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손가락, 빛나는 손!
히카루의 흑돌이 빛을 발했다.
나도 저렇게 둔다면!
콰콰콰쾅!
“…….”
도우야 명인과 사이,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긴장하며 바둑판을 응시했다. 희뿌연 연기가 자욱하게 흐르는 바둑판 위에는 히카루가 박아놓은 흑돌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폭렬지옥류(爆裂地獄類) 염라행마(閻羅行馬).
이어지는 내용
히카루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흑돌을 응시했다. 1수를 날렸던 손가락이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양 괴리감이 느껴졌다.
‘사이, 설마… 지금 내… 몸을…’
[덮치지 않았어요! 믿어주세요!]
사이가 외쳤지만 히카루는 듣지 못했다.
“아아아악!”
히카루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를 박찼다.
“꼬마야!”
도망가는 히카루를 향해 오가타가 손을 뻗었지만 잡지 못했다. 오가타는 멍한 얼굴로 히카루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으음…”
도우야 명인은 히카루를 무시한 채 묵묵히 바둑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폭렬지옥류 염라행마라니……. 도우야 명인의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울컥 솟구쳤지만, 그것을 표정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 때 오가타가 자책하듯 중얼거렸다.
“제가… 억지로 끌고 온 게 잘못한 걸까요?”
도우야 명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가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오가타는 도우야 명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아이… 어때요?”
“돌의 흐름이 정상적인 게 없어. 꾼들의 본보기와도 같아.”
도우야 명인의 한 마디가 오가타를 긴장시켰다.
“그렇다면…”
“서반의 몇 수를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뿐일세. 바둑경력도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것보다…”
“네?”
오가타가 멍하게 물었으나 도우야 명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상적이지 못한 초반의 흐름에 단 한 수의 맥을 짚어서 폭렬지옥류 염라행마로 바꿔버린 것은 일평생 바둑계에서 살았던 도우야 명인의 입장에서 너무도 뜻밖이었다. 도우야 명인은 히카루의 다음 수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어째서 히카루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던 것일까. 도우야 명인은 오가타를 돌아봤다.
“오가타군. 아이가 괜찮은 지 알아봐 주겠나?”
“아. 지금요?”
도우야 명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둑알을 정리했다.
“알겠습니다.”
오가타는 급히 몸을 돌려 기원을 나갔다.
“폭렬지옥류라… 옛날 그 녀석이 쓰던 기법을 여기서 보게될 줄이야…”
도우야 명인은 쓰게 웃었다. 뭉텅이 파마를 한 머리카락 속에서 끝없이 바둑알을 꺼내며 강렬한 수를 날리던 옛친구가 기억났다.
탁탁탁탁탁탁!
“멈춰! 스톱! 프리즈!”
아무리 외쳐도 히카루는 멈추려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달리는 히카루의 뒤를 쫓을수록 오가타는 불안감을 느꼈다. 히카루는 빨랐다. 자신이 이제껏 보아왔던 그 누구보다도!
“스톱!”
오가타는 힘껏 팔을 뻗으며 히카루가 멈추기를 갈망했다. 양복 속에 감춰진 모든 근육들이 주인의 뜻에 따라서 팽팽히 당겨졌다. 투후! 투! 근육이 한 번 수축될 때마다 들려오는 심장박동 소리는 히카루를 부르는 자신의 목소리조차 잡아먹을 정도로 컸다.
“스톱, 히카루!”
둑. 투우우! 투!
주변이 고요해지고 있었다. 오가타는 초월의 세계 속에 홀로 남아서 히카루가 남긴 발자국의 외길을 달렸다. 한 번 땅을 내디딜 때마다 피부에 맺힌 땀방울이 탄환처럼 사방으로 날아갔다.
피잉! 팅!
팔과 다리가 마치 용수철처럼 퉁기며 바람을 찢었다. 태풍의 눈에 들어오기라도 한 듯 바람의 중심이 갈가리 찢어지며 히카루의 뒷모습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오가타는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초월의 경계에 서자마자 모든 세상들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자신의 안경이 수은처럼 녹아 내리는 것 같았고, 히카루의 등이 블랙홀에 빠져드는 그것처럼 심하게 울렁거렸다.
“이야아아아아아아!”
심장의 정점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오가타는 환상을 보았다. 헤이안 시대의 복장을 한 사내가 30센티쯤 허공에 뜬 채로 히카루의 머리채를 잡고 날아가는 환상을. 오가타는 극한까지 당겨진 전신의 고무줄이 탁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헉. 헉헉헉…”
어느새 오가타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힘겹게 일어나긴 했지만, 앞으로 나아갈 힘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서러웠다. 나란 놈은 고작 이 정도인가. 바둑으로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나 오가타가 고작 이 정도에 주저앉을 인물이었단 말인가!(바둑과 육상은 관계없어!) 이것이 신의 한 수를 꿈꾸는 자의 근육이란 말인가!(전투바둑이냐!) 이깟 실력으로 황금성을 찾아서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오가타!(대체 너 뭐 하는 놈이야?)
“으… 헉… 으…”
오가타가 갑자기 눈을 빛냈다. 히카루가… 히카루가 보였다! 히카루도 한계를 넘어선 듯 넋이 나간 얼굴로 공원벤치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오가타는 희망의 미소를 지으며 안경테를 살짝 들어올렸다. 히카루가 앉은 벤치 뒤에서 순백의 옷을 입은 사내가 묵묵히 떠 있는 것은 가볍게 착시현상으로 치부했다. 지금 오가타의 표적은 넋나간 얼굴로 벤치에 앉아있는 히카루 밖에 없었다. 오가타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됐습니다, 도우야 선생님. 이제 곧 꼬마가 괜찮은 지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오가타는 힘겹게 발을 내밀어 1보를 디뎠다. 그 순간, 오가타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넋나간 얼굴의 히카루가 벤치의 손잡이를 쥐고있는 두 손에 힘을 주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히카루는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오가타는 이를 드러내며 중저음의 소리로 으르렁댔다.
