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이는 눈에 익은 동네를 걸어가고 있었어요. 아마도 유진이의 동네였을 거예요. 유진이는 늘 가던 방향대로 집을 향하고 있었고,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답니다. 그저 밝은 대낮에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와 집들. 구민이네 개조차도 보이지가 않네요.
“아빠가 기다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이어지는 내용
유진이는 밝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불안했는지 달리기 시작했어요. 막 골목길을 돌아서 호명이네 집 앞을 지나게 되었을 때, 유진이는 걸음을 멈추고 안도의 숨을 쉬었답니다.
“휴우우우…”
저 앞으로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요. 택시에서 내리려는 사람. 장바구니 들고 걸어오는 명훈이네 엄마. 세 명의 아줌마가 평소처럼 수다를 떨 듯 얼굴을 맞대고 있는 모습들. 유진이는 그제야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 사람들을 지나쳐 가려 했답니다.
“어…”
막 지나치려 했을 때, 유진이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아무런 말소리도, 아무런 동작도 보여주지 않는 사람들.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유진이는 택시에서 내리려던 언니를 향해서 살짝 고개를 내밀었죠.
“아빠아아아!”
유진이는 전기에 감전된 듯 몸을 떨었어요. 사람이 아니라 마네킨이었거든요.
“어어… 무서워… 아빠아.”
유진이는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주변을 휘둘러보았어요. 모두가… 모두가 마네킨이었어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네킨들. 유진이는 곧장 집을 향해서 도망치기 시작했답니다. 달리는 와중에도 여러 개의 마네킨이 보였답니다. 무서웠어요. 마네킨과 접촉하게 되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죠.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마네킨이었지만, 모두가 다 자기를 노리고 있는 것같은 기분이 들었답니다.
“아빠아!”
유진이는 털보할아버지네 문 앞까지 달려왔다가, 자기 집 문 앞에 서있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힘껏 고함쳤어요. 그리고 두 손을 뻗으며 달려갔죠.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지저분할 게 뻔했지만, 아빠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깨끗이 닦아줄 게 분명했어요. 유진이는 뚱보 기석이네 집을 지나서 아빠 앞까지 달려갔답니다. 하지만 아빠를 안지 못하고 멈춰버렸어요.
“어…”
아빠가 아니었어요. 또 하나의 마네킨.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긴 생머리의 여자 마네킨이유진이의 앞에 놓여있었답니다. 그러나 이번의 마네킨은 조금 달랐어요. 유진이를 향하고 있는 살색 얼굴 속으로 눈동자가 까맣게 칠해져 있는… 그리고 그 눈동자는 정말로 유진이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어요. 유진이는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답니다.
턱!
등뒤에서 무언가 닿았다는 느낌에, 유진이는 소름이 끼쳤어요. 유진이는 너무나 놀라서 비명을 ‘꽥!’ 지르며 뒤를 돌아봤습니다. 뒤에는 여태껏 지나쳐왔던 수많은 마네킨들이 두 팔을 앞으로 뻗은 채 잔뜩 모여있었어요.
“아빠악!”
유진이는 제 자리에서 개구리처럼 펄쩍 뛰며 마네킨들 사이를 달려갔어요. 마네킨들은 전혀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어요. 하지만 유진이는 마네킨들 사이를 뚫고 도망가는게 너무 힘들었답니다. 사이사이를 피해서 달렸지만, 유진이의 앞에는 언제나 마네킨이 놓여져 있었어요. 무서웠어요. 두 팔을 앞으로 뻗은 채 가만히 서 있는 마네킨들이 너무 무서웠어요. 뒤를 돌아보면 마네킨들이 자기를 덥석 잡아버릴 것만 같았어요.
“앙앙! 으아앙!”
유진이는 애들과 술래잡기 놀이라도 하듯이 마네킨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달렸어요. 동네를 한 바퀴 돌아서 집으로 들어갈 셈이었죠. 골목을 한 바퀴 돌았을 때, 다행히도 집 앞에는 그 소름끼치는 마네킨이 없었어요. 유진이는 안도하며 집 앞 현관 쪽의 모서리로 몸을 돌렸답니다.
“꺄아악!”
