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24일 일요일

우리들의 OX점수 게임과 기사식당.

나는 천주교 학교인 대건 고교를 나왔다. 월요일 조례를 미사로 했고, 노병건 선생님 이후 교장으로 취임하신 분은 이석은 수사님이다. 수녀이신 미술 선생님께 몽둥이로 맞고 싹싹 빌던 기억도 인상 깊다.(수녀님에게 얻어터지는 경험을 하기란 쉽지 않겠지)

전교생이 야외 학습 일환으로 샤미나드 피정의 집이라는 곳에서 수련한 적 있다. 그곳에 간 학생들이 제일 먼저 접한 것은 게임이었다. ‘우리들의 OX 점수 게임’이라는 아주 단순한 게임이다. 이 게임은 먼 훗날 내가 학생회장이 되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써먹었다.

게임 내용은 이렇다.

학생들 수에 맞춰 팀을 구성한다. 각 8-9인이 모인 6개 팀은 팀원끼리 의논하여 쪽지에 O, 또는 X를 적어 연단으로 가져가야 한다. 쪽지를 공개하기 전까지 다른 팀이 쪽지 내용을 알아서는 안 된다. 이 과정을 7번 반복한다.

그리고 3번째와 6번째는 쪽지에 적기 전에 모든 팀에서 대표 한 명을 뽑아 서로 모여 의논한다. 쪽지에 무엇을 적을 것인지 타협하는 것이다. 타협 내용을 지켜도 되고 배신 때려도 된다.

7회에 걸친 쪽지는 매회 공개된다. 그리고 그에 따른 점수를 받는다. 점수 내역은 다음과 같다.


- 6장 모두 O가 나오면 6팀 모두 +1점이다.

- 5O 1X : O -1점 / X +4점이다.

- 4O 2X : O -2점 / X +3점이다.

- 3O 3X : O -3점 / X +2점이다.

- 2O 4X : O -4점 / X +1점이다.

- 1O 5X : O -5점 / X 0점이다.

- 6장 모두 X가 나오면 6팀 모두 -1점이다.

마치 X를 쓰라고 주장하는 듯한 이 괴상한 게임을 보며 ‘참 재미없는 게임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O를 내는 팀도 있었지만 대부분 X를 냈다. 3회째가 되어 회의에 들어간 대표들은 모두 다 O를 내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팀을 비롯해서 몇몇 다른 팀은 약속을 깨고 X를 냈다.(O를 낸 팀도 있다) 그 때문인지 6회째 회의는 모두 다 X를 내기로 합의하여 합의내용대로 X를 냈다.

처음부터 끝까지 X를 낸 팀이 둘 있었고, 그 팀이 가장 높은 점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점수 발표는 뜻밖이었다.

운영자는 모든 팀 점수를 합산한 것이다. 이 게임은 ‘OX점수 게임’이 아니라, ‘우리들의 OX점수 게임’이었으니까. 당연히 우리들의 점수는 마이너스였다.

이 게임은 X를 내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점수가 낮아진다. 반면 X라는 존재는 팀 입장에서 대단히 탐나는 기호다. 이는 집단 속에서 ‘이기적 이득’을 취하는 태도에 대한 지적이라 볼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전체를 보는 법을 배웠다. 무신론자이지만 내심 천주교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때 얻은 쇼크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내게 있어서 ‘다독, 다작, 다상량’ 만큼이나 커다란 교육이었다.


내가 처음 서울에 정착하던 시절, 집을 얻은 곳 부근은 기사식당이 잔뜩 있었다. 택시기사분들이 점심때마다, 또는 저녁때마다 찾아와서 식사하는 곳이었다. 주 메뉴는 순댓국이었다. 감자탕집도 두엇 있었다. 여기 음식이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대부분 제법 맛이 있어서 자주 끼니를 해결했다.

식당이 꽤 많았지만 자리를 잡기 힘들었다. 손님이 그만큼 많아서다. 하지만 모든 식당이 잘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새로 생긴 기사식당에 갔다가 맛이 없거나 불친절하면 다시는 가지 않았다. 다른 손님들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런 곳은 대단히 신속하게 망했다. -_-

자주 찾는 식당에서 순댓국을 먹을 때, 면식 있던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온 적이 있다. 그분은 식당 주인에게 불평했다. 가게 내놨다며 한숨짓는다. 저 아주머니를 어디서 봤을까 고민했던 나는 비로소 감 잡았다. 내가 들어올 때부터 나갈 때까지 인상 잔뜩 찌푸린 채 퉁명스러운 태도로 손님을 받았던 식당 주인이었다. 생기자마자 맛이 어떨까하고 딱 한 번 갔던 식당이었는데 너무 기분이 나빠서 얼굴을 기억했던 거다.

