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썰매…”
“응? 눈썰매가 타고싶어? 이제 저녁이 다 되어 가는데 그만 집에 가자, 유진아.”
“싫어. 눈썰매 타고싶어.”
“음… 한 번만 타면 금방 끝날텐데? 그럼 재미없잖니. 그러지 말고 오늘은 집에 가자. 아빠가 다음주 일요일에 다시 데려와서 눈썰매 태워줄게.”
“히잉… 싫어어…”
이어지는 내용
갑작스럽게 고집을 부리는 유진이의 울상 진 얼굴이 아빠를 난처하게 만들었어요. 아빠는 잠깐 하늘을 바라보다가 곧 빙긋 웃으며 유진이를 번쩍 들어올렸답니다. 그리고 어깨에 태워 주었죠.
“그래. 알았다. 우리 눈썰매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신나게 놀자.”
“히히히히.”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있었던 유진이는 어느새 방긋 웃으며 두 손으로 아빠의 머리를 꼬옥 잡았어요. 아빠는 유진이를 어깨에 올려놓은 채 눈썰매장으로 신나게 달려갔답니다.
*
“…….”
“선생님… 유진이는 괜찮은 거예요?”
“아직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심한 것 같군요. 현재로서는 언제 깨어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 부탁이에요! 유진이를 꼭 좀 살려주세요.”
유진이의 엄마는 의사선생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애원을 했어요. 남편을 잃은 상황에서 이제 남아있는 소중한 가족은 유진이뿐이었어요. 엄마는 곱게 잠들어있는 유진이의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슬픔을 이기지 못해 얼굴을 찡그렸어요. 뒤에서 의사선생님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아마도 시각적인 효과 때문에 정신적 충격이 강했을 겁니다. 눈밭 위에서 사고를 당했던 만큼 붉은 피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을 것이고, 그것은 7살짜리 여자애가 가지고 있는 여린 감정이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었겠죠.”
“선생님, 흐윽! 저한테는 이제 유진이뿐이에요. 제발 유진이 좀 살려주세요, 허엉엉엉엉!”
“뇌파검사가 나오는 대로 최선의 조치를 취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선은 아주머니께서도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유진이가 깨어날 때를 위해서라도 이러시면 안됩니다. 나중에 깨어났을 때 아주머니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면 유진이의 정신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어요.”
“허어어어어엉!”
유진이는 발그레한 얼굴로 아무런 표정도 없이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것만 같았어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예요.
*
“꺄아아아아! 아빠! 살려줘요!”
유진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죽어라 달리고 있었답니다. 유진이의 뒤에서 검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소복의 여인이 입가에 피를 흘리며 쫓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유진이가 달려가는 곳은 옆집 뚱보 기석이네의 옥상이었어요. 유진이는 기석이네 옥상구석까지 도망쳤다가 재빨리 털보할아버지 집 장독대로 뛰어내렸어요.
“…….”
손톱이 손가락보다도 길어 보이는 소복 입은 여자가 기석이네 옥상에서 소름끼치는 눈으로 장독대의 유진이를 내려다보았어요. 유진이는 너무나 무서워서 커다란 장독 뒤로 숨어버렸죠. 장독 틈으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어 여자가 있는 곳을 바라본 유진이는 덜덜덜 떨기 시작했어요. 그 소복 입은 여자가 장독대 위로 뛰어내리고 있었거든요.
“아빠아… 무서워…”
유진이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아빠를 찾아보았지만, 항상 옆에 계시던 아빠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 때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유진이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어요.
“여기 있었네. 호호호호호!”
“꺄악!”
고개를 든 유진이는 비명을 질렀어요. 입가에서 빨간색 피를 뚝뚝 떨어뜨리는 그 여자가 장독 뚜껑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지 않겠어요? 여자의 까맣고 기다란 머리카락이 유진이의 옆으로 찰랑거리며 좌우를 막아버렸답니다. 세상이 온통 어두워졌어요. 보이는 것은 그저 소름끼치는 여자의 얼굴밖에 없었어요. 유진이는 계속 비명을 지르면서 눈물을 흘렸답니다.
“아빠아아아아……!”
“얘야.”
“아빠아아!”
“얘. 얘. 괜찮니?”
“아빠앗!”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서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유진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통나무로 만들어진 세모꼴의 천장이었답니다. 유진이는 흠뻑 젖은 눈을 돌려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아저씨를 보았어요.
“괜찮아? 무서운 꿈을 꾸었나보구나.”
“…….”
유진이는 아저씨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주변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어요. 생소한 통나무집이었어요. 어둑한 분위기에 고동색 나무들로 엉성하게 벽을 만든 집이었답니다. 놓여진 가구라고는 네모난 나무탁자와 커다란 침대 하나, 유진이가 누워있는 작은 침대뿐이었어요. 아저씨가 정성스럽게 껍질을 깎은 사과를 내밀자, 유진이는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아저씨는 누구세요?”
“녀석. 그걸 묻기 전에 땀이라도 좀 닦거라. 무슨 꿈을 꾸었기에 그렇게 땀을 흘렸냐.”
아저씨는 사과를 유진이의 손에 쥐어 주었어요. 그리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유진이의 이마에 덮어 주었어요. 유진이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했답니다. 그리고 아저씨의 눈치를 보며 손수건으로 이마와 얼굴을 닦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유진이는 금세 손수건을 팽개쳤어요. 유진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아저씨를 향해 볼멘 소리로 말했죠.
“냄새나요. 너무 지독해.”
“으응? 그, 그래? 이상하다. 코도 몇 번 안 풀었는데…….”
“와악! 코푼 수건이었어요? 너무해요! 더러워!”
“미안미안. 자, 자아… 깨끗이 닦을 테니 화내지 말아라.”
아저씨는 유진이를 달래듯 눈웃음을 치며 손수건을 자신의 옷에 열심히 문질렀어요. 유진이가 ‘설마’하는 눈으로 아저씨의 행동을 지켜보았습니다. 지켜보는 동안 유진이의 얼굴엔 불안감이 가득했죠. 아니나다를까 아저씨가 옷에 문지른 그 손수건을 다시 유진이의 앞으로 내미는 거예요.
“싫어요! 나 안 닦을 거야.”
