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17일 월요일

[연재] [호스트 바둑왕] 6국. 일도양단

제6국 일도양단

쏴아아아아!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구겨진 하늘의 우중충한 모습이 도시를 덮었다. 그 기운은 히카루와 아키라가 마주하고 있는 기원의 이곳저곳에 스며들며 사람들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째깍째깍.

시계는 6시 5분을 막 넘기는 중이었다. 기원의 내부에는 시계소리 외의 그 어떠한 소리도 용납되지 않았다. 도우야 아키라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며 바둑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가 아키라의 한수를 기다리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졌습니다.”

갑자기 아키라가 고개를 숙이고 침통하게 말했다. 히카루는 깜짝 놀라며 사이를 돌아봤다.

‘어어? 어! 왜 그래?’

사이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낙담하듯 중얼거렸다.

[불계입니다. 자기의 패배를 스스로 인정한 것입니다. 벌써부터 그러면 재미없는데…]

히카루가 당황하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나… 난 잘 모르겠지만… 아직 지난번 대국의 반정도 밖에 두지 않았잖아! 사… 사이. 네가 그렇게 무참하게 이긴 거야?’

사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움이 사이의 얼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이는 행여나 하는 마음에 히카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말해봐요, 히카루.]

히카루는 사이가 시킨 대로 눈을 내리깔며 아키라에게 조용히 말했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

울컥. 아키라가 목구멍으로 워프하는 심장을 애써 제 자리로 돌리며 말했다.

“그… 그래도 졌습니다. 어차피 다음 수에 단수치면 다 먹히니까…”

아키라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맺지 못했다. 처참하게 무너진 바둑판의 형국이 마치 자신의 인생이라도 되는 양 실의에 빠진 채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히카루는 아키라의 쳐진 어깨를 보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바둑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아이를 이렇게까지 망가뜨려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히카루가 안쓰럽게 아키라를 응시하다가 갑작스레 벌떡 일어나며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도우야, 너 대단하다! 너무 진지해서 무서울 정도였어!”

역시 아키라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한수 한수에 너의 기백이 나를 압도할 정도로…”

여전히. 여전히 아키라는 고개를 떨군 채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절망의 기운이 아키라의 주변에 가득했다. 히카루는 결국 말끝을 흐리며 아키라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내 말 따윈…’

히카루는 우울해졌다.

‘마냥 씹는다. 허접 주제에…’

히카루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나, 갈게. 안녕…”

히카루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아키라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늘어진 어깨는 더 이상 힘을 얻지 못했고, 절망의 한숨이 주변 공기를 가득 메웠다. 아키라의 눈이 금세 방울지며 한 방울의 눈물을 떨궜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키라는 어렸을 때 아버지인 도우야 명인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어렸을 때.

‘아버지!’

아주 어렸을 때. 아키라는 도우야 고요과 손을 잡고 걸으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버지! 나, 바둑에 재능이 있나요?’

도우야 고요는 아키라의 보드라운 손을 놓지 않은 채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바둑에 재능이 있냐고?’

도우야 고요는 웃었다.

‘하하하.’

도우야 고요는 말했다.

‘너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로선 모르겠지만…’

도우야 고요는 미소를 지었다.

빙긋.

도우야 고요는 춤췄다.

덩실.

도우야 고요는 벗었다.

‘작작 좀 해!’

그냥 말…을… 이었다. 쳇!

‘그런 재능이 없다고 해도 넌 더 대단한 재능을 두 가지 갖고 있단다.’

‘두 가지… 재능?’

‘혼인보 슈우사쿠의 바둑전서에 이런 옛구절이 있지. 명인이 숲을 걸으면 그는 오동나무 바둑판을 들고 온다. 허접이 숲을 걸으면 삽질만 하다 온다. 명인이 별을 바라보면 그는 묘수풀이좌를 만든다. 허접이 별을 바라보면 마냥 별이다. 명인과 허접의 차이를 잘 나타내는 말이지.’

‘차이요?’

‘명인은 구해버려. 돈이 될만한 것을. 허접을 구해버려. 돈이 될만한 것은.’

‘총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버지?’

어린 아키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물어본다면…’

도우야 고요는 쓸쓸한 표정으로 아키라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 아버지가 난감하게 되겠지. 그러니 아키라. 너의 말은 꽤 실례되는 말이었단다.’

‘저… 때릴 거예요, 아버지?’

‘하하하. 귀여운 내 아들을 때릴 이유가 없지. 그러나 한 가지는 명심해라. 최선을 다해 앞만 보며 걷는다면 허접은 되지 않는다. 넌 지금까지 잘 하고 있었어.’

‘아버지…’

‘그래, 아키라. 청춘을 향해 걸어라. 앞만 보고 가는 것이 명인의 로망이란다.’

