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각종 포만감에 젖어서 노곤함을 베개 속에 묻으리라 여겼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는다. 커피로 버텼더니 카페인마저 산화시키라는 요구를 하는 것일까. 결국 몸을 일으켜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하지만 컴퓨터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또 고장인 거냐! 긴장하던 나는 키보드의 Num Lock이 불빛을 발하는 걸 봤다. 빌어먹을! 켜놓고 있었구나. 차분하게 의자에 앉아 게슴츠레한 눈으로 모니터의 하얀 화면을 기다렸다.
옛날에, 아주 옛날에...
나 어린 시절에 무서운 일이 있었다.
이어지는 내용
새마을 운동이 끝나고 사회정화 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초등학생들은 공포에 떨었다.
초등학생들의 3대 해악은 '게임, 만화, 군것질'
오락실 갔다가 걸리면 뒤지게 맞았다.
만화가게 갔다가 걸리면 뒤지게 맞았다.
군것질하다가 걸리면 뒤지게 맞았다.
선생님들은 오락실도, 만화가게도, 떡볶이 포장마차도 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늘 걸렸다. HR시간이 되면 사회정화 운동의 기치에 따라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모두들 덜덜 떨었다. 선생님은 교탁 앞에서 짤막하게 "발표해라"라고 말했고, 학생들은 일어났다. 그리고 옆자리의, 또는 뒷자리, 앞자리의 동기들 이름을 불렀다. 이름이 불린 동기들은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두 손을 치켜들며 무릎을 꿇었다.
어떤 여자애가 반항했다. "전 떡볶이를 사 먹은 적이 없어요! 쟤가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무려 20명 가까이 동기의 이름을 부른 그 친구가 빙긋 웃으며 여자애를 주시했다. 그리고 종이쪽지를 펼치며 말했다.
"이름 XXX. 1981년 X월 X일 X시 X분 X초에 모 떡볶이집에서 떡볶이를 사 먹었다."
여자애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선생님은 가차없이 여자애의 뺨을 날렸다.
농담같이 들리겠지만, 실제로 내가 겪었던 얘기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담임이었던 허근남 선생은 정의의 이름으로 제자들에게 서로의 감시체제를 발동시켰고, 우리들은 1년 동안 'HR시간이 있는 금요일의 공포'에 떨었다.
나는 새벽별 보기 운동을 벌이는 북한의 동포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새벽종이 울려서 새아침이 밝았다는 새마을 운동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했다. 그렇게 배웠다. 5호 담당제로 서로를 감시하는 북한의 동포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급우들끼리 서로를 감시하는 정의의 이름을 존중했다. 그렇게 배웠다. 자아비판의 공포에 몸을 움츠리는 북한의 동포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반성의 시간에 자신의 이름이 불리면 부끄럽게 여겨야 했다. 그렇게 배웠다.
그 사고는 부모님에게도 전송됐다.
나는 군것질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지금도 군것질을 좋아하긴해도 군것질에 돈을 쓰는 걸 꺼리는 버릇이 있다. 내가 가진 돈의 대부분은 (다른 목적의) 학용품 구매와 만화, 게임에 사용됐다. 언제나 내 노트는 여백이 없었다. 만화, 그림, 글. 내 유일한 취미로 가득 채워진 교과서와 노트의 여백들은 끊임없이 내게 즐거움과 고통을 안겨줬다. 선생님은 내 노트와 교과서를 볼 때마다 가차없이 매를 드셨고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했다. 부모님은 죽을 죄를 진 자식의 구원을 청하신 뒤, 집으로 데려오자마자 회초리를 드셨다. 만화가게를 찾을 때마다 나는 맨 구석자리를 선택했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아무리 재미있는 만화라도 잽싸게 외면하며 누가 들어왔는 지를 확인했다. 행여나 부모형제라면 나는 의자뒤로 몸을 날려 숨었다. 그리고 만화를 끝까지 본 뒤 조심스레 밖으로 나가서 닌자가 됐다. 집에 몰래 들어와 장농 뒤까지 안착하여 그곳에서 자는 척을 했던 것이다. 부모님은 내가 장농뒤에서 잠자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셨다. 거긴 내가 매맞을 때마다 숨는 곳이다. 빼빼 마른 나 말고 아무도 못 들어오는 안전지대니까. -_-
왜 만화, 게임, 군것질이 죄가 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의 정의와 가치관에 어패가 많았다는 것은 어린시절의 나라도 느끼고 있었다. 부모님은 나의 발전을 위해 그것을 억제하시다가 나의 발전을 위해 봉인을 해제하셨다. 덕분에 나는 만화 속에 인생을 묻었다.