유진이가 퉁명스레 말하니까 아저씨는 멋쩍게 웃었어요. 갑자기 유진이는 사과도 먹기 싫어졌어요. 손수건이 그렇게 지저분하니까 틀림없이 아저씨가 깎은 사과도 지저분하겠죠? 유진이는 사과를 슬며시 옆에 내려놓았어요. 아저씨가 잠시 사과를 보고 있어서 유진이의 가슴이 콩콩 뛰었답니다. 혼내시는 게 아닐까? 열심히 깎아주신 사과를 안 먹었으니까 화내실 거야. 유진이가 아저씨의 눈치를 보면서 잔뜩 몸을 움츠렸어요. 하지만 아저씨는 유진이에게 빙긋 웃을 뿐 화를 내지는 않았답니다. 그래서 유진이는 용기를 내어 물었어요.
“근데 여기는 어디예요, 아저씨? 그리고 아저씨는 누구?”
아저씨는 대답대신 살며시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의 무릎을 주물럭거렸어요. 오랫동안 유진이 옆에 무릎을 꿇고 있어서 쑤셨었나 봐요. 아저씨가 말했어요.
“여기는 잠자는 나라란다. 나는 어렸을 때 이곳에 와서 지금까지 사는 사람이지. 내 이름은 벼리란다.”
“잠자는 나라요?”
“그래. 여기는 잠자는 나라야.”
“거짓말… 그런 나라가 어디 있어요? 그리고 여기는 통나무집이잖아요?”
“하하하, 그래. 여기는 통나무집이지. 하지만 아저씨가 어렸을 때 이곳에 살던 예쁜 누나가 나에게 이 집의 이름이 잠자는 나라라고 말해줬단다. 여기는 정말 잠자는 나라야.”
“아저씨가 주인 아녜요?”
유진이는 당연히 이 집의 주인이 지저분한 손수건을 가진 아저씨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닌가 봐요. 아저씨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미소를 지었답니다.
“주인은 없단다. 이 집은 주인이 필요가 없거든. 그냥 살면 되는 거야. 만약 아저씨가 이 집의 주인이 된다면 평생 이곳에서만 살게? 아저씨는 놀러도 다녀보고, 일도 하러 나가보고 해야 할텐데 말야.”
“그냥 주인이 되어도 그럴 수 있잖아요. 아저씨가 주인이 되면 이 집에서 왜 못나가요?”
“집이 슬퍼하잖니? 또 내가 밖으로 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이 집이 오지도 않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고… 무엇보다 이 집에 주인이 있다면 다른 사람은 내 허락이 있어야 들어올 수 있잖겠니. 허락은 집이 내려줘야 하는데 말야.”
“히에… 무슨… 집이 살아있는 것처럼 얘기를 하네요? 아저씨는 조금 이상해요.”
“하하하! 그래, 난 이상한 아저씨란다.”
유진이는 처음으로 벼리라는 아저씨를 향해 방긋 웃었어요. 아저씨가 나쁜 사람 같지 않아서죠. 유진이는 작고 귀여운 발을 뻗어서 침대 아래로 내려갔어요. 그리고 아저씨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채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봤답니다. 예전에 산장공원으로 놀러갔을 때 보았던 통나무집보다는 지저분했지만, 모든 물건들이 유진이의 눈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정돈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나가봐도 돼요?”
“응?”
유진이가 손가락으로 통나무 문을 가리키며 아저씨를 돌아봤어요. 아저씨의 얼굴이 갑자기 굳었답니다. 하지만 아저씨는 곧 유진이를 지나쳐서 문으로 다가갔어요. 그리고 문에 매달린 나무 손잡이를 잡고 말했죠.
“그건 네 자유지만……. 얘야, 이 바깥은 꿈의 나라란다.”
“네? 꿈나라요?”
유진이가 대뜸 반문을 던지네요. 익숙한 이름이긴 했지만, 그것이 공상의 세계라는 것은 유진이도 잘 알고있었어요. 그래서 아저씨가 거짓말로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했답니다. 하지만 아저씨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있어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어요.
“네가 들어온 것도 방금 전의 일이란다. 난 밖에서 비명을 지르는 너를 보고 급히 데리고 들어온 것 뿐이야. 그때의 너는 심한 악몽을 가지고 있었어. 만약 네가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악몽을 가지고 있다면 함부로 이 문을 나가지 않는 게 좋단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아저씨의 굳어진 표정이 무섭다고 생각되었는지 유진이가 귀엽게 뒷짐을 지고서 두 발을 꼬기 시작했어요. 유진이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눈동자만을 들어 아저씨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어요. 누가 봐도 아저씨의 말을 듣지 않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한다는 걸 알 수 있었을 거예요. 아저씨는 할 수 없다는 듯 아까처럼 미소를 얼굴에 담고 유진이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어요.
“꼭 나가고 싶은가 보구나?”
“네, 아저씨.”
“너의 갈 길을 내가 함부로 막을 수는 없지. 어차피 너는 문을 열어야 하거든. 그 대신…”
“네?”
“이 아저씨한테 네 이름을 가르쳐주겠니? 네 이름을…”
“유진이요, 김유진.”
“그래. 예쁜 이름이구나.”
아저씨는 유진이의 볼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환하게 웃었답니다. 그제야 유진이는 마음이 놓였어요.
“그러면 네가 밖에 나갔을 때 않 좋은 꿈을 꾸게 된다면, 아저씨의 이름을 꼭 불러다오. 그땐 아저씨가 꼭 너를 구하러 갈게.”
“아저씨, 이름이 뭔데요?”
“벼리란다. 응? 내가 얘기하지 않았었나?”
“언제 얘기를 했다고 그래요? 아저씨 치매인가 봐.”
유진이가 놀리듯 혀를 날름 내밀었답니다.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저씨를 뒤로 하고, 유진이는 통나무 문의 손잡이를 살며시 열었어요.
띠끼이이이익…….
문이 열리며 바깥의 안개 속 경치가 유진이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답니다.
*
쏴아아아악!
“와아아!”
유진이는 너무 좋아서 함성을 질렀어요. 시원한 바람이 유진이의 머리카락을 마음껏 뒤로 날려주었죠. 그리고 아무도 없는 하얀 눈밭위를 유진이의 몸이 쌩쌩 달리고 있었답니다.
“재미있다아!”
유진이는 너무 신났어요. 비명처럼 크게 고함치면서 하얀 세상 저 편에서 몰려드는 파란색 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답니다. 유진이는 앞에 펼쳐진 넓고도 하얀 세계를 바라보며 이 신나는 세상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뚝.
“어어?”
뚝.
어깨 위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유진이가 살짝 고개를 돌렸죠. 정말로 어깨 위에서 뭔가가… 아주 작은 뭔가가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답니다.
