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은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이는 놈이 입고있는 옷이 헤이안 시대의 복색 임을 알고 긴장했다. 그보다 더 사이를 긴장시키는 것은…….
[이 놈… 7국 때 뒷 얘기 생각 안 해서 꽁초라고 말해버리긴 했지만…]
사이는 바둑판 위에 짓이겨진 대마초를 노려보며 입술을 떨었다.
[저 장초를 아무렇지도 않게 버렸다. 이 자는 또 뭐지?]
놈이 다시 외쳤다.
“뭐가 혼인보 슈우사쿠냐! 그깟 녀석, 이미 나한테 진 시시한 놈이라구!”
[라는 건 나한테 이겼다는 얘긴데… 누구더라?]
“믿는 거냐, 이 놈 말을?!”
이어지는 내용
히카루가 사이를 향해 고함쳤다. 그 때 문제풀이 소년이 바둑돌을 정리하며 말했다.
“가가는 예전에 혼인보 슈우사쿠가 있는 바둑도장에 다녔어. 지금은 장기부지만…….”
“너, 너도 헤이안이냐!”
“요즘 혼인보 슈우사쿠를 직접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당연하지!”
“슈우사쿠는 요즘 아마추어 대회에는 나오지를 않으니까.”
“프로 쪽도 안나올 거라고! 아니, 못나온다고!”
“지난 번 어린이 바둑대회에도 나오지 않았고…….”
“내 말 좀 들어! 헤이안에서 왜 어린이 바둑대회 얘기가 나오는 거야!”
“앗! 그러고 보니 넌 그 때 그 대회에서 조언을 했던…”
문제 소년이 뒤늦게 히카루를 알아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히카루는 열이 올랐던 얼굴을 식히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젠장, 나만 낚였군.’ 히카루는 스스로를 질책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젠 내가 미끼를 던져보자. 히카루는 말했다.
“슈우사쿠가 졌다고? 지존급인 걔가 진짜로 졌단 말야?”
옆에서 사이가 초쳤다.
[히카루! 대국을 한 번 해보면 알 것 아녜요. 대국~♡ 대국~♡]
사이의 초에 덧붙여 가가가 코웃음을 쳤다.
“슈우사쿠가 지존? 지랄이다. 내가 강하다!”
[대국~♡ 대국~♤]
“걔가 지존이면 넌 대체 어느 정도의 얼간이냐?”
[히카루! 대마초인데 장초를 끄는 녀석은 내가 단칼에 보내버리겠어요! 대국♡ 대국♧]
“야 얼간이.”
[아잉, 대국♡ 대국◇. 쟤가 슈우사쿠를 이겼다는 건 절 이겼다는 얘기잖아요. 구라라는 걸 당장 증명하고 싶어요, 히카루. 그러니까 대국☆대국♬대국↕대국◉대국☏ 대국♨ 안 하면 전각기호 다 쓰는 수가 있어요?]
놈의 조롱과 사이의 조름 사이에 낑겨서 정신이 없었다.
“아! 더 이상 못 참겠다! 조용히 해!”
히카루는 힘껏 고함을 쳤다가 스스로에게 놀라며 급히 입을 막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사이가 보이지 않았으니 가가에게 성질을 부린 꼴이 된 셈이다. 히카루는 멋쩍게 웃으며 가가의 주먹에 모인 게이지를 응시했다. 저 새끼 스트랭쓰만 올렸다. 크리 뜨면 죽는다! 히카루는 비굴해졌다.
“아, 아니… 저어… 미안.”
“역시 얼간이로군.”
가가는 히카루의 겁먹은 눈을 향해 코웃음을 치곤 문제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야, 츠츠이. 바둑부를 만드는 건 어떻게 돼가니?”
“바둑부?”
히카루가 멍한 얼굴로 츠츠이를 돌아봤지만, 녀석은 묵묵히 바둑판을 정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히카루는 츠츠이의 찡그려진 눈썹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바둑부라니, 무슨 소리야?”
츠츠이를 대신해 가가가 말했다.
“세 명을 모아서 단체전에 참가할 수 있다면 학교가 부로서 인정해준다고 해서 필사적이었잖냐.”
여전히 츠츠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바둑판을 정리했다. 열이 오른 듯 츠츠이의 얼굴 주변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그러고 보니 대마초가 보이지 않는다.
“어때, 츠츠이?” 가가는 능글맞게 웃으며 상체를 들이밀었다. “조건을 들어주면 내가 단체전에 나가줄 수도 있지. 내 바둑 실력은 잘 알고 있겠지? 너보다 백 배는 더 강할 걸, 아마?”
비로소 츠츠이가 가가를 향해 불쾌감을 드러냈다.
“바둑판에다가 대마초나 비벼 끄는 그런 녀석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쳇!” 가가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잘도 지껄이는군. 지난번에 대회에 나가달라고 빌다시피했던 게 누군데.”
츠츠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외쳤다.
“자! 경품을 줄 테니 빨리 꺼져!”
츠츠이가 내민 것은 바둑돌이 아니었다. 가가는 멍한 표정으로 츠츠이가 준 책을 응시했다.
“도우야 명인선 묘수풀이집? 이게 경품이었냐?”
“그건 아니지만 너 따위에게 혼인보 슈우사쿠의 바둑돌을 줄 수는 없어. 그거라도 너에겐 과분할 거야. 너보다 실력 좋은 놈의 이름을 그 책에 적으면 반드시 죽…”
“시시해.”
쫘악!
가가는 단숨에 책을 찢었다. 두 눈에 담긴 분노가 주변을 매섭게 휘감았다. “시시해!” 가가는 찢겨진 책의 조각들이 허공에 맴도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고 염화권(炎火拳)으로 모두 불태웠다. 가가의 분노가 승화된 것일까?
쏴아아아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히카루는 창백한 얼굴이 되어 아직까지 분기를 억누르지 못하는 가가를 응시했다. 그 동안 사이는 책 쪼가리 붙잡고 오열하는 못생긴 놈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시하다고! 내가 말했지? 난 바둑과 도우야 아키라를 증오한단 말야!”
“그런 말 안했…”
“꼬맹이는 시끄러! 뭘 안다고 껴드는 거야? 네가 내 과거를 알아?”
“작가도 궁금해하더라. 대체 뭐야? 도우야 아키라가 도대체 왜 싫은 거야? 이유를 말해봐.”
순간, 가가의 몸을 휘감던 분노가 일시에 사라졌다. 가가는 싸늘한 눈으로 히카루를 흘기며 중얼거렸다.
“이유를 말하라고?” 가가는 코웃음쳤다. “까불고 있네.”
가가는 손을 뻗어 츠츠이의 가슴을 만졌다. 뺨을 맞고는 바둑돌 쪽으로 손이 옮겨졌다. 가가가 쥔 것은 4개의 백돌과 1개의 흑돌이었다.
“이 꼬맹아. 잘 봐라.”
가가는 손바닥 위에 놓인 5개의 바둑돌을 히카루에게 보여줬다. 뭘 하나싶었던 순간, 가가의 손이 빠르게 휘몰아쳤다.
