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25일 월요일

인연 1회

1화. 우연3

뭐가 중요한지 모르겠고 뭘 선택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 그래서 세희, 그 계집애가 참고서를 세워둔 채 타로카드를 뒤섞으면 유심히 바라보곤 했지. 선생님은 내 시선을 보고 세희가 뭘 하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에 나는 늘 떡볶이 값을 날렸어.

혹시 알아? 갑작스러운 상황이 닥쳤을 때 내가 무슨 행동을 취하건 하루가 지나면 그 때를 후회하게 된다는 것. 그 때의 기분. 혹시 알아?

뭔가에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대처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워질 거야. 난 절대 그럴 수 없을 테니까. 수많은 군중들을 끝까지 외면한 채 단상 위 메모지만 열심히 쳐다보는 사람들의 기분을 이해해. 그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어. 글 속에는 나의 생각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거든. 그 속에는 나의 생각을 시간이라는 양념으로 버무린 요리가 들어있어. 그래. 사람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우산 없어요?”

이 잘 생긴 남자애가 나에게 웃었을 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했을까? 잘 생겼다고는 하지만 머리카락은 세계 어느 인종에게도 천연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색깔이었고, 저런 귀를 가진 인간이 태어난다면 엄마 자궁이 남아나지를 않았겠다 싶을 정도로 서슬 퍼런 귀걸이를 하고 있는 애였어. 아아, 목걸이. 현기증이 난다. 누가 독살이라도 하려나? 저렇게 강인한 은사슬 목걸이라면 소가 아니라 미노타우르스라도 끌고 갈 수 있을 거야.

중요한 것은 이 녀석이 나에게 우산이 없냐고 물었다는 거야. 난 우산이 없었어. 하지만 얘도 없었어. 비가 쏟아지는 하늘 아래 어떤 쌩 양아치가 나타나서 나에게 유혹의 한 마디를 건넸다고 밖에 볼 수 없겠지. 이 불쾌감을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방법은 없었어. 시간이 없었으니까.

“예에…… 없는데요.”

“아, 그래요? 저도 없는데.”

어쩌라고! 나의 대답은 하루가 아니라 당장 후회할 만큼 머저리 같았을 거야. 폭이 1미터도 채 안 되는 좁은 공간에 나란히 선 채 우리 둘은 정면을 응시했어. 하늘엔 비가 쏟아졌고, 바람은 우리 머리를 막고 있는 좁은 테라스를 인정하듯 비를 실어오지 않았지. 셔터가 내려진 정체 모를 가게 앞에서 우리 둘은 약속된 침묵이라도 하듯 얌전히 있었어. 그러다 내가 말을 꺼냈어.

“이미 다 젖었는데 그냥 뛰지 그러세요?”

뒤늦게 공격을 한 거야. 나는 시간을 다루지 못하는 게 확실했어. 나의 두 번째 대답 속에는 시간이라는 양념이 버무려져 있었고, 그 양념은 소고기에 뿌려진 케첩처럼 형편없었지. 하지만 양아치는 웃었어.

“지금 꼬시는 중인데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요?”

농담조가 들어있는 그 대답에 내 정신은 공황상태가 되었어. 나는 고개부터 세차게 가로저으며 퉁명스럽게 “그럼 내가 뛸게요.”라고 말했지. 그리고 정말로 빗속을 향해 몸을 날렸어. 그 순간 나는 양아치와 육체적 접촉을 하게 되었지. 녀석이 내 손을 잡은 거야.

“됐어요, 됐어. 내가 포기할게요.”

다시 나를 테라스 아래로 집어넣은 양아치는 웃으며 말했어.

“나도 그냥 처음 봤을 때 마음에 든다 싶어서 말을 걸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갈게요.”

“아뇨. 어차피 뛰어서라도 가야 해요. 학원 시간 늦었거든요.”

“어느 학원 다녀요?”

“알아서 뭐 하게요? 포기한 거 맞아요?”

“음…….”

양아치는 잠시 망설였어. 그리고 그 커다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열 개나 붙어있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말했지.

“포기는 했죠. 그냥 물어본 거예요. 노력도 하지 않으면 아무리 인연이라도 소용이 없을 테니까.”

인연 좋아하네. 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건물의 어둑한 창을 지나치는 하얀 빗줄기를 바라보자, 양아치의 목소리가 들렸어. 활기 찬 목소리였지. 마치 뭔가를 꿈꾸는 사람이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듯 자신감이 느껴졌어.

“제 이름은 다음번에 만날 때 알려줄게요. 저는 이 동네에 처음 왔어요.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면서 여기저기 걷다가 여기까지 온 거예요. 아무 생각 없이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는 취미가 있거든요. 어때요?”

“뭐가요?”

“제 집은 이 동네도 아닐뿐더러 서울도 아니에요. 학교도 수원이고 여기 올 일이 전혀 없죠. 오늘처럼 한가한 경우도 자주 생기는 편이 아니고요. 괜찮죠?”

“그러니까, 뭐가요!”

“앞으로 3번을 더 우연히 만나면 그 때는 사귀는 거예요.”

스토킹하겠다는 얘기잖아! 난 있는 힘껏 코웃음을 치며 잔뜩 찌푸린 하늘을 바라보았어. 양아치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렸지. 언덕 아래 버스정류장 종점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가는 뒷모습이 이유 없이 즐거워 보였어. 그리고 나에게 무척이나 인상 깊은 장면을 남겨줬는데, 그것은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서 빗길에 미끄러져 자빠지는 모습이었어. 난 당연히 깔깔대며 웃었지.

그렇게 되고 보니 2년이 지났는데도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었어. 가끔 가다가 혼자서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며 피식 웃기도 했지. 하지만 그 양아치의 얼굴을 다시 떠올리려 해도 쉽지가 않았어. 남자애답지 않은 초승달 눈웃음도 기억이 나고 도톰한 입술이 열심히 움직였던 것도 기억이 나는데, 얼굴 전체는 죽었다 깨어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거야. 양아치를 생각하면 뚜렷하게 기억이 나는 것은 연녹색 머리카락과 고슴도치처럼 사방으로 가시를 뻗어대던 귀걸이와 은사슬 목걸이 뿐이었어.

그러니 2년 만에 그 녀석을 다시 만났을 때 알아볼 리가 없잖아! 그 3가지를 모두 팔아치우고 나타났으니까 말야.

“우와아아앗!”

수원역 앞에서 무테안경을 쓴 범생이 하나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비명을 질렀을 때, 저게 미쳤나 싶었어.

레디 오스 성화 올림

추잡: 카테고리를 이제야 확인한 사람은 진 겁니다.

댓글 5개:

  1. 뭐, 보는 순간... 하나 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능;;

    그럼 전 이긴건가효?-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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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오오오...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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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카테고리 보기도 전에 입술 사이로 혀를 내미는 행동을 하면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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