아키라는 마음속으로 괴롭게 되뇌었다. 기원은 여전히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너무도 조용해서 아키라가 주먹을 굳게 쥐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아키라는 마음속으로 괴롭게 외쳤다.

‘아버지! 저는 지금까지 아버지의 그 말을 가슴에 새긴 채 앞만 보며 걸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뭔가 보이지 않는 벽이 제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아랫입술을 자근 깨무는 순간, 고개를 숙인 아키라의 얼굴에서 맑은 방울이 떨어졌다. 물론 당황스럽게 침이나 콧물 따위는 아니었다. 아키라는 끊임없이 바둑판 위로 눈물을 떨구며 마음속으로 아우성쳤다.

‘보이지 않는 큰 벽이!’

*

비가 그친 다음날의 하늘은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며 햇살을 고스란히 내비칠 정도로 맑았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내내 멍한 얼굴을 하고 정신을 못차리는 히카루가 안쓰러웠는지, 아카리가 집에 같이 가자며 붙잡았다. 그 때 히카루는 백치와 맞먹는 정신상태였기 때문에, 아카리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우리엄마 진짜 웃긴다!”

학교를 벗어날 때까지 아카리는 쉴 새 없이 수다를 떨었다. 주 내용은 자신의 엄마 얘기였다. 대부분 같은 레퍼토리지만 아카리는 언제나 새로운 얘기인양 떠들어대며 웃곤 했다.

“생선을 훔쳐가는 도둑고양이를 맨발로 쫓아갔거든.”

아카리의 엄마 사카키는 언제나 그랬다. 도둑고양이가 아니더라도 고양이나 개를 보면 늘 필사적으로 달려가서 손을 물려야 직성이 풀리는 이상한 아줌마였다. 때문에 히카루도 가끔씩 아카리의 엄마가 손에 붕대를 매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히카루는 아카리의 엄마에 대한 동물 발견 정신증후군이나 그 동창이신 치요 아줌마가 메카닉인지 인간인지, 또는 카스가 아줌마가 오사카댁인지 부산댁인지를 고민할 상황이 아니었다. 히카루의 머릿속은 온통 어제의 아키라 모습만이 담겨져 있었다.

“어… 히카루! 내 말 듣고있니?”

듣고 있지 않았다. 히카루는 아카리가 멈춘 것도 모르고 그대로 땅만 보며 마냥 걸었다.

“왜 그렇게 일방적으로 이긴 거야, 사이.”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걷던 히카루가 갑작스레 멈춰서며 말했다.

“왜 지난번처럼 능숙하게 이기지 않은 거냐고? 말해봐, 사이!”

곧 사이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 아이는 단칼에 목과 몸통을 벨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 그러면 투명해지거든요. 그 땐 ‘방법2002’ 묘수기술로도 못 이겨요.]

“하아…”

히카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아카리가 뭐라고 쫑알거렸지만, 히카루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카리는 결국 히카루를 포기하고 중간에 다른 길로 가버렸다. 히카루는 마치 본능적으로 발이 움직이기라도 하는 듯 무의식을 담고 걸어가서 기원에 도착하고 말았다. 기원의 간판을 보는 순간, 히카루는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아키라가 눈깔까지 오그라들어 가며(그, 그건… 사이가…) 처절하게 싸우던 그 모습을. 왜 그랬을까! [아키라는 왜 그깟 바둑에 필사적으로 목을 매야 했을까! 어째서! 왜! 그렇게도 내 옷을 벗기고 싶었을까?] 에?

“이 자식! 남의 생각에 꼽싸리끼지 마!”

[그러니까 고민 때려 치고 빨리 바둑두러 가요!]

“싫어.”

[인색해요!]

“인색하다고?”

[여기까지 와 놓고선!]

“지금 그럴 기분이 아냐.”

히카루가 고개를 저으며 기원에게서 몸을 돌리는 순간, 뒤쪽에서 오가타가 착지했다. 아마도 기원창문을 통해 뛰어내린 듯 싶었다. 오가타는 히카루를 잡아채며 다짜고짜 기원으로 끌고갔다.

“따라와!”

“왜 이래요!”

히카루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어른인 오가타의 힘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히카루는 오가타의 우악스런 힘에 이끌려 기원까지 끌려가고 말았다. 오가타는 기원 안에 들어가자마자 중앙의 누군가에게 고함쳤다.

“도우야 선생님! 그 아이를 잡아왔습니다!”

“자, 잡았다고? 내가 뭘 어쨌다고…”

놀라서 고함치던 히카루가 멍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했다. 도우야 명인이었다. 도우야 고요는 침묵하는 바다처럼 오가타의 고함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대국을 지도하는 한수를 놓았다.

탁.

“그 아이가 아키라를 이겼다는 건가?”

탁.