콰콰콰콰콰콰콰!
가가는 5돌-> 5돌 동시에 투척시작-> 손가락으로 허공 찍기-> 허공찍기-> 허공찍기-> 허공찍기-> 악수하고 꼬맹아/잘 봐♡ 말하고 히카루 반응보고 함 씩- 웃기-> 바둑돌에 모인 빗방울 확인-> 불순물 찜-> 바둑통 찜-> 불순물 찜-> 바둑통 찜-> 불순물 찜-> 바둑통 찜->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흑돌 한 개 추가->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바둑돌 올 캐치-> 다시 던져서 올 캐치-> 불순물 찜-> 바둑통 찜-> 허공 찍기-> 바둑통 찜->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흑돌 한 개 추가->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바둑돌 올 캐치-> 다시 던져서 올 캐치-> 허공 찍기-> 흑돌 한 개 추가-> 빗방울 한 방울씩 건드리기 -> 바둑통 뚜껑 한 번 닫아보기-> 흑돌 한 개 추가-> 올 캐치-> 한숨하기-> 표정관리-> 흐트러진 머리칼 추스르기-> 백돌 한 개 다른 쪽으로 던지기-> 손가락으로 퉁겨서 다른 데로 보내기-> 또 퉁겨서 방향 바꾸기-> 또 퉁겨서 방향 바꾸기-> 또 퉁겨서 방향 바꾸기-> 나무 깎아서 새 바둑통 만들기-> 바둑통 찜-> 흑돌 한 개 누르기-> 흑돌 한 개 누르기-> 흑돌 8개까지 꺼내기 완료-> 흑돌 꺼내기 작업 계속->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모인 빗방울 확인-> 첫 번째 바둑통 위치에서 여백 공간 없도록 대각선 맞춰 바둑판 생산-> 바둑통 찜-> 불순물 찜-> 바둑통 찜-> 불순물 찜-> 날려보낸 흑돌 어디까지 갔나 흘끗 함 보기-> 히카루 노려보기-> 표정 추스르기-> 바둑통 찜->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흑돌 한 개 더 추가->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바둑알 올 캐치-> 다시 던져서 올 캐치-> 불순물 찜-> 드디어 불순물 처리통 생산-> 바둑통 찜->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흑돌 한 개 또 추가->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바둑알 올 캐치-> 다시 던져서 올 캐치-> 그중 불량한 바둑돌 3개 추려 불순물 통에 넣기-> 새 바둑통과 바둑판이 딱 붙어있나 눈으로 함 재보기-> 빗방울 한번씩 건드리기-> 흑돌 하나 추가-> 아까 날린 흑돌 다른 쪽으로 퉁기기-> 또 퉁겨서 다른 데로 보내기-> 또 퉁겨서 방향 바꾸기-> 또 퉁겨서 방향 바꾸기-> 또 퉁겨서 방향 바꾸기-> 첫 번째 고급 바둑판 만들기-> 바둑통 찍기-> 바둑알 올 캐치-> 다시 던져서 올 캐치-> 아앗, 슈우사쿠의 바둑판 발견하고 표정 관리를 했다.
“하고싶은 게 대체 뭐야!”
히카루가 참지 못하고 고함치는 순간, 허공을 맴돌던 바둑알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가가는 주먹 쥔 두 손을 히카루 앞에 내밀며 비릿하게 웃었다.
“어느 쪽? 돌들이 어느 쪽 손에 있지? 맞추면 말해주겠어.”
“이걸 위해서 그 짓 한 거냐……. 대체 바둑통이랑 바둑판은 왜 만든 거야?”
“크큭. 훼이크인 것이지. 자, 어서 맞춰봐. 만약 못 맞추면 바둑판 대신 네 손바닥에다가 대마초를 꺼주마.”
히카루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가가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한 옆에서 [지금은 그만두는 게 좋겠어! 저 녀석에겐 그분의 포스가 느껴진다고!]라며 반말 찍찍해대는 사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히카루는 가가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후회는 않겠지?”
“흥! 내가 후회 따위를 하려고 1,308글자나 되는 짓을 했겠냐?”
“어리석은 녀석.” 히카루는 가가의 왼손으로 힘껏 자신의 손을 뻗으며 외쳤다. “내가 믿는 신은 테페리다!”
텁!
자신감이 어린 히카루의 미소. 그러나 그와 비슷한 미소가 가가에게도 있었다. 뒤늦게 긴장하는 히카루의 가슴 앞으로 가가는 천천히 왼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펼쳐진 가가의 왼손에는 바둑돌이 없었다.
“크윽!”
히카루가 울상이 되어 한 발 물러섰을 때, 가가는 빙긋 웃으며 오른손도 마저 펼쳤다. 놀랍게도 가가의 오른손마저 바둑돌이 보이지 않았다. 가가는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하! 놀려먹기엔 딱인 녀석이네! 바둑같은 건 진작에 집어치고 장기나 두러가자! 내가 한 수 가르쳐 주겠다!”
“잠깐!” 히카루가 화냈다. “왼쪽 손바닥에 붙어있는 얼굴은 뭐야? 바른대로 말해! 걔가 바둑돌을 먹은 거지?”
움찔.
“아니다.”
“그런데 왜 움찔한 건데! 이 구라쟁이! 너한테 배울 거라면 평생 장기같은 건 안 배우겠어!”
“뭐라고?”
“슈우사쿠를 이겼다고? 뻔하지! 지금같은 속임수였겠지 뭐. 아니면 슈우사쿠가 진짜 실력으로 뒀던 거던가!”
“진짜 실력으로 뒀다고?”
“그래! 슈우사쿠는 진짜 실력으로 두면 허접이야! 솔직히 말해. 넌 바둑에서 퇴출당해 장기로 도망간 거 아냐? 내 말이 맞지?”
그 순간 가가의 얼굴이 굳었다. 히카루는 속으로 ‘아아, 저 놈을 헤이안 시대놈으로 인정하고 말았다. 확실히 낚였어.’라며 좌절 중이었다. 가가는 히카루를 매섭게 노려보다가 츠츠이를 옆으로 밀치며 의자를 당겼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앉아라. 내 실력을 보여주겠다.”
[꺄♡ 대국이다♡]
가가의 앞에 마주한 히카루는 일그러진 얼굴로 주먹을 떨었다. 앞에 놓인 바둑판 위를 가가가 팔뚝으로 쓸자, 빗방울이 일제히 흩어졌다. 히카루는 신이 나서 춤을 추는 사이에게 말했다.
‘넌 두지 마. 내가 할 거야.’
[엣! 말도 안돼요!]
사이가 창백한 얼굴로 히카루를 돌아봤다.
‘앞으로도 내가 둘 거야. 넌 이제 두지 마. 이놈은 내가 직접 쓰러뜨리겠어!’
[니막 즐쳐드셈! 그 실력으로는 칸쵸메도 이길 수 없어요!]
‘그래도 내가 둘래! 이런 놈은!’
사이가 히카루의 목을 조르며 울부짖었다.