“어어… 꺄아악!”
피였어요. 빨간 피. 마치 눈처럼 하얗던 유진이의 옷이 어느새 빨간 피로 물들어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껏 하얗게만 펼쳐졌던 눈 세상이 시뻘겋게 변하고 있었답니다.
“아아앙… 무서워. 엉엉엉…”
유진이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기 시작했어요.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는데 쉽지가 않네요. 유진이가 타고있던 눈썰매는 더욱 빨리 달렸어요. 어느새 빨간색이 되어버린 바람을 헤치고 시뻘건 눈 위와 새까만 하늘의 구멍 속으로 빨려들 듯 미끄러졌답니다.
“아빠아! 아빠 무서워!”
유진이의 고함소리가 피에 물든 눈 위에 메아리쳤어요. 그러나 아빠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답니다. 처음에는 그저 어두운 밤처럼 검게 물든 하늘이 점차로 핏빛이 되고 있었어요. 그래서 세상은 금세 피로 가득 차 버렸죠. 이제까지 눈밭이라 여겼던 세상은 피바다가 되어서 유진이의 몸을 휘감았어요. 유진이가 비명을 질렀지만, 비명조차 피바다의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답니다.
“엉엉엉…”
사방이 막혀진 공간 같았어요. 유진이의 울음소리가 가까운 벽에서 메아리쳐 돌아오네요. 유진이는 여태껏 감고있었던 눈을 뜨고서 여기가 어디인지를 알아내려 애썼답니다. 그리고,
“꺄아아악!”
유진이는 또다시 비명을 지르고 말았어요. 얼굴, 목, 그리고 등에 빨간 피가 번쩍거리는 아빠의 모습이 보이는 게 아니겠어요? 아빠는 목이 뒤로 돌아간 상태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는 피를 뒤집어쓴 채 쓰러져 있었어요.
“아빠아아아!”
유진이가 비명을 지르며 아빠를 불렀어요. 아빠가 너무나 많이 아플 것만 같았어요. 혹시 죽지는 않았을까 걱정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유진이는 아빠에게 다가가지 못했어요. 아빠의 몸에서 번쩍거리는 빨간 피가 무서웠답니다.
“아빠아아아…”
그저 울기만 했어요. 흐르는 눈물조차 빨간색이 아닐까 겁이 날 정도로 세상은 온통 빨갰어요. 유진이는 주변을 둘러봤답니다. 아빠를 구해줄 다른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사방이 빨간 피로 덮여있는 자그마한 방. 유진이는 이제까지 천장이라고 생각했던 위를 향해서 고개를 들었답니다. 그 순간 유진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어요.
“아빠악!”
천장대신 커다란 눈을 부릅뜬 여자의 거대한 얼굴이 세상을 덮고 있었답니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너무나 소름끼쳤어요. 유진이는 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겁먹은 표정으로 여자의 얼굴을 훔쳐봤어요. 그 때 여자가 입을 길게 찢으며 웃기 시작했답니다.
“호호호호호! 유진이가 여기 있었네?”
여자의 하얀 이에서 빨간 피가 뚝뚝 떨어졌어요. 귀밑까지 죽 찢어진 여자의 큰 입이 소름끼쳤답니다. 얼굴도 무서웠어요. 아까 달려나가던 눈밭처럼 하얘서 핏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 같았죠. 특히 크게 치켜 뜬 눈매 속에 담겨진 보라색 눈동자가 너무 싫었습니다.
“아빠아… 일어나 봐. 귀신이야… 엉엉엉.”
유진이가 떨리는 손과 발을 휘저으며 붉은 피가 반짝거리는 아빠의 곁으로 다가갔어요. 막 아빠의 얼굴을 만지려던 유진이가 감전된 사람처럼 흠칫하며 손을 가슴으로 당겼습니다. 아빠의 얼굴이 놀랍게도 무서운 여자의 얼굴로 변해버린 거예요.
“아, 아악!”
“호호호호호…….”
180도로 머리가 돌아가 버린 상태에서 여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어요. 검은색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진 여자의 머리는 아빠의 머리대신 달라붙어 있었답니다. 유진이는 일어설 엄두도 못 낸 채 두 손과 발을 휘저으며 뒤로 도망쳤어요.
“으. 어. 우우웅. 엉엉엉…”
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답니다. 열심히 뒤로 도망치던 중, 유진이의 등이 푹신한 뭔가에 닿았어요. 급히 고개를 돌린 유진이는 또 한 번 비명을 질렀습니다. 천장에 있던 여자에게서부터 흘러내린 머리카락들이 유진이의 주변을 모두 막고 있었어요.
“으아아앙…”
울었어요. 우는 것 밖에 유진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유진이는 눈을 꼭 감고 머리도 숙인 채 몸을 잔뜩 웅크렸어요. 금세 자신의 뒤에서 소름끼치는 촉감이 느껴질 것만 같았죠. 유진이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듯 온 몸을 떨었습니다.
스적.
마침내 유진이의 등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어요. 그 순간 그곳에서부터 얼음장처럼 서늘한 감각이 몸 전체로 퍼졌죠. 세상 그 무엇보다 차가운 전류가 유진이의 온 몸을 훑어버리는 것만 같았답니다. 유진이가 참지 못하고 또 비명을 질렀어요. 아주 오래.
“아빠아아아아아악!”
“유진아!”
갑자기 들려온 외침이었어요. 유진이는 그것이 통나무집에서 본 아저씨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힘껏 목청을 높여 대답했답니다.
“어! 아, 아저씨!”
“내 이름을 불러! 어서!”
“잊어먹었어요! 악!”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들며 눈을 떴던 유진이가 다시 질끈 감으며 비명을 질렀답니다. 얼굴 바로 앞에 여자의 섬뜩한 얼굴이 있었거든요. 유진이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어요. 눈을 꼭 감은 채 잔뜩 몸을 움츠린 유진이에게 아저씨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습니다.
“생각해봐! 아니면 내 얼굴을 기억하던지!”
“엉엉엉! 아저씨… 무서워요!”