이런 옛 생각을 왜 했을까?
뿌듯했기 때문이다. 3일 동안 잠도 자지 않고 320여권의 만화책을 읽은 내가 뿌듯했기 때문이다. 즐거웠고 재미있으며 유익한 시간을 3일 동안 쉬지 않고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 뿌듯했기 때문이다. 옛날이라면 쳐죽여도 시원치 않을 죄를 진 내가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부모님이, 아니 어쩌면 과거에 매를 드셨던 허근남 선생님마저도 나의 직업을 아신다면. 나의 인생을 아는 그 누구라도 내 키보다 높이 쌓인 만화책 더미 안에서 열심히 삼매경에 빠진 나의 모습을 달가워할 것이다. 이런 인생으로 주변을 바꾼 내가 자랑스럽고 뿌듯했기 때문에 과거를 회고할 수 있었다.
눈이 게슴츠레할 것이다. 잠이 온다. 기분 좋은 몽롱함에 미소가 절로 나온다.
바닥을 가득 메운 만화책은 곧 책장에 빨려들어가겠지. 어지간한 대여점 만큼이나 많은 책장들 속에 박혀서 나를 또 유혹하겠지. 난 녀석들을 앞에 두고 곧 잠에 빠질 것이다.
내가 만든 인생만큼이나 행복한 공간이 또 있을까?
레디 오스 성화 올림
초등학생들의 3대 해악은 '게임, 만화, 군것질'
오락실 갔다가 걸리면 뒤지게 맞았다.
만화가게 갔다가 걸리면 뒤지게 맞았다.
군것질하다가 걸리면 뒤지게 맞았다.
선생님들은 오락실도, 만화가게도, 떡볶이 포장마차도 가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늘 걸렸다. HR시간이 되면 사회정화 운동의 기치에 따라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 모두들 덜덜 떨었다. 선생님은 교탁 앞에서 짤막하게 "발표해라"라고 말했고, 학생들은 일어났다. 그리고 옆자리의, 또는 뒷자리, 앞자리의 동기들 이름을 불렀다. 이름이 불린 동기들은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두 손을 치켜들며 무릎을 꿇었다.
어떤 여자애가 반항했다. "전 떡볶이를 사 먹은 적이 없어요! 쟤가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무려 20명 가까이 동기의 이름을 부른 그 친구가 빙긋 웃으며 여자애를 주시했다. 그리고 종이쪽지를 펼치며 말했다.
"이름 XXX. 1981년 X월 X일 X시 X분 X초에 모 떡볶이집에서 떡볶이를 사 먹었다."
여자애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선생님은 가차없이 여자애의 뺨을 날렸다.
농담같이 들리겠지만, 실제로 내가 겪었던 얘기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담임이었던 허근남 선생은 정의의 이름으로 제자들에게 서로의 감시체제를 발동시켰고, 우리들은 1년 동안 'HR시간이 있는 금요일의 공포'에 떨었다.
나는 새벽별 보기 운동을 벌이는 북한의 동포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새벽종이 울려서 새아침이 밝았다는 새마을 운동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했다. 그렇게 배웠다. 5호 담당제로 서로를 감시하는 북한의 동포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급우들끼리 서로를 감시하는 정의의 이름을 존중했다. 그렇게 배웠다. 자아비판의 공포에 몸을 움츠리는 북한의 동포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반성의 시간에 자신의 이름이 불리면 부끄럽게 여겨야 했다. 그렇게 배웠다.