“싯 다운, 히카루.”
하지만 히카루는 일어서고 있었다.
“싯 다운!”
공원 주변이 오가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채워졌다. 으르렁거리는 오가타의 울림에도 아랑곳 않고 히카루는 일어섰다. 오가타가 다시 한 번 외쳤지만, 히카루는 끝내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오가타의 눈에는 달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간호사처럼 하얀 옷을 입은 자가 아까와 같이 히카루의 머리채를 쥐고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오가타는 절망하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미 히카루의 모습은 지평선 저편의 일점이 되어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하하하…”
오가타는 웃기 시작했다. 눈에 물방울이 맺혔다. 이제 오가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오가타는 눈물이 그렁거리는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까?”
기원에서 행마를 지적받던 사내가 도우야 명인을 응시하며 물었다. 도우야 명인이 쥐고 있던 바둑돌을 내려놓고 귀를 기울였다. 기원의 모든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며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어디선가 오가타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잘 지내십니까!”
“…….”
“잘 지내십니까아!”
“…….”
도우야 명인이 다시 바둑돌을 들었다.
“자자, 바보는 놔두고 행마에 집중합시다.”
도우야 명인의 말에 모두가 수긍하며 시선을 깔았다.
“잘 지내십니까아아아!”
퍼억!
“캑!”
히카루는 느닷없는 라인 크로스 어택의 팔뚝에 모가지를 얻어맞고 뒤로 자빠졌다.
“뭐, 뭐야?”
목을 주무르며 일어서는 히카루의 앞에 개를 데리고 있는 아카리가 보였다. 아카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물었다.
“방금 너네 집에서 오는 길이야. 이렇게 늦게까지 어디갔던 거니?”
“어… 바둑을 뒀어.”
히카루가 옷의 먼지를 털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카리가 놀랍다는 듯 물었다.
“바둑? 또? 너 요즘 바둑에 재미붙였니?”
아카리의 말을 듣자마자 히카루에 두 눈에 핏발을 세웠다.
“재미는 무슨! 그딴 거 재미없어! 에엑! 귀에다 넣지 말란 말야!”
“응?”
“아냐. 근데 무슨 용건이라도 있어?”
“아.”
아카리는 뒤늦게 생각난 듯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카리가 꺼낸 것은 2장의 티켓이었다.
“이거 언니한테 얻었어. 언니네 중학교에서 축제를 한 대. 같이 가자.”
아카리가 내민 티켓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히카루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싫어.”
“가자. 일부러 찾아와서 같이 가자는데 왜 그러니?”
“싫다니까. 아… 배고프다. 라면이나 사먹고 갈까보다.”
덥석.
“갈게.”
아카리의 애완견 실버경에게 머리를 물린 히카루가 땀을 훔치듯 피를 닦으며 대답했다. 사이가 아카리를 보며 ♡했다.
웅성웅성.
하제중학교의 창립축제는 여타 학교 이상으로 성대했다. 테니스부에서 감주를 공짜로 선물하고, 맛있는 타코야키의 향기가 운동장 전체를 맴돌며 히카루의 군침을 폭주시켰다. 하지만 히카루는 만족하지 못했다. 정작 오라고 했던 아카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안 오는 거야, 이 바보! 난 돈도 안 갖고 왔단 말야!”
히카루는 사방에 널린 화려한 음식들을 보며 군침을 삼켰다. 당고3형제가 춤을 추며 히카루를 유혹했지만, 돈이 없으니 그림의 당고와 다를 게 없다. 히카루가 분노하는 동안 사이는 신기한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것이 서당의 축제인가요? 와… 맛지다.]
“맛지다?”
[아니아니. 멋지다고요.]
“너 바른대로 말해. 여기 학생들 보면서 맛있겠다고 군침 흘렸지?”
[어, 저기… 바둑을 두고 있어요!]
“말 돌리지 마…”
히카루가 불평했지만, 이미 사이는 바둑을 두는 소년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히카루가 마지못한 듯 그곳에 갔을 때, 백발이 희끗희끗한 중년노인이 백돌을 들었다.
“여긴 흑집이니까… 백을… 오!”
탁.
백돌이 일점에 놓이자, 소년이 안경을 치켜세우며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 두면요?”
“허… 그렇구나. 하하! 역시 어려운 걸?”
노인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일어섰다. 히카루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사이가 귓속말을 했다.
[묘수풀이에요. 바둑을 배울 때 많은 도움을 주죠. 아앗!]
“으아악!”
귓속말을 하다가 소리쳤기 때문에 히카루도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바둑판 앞에 앉아있는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있는 히카루가 허공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귀에 대고 고함치면 어떻게 해! 귀청 떨어질 뻔 했잖아!”
“음… 너도 하겠니?”
소년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히카루가 불쾌감을 지우지 못한 채 싸늘한 표정으로 소년을 돌아봤다.
“그거 하면 뭐 주는데요?”
“하하하. 묘수풀이의 정답을 맞추는 사람에게 경품을 주고 있어.”
[해봐요, 히카루!]
사이가 폴짝폴짝 뛰며 손뼉을 쳤다. 히카루는 마지못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좋은 거 주나요?”
“맞추면 뭐든 못 줄까?”
[제가 할래요!]
사이가 눈을 빛내며 외쳤지만, 히카루는 소년의 순결을 위해 자신의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제! 가! 해 볼게요.”
사이의 툴툴거리는 소리를 무시한 채 히카루는 소년이 만들어놓은 묘수풀이 문제를 응시했다. 이것이다 싶은 지점에 바둑돌을 놓았는데, 주변에 모여있던 어른들이 갑자기 손뼉을 치며 웃었다.