유진이는 아저씨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는 동안, 여자의 이빨이 서서히 자라났어요. 얼마 되지 않아서 모든 이빨이 송곳니처럼 날카롭게 변해버렸답니다. 여자는 커다랗게 입을 벌리며 유진이의 머리를 먹을 듯 다가왔어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유진이는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짐작하고 있었답니다. 꼭 감긴 두 눈 사이에 여자의 입안 가득히 담겨진 빨간 피의 빛깔이 스며들었죠. 유진이는 끊임없이 울었어요. 아저씨의 이름이, 아저씨의 얼굴이, 그리고 통나무집의 모습조차 기억나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여자의 입이 유진이의 머리를 물기 직전에, 한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어요. 아저씨가 내밀었던 지저분한 사과였죠. 그 때 여자의 송곳니가 유진이의 머리에 닿았습니다.
“아아아아악!”
*
“너는 조이의 뒤를 따르려는 것이냐?”
“비극이겠죠. 저 또한 그 분 같은 운명을 맞이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몽계에 간섭하지 말아라. 몽계는 자신만이 선택할 수 있는 세계다. 타인이 간섭하게 되면, 둘 다 조이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
“왜 대답이 없느냐?”
“어린 아이기 때문에… 그저 저 아이가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차마 지켜보기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은 몽계의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순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열쇠를 통해 희망의 문을 열지 못하는 그 아이의 모습. 그게 너무 안타까워서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유진이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답니다. 마치 막 잠에서 깨었을 때, 유진이의 엄마 아빠가 머리맡에서 두런거리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희미한 대화였어요. 유진이는 자기가 지금 현실 속에 들어왔다고 생각했죠. 그저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말예요. 그렇지만 조금 전에 겪었던 무서운 악몽이 진짜 현실이었던 것처럼 강하게 느껴졌답니다. 그 두려움의 기억과 경험이 머리와 가슴에 남아서 유진이의 몸을 떨게 만들었죠. 유진이는 눈을 꼭 감은 채 떨기만 했어요. 눈을 뜨기가 너무 무서웠어요.
“그렇기에 더더욱 너는 저 아이의 꿈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저 아이가 어떤 미래를 가져오건 그것은 저 아이가 스스로 선택을 해야할 문제야. 현실과 꿈의 세계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현실에서는 다른 사람이 누군가에게 도움과 피해를 줄 수 있겠지만, 이곳은 모든 것을 스스로 이루어야 하는 법칙이 있다.”
“…….”
누구의 목소리인지 궁금해서 유진이는 결국 샛눈을 떴답니다. 그 무서운 꿈속에서 자길 도와준 아저씨를 막 혼내는 아줌마가 누군지 보고 싶었어요.
“어? 아저씨? 그 아줌마는 어디 갔어요?”
유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멍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아저씨 주변에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저 아저씨만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꼭 다물고 있었어요. 무척 쓸쓸한 표정이었죠.
“깨어났구나.”
아저씨의 목소리가 참 밝다고 느껴졌어요. 어느새 유진이를 돌아보며 빙긋 웃음 짓는 아저씨의 얼굴은 조금전의 쓸쓸한 표정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상태였답니다.
“나쁜 아이구나. 그 사이에 내 이름을 잊어먹다니. 이번에는 잊어먹지 마라. 내 이름은 벼리야.”
벼리 아저씨가 웃음과 함께 유진이의 이마를 콕 쥐어박았어요. 유진이는 자기 이마를 매만지며 멋쩍게 웃었습니다.
“근데 조금 전에 어떤 아줌마랑 얘기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벼리 아저씨는 대답대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아빠처럼 부드러웠고 조금 전 꿈속의 유진이처럼 조금씩 떨고있는 손이었어요. 벼리 아저씨는 자신의 손이 떨고 있다는 것을 감추려는 듯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아줌마는 꿈지기란다. 유진이가 행복한 꿈을 꾸며 편안하게 잠잘 수 있도록… 그리고 유진이가 꿈에서 깼을 때, 햇살이 보이는 개운하고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아줌마란다.”
“근데 왜 아저씨한테 화를 내요?”
“하하하. 화내지 않았어. 꿈지기 아줌마는 원래 말투가 그래.”
웃음을 터뜨리는 벼리 아저씨의 얼굴이 참 늙어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유진이는 잠깐동안 벼리 아저씨를 할아버지라고 불러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뿐, 유진이는 벼리 아저씨에게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어요.
“벼리 아저씨. 나 집에 가고 싶어요.”
“으… 응? 아. 집에? 그래. 집에 돌아가야지.”
벼리 아저씨가 당황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유진이가 고개를 약간 숙인 상태에서 눈동자만 위로 굴려 눈치를 보자, 벼리 아저씨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답니다. 곧 벼리 아저씨는 유진이의 볼을 두 손으로 쥐면서 미소를 머금었어요.
“유진아…”
“네?”
“친구의 집에서 유진이 집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가야하지?”
“그냥 집에 가죠?”
“우선 친구의 집을 나와야 유진이 집으로 갈 수 있지?”
“예.”
“친구 집의 문을 열고 나가야만 유진이 집으로 갈 수 있는 거야.”
“알아요, 아저씨.”
간단하게 대답해주는 유진이와는 다르게, 아저씨는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답니다. 유진이가 집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 유진이는 저어기 있는 문을 열고 나가서 집으로 돌아가야 할텐데… 꿈의 나라를 지나야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갈 수 있겠니?”
“아저씨가 데려다줘요.”
“아저씨는 유진이 집을 모르는걸? 그리고 이 집에서는 두 명이 같이 나갈 수가 없단다. 둘이 같이 나가면 둘 다 다른 길로 걸어가야 해.”
또 어려운 말을 쓰는 벼리 아저씨. 유진이는 속으로 벼리 아저씨가 자기와 같이 가고싶지 않아서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여태껏 벼리 아저씨에게 느끼고 있던 좋은 감정이 조금 식었어요.
“알았어요. 나 혼자 갈래요.”
유진이는 용기 있게 몸을 일으켰어요. 그런 유진이의 모습을 보고, 벼리 아저씨가 놀란 눈으로 질문을 던졌답니다.
“조금 전에 그렇게 무서운 꿈을 꾸고도 겁나지 않아?”
“꿈인데요 뭐… 밖에는 밤이에요, 아저씨?”
“아니… 밤이고 낮이고는 너에게 달려있겠지.”
또다시 알 수 없는 소리였어요. 유진이는 아저씨가 말릴 틈도 없이 문을 향해서 쪼르르르 달려갔답니다. 그런 유진이의 뒤에서 아저씨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어요.
“집에 가고싶다고 꼭 생각해야 한다. 꼭! 그리고 네가 왜 여기에 왔는지를 기억해!”
“네에!”