[으앙, 히카루! 저보고 바둑두지 말라는 소리는 죽으란 소리라고요! 내가 둘래요! 내가 둘래요!]
‘넌 이미 죽었잖아!’
[앙앙! 제가 둘래요! 제가 둘래요!]
‘시끄러! 내가 둘 거야! 정 바둑두고 싶으면 환생카드 써!’
[아앙, 히카루! 갑자기 쌩뚱맞게 왜 지랄이에요! 그날이세요?]
‘난 남자라고!’
[엘프도 하더만, 남자라고 못할까. 아무튼 내가 두게 해주세요!]
그 때 가가가 부채를 펼치며 외쳤다.
“어서 둬! 내가 지면 무릎을 꿇고 채찍으로 맞던지 하여튼 뭐든 다 할 테니까! 하지만 네가 지면 이 겨울에 홀딱 벗고 풀장에 뛰어들어가야 할 각오쯤은 해야 될 거다!”
“윽. 홀딱 벗고 풀장?”
당황하는 히카루의 뒤에서 사이가 표정을 굳혔다.
[역시 헤이안의 놈이 틀림없어요. 그 시대에 유행하던 룰이거든요. 대체 누구지? 그 시대의 강자 중에서 내가 못 본 놈은 ‘내기바둑 헌터 D'밖에 없는데…….]
‘아무튼 비까지 내린 한겨울에 홀딱 벗고 풀장에 들어갈 생각은 없으니 네가 둬.’
“뭐냐, 벌써부터 겁이 나는 거냐?”
능글맞게 웃는 가가를 향해 히카루가 눈알을 부라렸다. 아무리 헤이안 시대의 놈이라고 해도 사이가 두는 것이라면 절대로 지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사이!’
[17의 4 소목!]
히카루의 일수가 바둑판을 향해 힘껏 날아들었다.
톡.
“뭐야? 그 어색한 손놀림은!”
“손놀림이 무슨 상관이야?”
“너 완전히 초짜 아냐?”
불평하는 가가의 뒤에서 츠츠이가 중얼거렸다.
“초보가 아냐. 저 수는 ‘광마신격류(狂魔神格類)’의 ‘마도행마(魔道行馬)’다.”
“시끄러! 첫 수에 그걸 알아보는 놈이 어디 있어?”
“아, 빨랑 둬!”
“너같은 초짜랑 두는 내가 다 한심하다!”
“그런 건방진 소리는 이기고 나서 해!”
가가와 히카루의 바둑돌이 판을 채우기 시작했다. 가가는 힘껏 백돌을 내밀며 인상을 구겼다.
‘너 같은 녀석이 내 마음을 어떻게 알겠냐.’
가가는 악몽같았던 그 때의 일을 떠올렸다. 가가는 장기가 좋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내기장기 헌터 D'로 유명했던 아버지는 아들 ‘데츠오 가가’가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게 싫었다.
“네가 감히 그놈과 겨루겠다고? 웃기지 마라! 넌 어둠을 틈타 애비에게 꽁수를 부리려 한 적도 있었지. 그 때부터 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가가의 머릿속엔 늘 아버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두려웠다. 좋아하는 장기로 천하를 얻고 싶었으나 그 앞엔 언제나 아버지가 가로막고 있었다.
“천하무적은 데츠오 무니사이 단 한 사람. 네가 올라서게 할 수는 없다.”
“으아아아아!”
결국 가가는 장기를 포기하고 바둑계에 입문했다. 그리고 전국의 내기바둑계를 휩쓸었다. 가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천하무적으로 소문났던 혼인보 슈우사쿠를 쓰러뜨린 ‘음양대첩’때였다. 귀신 쫓는 사당으로 유명했던 음양사(陰陽寺)의 일전에서 혼인보 슈우사쿠는 가가에게 대패하고 10번이나 피를 토한 적이 있었다. 그로 인해 최고의 주가를 올릴 즈음, 가가는 마차에 치여 차원이동을 하고 말았다.
“좋아! 이곳에서라면 마음껏 장기를 둘 수 있겠어! 하지만 그 전에 내 실력으로 이곳의 바둑계부터 박살내주지. 크하하!”
가가는 망설임 없이 기원을 찾아갔다. 시골 변두리에 자리잡은 그 기원은 손님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현대 바둑의 수준을 가늠하기 위해 찾아간 것이니 아쉬울 건 없었다. 가가는 제일 강해 보이는 놈을 찾아 한 수 가르침을 청했다. 그리고 30수 만에 불계승을 얻었다.
“크큭! 겨우 이 정도냐? 룰만 달라졌을 뿐이지 실력은 더 형편없군.”
가가의 말에 발끈한 상대가 가르침을 청했지만 역시 박살났다. 가가는 더욱 기세등등한 외침으로 기원의 모두를 조롱했다. 그 때.
턱.
“뭐야?”
누군가가 자신의 앞자리에 앉았다. 무표정한 얼굴.
“흥! 너도 해보자는 거냐? 이 천하의 가가를 이겨보겠다고?”
가가가 코웃음을 치며 상대를 흘기는 순간, 녀석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이곳 기원의 최강자인 도우야 아키라입니다.”
“훗. 네가?”
“데츠오 가가님, 대국이 가능하신지요?”
“좋아. 네가 최강자라면 대국해주지. 얼마 내기를 할까?”
“그것은 제가 답변해드릴 사항이 아닙니다.”
‘이놈은 강하다!’
가가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놈은 여전히 무표정했는데,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몰아치고 있었다. 가가는 자리에 앉으며 바둑돌을 들었다.
“너의 이름이… 도우야 아키라라고?”
“그것은 제가 답변해드릴 사항이 아닙니다.”
“아깐 아키라라며! 나랑 말장난을 하자는 거냐?”
“가가님께서 대국하신 내용은 잘 보았습니다.”
“시끄러! 흑돌을 쥘 건지 백돌을 쥘 건지나 선택해.”
“가가님께서 부탁하신 내용은 제한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무슨 헛소리야? 빨리 돌이나 쥐라고!”
“선택이 가능한 부분에 대해서는 ‘제 홈페이지>마을회관>일반/대국공지>[대국] 흑돌/백돌 선택’을 통하여 알려드리고 있으니 참고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미안하다. 내가 흑 쥘게. -_-”
“대국 진행에 불편을 드린 점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쳇.”
가가는 고개를 저으며 첫 수를 위해 손을 뻗었다. 순간, 놈의 머리에서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났다.
“어억!”
가가는 손등에서 느끼는 지독한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바둑돌을 놓쳤다. 바둑돌은 판 위를 묵묵히 굴러가더니 1의 1에 자리를 잡았다.
“뭐 하는 짓이야!”
가가가 고함을 지르며 놈의 멱살을 잡았다. 놈은 멱살을 잡힌 상태에서 태연하게 돌을 들어 포석을 깔았다.
“수작을 부리다니! 이건 무효야!”
“가가님께서 현재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대국 내 구현된 복구 시스템으로 해결해 드리기 힘든 부분이며…”
“닥쳐! 너, 머리 털어 봐! 그 안에 뭐가 있는 거지?”