“와! 정답이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축하한다, 꼬마야.”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히카루가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빙긋 웃으며 히카루에게 1회용 화장지를 내밀었다. 곧 히카루가 실망스러운 표정이 되어 물었다.
“겨우 이거예요?”
사이가 한숨을 쉬며 불평했다.
[방금 것은 쉬운 문제라고요. 어려운 걸 풀어야 쟤가 벗죠.]
히카루는 사이의 말을 무시한 채 소년에게 물었다.
“좀 더 어려운 문제로 해 주세요.”
소년이 가소롭다는 듯 히카루를 응시하며 미소짓더니, 묘수풀이집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좀 더 어려운 거라… 좋아. 그러면 초 유단자 문제다. 나로서도 벅찬 문제인데… 세 수까지 놔 봐.”
히카루는 곁눈질로 사이를 봤다. 사이가 빙긋 웃으며 짤막하게 말했다.
[3의 14, 4의 14, 1의 16.]
히카루가 사이의 말대로 돌을 놓는 순간, 소년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 모여있던 어른들도 입을 쩍 벌리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히카루는 소년을 향해 말했다.
“이게 제일 어려운 건가요? 경품이 뭐예요?”
“음…”
소년은 잠시 히카루를 응시하다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이것을 풀다니… 이 문제는 도우야 아키라 수준의 문제였는데…”
그 순간 히카루가 화들짝 놀라며 소년에게 바짝 다가갔다.
“도우야 아키라! 나 그 애 알아요! 그 애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소년이 새로운 문제를 만들면서 대답했다.
“도우야 아키라라면 이미 프로테스트를 거치지 않았을까? 어른을 상대로 지도바둑을 둔다는 소문도 들었는데…”
히카루는 대국하던 때의 아키라 얼굴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걔와 대국할 때의 얼굴을 잊지 못하겠어요. 정말 진지해서 무서울 정도였는데…”
그 때 소년이 문제를 완성하며 말했다.
“자, 새로운 문제다.”
히카루와 사이가 동시에 바둑판을 응시했다. 그 때 소년이 바둑판 위로 뭔가를 올려놓았다.
“난 너같은 애를 기다렸어. 이것을 풀 수 있다면 경품으로 이걸 줄게.”
“네?”
소년이 바둑판 위에 올려놓은 것은 맑게 빛나는 백돌 한 개였다. 히카루가 백돌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고개를 기울이자, 소년이 말했다.
“이것은 우리 집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바둑알이지. 혹시 혼인보 슈우사쿠라고 알고 있니?”
“어! 알아요!”
소년의 입에서 혼인보 슈우사쿠의 이름이 나오자 사이가 몸을 떨었다. 사이는 뒤늦게 바둑알의 정체를 확인하곤 비명을 질렀다.
[저 바둑돌은!]
“응? 사이는 저게 무슨 바둑돌인지 알아?”
[알다마다요! 저것은 혼인보 슈우사쿠가 사용하던 바둑알이에요! 다른 자는 알 수 없겠지만 저는 확실하게 저것을 구분할 수 있어요!]
사이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히카루는 혼인보의 바둑알을 이 각도 저 각도에서 살펴보다가 혼잣말 식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보기엔 그냥 보통 바둑알같은데…”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히카루. 저건 혼인보 슈우사쿠와 나의 증표랍니다.]
“증표라고?”
[네. 우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저 돌과 함께 했어요. 언제나 아침이면 혼인보 슈우사쿠가 저 돌을 혀 위에 올려놓고 제게 다가와…]
“다다다다다다, 닥쳐! 나, 난… 저 문제 안 풀어!”
[앗! 너무해요, 히카루!]
사이가 울음을 터뜨렸지만, 히카루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소년이 올려놓은 혼인보 슈우사쿠의 바둑돌은 단지 사이와 히카루의 분위기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주변에 모여있던 모든 어른들의 눈에 이채가 어리며 볼에 욕심이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어른들 중 한 명이 천천히 다가와 혼인보의 바둑돌에 손을 내밀었다.
“이게 바로…”
탁!
소년은 바둑돌을 만지려던 손을 가볍게 때리더니 냉담하게 말했다.
“먼저 문제를 푸세요. 이 돌은 문제를 풀 수 있는 자만이 주인의 자격을 얻을 수 있어요. 잊지 마세요. 문제를 풀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뿐이에요.”
“좋아. 이 돌은 내가 갖겠어. 문제를 풀어주지.”
바둑돌을 만지려던 사내는 팔을 걷어붙이며 히카루를 밀쳤다. 그리고 흑돌을 들어 문제가 놓여진 판으로 접근했다. 그 순간,
“그걸 당신이 할 수 있단 말이냐!”
이제껏 미소를 지으며 구경했던 작달만한 체구에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인이 눈을 부릅뜨며 사내를 밀쳤다. 동시에 구레나룻의 아저씨가 몸을 일으키며 위협적인 어조로 외쳤다.
“만약 우리가 실패해서 잡상인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하지?”
소년이 움찔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가문의 보물인 혼인보의 바둑알이 한낱 경매품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소년은 기대에 어린 눈을 히카루에게 돌렸지만 가볍게 외면당했다. 그 때 덥수룩한 수염의 중년인이 살인이라도 저지를 듯 눈을 부라리며 호통쳤다.
“난 죽기 전에 이 돌이 너희들 손에 들어가는 것은 못 봐!”
얌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매력적인 청년 한 명이 그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쉬며 외면했다. 그 곁에 있던 백발의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에 모였던 다수의 어른들은 일시에 몸을 일으키며 서로를 향해 욕설을 뱉기 시작했다. 묘수풀이 동네 주변은 삽시간에 소음과 혼란과 분노로 가득 찼다.
