

"김유찬 대통령. 당신을 쏘았습니다. 이유는……."

 

제갈폭룡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정일휘의 이름을 꺼내기 싫었다. 초보자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암살 표적과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멍청한 짓이었다. 그래도 제갈폭룡은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입을 열었다. 홀린 것만 같았다. 가끔 미디어에서 보았던 김유찬의 눈웃음에 마력이 담겼던 것일까? 김유찬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눈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재촉했다.

 

"이유는?"

 

"지키려고."

 

제갈폭룡은 서둘러 답했다. 그리고 김유찬에게서 "무엇을?" 이라는 질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제가 지키는 진실보다 가치있습니까?"

 

예상 밖의 질문이 당황스럽거니와, 그 내용이 불쾌하여 제갈폭룡은 눈매를 찌푸렸다. 김유찬이 말한 '진실'은 어떤 것에 대한 진실이 아닌 진실 자체를 뜻할 것이다. 제갈폭룡은 이 무모하고 솔직하며 순진하기까지 한 대통령이 대단한 착각을 한다고 생각했다.

 

진실은 하나로서 이루어질 수 없는 존재다. 내가 행하는 무언가가 누군가에게는 진실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 있었다. 나 외의 그 무엇도 진실과 거짓을 판별할 수 없으며, 수많은 사람의 뜻을 포용할 대통령이 가질 수 있는 건 절대로 아니었다. 그럼에도 김유찬은 진실을 지킨다고 말했다.

 

제갈폭룡은 오늘 맡은 일의 긴장된 순간을 지금 당장 끝내려 했다. 그저 손가락만 당기면 김유찬의 하늘색이 온통 붉게 물들고 심장은 멈출 것이다. 하지만, 이 때 정경은의 얼굴이 제갈폭룡의 기억을 꼬집었다. 밝게 웃던 얼굴이, 은은하게 빛나던 반지가. 진실이 무엇인지 알게되었던 그 순간이 대통령의 방안을 지우고 제갈폭룡의 주변을 뒤덮었다. 제갈폭룡은 김유찬의 헐떡이는 모습과 침묵하는 백골을 겹쳐보았다. 아버지의, 어머니의, 그리고 친구들의 유골을 보며 진실을 찾기 시작한 그 순간이 오기 전.

 

"진실을 잘못 알고 있군요."

 

제갈폭룡은 거짓을 감추는 자를 암살하며 진실의 수호자라 여겼던 그 때의 자신에게 말했다. 이제는 잊었다고 생각한 자신의 얼굴이 김유찬의 웃음짓는 눈매에 얽혀있었다. 제갈폭룡은 다음 말을 기다리는 김유찬의 욕망을 해소했다.

 

"저 또한 진실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지키는 진실과 많이 다르군요."

 

"진실은 하나뿐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진실이 틀렸습니다. 진실은 힘입니다. 법이 아니라 힘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것이 진실이고, 내가 지키던 무엇이 누군가의 힘에 짓눌려 무너지는 것이 진실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힘을 알려 저항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진실이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틀렸습니다."

 

김유찬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바닥까지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입을 열었으나 힘이 빠졌는지 목소리를 꺼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뒤늦게 제갈폭룡은 음악을 들었다. 총구가 잠시 떨릴 만큼 당황했다. 바깥에서의 반응을 염두에 두고 청각을 극도로 높인 상태인지라 숨죽인 발걸음도 들을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방안에서 가장 크게 들리는 음악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못하고 있었다. 제갈폭룡은 음악 속에서 김유찬의 잦아드는 소리를 빼내려고 좀 더 귀기울였다. 그제야 음악이 거슬렸다.

 

발 틈새 스미듯 올라서는 갈색 흙

구름을 가끔 넘나드는 언제나 까만 새

마음이 소스라치면 꼭 느껴요

이 세상엔 좋은 기분이 가득하군요

 

영원하겠죠. 내가 잠들어 흙이 되면 누군가 밟겠죠.

영원하겠죠. 구름을 헤친 새의 날갯짓

문득 나를 보면 내 곁에 있는 기분좋음

이 세상엔 온통 영원한 숨소리소리

 

10년도 더 된 가요였다. 동방엔젤의 독주를 잠시 막았던 조상희의 '영원'이란 곡이다. 우연인지 아니면, 곡에서 감흥이라도 받은 것인지 김유찬이 힘주어 소리 내어 영원을 말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였지만 제갈폭룡에게는 충분히 전달될 성량이었다.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현실이지요. 진실은 어떠한 경우라도 가릴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그것에 대한 위협에 두려움을 느껴 이렇게 제게 방아쇠를 당겼고, 저는 목숨이 끊어짐을 알면서 생각을 바꿀 테니 살려달라 말하는 대신 이것을 지키려 합니다. 두려움이 가득한 이유는 현실이어서입니다. 거리낌 없이 말하는 이유는 진실이어서입니다. 현실은 바뀔 수 있지만, 진실은 결코 바뀔 수 없습니다. 어째서 당신이 현실을 진실로 믿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영원한 것이 진실입니다."

 

처음부터 작게 들렸던 목소리였다. 게다가 말을 하면 할수록 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그럼에도 제갈폭룡은 김유찬이 말 속에서 마지막에 나온 영원이라는 한 마디를 제일 크게 들었다.

 

제갈폭룡은 부정의 뜻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노래는 마지막 소절이 끝나고 반주가 흐르고 있었다. 반주가 끝날 즈음에 김유찬은 손님을 떠나보내고 차게 식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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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찬 암살장면에 사용하려던 꼭지다. 나라 꼴도 그렇고 주변 일도 그렇고 가끔씩 김유찬과 관련된 꼭지를 찾는 경우가 잦아진다.

 

포스팅을 하면서 엄한 문장(대체 언제쯤 내 손에서 엄한 문장이 사라지게 될까... -_-)을 수정하긴 했지만, 저 내용 자체는 꽤 오래 전에 썼다. 지금보다 어릴 때 저런 생각으로 글을 썼던 내가 가끔 대견할 때도 있다.(뭐랄까... 내가 이렇게 썼어? 우와! 하는 느낌?)

 

내 관점에 한정될지도 모르겠으나, 현실을 진실로 착각하는 사람이 자주 보였다. 모르는 순간에 나와 타협하고 그것이 타협 아닌 진실이라며 자신을 세뇌하는 사람. 그렇기에 당당하게 남에게도 진실이라며 말하는 사람. 차라리 이러면 위험하기는 해도 밉지는 않을 텐데, 거짓임을 알면서도 진실인양 말하여 순진한 사람의 행동을 혼탁하게 하는 사람마저 있다. 그 순진한 사람이 훗날 자신이 행한 과거를 평가하여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지 궁금하다.

 

이 사람, 저 사람, 따로따로 만나서 각각에 맞는 맞춤 발언을 하지 말고 누구에게건 똑같은 말을 하거나 아니면, 아예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모여서 대화하는데에 거리낌 없는 말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레디 오스 성화 올림

댓글 2개:

  1. 코스모스군요오오오오오...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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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리디아 - 2008/12/27 00:20
    메롱의 근원입니다.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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