가가는 바둑이고 나발이고 모두 때려친 채 놈의 곱슬머리를 마구 뒤적였다. 그러나 46마리의 이와 109개의 서캐를 제외한 그 무엇도 나오지 않았다. 놀랍게도 비듬은 없었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닌지라, 가가는 놈의 머리통을 힘껏 후려치며 외쳤다.
“다시 처음부터 하자고! 난 반칙은 질색이다.”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머리에서 뭔가 번쩍이더니 가가의 손을 나꿔챘다. 가가가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상황은 종료됐다. 어느새 가가는 자신의 손으로 흑돌을 들어 1의 19에 놓아버린 것이다. 비로소 가가는 놈의 수법이 뭔지 깨달았다.
“이 자식! 설마 건곤대나이 행마를?”
얼굴의 3배 면적은 됨직한 곱슬머리. 우울함이 깃든 얼굴. 긴 머리 휘날리며 눈동자를 크게 뜨고 바둑판을 바라보는 상반신뿐인 놈의 여자친구. 가가는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 놈은 누구냐! 이렇게 강한 녀석이 존재할 수 있다니!
“만방입니다. 이곳 기원의 최강자 도우야 아키라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악의 패배였다. 바둑판 위에는 가가의 돌이 단 한 개도 놓여있지 않았다. 덧붙여 가가의 손등은 피투성이가 되어 제대로 들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가가는 부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며 왼손에 OPG를 장착했다. 그리고 소목에 흑돌을 놓으며 말했다.
“덤벼라. 이번에는 지지 않겠다.”
“대국이 종료되었거나 요청을 통해 대국을 신청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대국신청을 해 주십시오.”
“지금 신청하고 있잖아!”
“대국이 종료되었거나 요청을 통해 대국을 신청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대국신청을 해 주십시오.”
“이 자식! 따고 배짱이냐! 매크로 쓰지 말고 혓바닥 풀지 못해? 내가 이길 때까지 넌 이 기원을 못 나가!”
순간, 놈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처음으로 사람다운 얼굴이 되었지만, 가가는 놈에게서 절대로 인간같지 않은 무언가의 포스를 느꼈다. 놈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져줄까?”
“큭!”
“너같은 애송이와 진지하게 싸울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날 형이라 부르면 져주지. 10초 내로 형이라 해라. 8초도 9초도 아닌 10초다. 실력으로 날 이길 생각이었냐? 웃긴다. 오늘은 진짜 너 잘못 걸린 거다.”
가가는 고개를 숙인 채 분노로 떨었다. 스스로에 대한 분노였다. 이렇게까지 무력할 수가! 져줄까? 져줄까라고? 내가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실력이 형편없단 말이냐!
“제기랄…….”
“10초 지났다. 간다. 형 바쁘다. 신의 한수에 다가가야 한다.”
“신의 한수?”
가가가 놀라며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가가는 창백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봤으나, 어디에도 그놈은 없었다. 가가는 oTL했다. 괴물같은 놈! 이런 놈이 있는 한 나는 절대로 최강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가가는 우울한 얼굴로 바둑판을 응시했다. 히카루가 막 8의 11에 돌을 올려놓고 있었다. 뒤늦게 가가는 식은땀을 흘렸다.
‘흠……. 그나저나 이 녀석, 꽤 잘하네?’
신중하게 받아치긴 했지만, 전세는 히카루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리 오래 바둑을 쉬었다고 해도 이런 어린애한테까지 밀린다는 건 믿기 어려웠다. 도우야 아키라라는 녀석만큼이나 강한 놈이 또 있었단 말인가!
[재미있다!]
사이 또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가가와는 달리 입가에 미소가 어린 채 흥분으로 볼이 빨개진 상태였다.
[이 사람… 도우야 아키라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놀려먹는 보람이 있군요! 피를 토하게 만드는 건 식은죽 먹기지만 좀 더 포인트를 모아서 제 필살기인 바오우 자케루가를 써보고 싶어요.]
‘적당히 하고 빨리 끝내.’
히카루는 투덜대면서도 가가의 난감한 표정을 즐기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가의 얼굴은 점점 흑빛이 되었다.
‘어쭈구리! 이거 장난이 아니네… 날 갖고 논다? 이거 내가 몰리고 있잖아.’
[9의 19. 피바람의 전주곡! 꺄♡]
사이가 드디어 초토화를 위한 일격을 명령하는 순간이었다. 히카루의 머릿속에 사이가 아닌 또 다른 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인의 음성! 그것은 약속장소에서 히카루를 기다리다가 지친 아카리의 전음이었다.
‘당신은 거기에 있었습니까?’
“허억! 맞다, 아카리!”
툭!
[아앗! 히카루! 거기가 아니에요!]
“어?”
뒤로 고개를 돌렸다가 실수로 놓은 바둑알은 최악의 위치에 있었다. 히카루가 당황하기도 전에 가가의 눈이 번득였다. 가가는 바람처럼 손을 날려 형세의 혈을 찍었다.
“자, 잠깐!”
“잠깐이라고? 시끄러!”
따아악!
“제, 젠장!”
‘당신은 왜 거기에 있습니까?’
“좀 조용해, 아카리! 너 때문에 지게 생겼잖아!”
‘허이짜.’
“아! 좀! 제발!”
최악의 형세였다. 사이는 모아놓은 포인트가 리버의 헛방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기는 싫었다. 저 혈기왕성한 가가의 피로 목욕하고 싶었다! 사이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아카리에게 반쯤 먹힌 히카루의 귀에 속삭였다.
[별 수 없지만 해봐요, 히카루. 12의 15.]
톡.
콰항!
“껙! 역시 아까의 한 수가 치명적이었다!”
이어지는 가가의 수는 형세를 굳히는 막강한 일수였다. 히카루의 폐가 중증 결핵모드로 시스템을 변환시키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자, 돌을 던질래?” 가가의 능글맞은 웃음이 히카루의 폐를 자극했다. “차가운 풀장에서 고추만 내놓기, 잊지 말라고.”
“왜 벌칙이 업그레이드 된 건데!”
[걱정 말아요, 히카루! 내놓으시면 제가 기분 좋게 가려드릴게요.]
“넌 유령이라서 어차피 보인다고! 아니, 안보여도 그런 짓 하지마! 아악! 그런 얘기 자체를 하지 마! 3국 때처럼 공지 뜨면 어쩌려고 그래!”
“미친 거냐? 누구한테 지껄이는 거야? 빨리 돌을 던지시지 그래? 크하하하하!”
히카루의 위기! 앞으로 3수 후면 히카루의 돌들 중 절반이 사라지게 될 상황이었다. 꽈릉! 번개가 쳤다. 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들었다. 하제중학교의 창립축제를 위해 설치된 각종 천막들이 일제히 걷히고 있었다. 모든 장사꾼들이 풀장으로 달려가 새로 천막을 설치하는 중이다. 풀장 앞에는 예전에 없던 대형 스크린도 생기고 이경규가 어슬렁거렸다. 왜 다들 핸드폰을 꺼내는 거냐! 너희 년놈들 말투가… 말투가! 젠장, DC갤 원정군이냐! 위기! 위기!