유치원에 갈 때 엄마가 던져주는 걱정스런 말투를 건성으로 듣듯, 유진이는 익숙하게 대답한 뒤 통나무집의 문을 열었어요. 그리고 유진이의 앞으로 안개가 자욱한 눈부신 바깥 세상이…….
1회 끝
“그래. 알았다. 우리 눈썰매장이 문을 닫을 때까지 신나게 놀자.”
“히히히히.”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있었던 유진이는 어느새 방긋 웃으며 두 손으로 아빠의 머리를 꼬옥 잡았어요. 아빠는 유진이를 어깨에 올려놓은 채 눈썰매장으로 신나게 달려갔답니다.
*
“…….”
“선생님… 유진이는 괜찮은 거예요?”
“아직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심한 것 같군요. 현재로서는 언제 깨어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 부탁이에요! 유진이를 꼭 좀 살려주세요.”
유진이의 엄마는 의사선생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애원을 했어요. 남편을 잃은 상황에서 이제 남아있는 소중한 가족은 유진이뿐이었어요. 엄마는 곱게 잠들어있는 유진이의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슬픔을 이기지 못해 얼굴을 찡그렸어요. 뒤에서 의사선생님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아마도 시각적인 효과 때문에 정신적 충격이 강했을 겁니다. 눈밭 위에서 사고를 당했던 만큼 붉은 피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을 것이고, 그것은 7살짜리 여자애가 가지고 있는 여린 감정이 감당하기엔 무리가 있었겠죠.”
“선생님, 흐윽! 저한테는 이제 유진이뿐이에요. 제발 유진이 좀 살려주세요, 허엉엉엉엉!”
“뇌파검사가 나오는 대로 최선의 조치를 취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선은 아주머니께서도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유진이가 깨어날 때를 위해서라도 이러시면 안됩니다. 나중에 깨어났을 때 아주머니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면 유진이의 정신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어요.”
“허어어어어엉!”
유진이는 발그레한 얼굴로 아무런 표정도 없이 평온하게 잠들어 있는 것만 같았어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예요.
*
“꺄아아아아! 아빠! 살려줘요!”
유진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죽어라 달리고 있었답니다. 유진이의 뒤에서 검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오는 소복의 여인이 입가에 피를 흘리며 쫓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유진이가 달려가는 곳은 옆집 뚱보 기석이네의 옥상이었어요. 유진이는 기석이네 옥상구석까지 도망쳤다가 재빨리 털보할아버지 집 장독대로 뛰어내렸어요.
“…….”
손톱이 손가락보다도 길어 보이는 소복 입은 여자가 기석이네 옥상에서 소름끼치는 눈으로 장독대의 유진이를 내려다보았어요. 유진이는 너무나 무서워서 커다란 장독 뒤로 숨어버렸죠. 장독 틈으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어 여자가 있는 곳을 바라본 유진이는 덜덜덜 떨기 시작했어요. 그 소복 입은 여자가 장독대 위로 뛰어내리고 있었거든요.
“아빠아… 무서워…”
유진이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아빠를 찾아보았지만, 항상 옆에 계시던 아빠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 때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유진이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어요.
“여기 있었네. 호호호호호!”
“꺄악!”
고개를 든 유진이는 비명을 질렀어요. 입가에서 빨간색 피를 뚝뚝 떨어뜨리는 그 여자가 장독 뚜껑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지 않겠어요? 여자의 까맣고 기다란 머리카락이 유진이의 옆으로 찰랑거리며 좌우를 막아버렸답니다. 세상이 온통 어두워졌어요. 보이는 것은 그저 소름끼치는 여자의 얼굴밖에 없었어요. 유진이는 계속 비명을 지르면서 눈물을 흘렸답니다.
“아빠아아아아……!”
“얘야.”
“아빠아아!”
“얘. 얘. 괜찮니?”
“아빠앗!”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서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유진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통나무로 만들어진 세모꼴의 천장이었답니다. 유진이는 흠뻑 젖은 눈을 돌려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아저씨를 보았어요.
“괜찮아? 무서운 꿈을 꾸었나보구나.”
“…….”
유진이는 아저씨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주변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어요. 생소한 통나무집이었어요. 어둑한 분위기에 고동색 나무들로 엉성하게 벽을 만든 집이었답니다. 놓여진 가구라고는 네모난 나무탁자와 커다란 침대 하나, 유진이가 누워있는 작은 침대뿐이었어요. 아저씨가 정성스럽게 껍질을 깎은 사과를 내밀자, 유진이는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아저씨는 누구세요?”
“녀석. 그걸 묻기 전에 땀이라도 좀 닦거라. 무슨 꿈을 꾸었기에 그렇게 땀을 흘렸냐.”
아저씨는 사과를 유진이의 손에 쥐어 주었어요. 그리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유진이의 이마에 덮어 주었어요. 유진이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고개만 살짝 숙여 인사했답니다. 그리고 아저씨의 눈치를 보며 손수건으로 이마와 얼굴을 닦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유진이는 금세 손수건을 팽개쳤어요. 유진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아저씨를 향해 볼멘 소리로 말했죠.
“냄새나요. 너무 지독해.”
“으응? 그, 그래? 이상하다. 코도 몇 번 안 풀었는데…….”
“와악! 코푼 수건이었어요? 너무해요! 더러워!”
“미안미안. 자, 자아… 깨끗이 닦을 테니 화내지 말아라.”
아저씨는 유진이를 달래듯 눈웃음을 치며 손수건을 자신의 옷에 열심히 문질렀어요. 유진이가 ‘설마’하는 눈으로 아저씨의 행동을 지켜보았습니다. 지켜보는 동안 유진이의 얼굴엔 불안감이 가득했죠. 아니나다를까 아저씨가 옷에 문지른 그 손수건을 다시 유진이의 앞으로 내미는 거예요.
“싫어요! 나 안 닦을 거야.”
유진이가 퉁명스레 말하니까 아저씨는 멋쩍게 웃었어요. 갑자기 유진이는 사과도 먹기 싫어졌어요. 손수건이 그렇게 지저분하니까 틀림없이 아저씨가 깎은 사과도 지저분하겠죠? 유진이는 사과를 슬며시 옆에 내려놓았어요. 아저씨가 잠시 사과를 보고 있어서 유진이의 가슴이 콩콩 뛰었답니다. 혼내시는 게 아닐까? 열심히 깎아주신 사과를 안 먹었으니까 화내실 거야. 유진이가 아저씨의 눈치를 보면서 잔뜩 몸을 움츠렸어요. 하지만 아저씨는 유진이에게 빙긋 웃을 뿐 화를 내지는 않았답니다. 그래서 유진이는 용기를 내어 물었어요.
