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13일 토요일

전화 통화

대화를 좋아하던 시절이 있다.(물론 이 때도 재미없는 대화가 지속되는 것은 사절이었다.)

많은 사람과 다양한 사람과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다가 통신연재를 시작하면서부터 말수가 많이 줄었다. 특히 인천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했던 몇년 전부터는 A군 커플 및 떠나간 첫사랑을 제외하고는 거의 누구와도 대화한 적이 없는 것 같다.(아. 출판사 관계자와는 자주 대화했다. 몇 개월에 한 번 만나게 되는 모임 때도 빼고.) 나의 대화는 입이 아니라 인터넷 상에서 글로 표현되었다.

그러다보니 대화하는 법조차 잊은 듯 뭔가 말을 할 때 앞뒤가 안 맞고 자주 버벅거렸다. 서울 사무실로 오면서부터는 많이 좋아졌지만.

그 덕에 생긴 버릇인지 몰라도 대화를 오랫동안 지속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인천 때부터 유독 눈에 띄었던 부분이 바로 전화 통화다.

10분 이상 전화 통화가 어렵다. 특히 자주 통화했던 G양이 확실히 느꼈겠지만, 도중에 빨리 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많이 보이게 된다. 30년 만에 만난 친구가 아니고서는(이런 친구가 존재한다는 게 좀 슬픔 크리) 어지간해서 짤막하게 통화하려고 한다. 마치 본능이라도 되듯.(물론 완전한 본능은 아니다. 최근 몇년 만에 통화한 친구와 1시간 가까이 통화한 적도 있으니까.)

아무리 입담 좋은 친구라도 내 이런 기분을 감지하면 통화를 중단한다. 늘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말이 많으면서도 눈치조차 없는 친구와 통화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중요한 일이 있다며 급작스럽게 전화한 친구가 있다. 이 친구를 전화로나마 접한 것이 얼마만이던가. 하지만, 내 옛 기억 속에서 이 친구에 대한 인상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었다. 특별하게 잘못한 것도 없고 특별하게 싸운 일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친근해지지가 않았다. 그런 기억을 가졌으면서도 이 친구의 연락이 무척 반가웠다. 나는 대단히 반기며 친구와 통화를 시작했다. 친구는 내 목소리를 기꺼워하며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친구들의 소식이었다.

10분이 흘렀다. 친구들 소식은 이미 끝났고, 친구들 가족및 나도 모르는 제3자의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어째서 이 친구와 각별하게 친한 사이가 될 수 없었는지. 기말고사 10분 전이건, 수업종이 울려서 하교시간이 되건, 지각해서 뛰어가는 중에 만났건, 떠들다 들켜서 매맞는 중이건 상관없이 대화를 요구하는 녀석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 취향은 고스란히 간직하여 이날도 변함없이 있는대로 긁어모은 정보를 읊었다. 어느 순간 정신이 멍해져서 "응." 만 반복하는 내가 생겼다.

20분이 흘렀다. 나보고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드디어' 물었다. 글 쓴다고 했다. 판타지와 무협을 주로 쓰고, 요즘 쓰는 글은 판타지 쪽이라고 말했다. 친구가 말했다.

"판타지 재미있지. 반지의 제왕도 재밌게 봤어. 아, 이게 먼저가 아니지. 길가메시 서사시 알겠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냐?! 그거 최초 판타지라고! 오딧세이까지만 가도 이틀은 걸린단 말이다! 반지의 제왕 언급은 적어도 톨킨 시대까지는 가겠다는 암시인 거야? 정말? 나도 모르게 "응." 을 반복해 버리고서 큰 실수를 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30분이 흘렀다. 결혼은 했냐고 '드디어' 물었다. 안 했다고 말했다. 사람은 결혼을 해야 인간이 된다느니하는 추석 제사 때 필수로 들어야 할 덕목을 리허설한다. 몇 마디 반박했더니 "네가 안 해봐서 그래. 네가 몰라서 그래." 라고 꼬박꼬박 면박준다. 그 때 깨달았다. 난 얘를 싫어했었어! 하느님, 이제는 제 치매가 두렵습니다! 자기 애가 얼마나 귀여운지 역설할 때, 참다 못해 본성을 드러냈다.
"그렇게 귀엽다니... 앞으로 아버님이라고 불러도 될까?"
"아들이야."
"알아."
게이가 싫은 이유를 구구절절 늘어놓기 시작한다. 빌어먹을. 이런 결과론이라니! 괜히 농담했다.