유진이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어요. 현관문 위쪽에는 고개만 내민 채 자신을 바라보는 긴머리 여인의 마네킨이 있었어요. 아까보다 더 짙은 검은색의 눈동자가 유진이를 향하고 있었죠. 유진이는 무서워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어요.
덜컹! 덜컹!
문이 저절로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앞뒤로 심하게 흔들렸답니다. 유진이는 겁에 질려 엉덩이를 땅에 붙인 채 뒤로 물러났어요. 현관에서 멀어져 골목으로 나오니까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잔뜩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봤더니 골목 끝에서 뭔가가 천천히 모습을 보이고 있었죠. 마네킨들의 손이었어요. 마네킨들은 진짜로 움직이고 있었던 거예요.
“엉엉엉! 아빠…….”
유진이는 집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어요. 그리고 반대쪽 골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죠. 뒤를 돌아보기도 무서웠답니다. 유진이네 집 골목을 벗어나면 왼쪽은 언덕으로 이어지는 오르막이고 오른쪽은 점점 가파르게 경사진 내리막이었죠. 유진이는 내리막길로 가려고 마음먹었어요. 아까 골목에서 튀어나온 손들이 오르막길 쪽에서 나온 것이거든요. 게다가 유진이의 앞에는 초록색 눈썰매가 놓여져 있었답니다. 유진이는 눈썰매 위에 올라타고 내리막길을 향해 노를 저었어요. 눈썰매가 빠른 속도로 질주했죠.
촤아아아아!
골목 이곳저곳에 있던 눈더미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어요. 눈이 바닥을 메우기 시작했을 때 눈썰매는 더 빠르게 바람을 치웠어요. 유진이는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이었답니다. 행여나 떨어질까 무서워서 눈썰매에 엎드리듯 매달려 있었죠. 점차 세상은 눈으로 뒤덮였고, 곧 세상 전체가 은세계로 변했어요. 하늘까지 하얀 세계. 그래서 끝없이 이어진 내리막길의 저편에 보이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유진이는 눈을 크게 떴어요. 내리막길 저 편에 꿈틀거리는 붉은색 덩어리가 있었거든요. 그것은 조금씩 커졌어요. 마치 ‘유진이 못 가!’하며 앞을 막는 장난꾸러리 기석이처럼요.
“어… 어… 어!”
유진이는 당황하며 눈썰매의 앞부분을 열심히 뒤틀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어느새 눈썰매는 그 붉은 덩어리에 부딪치며 하늘로 치솟았어요. 유진이는 눈썰매를 놓치고 붕 떴다가 눈밭 위를 나뒹굴었답니다.
“꺄아아악!”
풀썩!
“…….”
의식은 있었지만 몸을 움직이기가 싫었어요. 조금 전의 그 무서운 마네킨들이 쫓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무서웠죠. 그래도 움직이기가 싫었어요. 온 몸이 나른한 것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귀찮을 정도였답니다.
똑.
바닥에 엎어져 있던 유진이의 볼 위로 무언가 떨어져 내렸습니다. 유진이는 살며시 눈을 들었어요. 앞이 녹색 비닐로 된 벽으로 막혀있군요. 그 건너편에는 짤막한 눈밭이 펼쳐져 있었죠. 유진이는 벽에 써 있는 글씨를 읽었습니다.
‘신나는 눈썰매장.’
익숙한 하얀 글씨. 고개를 들고있던 유진이는 누군가 자신의 곁을 지나치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유진이가 급히 고개를 돌려 뭔지 확인했답니다. 마네킨일까 봐 무서웠거든요.
휘아아아악!
아빠였어요. 아빠가 눈밭 위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눈썰매도 없이 미끄러지고 있었답니다. 아빠가 유진이를 돌아보면서 환하게 웃네요. 유진이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무서움이 아빠 때문에 조금씩 사라졌어요. 눈부시게 밝은 햇님이 눈을 녹이는 것 처럼요.
“어어어어어!”
갑자기 유진이의 눈이 동그래졌어요. 다른 사람의 눈썰매가 아빠를 향해 매섭게 달려들고 있었거든요. 아빠가 위험해요!
쿵!
“아빠!”