“너희들은 아무도 못 믿어!”
“다들 모르겠어? 우리가 이렇게 다투는 동안, 잡상인은 돈을 끌어 모으고 있을 거라고!”
“아무도 풀 수 없어! 너희들은 허접일 거야!”
모두가 일어서서 떠들던 와중에 히카루는 불안한 표정으로 혼인보의 바둑돌을 응시했다. 바둑돌이 분노의 기운에 휘말려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주변에서 싸움을 벌이는 모든 자들을 비추기 시작했다. 바둑돌에 비친 동네 사람들의 모습은 곧 불길에 휘감겼다. 히카루는 불안에 떨며 바둑돌을 노려봤다. 타오르듯 일렁거리는 바둑돌의 영상이 히카루에게 조소를 보냈다. 히카루는 일어서며 외쳤다.
“제가 풀겠어요!”
사람들은 듣지 못한 채 여전히 떠들었다. 히카루가 다시 외쳤다.
“제가 풀게요!”
제일 먼저 히카루의 외침을 들었던 노인이 올 것이 왔다는 듯 서글픈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뒤늦게 히카루의 목소리를 들었던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침묵했다. 히카루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비록… 푸는 법은 모르지만요.”
그러자 노인이 손을 들어 부드럽게 히카루의 어깨를 짚었다.
“네가 이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마, 신도우 히카루. 네가 풀 수 있을 때까지…”
“내, 내 이름은 어떻게…”
노인이 눈을 부라려서 히카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때 소년이 다급하게 외쳤다.
“훈수는 안됩니다!”
히카루가 당황하며 노인과 소년을 번갈아 돌아봤다. 그 때 매력적인 청년이 히카루를 향해 미소지으며 말했다.
“내 목숨을 걸고 저 소년의 감시망을 돌려주겠네.”
청년은 히카루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을 이었다.
“맹세하지. 내 노래가 자네를 수호할 거야.”
동시에 곁에 있던 장발의 미청년이 히카루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리고 내 춤이 널 지킬 거야.”
잠시 침묵하던 덥수룩한 수염의 중년인도 한 마디 거들었다.
“그리고 내 자지도. -_-??”
히카루는 용기를 얻고 자리에 앉았다. 소년이 눈을 부릅뜨며 노인과 히카루를 노려봤다. 절대로 한눈을 팔지 않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소년은 말했다.
“자. 시작해요. 만약 훈수를 두는 것이 걸린다면 그 순간 게임은 끝입니다.”
히카루가 바둑돌을 들어 묘수풀이 문제를 향해 접근했다. 그와 동시에 매력적인 청년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
노래와 함께 미청년이 분신술을 펼치며 국민체조의 팔다리 운동과 흡사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소년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핏덩이를 억지로 삼켜가며 히카루의 수에 집중했다. 또한 끊임없는 곁눈질로 노인을 노려보며 훈수의 싹을 잘랐다. 히카루가 고민하고 있을 때, 매력적인 청년이 목소리를 깔았다.
“머쉬룸, 머쉬룸.”
“푸업!”
바둑판이 단숨에 피천지가 되었다. 덥수룩한 수염의 중년인이 그걸 꺼내 보였기 때문이다. 소년은 눈이 뒤집히는 것을 간신히 억제하면서도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해 비틀거렸다. 하지만 소년의 눈은 여전히 히카루와 노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매력적인 청년이 가진 매력을 몽땅 팽개치고 대단히 느끼한 표정을 지으며 주둥이를 내밀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징그러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쑤눼에이크! 쑤눼에이크!”
덥수룩한 수염의 중년인 것이 뱀처럼…
“으아아아아아아악!”
소년은 결국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성을 터뜨렸다. 사방에 피가 난무하고 있었다. 그 틈에 노인이 잽싼 동작으로 히카루의 귀에 뭐라뭐라 속삭였다. 이제껏 춤과 노래를 즐겁게 구경하던 사이가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이 영감의 훈수가 맞아요, 히카루. 거기에 놓으시면 풀 수 있을 거예요.]
“아 참. 너도 있었지?”
히카루가 안심하며 힘껏 바둑돌을 내려놓으려 했다. 그 순간,
“첫수는…”
탁!
“여기야.”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 꽁초가 바둑판의 한 점에 내리꽂혔다. 노래는 그치고 춤도 멈췄으며 그것은 들어갔다. -_-;; 히카루는 긴장된 표정으로 뜻밖의 인물을 응시했다. 키모노를 입은 녀석이 느끼한 미소를 짓다가 눈을 부릅떴다.
“그만둬. 바둑같은 건 따분하다고.”
문제를 냈던 소년이 입에서 쏟아지는 피를 억지로 수습하며 외쳤다.
“무슨 짓이야!”
“크크크…”
손가락을 퉁겨 꽁초를 던진 녀석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돌멩이로 땅따먹기라니 너무 시시해. 장기가 훨씬 재미있다구! 뭐가 혼인보 슈우사쿠냐? 그깟 녀석, 나한테도 진 시시한 녀석이야.”
“네가 몇 살인데…”
히카루가 불평하듯 중얼거렸다. 그 때 사이가 긴장하며 히카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히카루… 조심하세요. 보통 녀석이 아니에요.]
“뭐?”
[이 아이가 던진 꽁초… 헤이안 시대의 대마초예요.]
히카루가 흠칫하며 눈을 치켜 떴다.
7국 끝
잡담: 7국부터 마니악한 레벨로 올라갑니다.(8국은 더 심각해지고요) 상당히 다양한 부분의 패러디로 이어지기 때문에 끼리끼리 놀자는 글로 변해버렸을 거예요. 죄송합니다. ^^;;
레디 오스 성화 올림
‘사이, 설마… 지금 내… 몸을…’
[덮치지 않았어요! 믿어주세요!]