“그것도 두 번이나… 아키라를…”

갑자기 도우야 명인의 싸늘한 눈이 히카루를 향했다. 숨이 멎을 정도의 위압감! 폭풍처럼 몰아치는 위압적인 기운이 히카루의 전신을 휘감았다. 히카루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물러서며 긴장했다. 하지만 사이는 달랐다. 명인만이 가질 수 있는 패기에 휘말리자, 사이 또한 타오르는 눈빛으로 도우야를 응시했다. 사람을 보면서 나체를 상상하는 건 사이에겐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히카루는 더 큰 불안감을 느꼈다.

“네 실력을 알고싶다.”

도우야 명인이 빈자리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또 한 번 차가운 위압감이 히카루의 전신으로 몰아쳤다. 동시에 사이도 들끓는 열기의 눈동자를 빛내며 표정을 굳혔다.

“아, 아니… 전…”

히카루가 주춤 물러서며 손을 휘젓는 순간,

[히카루!]

활화산이 폭발하듯 뜨거운 위압감이 사이에게서 흘러나왔다.

[그와 겨루십시오!]

“…….”

[‘혼인보 슈우사쿠’였던 나에게 도전했던 호적수…]

“어어…”

[이 자의 기백은 그와 똑같다!]

“난… 싫어.”

히카루가 고개를 저으며 또 한 발 물러서는 순간, 사이의 목소리가 다른 의미로 뜨거워졌다.

[귀에 혀… 들어갑니다?]

히카루는 잽싸게 앉았다. ㅡㅡ;;

“세 점 깐다. 내 아들도 그랬다.”

“…….”

히카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3개의 화점 위에 돌을 놓았다. 그리고 조이는 가슴을 억제하기 위하여 조심스레 숨을 들이켰다.

따악!

제대로 숨을 들이켜기도 전에 도우야 명인의 날카로운 일격이 바둑판을 강타했다. 히카루의 가슴이 무저갱을 뚫고 맨틀을 지나 핵 관통 다시 맨틀 뒷동네 무저갱에 뜻밖의 심해를 거쳐서 칠레 산간지방을 뚫고 대기권으로 날아갈 만큼 철렁 내려앉았다. 단지 백돌을 바둑판에 올려놓았을 뿐인데도 엄청난 위압감이 전해지고 있었다. 히카루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사이가 외쳤다.

[5의 3 공격!]

“…….”

히카루는 사이가 말한 지점으로 조심스레 돌을 놓았다. 자신이 돌을 놓는 손을 보니 조금 전 도우야 명인이 내려놓을 때와 비교하여 단연코 쪽팔렸다. 히카루가 막 돌을 내려놓자마자 도우야 명인은 백돌을 들었다.

따아악!

“아키라한테는 2살 때부터 바둑을 가르쳤다.”

도우야 명인의 손가락 끝이 빛나는 것만 같았다. 한 수 한 수마다… 어느 순간부터 히카루는 사이가 지시해서가 아니라 도우야 명인이 돌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기 위해 돌을 내려놓고 있었다.

딱!

“그렇기 때문에… 그런 아키라를 이긴 아이가 있다는 걸…”

손가락이 돌을 집는다. 손가락이 휘어진다!

따악!

“나로선 믿을 수 없다.”

손가락이… 바둑판에 돌을 놓는다! 빛나는 손가락! 빛나는 손!

따아아아!

도우야 명인의 백돌이 바둑판의 일점을 맹렬하게 후려쳤다.

우주이상류(宇宙理想類) 천추행마(天樞行馬)!

사이가 흠칫하며 바둑판의 형세를 살피다가 급히 말했다.

[저자는 강합니다, 히카루! 일단 방어에 들어가야겠어요. 10의 16 화점에 두세요.]

나도… 히카루의 손이 통에 들어있는 흑돌을 매만졌다. 나도… 나도!

[히카루! 10의 16!]

‘나도 저렇게 둔다면!’

히카루는 흑돌을 쥔 손을 번쩍 치켜들며 힘차게 바둑판으로 날렸다.

콰콰콰쾅!

도우야 명인과 사이의 눈이 경악으로 치켜떠졌다. 히카루가 돌을 놓은 곳은 사이가 말했던 10의 16지점이 아니었다. 뜻밖의 곳! 그러나 그 한 수로 인하여 흑돌은 뜻밖의 형세를 만들었다.

폭렬지옥류(爆裂地獄類) 염라행마(閻羅行馬)!

사이, 도우야 명인! 3명 모두가 바둑판에 박혀서 뿌연 연기를 뿜어내는 흑돌을 응시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계가

댓글 4개:

  1. 이걸 본게 언제였는지 잘 기억도 안나는군요.(최소 2년은 지났죠?) 다음편은 언제 나와요~라는 질문은 할 필요가 없겠고(...) 한가지 지적하자면 카테고리 분류가 잘못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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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분명 하이텔에서 연재하시다 실종되신 호스트 바둑왕이 맞군요.



    다음 편에 대한 기대 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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