결국 부딪쳤어요. 아빠가 많이 아픈 듯 머리를 감싸쥐며 뒹굴었답니다. 그리고 머리를 감싼 채 누워있는 아빠에게 또 하나의 눈썰매가 달려들었어요. 유진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고함쳤답니다.
“아빠아아!”
콰앙!
퍼허억!
눈썰매를 타고있던 사람의 무릎이 아빠의 오른쪽 귀를 세게 때렸어요. 그리고 빨간 피. 새빨간 피가 아빠에게서 뿜어져 나왔어요. 아빠의 목이 너무 많이 돌아갔답니다. 빨간 피. 새빨간 피가 사방에 흩어졌어요. 유진이가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아무 말도 못했죠. 그 때 유진이의 볼 위로 뭔가 떨어졌답니다.
똑.
피였어요. 하늘로 날아간 아빠의 피가 초록색 벽을 넘어서 유진이의 볼에 떨어진 거예요. 볼을 매만진 손가락 끝에 눈부시게 빨간 피가 맺혀있었답니다. 유진이는 마네킨에게 쫓길 때보다 더 두려워졌어요. 그래도 마네킨들은 꿈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빠…….”
이건 꿈일 것 같지가 않았어요. 언제가 경험한 것 같은 광경이었거든요. 아빠의 반쯤 벌려진 입술이, 아빠의 크게 돌아가 머리가, 아빠의 주변에 잔뜩 쌓인 붉은 눈송이가……. 분명 기억에 있었어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의 모습까지 기억에 있었어요. 유진이는 고함쳤습니다.
“아빠아아악!”
꿈이 아냐. 꿈이 아니었어! 유진이의 볼에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어요. 잊고 싶었던, 그래서 잊었던 기억들이 유진이의 머리 속으로 마구 들어왔답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도 들어왔어요. 아빠가 죽었다는 사실이 자꾸만 유진이를 괴롭혔어요. 유진이는 결국 알았어요. 아빠의 죽음을. 유진이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기어가기 시작했어요. 한껏 벌어진 입에서 울음소리 밖에 나오지 않았죠.
“아와! 엉엉어. 압와아아아…….”
아빠의 곁에 왔어요. 아빠의 돌아간 얼굴이 무서웠어요. 그래도 현실이 아니길 바랐기 때문에 유진이는 손을 뻗었어요. 힘이 없는 소리라도 아빠가 입을 열어주길 바랐어요. 뺨에 손이 닿으면 아빠가 “유진아…….”하고 말을 할 것만 같았답니다. 유진이의 손이 아빠의 볼로 다가갔어요. 그때 갑자기 유진이의 몸이 굳어버렸어요. 이상하게도 손가락만 까닥여지며, 나머지 몸이 눈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꼼짝도 안했죠.
“이윽!”
유진이는 온힘을 다해 움직이려고 노력했어요. 도와줄 사람을 찾기 위해서 눈동자도 열심히 굴렸어요. 사람은 보이지 않았어요. 유독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군요. 핏자국. 눈밭에 찍혀있는 빨간 핏자국 2개가 자꾸 신경 쓰였답니다. 유진이는 괜히 무서워져서 핏자국을 노려봤어요. 그 핏자국에 변화가 생긴 것도 그 때였죠. 조금씩 색깔이 짙어지더니 이내 검은색이 된 핏자국. 유진이는 무서웠어요. 검은 색 핏자국 2개는 아까 유진이가 봤던 마네킨의 눈과 너무 똑같았거든요.
스으. 스.
핏자국 주변의 눈도 조금씩 일렁거렸어요. 천천히천천히 떠오르고 있었죠. 역시 핏자국은 눈이었어요. 눈밭 위로 마네킨의 얼굴이 내밀어지고 있었답니다. 유진이네 집 대문에서 바라보던 그 긴 머리 마네킨이었어요. 유진이는 너무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여전히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답니다. 그 때 마네킨이 고개를 돌렸어요. 이제까지 마네킨의 얼굴이었던 그것이 점점 굴곡을 만들면서 진짜 사람의 얼굴로 변했답니다. 여인의 얼굴이었어요. 유진이를 보며 소름끼치게 웃고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
“꺄아아아악! 아빠아아!”
*
“유진아, 유진아! 얘가 왜이래? 아이고 유진아! 정신 좀 차려!”