8국 끝
“가가는 예전에 혼인보 슈우사쿠가 있는 바둑도장에 다녔어. 지금은 장기부지만…….”
“너, 너도 헤이안이냐!”
“요즘 혼인보 슈우사쿠를 직접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당연하지!”
“슈우사쿠는 요즘 아마추어 대회에는 나오지를 않으니까.”
“프로 쪽도 안나올 거라고! 아니, 못나온다고!”
“지난 번 어린이 바둑대회에도 나오지 않았고…….”
“내 말 좀 들어! 헤이안에서 왜 어린이 바둑대회 얘기가 나오는 거야!”
“앗! 그러고 보니 넌 그 때 그 대회에서 조언을 했던…”
문제 소년이 뒤늦게 히카루를 알아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히카루는 열이 올랐던 얼굴을 식히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젠장, 나만 낚였군.’ 히카루는 스스로를 질책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젠 내가 미끼를 던져보자. 히카루는 말했다.
“슈우사쿠가 졌다고? 지존급인 걔가 진짜로 졌단 말야?”
옆에서 사이가 초쳤다.
[히카루! 대국을 한 번 해보면 알 것 아녜요. 대국~♡ 대국~♡]
사이의 초에 덧붙여 가가가 코웃음을 쳤다.
“슈우사쿠가 지존? 지랄이다. 내가 강하다!”
[대국~♡ 대국~♤]
“걔가 지존이면 넌 대체 어느 정도의 얼간이냐?”
[히카루! 대마초인데 장초를 끄는 녀석은 내가 단칼에 보내버리겠어요! 대국♡ 대국♧]
“야 얼간이.”
[아잉, 대국♡ 대국◇. 쟤가 슈우사쿠를 이겼다는 건 절 이겼다는 얘기잖아요. 구라라는 걸 당장 증명하고 싶어요, 히카루. 그러니까 대국☆대국♬대국↕대국◉대국☏ 대국♨ 안 하면 전각기호 다 쓰는 수가 있어요?]
놈의 조롱과 사이의 조름 사이에 낑겨서 정신이 없었다.
“아! 더 이상 못 참겠다! 조용히 해!”
히카루는 힘껏 고함을 쳤다가 스스로에게 놀라며 급히 입을 막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사이가 보이지 않았으니 가가에게 성질을 부린 꼴이 된 셈이다. 히카루는 멋쩍게 웃으며 가가의 주먹에 모인 게이지를 응시했다. 저 새끼 스트랭쓰만 올렸다. 크리 뜨면 죽는다! 히카루는 비굴해졌다.
“아, 아니… 저어… 미안.”
“역시 얼간이로군.”
가가는 히카루의 겁먹은 눈을 향해 코웃음을 치곤 문제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야, 츠츠이. 바둑부를 만드는 건 어떻게 돼가니?”
“바둑부?”
히카루가 멍한 얼굴로 츠츠이를 돌아봤지만, 녀석은 묵묵히 바둑판을 정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히카루는 츠츠이의 찡그려진 눈썹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바둑부라니, 무슨 소리야?”
츠츠이를 대신해 가가가 말했다.
“세 명을 모아서 단체전에 참가할 수 있다면 학교가 부로서 인정해준다고 해서 필사적이었잖냐.”
여전히 츠츠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바둑판을 정리했다. 열이 오른 듯 츠츠이의 얼굴 주변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그러고 보니 대마초가 보이지 않는다.
“어때, 츠츠이?” 가가는 능글맞게 웃으며 상체를 들이밀었다. “조건을 들어주면 내가 단체전에 나가줄 수도 있지. 내 바둑 실력은 잘 알고 있겠지? 너보다 백 배는 더 강할 걸, 아마?”
비로소 츠츠이가 가가를 향해 불쾌감을 드러냈다.
“바둑판에다가 대마초나 비벼 끄는 그런 녀석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쳇!” 가가가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잘도 지껄이는군. 지난번에 대회에 나가달라고 빌다시피했던 게 누군데.”
츠츠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외쳤다.
“자! 경품을 줄 테니 빨리 꺼져!”
츠츠이가 내민 것은 바둑돌이 아니었다. 가가는 멍한 표정으로 츠츠이가 준 책을 응시했다.
“도우야 명인선 묘수풀이집? 이게 경품이었냐?”
“그건 아니지만 너 따위에게 혼인보 슈우사쿠의 바둑돌을 줄 수는 없어. 그거라도 너에겐 과분할 거야. 너보다 실력 좋은 놈의 이름을 그 책에 적으면 반드시 죽…”
“시시해.”
쫘악!
가가는 단숨에 책을 찢었다. 두 눈에 담긴 분노가 주변을 매섭게 휘감았다. “시시해!” 가가는 찢겨진 책의 조각들이 허공에 맴도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고 염화권(炎火拳)으로 모두 불태웠다. 가가의 분노가 승화된 것일까?
쏴아아아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히카루는 창백한 얼굴이 되어 아직까지 분기를 억누르지 못하는 가가를 응시했다. 그 동안 사이는 책 쪼가리 붙잡고 오열하는 못생긴 놈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시하다고! 내가 말했지? 난 바둑과 도우야 아키라를 증오한단 말야!”
“그런 말 안했…”
“꼬맹이는 시끄러! 뭘 안다고 껴드는 거야? 네가 내 과거를 알아?”
“작가도 궁금해하더라. 대체 뭐야? 도우야 아키라가 도대체 왜 싫은 거야? 이유를 말해봐.”
순간, 가가의 몸을 휘감던 분노가 일시에 사라졌다. 가가는 싸늘한 눈으로 히카루를 흘기며 중얼거렸다.
“이유를 말하라고?” 가가는 코웃음쳤다. “까불고 있네.”
가가는 손을 뻗어 츠츠이의 가슴을 만졌다. 뺨을 맞고는 바둑돌 쪽으로 손이 옮겨졌다. 가가가 쥔 것은 4개의 백돌과 1개의 흑돌이었다.
“이 꼬맹아. 잘 봐라.”
가가는 손바닥 위에 놓인 5개의 바둑돌을 히카루에게 보여줬다. 뭘 하나싶었던 순간, 가가의 손이 빠르게 휘몰아쳤다.
콰콰콰콰콰콰콰!