사이가 외쳤지만 히카루는 듣지 못했다.
“아아아악!”
히카루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를 박찼다.
“꼬마야!”
도망가는 히카루를 향해 오가타가 손을 뻗었지만 잡지 못했다. 오가타는 멍한 얼굴로 히카루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으음…”
도우야 명인은 히카루를 무시한 채 묵묵히 바둑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폭렬지옥류 염라행마라니……. 도우야 명인의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울컥 솟구쳤지만, 그것을 표정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 때 오가타가 자책하듯 중얼거렸다.
“제가… 억지로 끌고 온 게 잘못한 걸까요?”
도우야 명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오가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오가타는 도우야 명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 아이… 어때요?”
“돌의 흐름이 정상적인 게 없어. 꾼들의 본보기와도 같아.”
도우야 명인의 한 마디가 오가타를 긴장시켰다.
“그렇다면…”
“서반의 몇 수를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뿐일세. 바둑경력도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것보다…”
“네?”
오가타가 멍하게 물었으나 도우야 명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상적이지 못한 초반의 흐름에 단 한 수의 맥을 짚어서 폭렬지옥류 염라행마로 바꿔버린 것은 일평생 바둑계에서 살았던 도우야 명인의 입장에서 너무도 뜻밖이었다. 도우야 명인은 히카루의 다음 수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어째서 히카루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던 것일까. 도우야 명인은 오가타를 돌아봤다.
“오가타군. 아이가 괜찮은 지 알아봐 주겠나?”
“아. 지금요?”
도우야 명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둑알을 정리했다.
“알겠습니다.”
오가타는 급히 몸을 돌려 기원을 나갔다.
“폭렬지옥류라… 옛날 그 녀석이 쓰던 기법을 여기서 보게될 줄이야…”
도우야 명인은 쓰게 웃었다. 뭉텅이 파마를 한 머리카락 속에서 끝없이 바둑알을 꺼내며 강렬한 수를 날리던 옛친구가 기억났다.
탁탁탁탁탁탁!
“멈춰! 스톱! 프리즈!”
아무리 외쳐도 히카루는 멈추려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달리는 히카루의 뒤를 쫓을수록 오가타는 불안감을 느꼈다. 히카루는 빨랐다. 자신이 이제껏 보아왔던 그 누구보다도!
“스톱!”
오가타는 힘껏 팔을 뻗으며 히카루가 멈추기를 갈망했다. 양복 속에 감춰진 모든 근육들이 주인의 뜻에 따라서 팽팽히 당겨졌다. 투후! 투! 근육이 한 번 수축될 때마다 들려오는 심장박동 소리는 히카루를 부르는 자신의 목소리조차 잡아먹을 정도로 컸다.
“스톱, 히카루!”
둑. 투우우! 투!
주변이 고요해지고 있었다. 오가타는 초월의 세계 속에 홀로 남아서 히카루가 남긴 발자국의 외길을 달렸다. 한 번 땅을 내디딜 때마다 피부에 맺힌 땀방울이 탄환처럼 사방으로 날아갔다.
피잉! 팅!
팔과 다리가 마치 용수철처럼 퉁기며 바람을 찢었다. 태풍의 눈에 들어오기라도 한 듯 바람의 중심이 갈가리 찢어지며 히카루의 뒷모습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오가타는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초월의 경계에 서자마자 모든 세상들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자신의 안경이 수은처럼 녹아 내리는 것 같았고, 히카루의 등이 블랙홀에 빠져드는 그것처럼 심하게 울렁거렸다.
“이야아아아아아아!”
심장의 정점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오가타는 환상을 보았다. 헤이안 시대의 복장을 한 사내가 30센티쯤 허공에 뜬 채로 히카루의 머리채를 잡고 날아가는 환상을. 오가타는 극한까지 당겨진 전신의 고무줄이 탁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헉. 헉헉헉…”
어느새 오가타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힘겹게 일어나긴 했지만, 앞으로 나아갈 힘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서러웠다. 나란 놈은 고작 이 정도인가. 바둑으로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나 오가타가 고작 이 정도에 주저앉을 인물이었단 말인가!(바둑과 육상은 관계없어!) 이것이 신의 한 수를 꿈꾸는 자의 근육이란 말인가!(전투바둑이냐!) 이깟 실력으로 황금성을 찾아서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오가타!(대체 너 뭐 하는 놈이야?)
“으… 헉… 으…”
오가타가 갑자기 눈을 빛냈다. 히카루가… 히카루가 보였다! 히카루도 한계를 넘어선 듯 넋이 나간 얼굴로 공원벤치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오가타는 희망의 미소를 지으며 안경테를 살짝 들어올렸다. 히카루가 앉은 벤치 뒤에서 순백의 옷을 입은 사내가 묵묵히 떠 있는 것은 가볍게 착시현상으로 치부했다. 지금 오가타의 표적은 넋나간 얼굴로 벤치에 앉아있는 히카루 밖에 없었다. 오가타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됐습니다, 도우야 선생님. 이제 곧 꼬마가 괜찮은 지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오가타는 힘겹게 발을 내밀어 1보를 디뎠다. 그 순간, 오가타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넋나간 얼굴의 히카루가 벤치의 손잡이를 쥐고있는 두 손에 힘을 주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히카루는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오가타는 이를 드러내며 중저음의 소리로 으르렁댔다.
“싯 다운, 히카루.”
하지만 히카루는 일어서고 있었다.
“싯 다운!”