40분이 흘렀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핸드폰 배터리는 오늘 따라 만땅되겠다. 어쩌다가 게이에서 NBA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들의 스포츠는 농구로 시작되었다. 올림픽 야구 미국전을 '회' 단위로 설명한다.(미국전이라는 것은 의미가 크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다음에 일본전이 두 갠가 있고 쿠바전도 두 갠가 있었다. 이놈의 대화는 시작부터 창대함을 암시한다.) 내가 지금 엄청난 위기에 봉착해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는 과거를 떠올렸다. 말빨이 화려했던 시절을 더듬고 더듬어 남의 말을 끊을 수 있는, 대화를 후딱 종료할 수 있는 '봉인된 기술'을 찾기 시작했다.

벼라별 횡설수설과 냉담한 말투로 간신히 녀석의 주저리를 끊었을 때는 이미 통화시간 50분이 넘어갔다. 녀석이 말했다.

"아 참. 용건이 있었지. 이거 얘기가 좀 긴데 지금 시간 괜찮아?"

뭣이!!!!!!!

이게 기였어? 아직도 승과 전과 결이 더 남은 거야? 내 목소리가 조급해졌다. 아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야, 큰일이다. 나 지금 마감중이야. 바빠서 빨리 끊어야 할 것 같아. 미안해. 정말(훗) 미안해! 친구는 아쉬운듯 "아냐, 괜찮아. 어쩔 수 없지. 시간이 나면 전화해." 라고 말했다. 그리고 "야, 근데 정말 너 오랜만이다. 네가 옛날에 만화 그릴 때부터 작가가 될 놈이라는 거 알아봤지." 라면서 그 때 얘기를 10분간 더하여 1시간 돌파했다. -_-

그리고 며칠이 지났지만 아직 그녀석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전화 걸기 무섭단 말이다! ;ㅁ;

고스트 라이터 올림

추잡: 아. 초반에 1시간 가까이 통화했다던 친구와는 다른 사람이다. 그 친구와 통화한 건 무척 즐거워서 내가 1시간 가까이 통화를 끌었던 것 같다. 역시 사람 차이인 건가!

댓글 25개:

  1. 저저저저저저저도그런사람하나알아요! 로(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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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저는 통화가 5분 이상 넘어가면 등허리에 식은땀이 솟아나기 시작하더군요...



    그나저나 30년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죠?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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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괴...굉장하군요(.. ) 시작부터 창대한 대화라니..후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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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뭔가 대단합니다;; 전 여자친구와 전화할 때 말고는 한 시간을 넘겨본 적이... 아니 10분을 넘겨본 적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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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저도 그런 사람은 무섭습니다. ...랄까 그렇게 통화해본 적도 너무 오랜만이라서-_;; 핸드폰은 시계인겁니다. 네. 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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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ㅇㅅㅇ/////// 즐거운한가위는 마감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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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저는 입으로 하는 대화가 힘들어요. 손으로 하는 대화는 그럭저럭 수월해요. 20분 정도만 떠들고 나면 목이 컬컬하고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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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하아.. 통화라. 저도 안한지 매우 오래됫내요.. 옛날엔 막 1,2시간이고 통화해본적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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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뒤에 1시간 넘게 통화하셨던 친구분...쩌는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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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아아 저도 이런 사람 알아요 ;ㅁ; 로...(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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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아, 실수. 30분 만에로 정정해야 할...(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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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전 여자친구와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ㅠ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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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그렇죠! 핸드폰은 시계입니다. 집전화번호는 1번꾹이고요! ㅇㅅ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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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이 때로부터 10일 후에 뭔 일이 벌어졌는지 네놈이 직접 확인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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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실탄님은 제가 만난 분 중에서 끊이지 않는 언변력을 가지신 몇 안 되는 분이셨어염.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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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그, 그것도 젊음이 필요한 것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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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그 친구 번호 뜨면 짜질 것같아요. ;ㅁ;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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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trackback from: kz의 느낌
    그 때 깨달았다. 난 얘를 싫어했었어! - 잠깐 반갑다가도 막상 보면 다시금 안 반가워지는 사람이 있다. 아주 가끔 어떻게 살까 생각은 나지만 그냥 거기까지가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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