그 사고는 부모님에게도 전송됐다.
나는 군것질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지금도 군것질을 좋아하긴해도 군것질에 돈을 쓰는 걸 꺼리는 버릇이 있다. 내가 가진 돈의 대부분은 (다른 목적의) 학용품 구매와 만화, 게임에 사용됐다. 언제나 내 노트는 여백이 없었다. 만화, 그림, 글. 내 유일한 취미로 가득 채워진 교과서와 노트의 여백들은 끊임없이 내게 즐거움과 고통을 안겨줬다. 선생님은 내 노트와 교과서를 볼 때마다 가차없이 매를 드셨고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했다. 부모님은 죽을 죄를 진 자식의 구원을 청하신 뒤, 집으로 데려오자마자 회초리를 드셨다. 만화가게를 찾을 때마다 나는 맨 구석자리를 선택했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아무리 재미있는 만화라도 잽싸게 외면하며 누가 들어왔는 지를 확인했다. 행여나 부모형제라면 나는 의자뒤로 몸을 날려 숨었다. 그리고 만화를 끝까지 본 뒤 조심스레 밖으로 나가서 닌자가 됐다. 집에 몰래 들어와 장농 뒤까지 안착하여 그곳에서 자는 척을 했던 것이다. 부모님은 내가 장농뒤에서 잠자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셨다. 거긴 내가 매맞을 때마다 숨는 곳이다. 빼빼 마른 나 말고 아무도 못 들어오는 안전지대니까. -_-
왜 만화, 게임, 군것질이 죄가 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의 정의와 가치관에 어패가 많았다는 것은 어린시절의 나라도 느끼고 있었다. 부모님은 나의 발전을 위해 그것을 억제하시다가 나의 발전을 위해 봉인을 해제하셨다. 덕분에 나는 만화 속에 인생을 묻었다.
이런 옛 생각을 왜 했을까?
뿌듯했기 때문이다. 3일 동안 잠도 자지 않고 320여권의 만화책을 읽은 내가 뿌듯했기 때문이다. 즐거웠고 재미있으며 유익한 시간을 3일 동안 쉬지 않고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 뿌듯했기 때문이다. 옛날이라면 쳐죽여도 시원치 않을 죄를 진 내가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 부모님이, 아니 어쩌면 과거에 매를 드셨던 허근남 선생님마저도 나의 직업을 아신다면. 나의 인생을 아는 그 누구라도 내 키보다 높이 쌓인 만화책 더미 안에서 열심히 삼매경에 빠진 나의 모습을 달가워할 것이다. 이런 인생으로 주변을 바꾼 내가 자랑스럽고 뿌듯했기 때문에 과거를 회고할 수 있었다.
눈이 게슴츠레할 것이다. 잠이 온다. 기분 좋은 몽롱함에 미소가 절로 나온다.
바닥을 가득 메운 만화책은 곧 책장에 빨려들어가겠지. 어지간한 대여점 만큼이나 많은 책장들 속에 박혀서 나를 또 유혹하겠지. 난 녀석들을 앞에 두고 곧 잠에 빠질 것이다.
내가 만든 인생만큼이나 행복한 공간이 또 있을까?
레디 오스 성화 올림
굇수....나도 그런 행복한 공간이 있었으면(있던가???)
답글삭제하이 오시야. ^^
답글삭제형님, 무섭습니다. (...) 3일 동안 320권이라니요;
답글삭제3일 동안 320권..... 부럽습니다.
답글삭제요즘은 하루 25권 정도 읽으면 지쳐 나가떨어지더라고요.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잠도 안자고 만화책 읽는 것을 누군가에게 자랑할 수 있다는 시절에 몸을 담고 있군요. 너무 즐거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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