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1일 토요일

우울한 생각

호랑이가 담배피던 시절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옛날.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녀석이 친구들에게 열심히 머릿속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운이 좋으면 그 이야기를 끝까지 재밌게 들어주는 친구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친구는 길고 긴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못하고 하품한다. 또는 핑계를 대고 녀석의 이야기에게서 도망친다.

그런 나날이 지속되던 어느날 세상이 변했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공간이 생겨버린 거다.

게시판에 내 이야기를 글로 적으면 그걸 끝까지 읽는다. 게다가 재밌다고 감상도 적고 심지어 남들한테 읽어보라는 추천도 한다. 가끔은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도록 지적까지 해주는 고마운 사람도 있다. 통칭 '독자'라고 불리는 이 사람들은 내가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쌩판 남이었다.

이건 이야기하는 녀석의 입장에서 인생의 혁명이었다.

게시판은 이야기하고싶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듣고싶은 사람들로 가득찬다. 모이고 또 모인다. 글은 연재되고 독자는 읽는다. 독자는 읽는 기쁨을 넘어서며 작가가 되기도 한다. 어제는 내 팬이었던 사람이 오늘은 작가가 되어 팬과 함께 즐기기도 한다.

작가는 그것이 즐겁다. 영원히 그 기쁨을 누리고 싶어졌다. 즐거운 공간과 현실을 연결하고 싶었다. 그 기회는 왔다. 출판이다. 즐거움 자체가 생활이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기리에 연재된 글은 출판되었다. 독자들은 작가의 글을 모두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구매한다. 그것이 작가의 또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길임을 알고 있다. 이런 생활만으로도 인생의 끝까지 갈 수 있다고 여긴 몇몇 작가들은 자신의 미래를 맡긴다.

어떤 작가들은 다른 판단을 한다. 읽힌 글보다 읽히지 않은 글이 더 많이 팔리는 것을 알게된다. 이미 읽은 글을 책으로 구매하지 않는 독자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출판사는 연재된 분량을 삭제해달라고 부탁한다. 게시판에서 글을 읽은 독자가 아닌 또 다른 다수의 독자들이 게시판보다 책을 먼저 찾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출판사로서는 그게 더 많이 팔리는 방법임을 알고 있다.

작가는 출간된 부분의 연재분을 삭제한다. 연재글을 읽고 책을 사던 독자들 중 일부가 이러한 모습을 좋지 않게 본다. 연재 게시판의 순수성을 짓밟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다수의 독자들은 출판사와 작가의 의도에 대해 어느 정도 타협한다.

그리고 출간계약된 이야기가 연재를 끝까지 마치지 않고 도중에 끊어지면 더 많이 팔린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연재게시판은 홍보의 역할에 큰 비중을 두게된다. 출판사의 방침을 기준으로 계약이 되고 있기에, 확실한 자기 의도를 보여주지 못한 작가들은 그 방침대로 연재를 도중에 마친다.

오랜 옛날부터 게시판의 글을 읽고 책도 구입하던 독자들 일부가 더 큰 배신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끝까지 연재한 뒤 출간하는 작가들도 있었다. 배신감의 대상에서 빠질 뿐 아니라 배신의 손가락질을 위한 도구가 되기도 한다. 가끔 그 특정 케이스의 모습에 죄의식을 느끼는 작가도 생긴다.

논란이 가중된다. 그러는 와중에 게시판의 수가 늘어난다. VT를 넘어서며 인터넷이 등장하고 수많은 사이트에 속한 수많은 게시판이 모습을 드러낸다. 작가도 많아지고 독자도 많아지고 출판사도 많아진다. 출판사는 가장 많이 팔리는 방법을 고민하여 작가에게 요구한다. 그것은 게시판의 연재글을 즐기는 독자들 상당수가 싫어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책을 사야만 하는 방법이었으니까. 그래도 진행된다. 작가와 독자가 드디어 그 문제로 싸우기 시작한다.