가가는 5돌-> 5돌 동시에 투척시작-> 손가락으로 허공 찍기-> 허공찍기-> 허공찍기-> 허공찍기-> 악수하고 꼬맹아/잘 봐♡ 말하고 히카루 반응보고 함 씩- 웃기-> 바둑돌에 모인 빗방울 확인-> 불순물 찜-> 바둑통 찜-> 불순물 찜-> 바둑통 찜-> 불순물 찜-> 바둑통 찜->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흑돌 한 개 추가->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바둑돌 올 캐치-> 다시 던져서 올 캐치-> 불순물 찜-> 바둑통 찜-> 허공 찍기-> 바둑통 찜->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흑돌 한 개 추가->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바둑돌 올 캐치-> 다시 던져서 올 캐치-> 허공 찍기-> 흑돌 한 개 추가-> 빗방울 한 방울씩 건드리기 -> 바둑통 뚜껑 한 번 닫아보기-> 흑돌 한 개 추가-> 올 캐치-> 한숨하기-> 표정관리-> 흐트러진 머리칼 추스르기-> 백돌 한 개 다른 쪽으로 던지기-> 손가락으로 퉁겨서 다른 데로 보내기-> 또 퉁겨서 방향 바꾸기-> 또 퉁겨서 방향 바꾸기-> 또 퉁겨서 방향 바꾸기-> 나무 깎아서 새 바둑통 만들기-> 바둑통 찜-> 흑돌 한 개 누르기-> 흑돌 한 개 누르기-> 흑돌 8개까지 꺼내기 완료-> 흑돌 꺼내기 작업 계속->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모인 빗방울 확인-> 첫 번째 바둑통 위치에서 여백 공간 없도록 대각선 맞춰 바둑판 생산-> 바둑통 찜-> 불순물 찜-> 바둑통 찜-> 불순물 찜-> 날려보낸 흑돌 어디까지 갔나 흘끗 함 보기-> 히카루 노려보기-> 표정 추스르기-> 바둑통 찜->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흑돌 한 개 더 추가->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바둑알 올 캐치-> 다시 던져서 올 캐치-> 불순물 찜-> 드디어 불순물 처리통 생산-> 바둑통 찜->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흑돌 한 개 또 추가->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허공 찍기-> 바둑알 올 캐치-> 다시 던져서 올 캐치-> 그중 불량한 바둑돌 3개 추려 불순물 통에 넣기-> 새 바둑통과 바둑판이 딱 붙어있나 눈으로 함 재보기-> 빗방울 한번씩 건드리기-> 흑돌 하나 추가-> 아까 날린 흑돌 다른 쪽으로 퉁기기-> 또 퉁겨서 다른 데로 보내기-> 또 퉁겨서 방향 바꾸기-> 또 퉁겨서 방향 바꾸기-> 또 퉁겨서 방향 바꾸기-> 첫 번째 고급 바둑판 만들기-> 바둑통 찍기-> 바둑알 올 캐치-> 다시 던져서 올 캐치-> 아앗, 슈우사쿠의 바둑판 발견하고 표정 관리를 했다.
“하고싶은 게 대체 뭐야!”
히카루가 참지 못하고 고함치는 순간, 허공을 맴돌던 바둑알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가가는 주먹 쥔 두 손을 히카루 앞에 내밀며 비릿하게 웃었다.
“어느 쪽? 돌들이 어느 쪽 손에 있지? 맞추면 말해주겠어.”
“이걸 위해서 그 짓 한 거냐……. 대체 바둑통이랑 바둑판은 왜 만든 거야?”
“크큭. 훼이크인 것이지. 자, 어서 맞춰봐. 만약 못 맞추면 바둑판 대신 네 손바닥에다가 대마초를 꺼주마.”
히카루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가가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한 옆에서 [지금은 그만두는 게 좋겠어! 저 녀석에겐 그분의 포스가 느껴진다고!]라며 반말 찍찍해대는 사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히카루는 가가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후회는 않겠지?”
“흥! 내가 후회 따위를 하려고 1,308글자나 되는 짓을 했겠냐?”
“어리석은 녀석.” 히카루는 가가의 왼손으로 힘껏 자신의 손을 뻗으며 외쳤다. “내가 믿는 신은 테페리다!”
텁!
자신감이 어린 히카루의 미소. 그러나 그와 비슷한 미소가 가가에게도 있었다. 뒤늦게 긴장하는 히카루의 가슴 앞으로 가가는 천천히 왼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펼쳐진 가가의 왼손에는 바둑돌이 없었다.
“크윽!”
히카루가 울상이 되어 한 발 물러섰을 때, 가가는 빙긋 웃으며 오른손도 마저 펼쳤다. 놀랍게도 가가의 오른손마저 바둑돌이 보이지 않았다. 가가는 호탕하게 웃었다.
“크하하하! 놀려먹기엔 딱인 녀석이네! 바둑같은 건 진작에 집어치고 장기나 두러가자! 내가 한 수 가르쳐 주겠다!”
“잠깐!” 히카루가 화냈다. “왼쪽 손바닥에 붙어있는 얼굴은 뭐야? 바른대로 말해! 걔가 바둑돌을 먹은 거지?”
움찔.
“아니다.”
“그런데 왜 움찔한 건데! 이 구라쟁이! 너한테 배울 거라면 평생 장기같은 건 안 배우겠어!”
“뭐라고?”
“슈우사쿠를 이겼다고? 뻔하지! 지금같은 속임수였겠지 뭐. 아니면 슈우사쿠가 진짜 실력으로 뒀던 거던가!”
“진짜 실력으로 뒀다고?”
“그래! 슈우사쿠는 진짜 실력으로 두면 허접이야! 솔직히 말해. 넌 바둑에서 퇴출당해 장기로 도망간 거 아냐? 내 말이 맞지?”
그 순간 가가의 얼굴이 굳었다. 히카루는 속으로 ‘아아, 저 놈을 헤이안 시대놈으로 인정하고 말았다. 확실히 낚였어.’라며 좌절 중이었다. 가가는 히카루를 매섭게 노려보다가 츠츠이를 옆으로 밀치며 의자를 당겼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앉아라. 내 실력을 보여주겠다.”
[꺄♡ 대국이다♡]
가가의 앞에 마주한 히카루는 일그러진 얼굴로 주먹을 떨었다. 앞에 놓인 바둑판 위를 가가가 팔뚝으로 쓸자, 빗방울이 일제히 흩어졌다. 히카루는 신이 나서 춤을 추는 사이에게 말했다.
‘넌 두지 마. 내가 할 거야.’
[엣! 말도 안돼요!]
사이가 창백한 얼굴로 히카루를 돌아봤다.
‘앞으로도 내가 둘 거야. 넌 이제 두지 마. 이놈은 내가 직접 쓰러뜨리겠어!’
[니막 즐쳐드셈! 그 실력으로는 칸쵸메도 이길 수 없어요!]
‘그래도 내가 둘래! 이런 놈은!’
사이가 히카루의 목을 조르며 울부짖었다.
[으앙, 히카루! 저보고 바둑두지 말라는 소리는 죽으란 소리라고요! 내가 둘래요! 내가 둘래요!]
‘넌 이미 죽었잖아!’
[앙앙! 제가 둘래요! 제가 둘래요!]
‘시끄러! 내가 둘 거야! 정 바둑두고 싶으면 환생카드 써!’
[아앙, 히카루! 갑자기 쌩뚱맞게 왜 지랄이에요! 그날이세요?]
‘난 남자라고!’
[엘프도 하더만, 남자라고 못할까. 아무튼 내가 두게 해주세요!]
그 때 가가가 부채를 펼치며 외쳤다.