공원 주변이 오가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채워졌다. 으르렁거리는 오가타의 울림에도 아랑곳 않고 히카루는 일어섰다. 오가타가 다시 한 번 외쳤지만, 히카루는 끝내 달리기 시작했다. 아니, 오가타의 눈에는 달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간호사처럼 하얀 옷을 입은 자가 아까와 같이 히카루의 머리채를 쥐고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오가타는 절망하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미 히카루의 모습은 지평선 저편의 일점이 되어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하하하…”
오가타는 웃기 시작했다. 눈에 물방울이 맺혔다. 이제 오가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오가타는 눈물이 그렁거리는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천천히 두 손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까?”
기원에서 행마를 지적받던 사내가 도우야 명인을 응시하며 물었다. 도우야 명인이 쥐고 있던 바둑돌을 내려놓고 귀를 기울였다. 기원의 모든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며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어디선가 오가타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잘 지내십니까!”
“…….”
“잘 지내십니까아!”
“…….”
도우야 명인이 다시 바둑돌을 들었다.
“자자, 바보는 놔두고 행마에 집중합시다.”
도우야 명인의 말에 모두가 수긍하며 시선을 깔았다.
“잘 지내십니까아아아!”
퍼억!
“캑!”
히카루는 느닷없는 라인 크로스 어택의 팔뚝에 모가지를 얻어맞고 뒤로 자빠졌다.
“뭐, 뭐야?”
목을 주무르며 일어서는 히카루의 앞에 개를 데리고 있는 아카리가 보였다. 아카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물었다.
“방금 너네 집에서 오는 길이야. 이렇게 늦게까지 어디갔던 거니?”
“어… 바둑을 뒀어.”
히카루가 옷의 먼지를 털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아카리가 놀랍다는 듯 물었다.
“바둑? 또? 너 요즘 바둑에 재미붙였니?”
아카리의 말을 듣자마자 히카루에 두 눈에 핏발을 세웠다.
“재미는 무슨! 그딴 거 재미없어! 에엑! 귀에다 넣지 말란 말야!”
“응?”
“아냐. 근데 무슨 용건이라도 있어?”
“아.”
아카리는 뒤늦게 생각난 듯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카리가 꺼낸 것은 2장의 티켓이었다.
“이거 언니한테 얻었어. 언니네 중학교에서 축제를 한 대. 같이 가자.”
아카리가 내민 티켓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히카루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싫어.”
“가자. 일부러 찾아와서 같이 가자는데 왜 그러니?”
“싫다니까. 아… 배고프다. 라면이나 사먹고 갈까보다.”
덥석.
“갈게.”
아카리의 애완견 실버경에게 머리를 물린 히카루가 땀을 훔치듯 피를 닦으며 대답했다. 사이가 아카리를 보며 ♡했다.
웅성웅성.
하제중학교의 창립축제는 여타 학교 이상으로 성대했다. 테니스부에서 감주를 공짜로 선물하고, 맛있는 타코야키의 향기가 운동장 전체를 맴돌며 히카루의 군침을 폭주시켰다. 하지만 히카루는 만족하지 못했다. 정작 오라고 했던 아카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안 오는 거야, 이 바보! 난 돈도 안 갖고 왔단 말야!”
히카루는 사방에 널린 화려한 음식들을 보며 군침을 삼켰다. 당고3형제가 춤을 추며 히카루를 유혹했지만, 돈이 없으니 그림의 당고와 다를 게 없다. 히카루가 분노하는 동안 사이는 신기한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것이 서당의 축제인가요? 와… 맛지다.]
“맛지다?”
[아니아니. 멋지다고요.]
“너 바른대로 말해. 여기 학생들 보면서 맛있겠다고 군침 흘렸지?”
[어, 저기… 바둑을 두고 있어요!]
“말 돌리지 마…”
히카루가 불평했지만, 이미 사이는 바둑을 두는 소년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히카루가 마지못한 듯 그곳에 갔을 때, 백발이 희끗희끗한 중년노인이 백돌을 들었다.
“여긴 흑집이니까… 백을… 오!”
탁.
백돌이 일점에 놓이자, 소년이 안경을 치켜세우며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 두면요?”
“허… 그렇구나. 하하! 역시 어려운 걸?”
노인은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일어섰다. 히카루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사이가 귓속말을 했다.
[묘수풀이에요. 바둑을 배울 때 많은 도움을 주죠. 아앗!]
“으아악!”
귓속말을 하다가 소리쳤기 때문에 히카루도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바둑판 앞에 앉아있는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 있는 히카루가 허공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귀에 대고 고함치면 어떻게 해! 귀청 떨어질 뻔 했잖아!”
“음… 너도 하겠니?”
소년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히카루가 불쾌감을 지우지 못한 채 싸늘한 표정으로 소년을 돌아봤다.
“그거 하면 뭐 주는데요?”
“하하하. 묘수풀이의 정답을 맞추는 사람에게 경품을 주고 있어.”
[해봐요, 히카루!]
사이가 폴짝폴짝 뛰며 손뼉을 쳤다. 히카루는 마지못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좋은 거 주나요?”
“맞추면 뭐든 못 줄까?”
[제가 할래요!]
사이가 눈을 빛내며 외쳤지만, 히카루는 소년의 순결을 위해 자신의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제! 가! 해 볼게요.”
사이의 툴툴거리는 소리를 무시한 채 히카루는 소년이 만들어놓은 묘수풀이 문제를 응시했다. 이것이다 싶은 지점에 바둑돌을 놓았는데, 주변에 모여있던 어른들이 갑자기 손뼉을 치며 웃었다.
“와! 정답이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축하한다, 꼬마야.”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히카루가 소년을 보았다. 소년은 빙긋 웃으며 히카루에게 1회용 화장지를 내밀었다. 곧 히카루가 실망스러운 표정이 되어 물었다.
“겨우 이거예요?”
사이가 한숨을 쉬며 불평했다.