“근데 여기는 어디예요, 아저씨? 그리고 아저씨는 누구?”
아저씨는 대답대신 살며시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의 무릎을 주물럭거렸어요. 오랫동안 유진이 옆에 무릎을 꿇고 있어서 쑤셨었나 봐요. 아저씨가 말했어요.
“여기는 잠자는 나라란다. 나는 어렸을 때 이곳에 와서 지금까지 사는 사람이지. 내 이름은 벼리란다.”
“잠자는 나라요?”
“그래. 여기는 잠자는 나라야.”
“거짓말… 그런 나라가 어디 있어요? 그리고 여기는 통나무집이잖아요?”
“하하하, 그래. 여기는 통나무집이지. 하지만 아저씨가 어렸을 때 이곳에 살던 예쁜 누나가 나에게 이 집의 이름이 잠자는 나라라고 말해줬단다. 여기는 정말 잠자는 나라야.”
“아저씨가 주인 아녜요?”
유진이는 당연히 이 집의 주인이 지저분한 손수건을 가진 아저씨일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닌가 봐요. 아저씨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미소를 지었답니다.
“주인은 없단다. 이 집은 주인이 필요가 없거든. 그냥 살면 되는 거야. 만약 아저씨가 이 집의 주인이 된다면 평생 이곳에서만 살게? 아저씨는 놀러도 다녀보고, 일도 하러 나가보고 해야 할텐데 말야.”
“그냥 주인이 되어도 그럴 수 있잖아요. 아저씨가 주인이 되면 이 집에서 왜 못나가요?”
“집이 슬퍼하잖니? 또 내가 밖으로 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이 집이 오지도 않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고… 무엇보다 이 집에 주인이 있다면 다른 사람은 내 허락이 있어야 들어올 수 있잖겠니. 허락은 집이 내려줘야 하는데 말야.”
“히에… 무슨… 집이 살아있는 것처럼 얘기를 하네요? 아저씨는 조금 이상해요.”
“하하하! 그래, 난 이상한 아저씨란다.”
유진이는 처음으로 벼리라는 아저씨를 향해 방긋 웃었어요. 아저씨가 나쁜 사람 같지 않아서죠. 유진이는 작고 귀여운 발을 뻗어서 침대 아래로 내려갔어요. 그리고 아저씨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채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봤답니다. 예전에 산장공원으로 놀러갔을 때 보았던 통나무집보다는 지저분했지만, 모든 물건들이 유진이의 눈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정돈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나가봐도 돼요?”
“응?”
유진이가 손가락으로 통나무 문을 가리키며 아저씨를 돌아봤어요. 아저씨의 얼굴이 갑자기 굳었답니다. 하지만 아저씨는 곧 유진이를 지나쳐서 문으로 다가갔어요. 그리고 문에 매달린 나무 손잡이를 잡고 말했죠.
“그건 네 자유지만……. 얘야, 이 바깥은 꿈의 나라란다.”
“네? 꿈나라요?”
유진이가 대뜸 반문을 던지네요. 익숙한 이름이긴 했지만, 그것이 공상의 세계라는 것은 유진이도 잘 알고있었어요. 그래서 아저씨가 거짓말로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했답니다. 하지만 아저씨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있어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어요.
“네가 들어온 것도 방금 전의 일이란다. 난 밖에서 비명을 지르는 너를 보고 급히 데리고 들어온 것 뿐이야. 그때의 너는 심한 악몽을 가지고 있었어. 만약 네가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악몽을 가지고 있다면 함부로 이 문을 나가지 않는 게 좋단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아저씨의 굳어진 표정이 무섭다고 생각되었는지 유진이가 귀엽게 뒷짐을 지고서 두 발을 꼬기 시작했어요. 유진이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눈동자만을 들어 아저씨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어요. 누가 봐도 아저씨의 말을 듣지 않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한다는 걸 알 수 있었을 거예요. 아저씨는 할 수 없다는 듯 아까처럼 미소를 얼굴에 담고 유진이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어요.
“꼭 나가고 싶은가 보구나?”
“네, 아저씨.”
“너의 갈 길을 내가 함부로 막을 수는 없지. 어차피 너는 문을 열어야 하거든. 그 대신…”
“네?”
“이 아저씨한테 네 이름을 가르쳐주겠니? 네 이름을…”
“유진이요, 김유진.”
“그래. 예쁜 이름이구나.”
아저씨는 유진이의 볼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환하게 웃었답니다. 그제야 유진이는 마음이 놓였어요.
“그러면 네가 밖에 나갔을 때 않 좋은 꿈을 꾸게 된다면, 아저씨의 이름을 꼭 불러다오. 그땐 아저씨가 꼭 너를 구하러 갈게.”
“아저씨, 이름이 뭔데요?”
“벼리란다. 응? 내가 얘기하지 않았었나?”
“언제 얘기를 했다고 그래요? 아저씨 치매인가 봐.”
유진이가 놀리듯 혀를 날름 내밀었답니다.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저씨를 뒤로 하고, 유진이는 통나무 문의 손잡이를 살며시 열었어요.
띠끼이이이익…….
문이 열리며 바깥의 안개 속 경치가 유진이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답니다.
*
쏴아아아악!
“와아아!”
유진이는 너무 좋아서 함성을 질렀어요. 시원한 바람이 유진이의 머리카락을 마음껏 뒤로 날려주었죠. 그리고 아무도 없는 하얀 눈밭위를 유진이의 몸이 쌩쌩 달리고 있었답니다.
“재미있다아!”
유진이는 너무 신났어요. 비명처럼 크게 고함치면서 하얀 세상 저 편에서 몰려드는 파란색 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답니다. 유진이는 앞에 펼쳐진 넓고도 하얀 세계를 바라보며 이 신나는 세상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뚝.
“어어?”
뚝.
어깨 위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유진이가 살짝 고개를 돌렸죠. 정말로 어깨 위에서 뭔가가… 아주 작은 뭔가가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었답니다.
“어어… 꺄아악!”
피였어요. 빨간 피. 마치 눈처럼 하얗던 유진이의 옷이 어느새 빨간 피로 물들어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껏 하얗게만 펼쳐졌던 눈 세상이 시뻘겋게 변하고 있었답니다.
