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7일 금요일

소녀와 소년의 이야기

소년은 소녀의 동급생입니다. 같은 반이며 한 분단 너머 옆자리에 앉은 친구입니다.

소녀는 소년을 좋아합니다. 항상 웃고 떠들며, 때로는 싸우고 외면하는 일상 속 친구이지만 마음 속으로는 세상 그 무엇보다 소년이 좋습니다.

학원 끝나고 교문을 나섰을 때 집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소녀의 엄마는 제사 때문에 집을 비웠으니 곧장 친척집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소녀는 말했습니다.

너무 멀어요. 그냥 친구집에서 잘게요.

하지만 소녀의 몇몇 친구들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모두 다 사정이 안된다며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 소녀는 소년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핸드폰이 악마의 죄악처럼 느껴졌지만, 소녀는 끝내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평소처럼 웃는 얼굴로 말했습니다.

큰집에서 제사지낸다고 엄마 아빠가 다 가버렸어. 문도 잠겨서 갈 데가 없는데 하루만 재워줄래?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 와.

소년은 자취생입니다.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성적이 좋습니다. 소년의 집에 자주 놀러간 적은 있지만 이렇게 늦은 밤에 찾아가는 건 처음입니다. 언제나 소녀는 학원갈 시간이 되면 집을 나왔고, 소년은 그때마다 잘 가라는 인사와 함께 책상 앞에 앉습니다. 이 깊은 밤에 소년이 뭘 하는지 소녀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책을 펼치고 있을 겁니다.

네. 그랬습니다. 소년은 공부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래도 소녀를 반기며 먹을 것을 챙겨줍니다. 평소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어서 편합니다. 이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했지만, 소년의 태도에 마음이 놓입니다.

밤이 깊었습니다. 소년은 침대를 양보하고 비상용 이불을 깔고 잠을 청합니다. 소녀는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습니다. 가끔 곁눈질하여 어둠 속 소년의 모습을 흘겼습니다. 소년은 자고 있습니다. 소녀는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소년과 소녀는 등교준비에 부산을 떱니다. 소년이 여러 번 농담을 하며 웃고, 소녀도 웃습니다. 하지만 소녀의 웃음은 짧았습니다. 곧 굳은 얼굴이 됩니다. 아무리 밝은 표정으로 소년을 보려해도 저절로 굳는 얼굴을 막지 못합니다.

소녀는 우울했습니다. 이렇게 되리라 믿었기에 소년의 집을 찾아왔지만, 이렇게까지 평범한 하루가 되길 바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얼굴을 붉히는 소년을 한 번쯤 보고 싶었고, 밤잠 뒤척이는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고 싶었습니다. 어둠 깔린 좁은 방이 소녀를 의식하는 소년의 가슴뛰는 소리를 속삭여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소년에게 있어서 소녀는 친구일 뿐이었나 봅니다.

지워지지 않는 굳은 얼굴이 수업시간을 지루하게 만듭니다. 소녀는 초록색 칠판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소년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 슬퍼질 것 같았으니까요.

하지만 마음의 방심을 틈타 소녀의 시선이 소년을 찾았습니다. 버릇이니까요. 그런 스스로가 미웠지만, 소녀는 어쩔 수 없이 소년의 모습을 응시했습니다. 자신은 소년에게서 영원히 친구일 수 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움을 담고 바라봤습니다.

소년은 졸고 있었습니다. 소녀의 굳은 얼굴에 갑자기 미소가 번집니다.

레디 오스 성화 올림

여기저기서 게시물을 읽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포스팅으로 끄적끄적... -ㅅ-;;

댓글 7개:

  1. 10월 말에 나올 용들의 전쟁 6권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답글삭제
  2. 그 미소와 함께 소녀의 머리 위에는 아이콘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파워봄]



    설명 : 프로레슬링에 있어 가장 호쾌한 기술 중 하나. 상대와 마주본 상태에서 상대의 허리를 굽히게 한 후 허리를 잡아 거꾸로 들어올려, 머리 위까지 반회전시켜 끌어올린 후 그대로 등으로부터 떨어뜨리는 강렬무비한 기술. Don't Try This at Home! (Never!)

    답글삭제
  3. 소년의 이름은 'Rock'이었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노려보던 중이었죠.

    답글삭제
  4. 짧은데 뭔가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