“어서 둬! 내가 지면 무릎을 꿇고 채찍으로 맞던지 하여튼 뭐든 다 할 테니까! 하지만 네가 지면 이 겨울에 홀딱 벗고 풀장에 뛰어들어가야 할 각오쯤은 해야 될 거다!”
“윽. 홀딱 벗고 풀장?”
당황하는 히카루의 뒤에서 사이가 표정을 굳혔다.
[역시 헤이안의 놈이 틀림없어요. 그 시대에 유행하던 룰이거든요. 대체 누구지? 그 시대의 강자 중에서 내가 못 본 놈은 ‘내기바둑 헌터 D'밖에 없는데…….]
‘아무튼 비까지 내린 한겨울에 홀딱 벗고 풀장에 들어갈 생각은 없으니 네가 둬.’
“뭐냐, 벌써부터 겁이 나는 거냐?”
능글맞게 웃는 가가를 향해 히카루가 눈알을 부라렸다. 아무리 헤이안 시대의 놈이라고 해도 사이가 두는 것이라면 절대로 지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사이!’
[17의 4 소목!]
히카루의 일수가 바둑판을 향해 힘껏 날아들었다.
톡.
“뭐야? 그 어색한 손놀림은!”
“손놀림이 무슨 상관이야?”
“너 완전히 초짜 아냐?”
불평하는 가가의 뒤에서 츠츠이가 중얼거렸다.
“초보가 아냐. 저 수는 ‘광마신격류(狂魔神格類)’의 ‘마도행마(魔道行馬)’다.”
“시끄러! 첫 수에 그걸 알아보는 놈이 어디 있어?”
“아, 빨랑 둬!”
“너같은 초짜랑 두는 내가 다 한심하다!”
“그런 건방진 소리는 이기고 나서 해!”
가가와 히카루의 바둑돌이 판을 채우기 시작했다. 가가는 힘껏 백돌을 내밀며 인상을 구겼다.
‘너 같은 녀석이 내 마음을 어떻게 알겠냐.’
가가는 악몽같았던 그 때의 일을 떠올렸다. 가가는 장기가 좋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내기장기 헌터 D'로 유명했던 아버지는 아들 ‘데츠오 가가’가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게 싫었다.
“네가 감히 그놈과 겨루겠다고? 웃기지 마라! 넌 어둠을 틈타 애비에게 꽁수를 부리려 한 적도 있었지. 그 때부터 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가가의 머릿속엔 늘 아버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두려웠다. 좋아하는 장기로 천하를 얻고 싶었으나 그 앞엔 언제나 아버지가 가로막고 있었다.
“천하무적은 데츠오 무니사이 단 한 사람. 네가 올라서게 할 수는 없다.”
“으아아아아!”
결국 가가는 장기를 포기하고 바둑계에 입문했다. 그리고 전국의 내기바둑계를 휩쓸었다. 가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천하무적으로 소문났던 혼인보 슈우사쿠를 쓰러뜨린 ‘음양대첩’때였다. 귀신 쫓는 사당으로 유명했던 음양사(陰陽寺)의 일전에서 혼인보 슈우사쿠는 가가에게 대패하고 10번이나 피를 토한 적이 있었다. 그로 인해 최고의 주가를 올릴 즈음, 가가는 마차에 치여 차원이동을 하고 말았다.
“좋아! 이곳에서라면 마음껏 장기를 둘 수 있겠어! 하지만 그 전에 내 실력으로 이곳의 바둑계부터 박살내주지. 크하하!”
가가는 망설임 없이 기원을 찾아갔다. 시골 변두리에 자리잡은 그 기원은 손님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현대 바둑의 수준을 가늠하기 위해 찾아간 것이니 아쉬울 건 없었다. 가가는 제일 강해 보이는 놈을 찾아 한 수 가르침을 청했다. 그리고 30수 만에 불계승을 얻었다.
“크큭! 겨우 이 정도냐? 룰만 달라졌을 뿐이지 실력은 더 형편없군.”
가가의 말에 발끈한 상대가 가르침을 청했지만 역시 박살났다. 가가는 더욱 기세등등한 외침으로 기원의 모두를 조롱했다. 그 때.
턱.
“뭐야?”
누군가가 자신의 앞자리에 앉았다. 무표정한 얼굴.
“흥! 너도 해보자는 거냐? 이 천하의 가가를 이겨보겠다고?”
가가가 코웃음을 치며 상대를 흘기는 순간, 녀석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이곳 기원의 최강자인 도우야 아키라입니다.”
“훗. 네가?”
“데츠오 가가님, 대국이 가능하신지요?”
“좋아. 네가 최강자라면 대국해주지. 얼마 내기를 할까?”
“그것은 제가 답변해드릴 사항이 아닙니다.”
‘이놈은 강하다!’
가가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놈은 여전히 무표정했는데,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몰아치고 있었다. 가가는 자리에 앉으며 바둑돌을 들었다.
“너의 이름이… 도우야 아키라라고?”
“그것은 제가 답변해드릴 사항이 아닙니다.”
“아깐 아키라라며! 나랑 말장난을 하자는 거냐?”
“가가님께서 대국하신 내용은 잘 보았습니다.”
“시끄러! 흑돌을 쥘 건지 백돌을 쥘 건지나 선택해.”
“가가님께서 부탁하신 내용은 제한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무슨 헛소리야? 빨리 돌이나 쥐라고!”
“선택이 가능한 부분에 대해서는 ‘제 홈페이지>마을회관>일반/대국공지>[대국] 흑돌/백돌 선택’을 통하여 알려드리고 있으니 참고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미안하다. 내가 흑 쥘게. -_-”
“대국 진행에 불편을 드린 점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쳇.”
가가는 고개를 저으며 첫 수를 위해 손을 뻗었다. 순간, 놈의 머리에서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났다.
“어억!”
가가는 손등에서 느끼는 지독한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바둑돌을 놓쳤다. 바둑돌은 판 위를 묵묵히 굴러가더니 1의 1에 자리를 잡았다.
“뭐 하는 짓이야!”
가가가 고함을 지르며 놈의 멱살을 잡았다. 놈은 멱살을 잡힌 상태에서 태연하게 돌을 들어 포석을 깔았다.
“수작을 부리다니! 이건 무효야!”
“가가님께서 현재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대국 내 구현된 복구 시스템으로 해결해 드리기 힘든 부분이며…”
“닥쳐! 너, 머리 털어 봐! 그 안에 뭐가 있는 거지?”
가가는 바둑이고 나발이고 모두 때려친 채 놈의 곱슬머리를 마구 뒤적였다. 그러나 46마리의 이와 109개의 서캐를 제외한 그 무엇도 나오지 않았다. 놀랍게도 비듬은 없었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닌지라, 가가는 놈의 머리통을 힘껏 후려치며 외쳤다.
“다시 처음부터 하자고! 난 반칙은 질색이다.”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머리에서 뭔가 번쩍이더니 가가의 손을 나꿔챘다. 가가가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상황은 종료됐다. 어느새 가가는 자신의 손으로 흑돌을 들어 1의 19에 놓아버린 것이다. 비로소 가가는 놈의 수법이 뭔지 깨달았다.