“아아앙… 무서워. 엉엉엉…”
유진이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기 시작했어요.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는데 쉽지가 않네요. 유진이가 타고있던 눈썰매는 더욱 빨리 달렸어요. 어느새 빨간색이 되어버린 바람을 헤치고 시뻘건 눈 위와 새까만 하늘의 구멍 속으로 빨려들 듯 미끄러졌답니다.
“아빠아! 아빠 무서워!”
유진이의 고함소리가 피에 물든 눈 위에 메아리쳤어요. 그러나 아빠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답니다. 처음에는 그저 어두운 밤처럼 검게 물든 하늘이 점차로 핏빛이 되고 있었어요. 그래서 세상은 금세 피로 가득 차 버렸죠. 이제까지 눈밭이라 여겼던 세상은 피바다가 되어서 유진이의 몸을 휘감았어요. 유진이가 비명을 질렀지만, 비명조차 피바다의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답니다.
“엉엉엉…”
사방이 막혀진 공간 같았어요. 유진이의 울음소리가 가까운 벽에서 메아리쳐 돌아오네요. 유진이는 여태껏 감고있었던 눈을 뜨고서 여기가 어디인지를 알아내려 애썼답니다. 그리고,
“꺄아아악!”
유진이는 또다시 비명을 지르고 말았어요. 얼굴, 목, 그리고 등에 빨간 피가 번쩍거리는 아빠의 모습이 보이는 게 아니겠어요? 아빠는 목이 뒤로 돌아간 상태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는 피를 뒤집어쓴 채 쓰러져 있었어요.
“아빠아아아!”
유진이가 비명을 지르며 아빠를 불렀어요. 아빠가 너무나 많이 아플 것만 같았어요. 혹시 죽지는 않았을까 걱정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유진이는 아빠에게 다가가지 못했어요. 아빠의 몸에서 번쩍거리는 빨간 피가 무서웠답니다.
“아빠아아아…”
그저 울기만 했어요. 흐르는 눈물조차 빨간색이 아닐까 겁이 날 정도로 세상은 온통 빨갰어요. 유진이는 주변을 둘러봤답니다. 아빠를 구해줄 다른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사방이 빨간 피로 덮여있는 자그마한 방. 유진이는 이제까지 천장이라고 생각했던 위를 향해서 고개를 들었답니다. 그 순간 유진이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어요.
“아빠악!”
천장대신 커다란 눈을 부릅뜬 여자의 거대한 얼굴이 세상을 덮고 있었답니다.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너무나 소름끼쳤어요. 유진이는 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겁먹은 표정으로 여자의 얼굴을 훔쳐봤어요. 그 때 여자가 입을 길게 찢으며 웃기 시작했답니다.
“호호호호호! 유진이가 여기 있었네?”
여자의 하얀 이에서 빨간 피가 뚝뚝 떨어졌어요. 귀밑까지 죽 찢어진 여자의 큰 입이 소름끼쳤답니다. 얼굴도 무서웠어요. 아까 달려나가던 눈밭처럼 하얘서 핏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 같았죠. 특히 크게 치켜 뜬 눈매 속에 담겨진 보라색 눈동자가 너무 싫었습니다.
“아빠아… 일어나 봐. 귀신이야… 엉엉엉.”
유진이가 떨리는 손과 발을 휘저으며 붉은 피가 반짝거리는 아빠의 곁으로 다가갔어요. 막 아빠의 얼굴을 만지려던 유진이가 감전된 사람처럼 흠칫하며 손을 가슴으로 당겼습니다. 아빠의 얼굴이 놀랍게도 무서운 여자의 얼굴로 변해버린 거예요.
“아, 아악!”
“호호호호호…….”
180도로 머리가 돌아가 버린 상태에서 여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어요. 검은색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진 여자의 머리는 아빠의 머리대신 달라붙어 있었답니다. 유진이는 일어설 엄두도 못 낸 채 두 손과 발을 휘저으며 뒤로 도망쳤어요.
“으. 어. 우우웅. 엉엉엉…”
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답니다. 열심히 뒤로 도망치던 중, 유진이의 등이 푹신한 뭔가에 닿았어요. 급히 고개를 돌린 유진이는 또 한 번 비명을 질렀습니다. 천장에 있던 여자에게서부터 흘러내린 머리카락들이 유진이의 주변을 모두 막고 있었어요.
“으아아앙…”
울었어요. 우는 것 밖에 유진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유진이는 눈을 꼭 감고 머리도 숙인 채 몸을 잔뜩 웅크렸어요. 금세 자신의 뒤에서 소름끼치는 촉감이 느껴질 것만 같았죠. 유진이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듯 온 몸을 떨었습니다.
스적.
마침내 유진이의 등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어요. 그 순간 그곳에서부터 얼음장처럼 서늘한 감각이 몸 전체로 퍼졌죠. 세상 그 무엇보다 차가운 전류가 유진이의 온 몸을 훑어버리는 것만 같았답니다. 유진이가 참지 못하고 또 비명을 질렀어요. 아주 오래.
“아빠아아아아아악!”
“유진아!”
갑자기 들려온 외침이었어요. 유진이는 그것이 통나무집에서 본 아저씨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힘껏 목청을 높여 대답했답니다.
“어! 아, 아저씨!”
“내 이름을 불러! 어서!”
“잊어먹었어요! 악!”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들며 눈을 떴던 유진이가 다시 질끈 감으며 비명을 질렀답니다. 얼굴 바로 앞에 여자의 섬뜩한 얼굴이 있었거든요. 유진이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어요. 눈을 꼭 감은 채 잔뜩 몸을 움츠린 유진이에게 아저씨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습니다.
“생각해봐! 아니면 내 얼굴을 기억하던지!”
“엉엉엉! 아저씨… 무서워요!”
유진이는 아저씨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는 동안, 여자의 이빨이 서서히 자라났어요. 얼마 되지 않아서 모든 이빨이 송곳니처럼 날카롭게 변해버렸답니다. 여자는 커다랗게 입을 벌리며 유진이의 머리를 먹을 듯 다가왔어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유진이는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짐작하고 있었답니다. 꼭 감긴 두 눈 사이에 여자의 입안 가득히 담겨진 빨간 피의 빛깔이 스며들었죠. 유진이는 끊임없이 울었어요. 아저씨의 이름이, 아저씨의 얼굴이, 그리고 통나무집의 모습조차 기억나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여자의 입이 유진이의 머리를 물기 직전에, 한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어요. 아저씨가 내밀었던 지저분한 사과였죠. 그 때 여자의 송곳니가 유진이의 머리에 닿았습니다.