[방금 것은 쉬운 문제라고요. 어려운 걸 풀어야 쟤가 벗죠.]
히카루는 사이의 말을 무시한 채 소년에게 물었다.
“좀 더 어려운 문제로 해 주세요.”
소년이 가소롭다는 듯 히카루를 응시하며 미소짓더니, 묘수풀이집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좀 더 어려운 거라… 좋아. 그러면 초 유단자 문제다. 나로서도 벅찬 문제인데… 세 수까지 놔 봐.”
히카루는 곁눈질로 사이를 봤다. 사이가 빙긋 웃으며 짤막하게 말했다.
[3의 14, 4의 14, 1의 16.]
히카루가 사이의 말대로 돌을 놓는 순간, 소년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 모여있던 어른들도 입을 쩍 벌리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히카루는 소년을 향해 말했다.
“이게 제일 어려운 건가요? 경품이 뭐예요?”
“음…”
소년은 잠시 히카루를 응시하다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이것을 풀다니… 이 문제는 도우야 아키라 수준의 문제였는데…”
그 순간 히카루가 화들짝 놀라며 소년에게 바짝 다가갔다.
“도우야 아키라! 나 그 애 알아요! 그 애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소년이 새로운 문제를 만들면서 대답했다.
“도우야 아키라라면 이미 프로테스트를 거치지 않았을까? 어른을 상대로 지도바둑을 둔다는 소문도 들었는데…”
히카루는 대국하던 때의 아키라 얼굴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걔와 대국할 때의 얼굴을 잊지 못하겠어요. 정말 진지해서 무서울 정도였는데…”
그 때 소년이 문제를 완성하며 말했다.
“자, 새로운 문제다.”
히카루와 사이가 동시에 바둑판을 응시했다. 그 때 소년이 바둑판 위로 뭔가를 올려놓았다.
“난 너같은 애를 기다렸어. 이것을 풀 수 있다면 경품으로 이걸 줄게.”
“네?”
소년이 바둑판 위에 올려놓은 것은 맑게 빛나는 백돌 한 개였다. 히카루가 백돌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고개를 기울이자, 소년이 말했다.
“이것은 우리 집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바둑알이지. 혹시 혼인보 슈우사쿠라고 알고 있니?”
“어! 알아요!”
소년의 입에서 혼인보 슈우사쿠의 이름이 나오자 사이가 몸을 떨었다. 사이는 뒤늦게 바둑알의 정체를 확인하곤 비명을 질렀다.
[저 바둑돌은!]
“응? 사이는 저게 무슨 바둑돌인지 알아?”
[알다마다요! 저것은 혼인보 슈우사쿠가 사용하던 바둑알이에요! 다른 자는 알 수 없겠지만 저는 확실하게 저것을 구분할 수 있어요!]
사이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히카루는 혼인보의 바둑알을 이 각도 저 각도에서 살펴보다가 혼잣말 식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보기엔 그냥 보통 바둑알같은데…”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히카루. 저건 혼인보 슈우사쿠와 나의 증표랍니다.]
“증표라고?”
[네. 우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저 돌과 함께 했어요. 언제나 아침이면 혼인보 슈우사쿠가 저 돌을 혀 위에 올려놓고 제게 다가와…]
“다다다다다다, 닥쳐! 나, 난… 저 문제 안 풀어!”
[앗! 너무해요, 히카루!]
사이가 울음을 터뜨렸지만, 히카루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소년이 올려놓은 혼인보 슈우사쿠의 바둑돌은 단지 사이와 히카루의 분위기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주변에 모여있던 모든 어른들의 눈에 이채가 어리며 볼에 욕심이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어른들 중 한 명이 천천히 다가와 혼인보의 바둑돌에 손을 내밀었다.
“이게 바로…”
탁!
소년은 바둑돌을 만지려던 손을 가볍게 때리더니 냉담하게 말했다.
“먼저 문제를 푸세요. 이 돌은 문제를 풀 수 있는 자만이 주인의 자격을 얻을 수 있어요. 잊지 마세요. 문제를 풀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뿐이에요.”
“좋아. 이 돌은 내가 갖겠어. 문제를 풀어주지.”
바둑돌을 만지려던 사내는 팔을 걷어붙이며 히카루를 밀쳤다. 그리고 흑돌을 들어 문제가 놓여진 판으로 접근했다. 그 순간,
“그걸 당신이 할 수 있단 말이냐!”
이제껏 미소를 지으며 구경했던 작달만한 체구에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인이 눈을 부릅뜨며 사내를 밀쳤다. 동시에 구레나룻의 아저씨가 몸을 일으키며 위협적인 어조로 외쳤다.
“만약 우리가 실패해서 잡상인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하지?”
소년이 움찔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가문의 보물인 혼인보의 바둑알이 한낱 경매품으로 전락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기 싫었다. 소년은 기대에 어린 눈을 히카루에게 돌렸지만 가볍게 외면당했다. 그 때 덥수룩한 수염의 중년인이 살인이라도 저지를 듯 눈을 부라리며 호통쳤다.
“난 죽기 전에 이 돌이 너희들 손에 들어가는 것은 못 봐!”
얌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매력적인 청년 한 명이 그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쉬며 외면했다. 그 곁에 있던 백발의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에 모였던 다수의 어른들은 일시에 몸을 일으키며 서로를 향해 욕설을 뱉기 시작했다. 묘수풀이 동네 주변은 삽시간에 소음과 혼란과 분노로 가득 찼다.
“너희들은 아무도 못 믿어!”
“다들 모르겠어? 우리가 이렇게 다투는 동안, 잡상인은 돈을 끌어 모으고 있을 거라고!”
“아무도 풀 수 없어! 너희들은 허접일 거야!”