연재란이 홍보를 위한 연재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출판사에게 컨택을 받기 위한 연재란으로서의 성격을 가질 정도로 변화한다. 연재하다가 도중에 끊고 삭제하는 것을 독자들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시대가 된다. 자칫 실수로라도 상당수 분량을 연재하면 모 단체에게 연재량이 너무 많으니 주의하라는 편지도 받는 시대가 된다. 한 편으로는 돈을 줘야 연재글을 볼 수 있는 시스템도 만들어진다.

처음 연재게시판에 글을 연재하고 그것을 재밌게 읽던 시절. 일명 '순수했던 시절'이라는 것은 사라졌다.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한 작가와 독자들은 그에 맞춰 새로운 시스템을 살아가고 있다. 회귀는 불가능하다. 일부 독자들은 이미 '불법파일'이라는 궁극의 시스템까지 개발했다. 일부 출판사들과 일부 작가들은 그를 넘어서는 시스템을 고민하며 창작하는 것이 인생을 끝까지 책임질 생활이 되도록 노력한다. 순수는 깨졌다.

컨택 받으려고 연재하는 작가. 홍보하려고 연재하는 작가. 연재 안하는 작가. 그냥 연재하는 작가. 이들이 현재 한 공간 한 시대에 살고 있다. 연재글 읽고도 책을 사는 독자. 연재글 읽지 못했기에 책을 사는 독자. 연재글 읽지 못해도 책 안사고 읽는 방법으로 읽는 독자. 이들이 현재 한 공간 한 시대에 살고 있다. 각각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 모든 사람들은 '죄의식'을 느끼기도 하고, '당연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난 옛일 회상하며 '그 때가 좋았지'라고 말하는 걸 가급적 피한다. 처음엔 그렇게 말하는 행동 자체를 좋게보지 않아서라고 여겼는데, 아무래도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같다. 이런 류의 이야기를 하게되면 자꾸 미련이 남는다. 어쩔 수 없다.

내 컴퓨터엔 나우누리 SF란, 만사동 Story란과 하이텔 Serial란의 모든 목록을 캡쳐한 텍스트 파일이 있다. 정리하는 걸 좋아하지만 그 파일만큼은 여전히 지우지 않고 있다. 미련이 많다는 증거다.

난 글을 쓰면 연재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막 손이 떨리면서 연재글로 편집하고 싶은 욕구와 필사적으로 싸우게 된다. 출간이 확정된 글일 경우, 특히 연재를 해서는 안될 글이 되어버린 경우에는 글 자체를 쓰기 싫을 정도로 연재중독증이 심하다. 덕분에 연재가 가능한 단편이나 중편, 또는 출간과 인연이 없을 글들을 마구 써버린다. 그리고 내 이름을 숨긴 채 나도 처음보는 생소한 연재 게시판에 확 올려버린다. 조회수 1은 기본이고, 10이 나오면 대박인 게시판에서 내 연재글을 보며 흐뭇함에 젖을 때가 많다. 때로는 내 글이 재밌다며 누군가 감상글을 올리면 마치 나우 SF란에 다시 돌아간 것처럼 행복해진다.

내가 만약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부자였다면, 난 영원히 작가가 못됐을 거다. 출간하지 않고 마냥 연재만 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이런 걸 보면 역시 난 아마츄어다. 솔직한 심정으로 프로라는 게 너무 싫다.

돈이 걸리면 글을 쓰기가 싫어지는 이 버릇을 고치지 않는 한, 언제고 난 서울역에서 신문지 덮고 잘 날이 오고야 말 것 같다. -_-

레디 오스 성화 올림

댓글 4개:

  1. 아...그래도 어쩌겠어요..^^;;

    이 말밖에 못 드리겠네요.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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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연재라는 게 중독성이죠 ;ㅅ;.. sf라아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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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뜨끔.... 중간에 읽다가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확실히 세상은 우울하게 변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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