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17일 월요일

[연재] [호스트 바둑왕] 1국. 바둑 영혼의 출현

제1국 바둑 영혼의 출현

“흐음.” 히카루는 반쯤 금이 가고 끈적한 먼지가 달라붙은 골동품 병을 집어들며 말했다. “이것도 아냐.”

“그만 나가자, 히카루! 기분 나쁘다.”

아카리는 히카루가 이 습기 가득한 벽장 위에 들어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가끔씩 히카루의 엉덩이를 발끝으로 걷어찼지만, 히카루는 그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먼지가 풀풀 솟는 상자 속의 물건들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어?” 히카루는 눅은 먼지가 가득한 종이들 아래 잡힌 물건이 대단히 묵직한 느낌을 주자, 낮게 외쳤다.

“이거! 이거 좋겠다!”

히카루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가 힘들여 꺼낸 것은 바둑판이었다. 네 개의 다리가 딸린 19로반의 바둑판은 한 눈에 보기에도 오랜 세월을 겪은 노인의 그것(치매는 아니고 --;;)이 담겨졌음을 알 수 있었다. 히카루가 찾는 물건은 바로 그 연륜이 담긴 골동품이었다.

“우와! 나, 이거 뭔지 알아. 오목하는 거 맞지?”

아카리가 바둑판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웃었다.

“바보, 바둑이야! 이건 바둑판이라는 거야!” 히카루는 아카리를 향해 불평하곤 바둑판의 퀴퀴한 먼지를 털었다.“무지 오래된 거 같은데 할아버지가 옛날에 쓰시던 건가? 요즘 골동품이 뜨고 있는데 꽤 비싼 값에 팔 수 있겠는걸!”

그리고 히카루는 걸레를 들어 바둑판의 표면을 닦기 시작했다. 비로소 히카루의 목적을 알게 된 아카리가 대사대로 불평했다. 물론 히카루도 대사대로 받아쳤다. 히카루의 신경은 온통 바둑판의 얼룩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무리 걸레로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바둑판의 얼룩은 골동품상과의 가격 흥정에서 대단히 불리하게 작용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 어라! 아무리 닦아도 이 얼룩이 안 지워져.”

“얼룩? 얼룩이 어디 있는데? 깨끗하잖아!”

“이 얼룩이 안 보여?” 바둑판을 향해 불평하던 히카루가 이번엔 아카리를 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직접 얼룩에 검지를 뻗어 짚어 주었지만, 아카리는 그 얼룩을 정말로 못 보는 지 고개만 기울이며 멍한 얼굴을 했다.

“여기 있잖아!” 히카루가 짜증을 냈다.

“어디?” 아카리의 목소리에도 점진적인 짜증이 흘렀다.

“여기!”

“어디?”

“여…!”까지 말을 하다가 히카루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어디 여기어디하다가 결국 짜증이 나서 치고 받고, 그러다가 제3자가 없는 이곳에서 둘 다 엎어지면 느닷없는 온리 유. 히카루는 거기까지 생각한 걸 다행으로 여기며 “여기 그런 게 있어. 우유가 굳은 것 같은 얼룩(--??)이….”라고 간단히 말한 뒤, 걸레로 열심히 얼룩을 닦기 시작했다.

[보입니까?]

“그러니까 아까부터 말했잖아!” 히카루는 다시 짜증을 냈다. 그의 예상대로 아카리는 일부러 장난을 친 것이다. 정말로 엎어져서 온리 유를 원한 것일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목소리가 들립니까?]

“어?”

히카루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카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군요!]

“누구냐!”

히카루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자 아카리 또한 창백한 얼굴로 히카루를 주시했다.

“왜 그래? 뭔 말이야!” 아카리는 울상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나 돌아갈래!”

[있다! 있어! 신이시여, 감사드립니다!]

아카리가 막 천장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딛었을 때였다. 히카루는 보았다. 바둑판 위에 나타난 하얗고 투명한 막부시대의 관복을 입은 자가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을 하고 자신을 주시하는 것을.

[저는 지금 다시… 지금 다시… 이승으로 돌아갑니다.]

그는 여인처럼 아름답고 곱상한 얼굴을 한 20대의 청년이었다. 그 하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지는가 싶더니 히카루의 온 몸에 차가운 전율이 흘렀다. 히카루는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악! 난 세상에서 주변에 꽃바람 날리는 새끼가 제일 싫어어어!”

그리고 히카루는 기절했다.



다음 날 학교에 가게 된 것도 히카루에겐 기적이었다. 히카루의 할아버지 대신 직접 구급차를 불러서 병원에 데려갔던 아카리가 교실 내에서 가끔씩 걱정스런 얼굴로 히카루를 보곤 했다. 물론 히카루는 아카리가 그러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히카루의 정신은 온통 자신의 몸 속에 들어온 꽃바람 유령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넌 누구야.”