엄마는 온 몸이 철 덩어리처럼 경직된 유진이를 붙들고 울음을 터뜨렸어요. 금방이라도 목숨을 잃을 것 같았거든요. 엄마가 미친 듯 유진이를 흔들 때 문이 열렸어요. 간호사가 급히 침대로 달려왔답니다.
“비켜보세요.”
간호사는 침착한 말투로 엄마를 위로했어요. 유진이를 살피던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네요.
“괜찮아요? 우리 유진이 괜찮아요?”
울먹이는 엄마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간호사는 유진이의 팔과 다리를 가볍게 주물렀어요. 유진이가 길게 한숨을 쉬자 간호사가 엄마를 돌아보며 미소짓네요. 간호사는 다시 고개를 돌려 닝겔에 달린 호스의 플라스틱을 매만졌어요. 불안한 표정으로 간호사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이 엄마가 크게 숨을 쉬었어요. 어느새 유진이의 굳어진 몸이 풀어진 걸 봤거든요. 간호사가 말했어요.
“유진이가 안 좋은 꿈을 꾼 것 같아요. 이젠 별 일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그래도 아직은 혼수상태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을 주세요, 유진이 어머니.”
간호사는 유진이의 엄마에게 또 한 번 미소를 보였어요. 엄마가 고마운 마음에 오렌지주스를 건네줬답니다. 하지만 간호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어요.
“그건 유진이가 깨어나면 주세요. 깨어나면 목이 마를 거예요. 뛰어다니느라 고생을 많거든요.”
“예?”
“힘들 거예요. 7살짜리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가족의 짐이 너무도 무겁네요. 유진이가 혼자서 떠맡고 있는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지만…….”
“그게 무슨?”
“어머! 저 옆 동에 가봐야 하거든요? 무슨 일이 있으면 프론트에 연락주세요.”
검은 생머리의 간호사는 유진이의 엄마를 향해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으며 급히 나갔답니다. 엄마는 간호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서 주스를 든 채 한동안 문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에구! 이 땀 좀 봐.”
한참만에 고개를 돌린 엄마는 유진이의 이마와 볼에 가득히 맺힌 땀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주스를 다시 탁자에 내려놓고 손수건을 꺼내어 유진이의 얼굴을 닦아주었죠.
*
2회 끝
“휴우우우…”
저 앞으로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어요. 택시에서 내리려는 사람. 장바구니 들고 걸어오는 명훈이네 엄마. 세 명의 아줌마가 평소처럼 수다를 떨 듯 얼굴을 맞대고 있는 모습들. 유진이는 그제야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 사람들을 지나쳐 가려 했답니다.
“어…”
막 지나치려 했을 때, 유진이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아무런 말소리도, 아무런 동작도 보여주지 않는 사람들.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유진이는 택시에서 내리려던 언니를 향해서 살짝 고개를 내밀었죠.
“아빠아아아!”
유진이는 전기에 감전된 듯 몸을 떨었어요. 사람이 아니라 마네킨이었거든요.
“어어… 무서워… 아빠아.”
유진이는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주변을 휘둘러보았어요. 모두가… 모두가 마네킨이었어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네킨들. 유진이는 곧장 집을 향해서 도망치기 시작했답니다. 달리는 와중에도 여러 개의 마네킨이 보였답니다. 무서웠어요. 마네킨과 접촉하게 되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죠.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마네킨이었지만, 모두가 다 자기를 노리고 있는 것같은 기분이 들었답니다.
“아빠아!”
유진이는 털보할아버지네 문 앞까지 달려왔다가, 자기 집 문 앞에 서있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힘껏 고함쳤어요. 그리고 두 손을 뻗으며 달려갔죠.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지저분할 게 뻔했지만, 아빠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깨끗이 닦아줄 게 분명했어요. 유진이는 뚱보 기석이네 집을 지나서 아빠 앞까지 달려갔답니다. 하지만 아빠를 안지 못하고 멈춰버렸어요.
“어…”
아빠가 아니었어요. 또 하나의 마네킨.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긴 생머리의 여자 마네킨이유진이의 앞에 놓여있었답니다. 그러나 이번의 마네킨은 조금 달랐어요. 유진이를 향하고 있는 살색 얼굴 속으로 눈동자가 까맣게 칠해져 있는… 그리고 그 눈동자는 정말로 유진이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어요. 유진이는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답니다.