모두가 일어서서 떠들던 와중에 히카루는 불안한 표정으로 혼인보의 바둑돌을 응시했다. 바둑돌이 분노의 기운에 휘말려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주변에서 싸움을 벌이는 모든 자들을 비추기 시작했다. 바둑돌에 비친 동네 사람들의 모습은 곧 불길에 휘감겼다. 히카루는 불안에 떨며 바둑돌을 노려봤다. 타오르듯 일렁거리는 바둑돌의 영상이 히카루에게 조소를 보냈다. 히카루는 일어서며 외쳤다.
“제가 풀겠어요!”
사람들은 듣지 못한 채 여전히 떠들었다. 히카루가 다시 외쳤다.
“제가 풀게요!”
제일 먼저 히카루의 외침을 들었던 노인이 올 것이 왔다는 듯 서글픈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뒤늦게 히카루의 목소리를 들었던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침묵했다. 히카루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비록… 푸는 법은 모르지만요.”
그러자 노인이 손을 들어 부드럽게 히카루의 어깨를 짚었다.
“네가 이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마, 신도우 히카루. 네가 풀 수 있을 때까지…”
“내, 내 이름은 어떻게…”
노인이 눈을 부라려서 히카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때 소년이 다급하게 외쳤다.
“훈수는 안됩니다!”
히카루가 당황하며 노인과 소년을 번갈아 돌아봤다. 그 때 매력적인 청년이 히카루를 향해 미소지으며 말했다.
“내 목숨을 걸고 저 소년의 감시망을 돌려주겠네.”
청년은 히카루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을 이었다.
“맹세하지. 내 노래가 자네를 수호할 거야.”
동시에 곁에 있던 장발의 미청년이 히카루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그리고 내 춤이 널 지킬 거야.”
잠시 침묵하던 덥수룩한 수염의 중년인도 한 마디 거들었다.
“그리고 내 자지도. -_-??”
히카루는 용기를 얻고 자리에 앉았다. 소년이 눈을 부릅뜨며 노인과 히카루를 노려봤다. 절대로 한눈을 팔지 않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소년은 말했다.
“자. 시작해요. 만약 훈수를 두는 것이 걸린다면 그 순간 게임은 끝입니다.”
히카루가 바둑돌을 들어 묘수풀이 문제를 향해 접근했다. 그와 동시에 매력적인 청년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팥죽”
노래와 함께 미청년이 분신술을 펼치며 국민체조의 팔다리 운동과 흡사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소년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핏덩이를 억지로 삼켜가며 히카루의 수에 집중했다. 또한 끊임없는 곁눈질로 노인을 노려보며 훈수의 싹을 잘랐다. 히카루가 고민하고 있을 때, 매력적인 청년이 목소리를 깔았다.
“머쉬룸, 머쉬룸.”
“푸업!”
바둑판이 단숨에 피천지가 되었다. 덥수룩한 수염의 중년인이 그걸 꺼내 보였기 때문이다. 소년은 눈이 뒤집히는 것을 간신히 억제하면서도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해 비틀거렸다. 하지만 소년의 눈은 여전히 히카루와 노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매력적인 청년이 가진 매력을 몽땅 팽개치고 대단히 느끼한 표정을 지으며 주둥이를 내밀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징그러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쑤눼에이크! 쑤눼에이크!”
덥수룩한 수염의 중년인 것이 뱀처럼…
“으아아아아아아악!”
소년은 결국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성을 터뜨렸다. 사방에 피가 난무하고 있었다. 그 틈에 노인이 잽싼 동작으로 히카루의 귀에 뭐라뭐라 속삭였다. 이제껏 춤과 노래를 즐겁게 구경하던 사이가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이 영감의 훈수가 맞아요, 히카루. 거기에 놓으시면 풀 수 있을 거예요.]
“아 참. 너도 있었지?”
히카루가 안심하며 힘껏 바둑돌을 내려놓으려 했다. 그 순간,
“첫수는…”
탁!
“여기야.”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 꽁초가 바둑판의 한 점에 내리꽂혔다. 노래는 그치고 춤도 멈췄으며 그것은 들어갔다. -_-;; 히카루는 긴장된 표정으로 뜻밖의 인물을 응시했다. 키모노를 입은 녀석이 느끼한 미소를 짓다가 눈을 부릅떴다.
“그만둬. 바둑같은 건 따분하다고.”
문제를 냈던 소년이 입에서 쏟아지는 피를 억지로 수습하며 외쳤다.
“무슨 짓이야!”
“크크크…”
손가락을 퉁겨 꽁초를 던진 녀석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돌멩이로 땅따먹기라니 너무 시시해. 장기가 훨씬 재미있다구! 뭐가 혼인보 슈우사쿠냐? 그깟 녀석, 나한테도 진 시시한 녀석이야.”
“네가 몇 살인데…”
히카루가 불평하듯 중얼거렸다. 그 때 사이가 긴장하며 히카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히카루… 조심하세요. 보통 녀석이 아니에요.]
“뭐?”
[이 아이가 던진 꽁초… 헤이안 시대의 대마초예요.]
히카루가 흠칫하며 눈을 치켜 떴다.
7국 끝
잡담: 7국부터 마니악한 레벨로 올라갑니다.(8국은 더 심각해지고요) 상당히 다양한 부분의 패러디로 이어지기 때문에 끼리끼리 놀자는 글로 변해버렸을 거예요. 죄송합니다. ^^;;
레디 오스 성화 올림
다 좋은데 그것... 이 직접적으로... 푸헉. 그것도 그렇지만 뭡니까!? 이거 후속을 쓰시다니!!!!!!
답글삭제8국도 있어요. -ㅅ-;;
답글삭제.......오오 이 전설의 물건이 부활하는구요;
답글삭제묵시강호에 이어 이것도;;
답글삭제묵시강호는...(덜덜덜)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