히카루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유령을 하루 동안 관찰한 결과, 그는 대단히 마음이 여린 편이었다. 히카루가 기절했을 때 [어쩜! 난 몰라! 왜 기절하고 지랄이얌.]이라고 외치며 바동댄 것도, 자세히 생각해 보니 아카리가 아니라 이 유령이었다. 히카루는 자신의 몸에 들어온 놈이 엑소시스트의 그 놈과는 다르게 대단히 만만한 유령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절대로 자신의 모가지를 180도 돌리거나 몸을 뒤집어서 계단을 내려가게 하지는 않을 유령임이 확실했다.

“누구냐니까!”

히카루가 외쳤다. 교실 내의 학생과 선생들이 흠칫하며 히카루를 보았지만, 그 중간과정은 아카리가 어제의 일을 들먹이며 처리했다. 덕분에 히카루는 마음 편하게 유령의 대답을 들을 수가 있었다.

[저는 후지와라노 사이입니다.]

“완전히 새된 놈?”

[걔는 싸이에요] 사이는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저는 헤이안의 기원에서 대군에게 바둑을 가르치던 사람이었답니다.]

“헤이안? 바둑?”

사이는 회상했다. 구리빛 얼굴에 밝은 미소와 콧수염이 특히 인상적이었던 대군의 모습이 그의 마음을 저리게 했다.

[기원에서 매일 바둑을 둘 수 있었던 저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특히 대군께서 다섯 알이 넘는 바둑돌을 향해 단수를 치실 때면 숨이 막힐 정도로 짜릿했답니다. 다섯 알부터는 가슴을 만져도 되거든요.]

“자, 잠깐. 바둑에서 가슴이 왜 나와?”

[어, 모르세요? 요즘은 옷 벗기 바둑같은 것 안 하나 보죠?]

“기원에서 그런 걸 왜 해?”

[기(棋)도 두고 기(妓)도 따 먹는 곳이 기원이잖아요.]

“그럼.” 히카루는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너 설마… 호스트냐?”

[아무튼 말예요.] 사이는 식은땀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저 이외에도 대군께 사랑을 받는 기선생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가 대군께 말을 하더군요. ‘대군 마마, 기(선)생은 한 명이면 충분합니다. 옷 벗기 대국으로 승부를 가려 승자만을 스승으로 두십시오.’라고요.]

“…….” 초등학교 6년생 히카루가 감당하기엔 다소 벙찜이 있었다.;;;

[일방적인 대국으로 그는 바지 속옷만 남고 저는 웃옷 하나만을 벗었었습니다. 당연히 모두의 시선이 그 자에게만 집중된 가운데 나 혼자만 그걸 눈치챘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뭐, 뭐가?”

[그가 바둑판 밑으로 발을 내밀어 제 허벅지를 더듬어 제 그곳을 향해…….]

“우우우우욱!”

“히카루! 왜 그러니?”

선생님이 기겁하며 히카루에게 달려왔지만, 히카루가 먼저 화장실을 향해 쏜 살처럼 날아갔다. 히카루는 화장실의 세면기에 끊임없이 오바이트를 하며 괴롭게 말했다.

“네 상대가 남자 아니었어?”

[그래서 제 가슴이 더 두근거렸습니다. 결국 저는 제 흥분된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대국에서 지고 말았지요.]

“우웨에에에엑!”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대국에서 지고 몸을 일으켰을 때 어찌 제 그곳이 멀쩡할 수 있었겠습니까? 대군께서는 옷 위에 비친 제 …를 보시고 음탕하다 하여 내치셨습니다. 음탕하다는 오명까지 덮어쓰고 왕궁에서 쫓겨난 저에게 살아갈 방법은 없었습니다. 이틀 후 전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 그럼 넌 유령같은 거구나.”

[예. 너무 원통해서 저승으로 갈 수 없었던 제 영혼은 그 바둑판에 그대로 잠들어 수많은 세월을 보내고 마침내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항간에 떠도는 고스트 바둑왕이라는 작품이 호스트 바둑왕의 아류인 이유는 위의 사항을 빌어서 알 수 있는데, 본문을 잘 보시면 그 때 두던 바둑판과 어제 본 바둑판이 다르게 생겼음을 알게 되실 겁니다.]

“자, 잠깐만. 내 수준을 감안해서 얘기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아. 죄송해요. 아무튼 이번 편은 로리콘입니다. 그 애가 그러더군요. ‘이 바둑판에 있는 우유빛(--;;) 얼룩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누군가가 흘린 이 …;;같은 얼룩이 왜 나에게만 보이는 걸까?’라고요. 그래서 재빨리 나타나 따 먹었죠.]

“우웨에에에엑!”

[아이는 그런 걸 꿈꾸고 있었기 때문에 기뻐하며 저에게 몸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바라던 대로 다시 기생으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가 서슬 네 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전염병에 걸려 죽기까지는.]

“제, 제발 그만 얘기해. 네가 원한다는 바둑을 둬 줄 테니까! 우웨엑!”

[그의 이름은 혼인보 슈우사쿠. 좋은 몸이었죠.]

“우우우웨에에에에엑! 그마안!”

그것이 초등학교 6년생 히카루가 바둑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었다.

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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