턱!
등뒤에서 무언가 닿았다는 느낌에, 유진이는 소름이 끼쳤어요. 유진이는 너무나 놀라서 비명을 ‘꽥!’ 지르며 뒤를 돌아봤습니다. 뒤에는 여태껏 지나쳐왔던 수많은 마네킨들이 두 팔을 앞으로 뻗은 채 잔뜩 모여있었어요.
“아빠악!”
유진이는 제 자리에서 개구리처럼 펄쩍 뛰며 마네킨들 사이를 달려갔어요. 마네킨들은 전혀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어요. 하지만 유진이는 마네킨들 사이를 뚫고 도망가는게 너무 힘들었답니다. 사이사이를 피해서 달렸지만, 유진이의 앞에는 언제나 마네킨이 놓여져 있었어요. 무서웠어요. 두 팔을 앞으로 뻗은 채 가만히 서 있는 마네킨들이 너무 무서웠어요. 뒤를 돌아보면 마네킨들이 자기를 덥석 잡아버릴 것만 같았어요.
“앙앙! 으아앙!”
유진이는 애들과 술래잡기 놀이라도 하듯이 마네킨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며 달렸어요. 동네를 한 바퀴 돌아서 집으로 들어갈 셈이었죠. 골목을 한 바퀴 돌았을 때, 다행히도 집 앞에는 그 소름끼치는 마네킨이 없었어요. 유진이는 안도하며 집 앞 현관 쪽의 모서리로 몸을 돌렸답니다.
“꺄아악!”
유진이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어요. 현관문 위쪽에는 고개만 내민 채 자신을 바라보는 긴머리 여인의 마네킨이 있었어요. 아까보다 더 짙은 검은색의 눈동자가 유진이를 향하고 있었죠. 유진이는 무서워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어요.
덜컹! 덜컹!
문이 저절로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앞뒤로 심하게 흔들렸답니다. 유진이는 겁에 질려 엉덩이를 땅에 붙인 채 뒤로 물러났어요. 현관에서 멀어져 골목으로 나오니까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잔뜩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봤더니 골목 끝에서 뭔가가 천천히 모습을 보이고 있었죠. 마네킨들의 손이었어요. 마네킨들은 진짜로 움직이고 있었던 거예요.
“엉엉엉! 아빠…….”
유진이는 집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어요. 그리고 반대쪽 골목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죠. 뒤를 돌아보기도 무서웠답니다. 유진이네 집 골목을 벗어나면 왼쪽은 언덕으로 이어지는 오르막이고 오른쪽은 점점 가파르게 경사진 내리막이었죠. 유진이는 내리막길로 가려고 마음먹었어요. 아까 골목에서 튀어나온 손들이 오르막길 쪽에서 나온 것이거든요. 게다가 유진이의 앞에는 초록색 눈썰매가 놓여져 있었답니다. 유진이는 눈썰매 위에 올라타고 내리막길을 향해 노를 저었어요. 눈썰매가 빠른 속도로 질주했죠.
촤아아아아!
골목 이곳저곳에 있던 눈더미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어요. 눈이 바닥을 메우기 시작했을 때 눈썰매는 더 빠르게 바람을 치웠어요. 유진이는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이었답니다. 행여나 떨어질까 무서워서 눈썰매에 엎드리듯 매달려 있었죠. 점차 세상은 눈으로 뒤덮였고, 곧 세상 전체가 은세계로 변했어요. 하늘까지 하얀 세계. 그래서 끝없이 이어진 내리막길의 저편에 보이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유진이는 눈을 크게 떴어요. 내리막길 저 편에 꿈틀거리는 붉은색 덩어리가 있었거든요. 그것은 조금씩 커졌어요. 마치 ‘유진이 못 가!’하며 앞을 막는 장난꾸러리 기석이처럼요.
“어… 어… 어!”
유진이는 당황하며 눈썰매의 앞부분을 열심히 뒤틀었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어느새 눈썰매는 그 붉은 덩어리에 부딪치며 하늘로 치솟았어요. 유진이는 눈썰매를 놓치고 붕 떴다가 눈밭 위를 나뒹굴었답니다.