“이 자식! 설마 건곤대나이 행마를?”
얼굴의 3배 면적은 됨직한 곱슬머리. 우울함이 깃든 얼굴. 긴 머리 휘날리며 눈동자를 크게 뜨고 바둑판을 바라보는 상반신뿐인 놈의 여자친구. 가가는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 놈은 누구냐! 이렇게 강한 녀석이 존재할 수 있다니!
“만방입니다. 이곳 기원의 최강자 도우야 아키라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악의 패배였다. 바둑판 위에는 가가의 돌이 단 한 개도 놓여있지 않았다. 덧붙여 가가의 손등은 피투성이가 되어 제대로 들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가가는 부러질 정도로 이를 악물며 왼손에 OPG를 장착했다. 그리고 소목에 흑돌을 놓으며 말했다.
“덤벼라. 이번에는 지지 않겠다.”
“대국이 종료되었거나 요청을 통해 대국을 신청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대국신청을 해 주십시오.”
“지금 신청하고 있잖아!”
“대국이 종료되었거나 요청을 통해 대국을 신청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대국신청을 해 주십시오.”
“이 자식! 따고 배짱이냐! 매크로 쓰지 말고 혓바닥 풀지 못해? 내가 이길 때까지 넌 이 기원을 못 나가!”
순간, 놈의 무표정했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처음으로 사람다운 얼굴이 되었지만, 가가는 놈에게서 절대로 인간같지 않은 무언가의 포스를 느꼈다. 놈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져줄까?”
“큭!”
“너같은 애송이와 진지하게 싸울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날 형이라 부르면 져주지. 10초 내로 형이라 해라. 8초도 9초도 아닌 10초다. 실력으로 날 이길 생각이었냐? 웃긴다. 오늘은 진짜 너 잘못 걸린 거다.”
가가는 고개를 숙인 채 분노로 떨었다. 스스로에 대한 분노였다. 이렇게까지 무력할 수가! 져줄까? 져줄까라고? 내가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실력이 형편없단 말이냐!
“제기랄…….”
“10초 지났다. 간다. 형 바쁘다. 신의 한수에 다가가야 한다.”
“신의 한수?”
가가가 놀라며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가가는 창백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봤으나, 어디에도 그놈은 없었다. 가가는 oTL했다. 괴물같은 놈! 이런 놈이 있는 한 나는 절대로 최강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가가는 우울한 얼굴로 바둑판을 응시했다. 히카루가 막 8의 11에 돌을 올려놓고 있었다. 뒤늦게 가가는 식은땀을 흘렸다.
‘흠……. 그나저나 이 녀석, 꽤 잘하네?’
신중하게 받아치긴 했지만, 전세는 히카루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리 오래 바둑을 쉬었다고 해도 이런 어린애한테까지 밀린다는 건 믿기 어려웠다. 도우야 아키라라는 녀석만큼이나 강한 놈이 또 있었단 말인가!
[재미있다!]
사이 또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가가와는 달리 입가에 미소가 어린 채 흥분으로 볼이 빨개진 상태였다.
[이 사람… 도우야 아키라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놀려먹는 보람이 있군요! 피를 토하게 만드는 건 식은죽 먹기지만 좀 더 포인트를 모아서 제 필살기인 바오우 자케루가를 써보고 싶어요.]
‘적당히 하고 빨리 끝내.’
히카루는 투덜대면서도 가가의 난감한 표정을 즐기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가의 얼굴은 점점 흑빛이 되었다.
‘어쭈구리! 이거 장난이 아니네… 날 갖고 논다? 이거 내가 몰리고 있잖아.’
[9의 19. 피바람의 전주곡! 꺄♡]
사이가 드디어 초토화를 위한 일격을 명령하는 순간이었다. 히카루의 머릿속에 사이가 아닌 또 다른 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인의 음성! 그것은 약속장소에서 히카루를 기다리다가 지친 아카리의 전음이었다.
‘당신은 거기에 있었습니까?’
“허억! 맞다, 아카리!”
툭!
[아앗! 히카루! 거기가 아니에요!]
“어?”
뒤로 고개를 돌렸다가 실수로 놓은 바둑알은 최악의 위치에 있었다. 히카루가 당황하기도 전에 가가의 눈이 번득였다. 가가는 바람처럼 손을 날려 형세의 혈을 찍었다.
“자, 잠깐!”
“잠깐이라고? 시끄러!”
따아악!
“제, 젠장!”
‘당신은 왜 거기에 있습니까?’
“좀 조용해, 아카리! 너 때문에 지게 생겼잖아!”
‘허이짜.’
“아! 좀! 제발!”
최악의 형세였다. 사이는 모아놓은 포인트가 리버의 헛방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기는 싫었다. 저 혈기왕성한 가가의 피로 목욕하고 싶었다! 사이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아카리에게 반쯤 먹힌 히카루의 귀에 속삭였다.
[별 수 없지만 해봐요, 히카루. 12의 15.]
톡.
콰항!
“껙! 역시 아까의 한 수가 치명적이었다!”
이어지는 가가의 수는 형세를 굳히는 막강한 일수였다. 히카루의 폐가 중증 결핵모드로 시스템을 변환시키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자, 돌을 던질래?” 가가의 능글맞은 웃음이 히카루의 폐를 자극했다. “차가운 풀장에서 고추만 내놓기, 잊지 말라고.”
“왜 벌칙이 업그레이드 된 건데!”
[걱정 말아요, 히카루! 내놓으시면 제가 기분 좋게 가려드릴게요.]
“넌 유령이라서 어차피 보인다고! 아니, 안보여도 그런 짓 하지마! 아악! 그런 얘기 자체를 하지 마! 3국 때처럼 공지 뜨면 어쩌려고 그래!”
“미친 거냐? 누구한테 지껄이는 거야? 빨리 돌을 던지시지 그래? 크하하하하!”
히카루의 위기! 앞으로 3수 후면 히카루의 돌들 중 절반이 사라지게 될 상황이었다. 꽈릉! 번개가 쳤다. 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들었다. 하제중학교의 창립축제를 위해 설치된 각종 천막들이 일제히 걷히고 있었다. 모든 장사꾼들이 풀장으로 달려가 새로 천막을 설치하는 중이다. 풀장 앞에는 예전에 없던 대형 스크린도 생기고 이경규가 어슬렁거렸다. 왜 다들 핸드폰을 꺼내는 거냐! 너희 년놈들 말투가… 말투가! 젠장, DC갤 원정군이냐! 위기! 위기!
8국 끝
으샤으샤. 링크 신고합니다~
답글삭제오케! 스스로 와서 잡히셨다! 아싸.
답글삭제덥썩!
답글삭제발랑~!
답글삭제.......[기절]
답글삭제마천루였나요; 커그였나요, 그때 연재 재밌게 읽었었는데 다시보니 반갑네요... 이수영씨의 ****반지랑 같이 괴작으로 손꼽혔지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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