아주머니는 장사가 너무 안 된다며 불평했다. 주변에 식당이 너무 많아서란다. 내가 보기엔 아니었다. 순댓국을 먹으면서 ‘아줌마는 뭘 해도 망할 거예요’라고 생각했다. 그 때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식당을 접는 주인들이 ‘다수의 경쟁자’나 ‘단골손님을 확보한 텃세’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그와 비슷한 면이라고 하면 좋겠다. 산책을 즐기는 편이라서 집 주변 뿐 아니라 4-5블록을 돌아다니곤 한다. 기사식당 구역을 벗어난 지역에 순댓국이나 감자탕을 파는 집이 가끔 보인다. 그 중 어떤 집은 내가 자주 찾는 곳이기도 했다. 맛도 있고 친절해서 일부러 그곳까지 걸어가 식사할 때도 있었다. 이 식당을 찾는 이유 중에 또 한 가지가 있다. 손님이 별로 없어서 한적한 맛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내가 이사 가기 전에 이 식당도 문을 닫았다. -_-

경쟁자가 있다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 더 큰 세상을 보면 그 사람들이 경쟁자가 아닌 동료일 수도 있다. 기사식당 구역 내 모든 식당들이 서로 경쟁하여 맛과 친절을 레벨업하면 본인도 몰랐던 뜻밖의 점수를 얻게 된다. 그것은 순댓국과 감자탕이다. 이 세상에 점심시간을 채울 음식은 널리고 널렸다. 그 수많은 음식 중 순댓국과 감자탕을 선택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기사식당에서 벌어지는 경쟁은 바로 그 확률을 남몰래 높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 주변 지역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순댓국과 감자탕을 메뉴로 결정하게 만드는 최면효과도 준다. 경쟁자가 없는 다른 지역에서 장사하는 식당이라면 ‘확률과 최면’을 커버하기 위한 노력이 필수다. 적어도 기사식당 구역 내 식당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야 될 것이다. 저들은 단체라는 힘을 빌어 노력을 나눠가지니까.

작가, 독자, 출판사, 총판, 대여점, 판매시장, 대여시장들이 서로 X를 내밀며 각자 이익을 취할 동안, ‘우리들 서점시장’은 계속 마이너스가 될 것이다. 음식에 순댓국과 감자탕만 있는 것이 아니듯 문화에 소설과 만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게임, 스포츠, 여행, 음악, 영화, 텔레비전 등등 시간과 금전을 필요로 하는 무언가는 산더미처럼 쌓였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 X를 내세우는 경쟁을 할 때는 이미 지났다. 지금은 확률과 최면을 위해서 남이 좀 잘 되더라도 투자를 해야 살아남는 시기다.

판매시장이 눈에 띄게 활성화되고 있다. 이에 반하여 대여시장 위축현상은 점점 더 심화되어 소규모 대여점이 연이어 문을 닫거나, 책 구매에 망설인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꼴좋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서점시장의 축소현상이다.

예를 들어, 만약 대여점을 판매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루트가 형성된다면? 이는 대여점과 총판, 출판사 간 상호 합의가 이루어져야 가능하며, 각자가 피해를 보거나 투자하는 것을 감수해야 가능하다.(투자는 현재 돈줄을 쥐고 있는 출판사와 총판이 주가 될 수밖에 없다) 어쨌건 루트가 형성되는 그 순간, 모두 다 후회할 것이다. 소규모 대여점들이 문을 닫기 전에 진작 하지 않았던 것을.

울컥할 사항도 있다. 불법복제.

터무니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불법복제는 서점시장에게 마냥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다. 그나마 ‘이 세상에 책이 있다’라는 의식을 남겨주는 역할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법복제와 서점시장 간 연결점을 확보하는 기획이 꼭 필요하다. 어제 0원이던 책이 오늘 8천원이면 책 자체를 외면할 사람들이 많다. 어떠한 기획이건 연결점을 조심스레 찾아서 현재 독자로 인정하지 않는 ‘비수익 독자’들을 ‘수익 독자 계열’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속이 뒤집어져도 일단은 ‘저것들도 독자는 독자다’라는 관점만큼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지금 책은 위기에 봉착했다. 그런 주제에 팀이 많다. 이 많은 팀들이 각각 따로 놀면서 X를 내미는 상황이니만큼 서로를 적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모두가 O를 내도록 조율해야 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모두가 이 게임의 비밀을 알고, 기사식당촌의 결과물을 의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이상론이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안다. -_-

그래도 최선을 다하여 O를 내밀고 플러스 점수마저 구하는 게임룰 파괴의 노력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이상실현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관련업계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특정한 누군가를 위해 ‘저들은 크고 아름답다!’라고 말하기 힘들다. 특정하게 편을 든다는 오해를 살 테니까 말이다. 그저 마음속으로 응원한다. 어떤 작품들, 어떤 작가들, 어떤 출판사들을 진심으로 아끼며.

레디 오스 성화 올림

댓글 7개:

  1. 으음... 간만에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저 게임은 어디서 써먹어 봐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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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저희 아버지께서도 대건고를 나오셨지요. 천주교 재단이었다는 건 지금 처음 알았습니다만; 저 OX 게임 이야기는 죄수의 딜레마의 변형판이로군요. 항상 O만 낼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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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OX 게임이라... 심오하군요. 아래 말씀도 잘 읽었습니다.



    대건고가 왜 대건고인지 짐작은 갑니다만 아련이 먼저 생각나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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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정말 이상론 ;;;; 가능할까요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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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혹시 대구의 대건고? 대구 대건고면 선배님이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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