“꺄아아악!”
풀썩!
“…….”
의식은 있었지만 몸을 움직이기가 싫었어요. 조금 전의 그 무서운 마네킨들이 쫓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무서웠죠. 그래도 움직이기가 싫었어요. 온 몸이 나른한 것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귀찮을 정도였답니다.
똑.
바닥에 엎어져 있던 유진이의 볼 위로 무언가 떨어져 내렸습니다. 유진이는 살며시 눈을 들었어요. 앞이 녹색 비닐로 된 벽으로 막혀있군요. 그 건너편에는 짤막한 눈밭이 펼쳐져 있었죠. 유진이는 벽에 써 있는 글씨를 읽었습니다.
‘신나는 눈썰매장.’
익숙한 하얀 글씨. 고개를 들고있던 유진이는 누군가 자신의 곁을 지나치고 있다는 걸 느꼈어요. 유진이가 급히 고개를 돌려 뭔지 확인했답니다. 마네킨일까 봐 무서웠거든요.
휘아아아악!
아빠였어요. 아빠가 눈밭 위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눈썰매도 없이 미끄러지고 있었답니다. 아빠가 유진이를 돌아보면서 환하게 웃네요. 유진이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무서움이 아빠 때문에 조금씩 사라졌어요. 눈부시게 밝은 햇님이 눈을 녹이는 것 처럼요.
“어어어어어!”
갑자기 유진이의 눈이 동그래졌어요. 다른 사람의 눈썰매가 아빠를 향해 매섭게 달려들고 있었거든요. 아빠가 위험해요!
쿵!
“아빠!”
결국 부딪쳤어요. 아빠가 많이 아픈 듯 머리를 감싸쥐며 뒹굴었답니다. 그리고 머리를 감싼 채 누워있는 아빠에게 또 하나의 눈썰매가 달려들었어요. 유진이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고함쳤답니다.
“아빠아아!”
콰앙!
퍼허억!
눈썰매를 타고있던 사람의 무릎이 아빠의 오른쪽 귀를 세게 때렸어요. 그리고 빨간 피. 새빨간 피가 아빠에게서 뿜어져 나왔어요. 아빠의 목이 너무 많이 돌아갔답니다. 빨간 피. 새빨간 피가 사방에 흩어졌어요. 유진이가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아무 말도 못했죠. 그 때 유진이의 볼 위로 뭔가 떨어졌답니다.
똑.
피였어요. 하늘로 날아간 아빠의 피가 초록색 벽을 넘어서 유진이의 볼에 떨어진 거예요. 볼을 매만진 손가락 끝에 눈부시게 빨간 피가 맺혀있었답니다. 유진이는 마네킨에게 쫓길 때보다 더 두려워졌어요. 그래도 마네킨들은 꿈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빠…….”
이건 꿈일 것 같지가 않았어요. 언제가 경험한 것 같은 광경이었거든요. 아빠의 반쯤 벌려진 입술이, 아빠의 크게 돌아가 머리가, 아빠의 주변에 잔뜩 쌓인 붉은 눈송이가……. 분명 기억에 있었어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의 모습까지 기억에 있었어요. 유진이는 고함쳤습니다.
“아빠아아악!”
꿈이 아냐. 꿈이 아니었어! 유진이의 볼에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어요. 잊고 싶었던, 그래서 잊었던 기억들이 유진이의 머리 속으로 마구 들어왔답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도 들어왔어요. 아빠가 죽었다는 사실이 자꾸만 유진이를 괴롭혔어요. 유진이는 결국 알았어요. 아빠의 죽음을. 유진이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기어가기 시작했어요. 한껏 벌어진 입에서 울음소리 밖에 나오지 않았죠.
“아와! 엉엉어. 압와아아아…….”
아빠의 곁에 왔어요. 아빠의 돌아간 얼굴이 무서웠어요. 그래도 현실이 아니길 바랐기 때문에 유진이는 손을 뻗었어요. 힘이 없는 소리라도 아빠가 입을 열어주길 바랐어요. 뺨에 손이 닿으면 아빠가 “유진아…….”하고 말을 할 것만 같았답니다. 유진이의 손이 아빠의 볼로 다가갔어요. 그때 갑자기 유진이의 몸이 굳어버렸어요. 이상하게도 손가락만 까닥여지며, 나머지 몸이 눈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꼼짝도 안했죠.