“아아아아악!”
*
“너는 조이의 뒤를 따르려는 것이냐?”
“비극이겠죠. 저 또한 그 분 같은 운명을 맞이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몽계에 간섭하지 말아라. 몽계는 자신만이 선택할 수 있는 세계다. 타인이 간섭하게 되면, 둘 다 조이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
“왜 대답이 없느냐?”
“어린 아이기 때문에… 그저 저 아이가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차마 지켜보기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은 몽계의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순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열쇠를 통해 희망의 문을 열지 못하는 그 아이의 모습. 그게 너무 안타까워서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유진이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답니다. 마치 막 잠에서 깨었을 때, 유진이의 엄마 아빠가 머리맡에서 두런거리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희미한 대화였어요. 유진이는 자기가 지금 현실 속에 들어왔다고 생각했죠. 그저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말예요. 그렇지만 조금 전에 겪었던 무서운 악몽이 진짜 현실이었던 것처럼 강하게 느껴졌답니다. 그 두려움의 기억과 경험이 머리와 가슴에 남아서 유진이의 몸을 떨게 만들었죠. 유진이는 눈을 꼭 감은 채 떨기만 했어요. 눈을 뜨기가 너무 무서웠어요.
“그렇기에 더더욱 너는 저 아이의 꿈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저 아이가 어떤 미래를 가져오건 그것은 저 아이가 스스로 선택을 해야할 문제야. 현실과 꿈의 세계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현실에서는 다른 사람이 누군가에게 도움과 피해를 줄 수 있겠지만, 이곳은 모든 것을 스스로 이루어야 하는 법칙이 있다.”
“…….”
누구의 목소리인지 궁금해서 유진이는 결국 샛눈을 떴답니다. 그 무서운 꿈속에서 자길 도와준 아저씨를 막 혼내는 아줌마가 누군지 보고 싶었어요.
“어? 아저씨? 그 아줌마는 어디 갔어요?”
유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멍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아저씨 주변에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저 아저씨만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꼭 다물고 있었어요. 무척 쓸쓸한 표정이었죠.
“깨어났구나.”
아저씨의 목소리가 참 밝다고 느껴졌어요. 어느새 유진이를 돌아보며 빙긋 웃음 짓는 아저씨의 얼굴은 조금전의 쓸쓸한 표정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상태였답니다.
“나쁜 아이구나. 그 사이에 내 이름을 잊어먹다니. 이번에는 잊어먹지 마라. 내 이름은 벼리야.”
벼리 아저씨가 웃음과 함께 유진이의 이마를 콕 쥐어박았어요. 유진이는 자기 이마를 매만지며 멋쩍게 웃었습니다.
“근데 조금 전에 어떤 아줌마랑 얘기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벼리 아저씨는 대답대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아빠처럼 부드러웠고 조금 전 꿈속의 유진이처럼 조금씩 떨고있는 손이었어요. 벼리 아저씨는 자신의 손이 떨고 있다는 것을 감추려는 듯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아줌마는 꿈지기란다. 유진이가 행복한 꿈을 꾸며 편안하게 잠잘 수 있도록… 그리고 유진이가 꿈에서 깼을 때, 햇살이 보이는 개운하고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아줌마란다.”
“근데 왜 아저씨한테 화를 내요?”
“하하하. 화내지 않았어. 꿈지기 아줌마는 원래 말투가 그래.”
웃음을 터뜨리는 벼리 아저씨의 얼굴이 참 늙어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유진이는 잠깐동안 벼리 아저씨를 할아버지라고 불러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뿐, 유진이는 벼리 아저씨에게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어요.
“벼리 아저씨. 나 집에 가고 싶어요.”
“으… 응? 아. 집에? 그래. 집에 돌아가야지.”
벼리 아저씨가 당황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유진이가 고개를 약간 숙인 상태에서 눈동자만 위로 굴려 눈치를 보자, 벼리 아저씨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답니다. 곧 벼리 아저씨는 유진이의 볼을 두 손으로 쥐면서 미소를 머금었어요.
“유진아…”
“네?”
“친구의 집에서 유진이 집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가야하지?”
“그냥 집에 가죠?”
“우선 친구의 집을 나와야 유진이 집으로 갈 수 있지?”
“예.”
“친구 집의 문을 열고 나가야만 유진이 집으로 갈 수 있는 거야.”
“알아요, 아저씨.”
간단하게 대답해주는 유진이와는 다르게, 아저씨는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답니다. 유진이가 집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 유진이는 저어기 있는 문을 열고 나가서 집으로 돌아가야 할텐데… 꿈의 나라를 지나야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갈 수 있겠니?”
“아저씨가 데려다줘요.”
“아저씨는 유진이 집을 모르는걸? 그리고 이 집에서는 두 명이 같이 나갈 수가 없단다. 둘이 같이 나가면 둘 다 다른 길로 걸어가야 해.”
또 어려운 말을 쓰는 벼리 아저씨. 유진이는 속으로 벼리 아저씨가 자기와 같이 가고싶지 않아서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여태껏 벼리 아저씨에게 느끼고 있던 좋은 감정이 조금 식었어요.
“알았어요. 나 혼자 갈래요.”
유진이는 용기 있게 몸을 일으켰어요. 그런 유진이의 모습을 보고, 벼리 아저씨가 놀란 눈으로 질문을 던졌답니다.
“조금 전에 그렇게 무서운 꿈을 꾸고도 겁나지 않아?”
“꿈인데요 뭐… 밖에는 밤이에요, 아저씨?”
“아니… 밤이고 낮이고는 너에게 달려있겠지.”
또다시 알 수 없는 소리였어요. 유진이는 아저씨가 말릴 틈도 없이 문을 향해서 쪼르르르 달려갔답니다. 그런 유진이의 뒤에서 아저씨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어요.
“집에 가고싶다고 꼭 생각해야 한다. 꼭! 그리고 네가 왜 여기에 왔는지를 기억해!”
“네에!”
유치원에 갈 때 엄마가 던져주는 걱정스런 말투를 건성으로 듣듯, 유진이는 익숙하게 대답한 뒤 통나무집의 문을 열었어요. 그리고 유진이의 앞으로 안개가 자욱한 눈부신 바깥 세상이…….
1회 끝
강화인간계조물..!(?)
답글삭제과연 마왕의 일보.(...) 연중 되지 않기를 빕니다.(...;;)
답글삭제링크 신고 합니다.