“이윽!”
유진이는 온힘을 다해 움직이려고 노력했어요. 도와줄 사람을 찾기 위해서 눈동자도 열심히 굴렸어요. 사람은 보이지 않았어요. 유독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군요. 핏자국. 눈밭에 찍혀있는 빨간 핏자국 2개가 자꾸 신경 쓰였답니다. 유진이는 괜히 무서워져서 핏자국을 노려봤어요. 그 핏자국에 변화가 생긴 것도 그 때였죠. 조금씩 색깔이 짙어지더니 이내 검은색이 된 핏자국. 유진이는 무서웠어요. 검은 색 핏자국 2개는 아까 유진이가 봤던 마네킨의 눈과 너무 똑같았거든요.
스으. 스.
핏자국 주변의 눈도 조금씩 일렁거렸어요. 천천히천천히 떠오르고 있었죠. 역시 핏자국은 눈이었어요. 눈밭 위로 마네킨의 얼굴이 내밀어지고 있었답니다. 유진이네 집 대문에서 바라보던 그 긴 머리 마네킨이었어요. 유진이는 너무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여전히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답니다. 그 때 마네킨이 고개를 돌렸어요. 이제까지 마네킨의 얼굴이었던 그것이 점점 굴곡을 만들면서 진짜 사람의 얼굴로 변했답니다. 여인의 얼굴이었어요. 유진이를 보며 소름끼치게 웃고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
“꺄아아아악! 아빠아아!”
*
“유진아, 유진아! 얘가 왜이래? 아이고 유진아! 정신 좀 차려!”
엄마는 온 몸이 철 덩어리처럼 경직된 유진이를 붙들고 울음을 터뜨렸어요. 금방이라도 목숨을 잃을 것 같았거든요. 엄마가 미친 듯 유진이를 흔들 때 문이 열렸어요. 간호사가 급히 침대로 달려왔답니다.
“비켜보세요.”
간호사는 침착한 말투로 엄마를 위로했어요. 유진이를 살피던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네요.
“괜찮아요? 우리 유진이 괜찮아요?”
울먹이는 엄마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간호사는 유진이의 팔과 다리를 가볍게 주물렀어요. 유진이가 길게 한숨을 쉬자 간호사가 엄마를 돌아보며 미소짓네요. 간호사는 다시 고개를 돌려 닝겔에 달린 호스의 플라스틱을 매만졌어요. 불안한 표정으로 간호사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유진이 엄마가 크게 숨을 쉬었어요. 어느새 유진이의 굳어진 몸이 풀어진 걸 봤거든요. 간호사가 말했어요.
“유진이가 안 좋은 꿈을 꾼 것 같아요. 이젠 별 일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그래도 아직은 혼수상태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을 주세요, 유진이 어머니.”
간호사는 유진이의 엄마에게 또 한 번 미소를 보였어요. 엄마가 고마운 마음에 오렌지주스를 건네줬답니다. 하지만 간호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어요.
“그건 유진이가 깨어나면 주세요. 깨어나면 목이 마를 거예요. 뛰어다니느라 고생을 많거든요.”
“예?”
“힘들 거예요. 7살짜리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가족의 짐이 너무도 무겁네요. 유진이가 혼자서 떠맡고 있는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지만…….”
“그게 무슨?”
“어머! 저 옆 동에 가봐야 하거든요? 무슨 일이 있으면 프론트에 연락주세요.”
검은 생머리의 간호사는 유진이의 엄마를 향해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으며 급히 나갔답니다. 엄마는 간호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서 주스를 든 채 한동안 문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에구! 이 땀 좀 봐.”
한참만에 고개를 돌린 엄마는 유진이의 이마와 볼에 가득히 맺힌 땀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주스를 다시 탁자에 내려놓고 손수건을 꺼내어 유진이의 얼굴을 닦아주었죠.
*
2회 끝
간호사의 정체가 궁금하군요.
답글삭제잡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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